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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습작 - 김탁환의 따듯한 글쓰기 특강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5월
평점 :
품절
언제부턴가 이쪽 분야의 전문가(창작법에 관한 이론가들)가 아닌 현장 작가들이 그들의 글쓰기 노하우를 밝힌 책들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나 역시 글쓰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중의 한 사람이니 이런 책에 눈이 안 갈수가 없다. 이 책은 내가 글쓰기 분야에서 본 가장 최근에 발견한 책이 아닌가 한다.
이런 책 읽는다고 어느 날 갑자기 글을 잘 쓰는 건 아닐 것이다. 중요한 건 글쓰기에(특별히 소설 쓰기에) 뜻을 뒀다면 이런 분야의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내 글을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글은 쓰지 않으면서 이런 책에만 탐닉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이런 책들을 읽어보면 하나 같이 하는 말은 다른 것이 아니다. 무조건 '써라!'이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고 했다.(이 말은 내가 소설가 이승우씨가 쓴 소설론을 읽고 리뷰에 인용한 제목이기도 하다.http://blog.aladin.co.kr/stella09/883139) 내가 아는 또는 체험한 이야기가 아무리 많이 있어도 그것을 글로써 풀어내지 못하면 그것은 소설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도 그것의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책이 좋다. 그래. 구슬을 꿰지도 못하면서도 난 이런 책이 좋은 것이다.
누구는 이런 나를 두고 그런 책에서 차마 글을 쓸 용기는 없고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오래 전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나는 공부는 못했으면서 참고서만 딥따 산 적이 있다. 참고서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지만 내가 오늘도 이런 책을 읽는 이유는 저자가 이 책에서 아니 에르노를 인용했듯이 글쓰기가 주는 기쁨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이 누군가 "당신은 바로 내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또는 "이 책은 바로 나예요."라고 말해 줄 때(150p)라고 했듯이, 이 책 또한 나를 이해해 주고 공감해 주길 바라서일 것이다. 즉 다시말해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자의 말에 눈을 맞추고 귀를 여는 것을 통해 그의 기쁨에 기꺼이 동참해 주는 것이라고 하면 글을 안 쓰기에 적절한 핑계가 될 수 있을까?
저자는 소설 쓰기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책상 가득 자료들을 모아 놓고 쓰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런 것 하나 없이 오로지 노트북 하나 또는 펜과 종이만을 가지고 자신의 체험과 생각들을 풀어나가는 것. 이 둘중 어느 것이 더 쉬워 보일까?
전자는 많은 자료들을 모아야 하는 수고로움과 필력이 받혀주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후자는 나의 체험을 바탕으로 했으니 내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인 것만은 사실이고, 창작을 가르치는 선생님들 역시 하나 같이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쓰라고 하니 그것에 부합은 된다. 하지만 그런 작업은 동시에 자신의 아품을 들추어내야 하고 때론 부끄러움도 고백해야 하기 때문에 아프다. 나 역시 글을 쓸 때는 대단한 각오와 결심을 가지고 시작하지만 매번 여기서 무너지곤 했다. 저자는 이 암초를 너무나 잘 알기에 이렇게 말한다.
"......작가는 왜 이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글을 쓰는 걸까요. 이것은 결코 위로와 평안을 주는 글쓰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숨어있는 상처를 하나하나 집어내어 다시 아파하는 행위지요. 독자가 불편한 것 보다 열 배 백 배 더 작가는 불편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덤벼드는 한판 '투쟁하는 삶'인 겁니다. 글 따로 삶 따로의 나날이 아니라 글을 통해 삶을 사는 바로 일치의 나날인 겁니다. "......작가는 왜 이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글을 쓰는 걸까요. 이것은 결코 위로와 평안을 주는 글쓰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숨어있는 상처를 하나하나 집어내어 다시 아파하는 행위지요. 독자가 불편한 것 보다 열 배 백 배 더 작가는 불편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덤벼드는 한판 '투쟁하는 삶'인 겁니다. 글 따로 삶 따로의 나날이 아니라 글을 통해 삶을 사는 바로 일치의 나날인 겁니다.(153p)
예전엔 글을 쓰는 목적이 독자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야 앞서 인용했던 아니 에르노의 말과 상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당신은 내 말을 하고 있군요."라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어줍잖은 생각이었다. 작가가 뭐라고 사람들의 아픔을 알아서 위로와 평안을 준단 말인가? 저자가 말했듯이 글을 쓰는 것은 독자 보다 열 배, 백 배 불편한 것이며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덤벼드는 한판 '투쟁하는 삶' 오직 그것 뿐인 것이다. 그래야 아니 에르노의 말이 진실로 성립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투쟁적으로 치열하게 글을 쓰지 못했다. 그저 의무감이나 생각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때 몇 줄 끄적여 보는 것뿐 창작의 고통을 (조금은)알기에 그 고통속에 나를 맞기고 희열을 느끼는 것을 감히 감내하지 못하겠다.(아마도 내가 작가가 되지 못했다면 나는 목숨하나 기식할만 하던가 발자크처럼 5만잔의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 수도복 한벌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인 줄로 알라.)
저자는 참 현실적인 문제들을 잘도 짚어낸다. 작가로서의 재능의 문제에 대해, 자세에 대해 또는 무엇을 쓰고 그리고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 또한 작가에게 열려진 길에 대해 저자는 하나 하나 논리적이며 설득력 있게 쓰고 있다. 또한 나아가서 독자와의 소통에 대해 생각해 보고, 오늘 날 매체의 발달로 인해 근대소설처럼 활자 하나로만 승부할 수 없는 현실과 그것들과 어떻게 조우하며 해결해 나갈 것인가(특히 제7강 매체와 이야기의 변신,<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에 기대어나, 제15강 따뜻하게 영화 품기 <복수는 나의 것>과 <집으로>에 기대어 같은)는 상당히 현실적이며 현대의 소설 쓰기에 확실히 좋은 지침이 될만 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어찌보면 내가 지적한 내용들은 작가가 글쓰는 첫번째 조건은 아닌 듯 싶다. 작가에게 있어서 '왜 쓰는가'에 답을 달지 못하면 위의 모든 것들은 그다지 중요하게 와닿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작가가 글을 쓰는 것은 작은 기적을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의 잠을 앗아간 소설들처럼, 내가 쓴 소설이 새벽까지 읽힐 수만 있다면, 어떤 고통이라도 감내하리라. <불멸>은 "이 소설을 읽은 후 인생을 찬찬히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라는 놀라운 엽서 한 장과 맞바꾸기 위해 쓰여졌을 따름이다.-<불멸>,작가의 말(252p)
이 소박하고 진실한 말에 "나도"라는 대답으로 응수하지 못한다면 이 책의 내용뿐만 아니라 내가 이 글을 읽는 의미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더불어 그는 또한 오늘날의 소설 쓰기가 너무 테크닉 위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하기도 했다.
저는 글쓰기와 이야기 만들기를 '인생을 값지게 만드는 인류사적 행위'로 파악합니다. 잔재주가 아니라 삶을 관통하는 일관된 '자세'를 확립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글쓰기와 이야기 만들기를 디지털 기술로 해결하려는 시도입니다. ......설령 컴퓨터가 글을 쓰고 이야기를 만드는 날이 온다고 해도, 그것들은 단지 삶의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척'할 뿐이겠지요. 글쓰기와 이야기 만들기의 핵심은 그럴 듯한 흉내가 아니라 '진심' 그 자체입니다.(266~267p)
그렇다. 글쓰기란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만큼 진심이 담겨있느냐일 것이다. 그런데 늘 우리가 두려워 하는 건 테크닉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주제가 좋아도 그것을 받혀주는 그릇이 미약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솔직히 우리 문학계의 관행이 그것을 부추기지 않는가? 특히 여타의 문학상을 타고 나오는 것을 보면 화려한 테크닉과 수사를 무기로 삼은 듯하다. 그리고 아예 그것을 표방한 문학상도 있다. 여기에 얼마나 진심이 통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가 보아왔듯이 그런 화려한 테크닉만을 무장한 작품들은 일찌기 문학계에서 단명했다. 그러니 저자가 말하는 것은 믿을만한 말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백년학생'이라고 했다. 그만큼 죽을 때까지 배움의 자세를 유지하라는 뜻이겠지. 그에 비해 김탁환은 글쓰기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천년습작'을 각오하라고 주문한다. 이 말이 던져주는 무게가 묵직하다. 하지만 동시에 나름 위로가 되기도 한다.
이 세상 어느 소설가도 완벽한 작품을 내는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위대한 작가도 매번 습작하는 마음으로 글을 쓰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작가에게 따로이 정해진 습작기란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것은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말로도 들린다. 요즘 흔히 잘 나가는 일은 다 그 때가 있다. 하지만 글쓰기는 언제든지 할 수 있으며 나이들면 들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지금부터라도 써라. 이 사대의 작가 김탁환이 맛난 술 익히며 기다리겠다고 하지않는가? 그가 따라 주는 술 한 잔은 마셔봐야 하지 않겠는가?
덧붙여, 책표지가 마음에 든다. 특히 뒷면에 연출된 것이긴 할테지만 맨발에 의자에 앉아 피곤한 듯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저자의 사진이 참으로 많이 피곤해 보인다. 그게 결국 작가의 모습 아니겠는가? 인상적이다.
또 하나 덧붙이는 건, 이 책을 읽은 후에 김탁환으로 검색해서 그의 책들이 현재 서점에 얼마나 나와 있는지를 알아 봤다. 그가 그리도 많은 책들을 내놨건만 이중 반 정도는 품절이거나 절판 상태다. 힘 없는 문학작품이 단명하는 거야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아직도 대중에게 많이 읽혀야 하는 책들이 단명하는 거 좀 문제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이것의 문제가 출판사에 있다고 해야하는 건지, 독자들에게 있다고 해야하는 건지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