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사투리 쓰는 테스
이책을 읽은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책은 독특하게도 번역하는 과정에서 테스를 비롯한 가족들, 동향인들이 하는 대사가 사투리로 표현되어 있다. 사실 이 비슷한 시도가 과거에 없지 않았던 것 같다. 예를들면, 아주 오래 전 나는 <크래머 대 크래머>를 소설로 읽은 적이 있는데, 주인공 집에서 일을 해 주는 가정부가 사투리를 썼던 것으로 안다. 그것을 옮기는 과정에서 한국적 사투리로 번안된 것을 기억한다. 그때서야 나는 퍼뜩, '아, 미국도 사투리가 있겠지' 했다.
그런 것에 비하면 이 작품은 거의 전면적이다 싶다. 번역도 제2의 창작이라고 하는데 , 이 작품이야 말로 번역의 토착화를 이루어낸 작품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이것에 대해 비평이 엇갈리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좋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어색하다고도 한다. 솔직히 나는 후자쪽에 가까운데, 이 작품은 과거 영화로 나온 것이기도 하다. 애석하게도 난 영화는 보지 못했는데, 나스타샤 킨스킨이 분한 테스를 대사를 칠 때 충청도 사투리를 쓴다는 게 영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아직 원작을 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원작자인 토마스 하디도 테스를 시골처녀로 묘사하기 위해 그녀의 대사를 영국식 사투리로 썼을 것도 같다. 모르긴 해도 번역자도 토머스 하디의 그런 의도를 최대한 적극적으로 살리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것을 어색하다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둘. 표준어, 그것도 알고 보면 패권주의의 결과물은 아닐지?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표준어에 대한 의혹이 생겼다. 우린 보통 서울말을 표준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정말 확실할까?
약간 황당한 영화 같기는 하지만 <황산벌>을 보면 옛날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백제와 신라가 싸우는데 충청도와 경상도 방언이 오고 가는데 서로 말을 못 알아 먹겠다고 난리를 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그 시대에 그랬을지 아닐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영화적 장치로는 충분히 이용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안이긴 하다. 하지만 실제로 서로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한다면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조그만 나라에서 삼등분으로 갈라져 잘 들으면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을 서로 못 알아 듣겠다고 하는 건 그냥 자존심 대결 같은 거 아닌가?
어쨌든, 신라의 입장에선 자기네들이 표준어를 사용한다고 우길 것이고, 백제는 백제대로 자기네 말이 표준어라고 생각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오늘 날 한국의 표준어는 서울말을 잘 구사하는 것에 있다. 예전에 수도를 옮긴다 어쩐다는 말이 있었는데 그게 대전이 됐다면 충청도 사투리가 득세하는 거 아닌가? 아무튼 그것도 패권주의의 결과물일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물론 어쩌다 서울말이 표준어가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셋. 애정관에 관하여
이 책을 읽다보면, 확실히 18세기의 사랑과 오늘 날 21세기의 사랑은 많이 다르다는 생각을 새삼해 보게 된다. 특히 클레어가 테스를 알게되고 그저 눈만 마주치고, 잠시 포옹만 했을 뿐인데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결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그것이 오늘 날 21세기에 다소 진부하게도 느껴질 법도 하다. 솔직히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이건 그다지 어색한 것이 아니었다. 당연한 것처럼 보여지기도 했다. 물론 그것에 다소의 재고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오늘 날 같이 인스턴트 사랑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누가 그만한 제스추어에 결혼까지 진지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서로 알 거 다 알고, 따질 것 다 따져서 최중적으로 결혼을 할 것이냐 말 것이냐를 생각하며, 결혼은 영악해졌다. 사실 너무 재고 따지고 하는 것도 결혼에 악영향일 수도 있다. 연애를 오래하고 결혼을 하는 사람들 보면 기특도 하지만, 저들은 뭐 때문에 이제 결혼하는 걸까? 약간의 권태로운 측은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어쨌든 이렇게 사랑 하나만을 가지고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때는 지나간 듯도 하다. 그래서일까? 클레어의 결혼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나는 오히려 진부하다기 보단 진지해서 좋아 보인다. 물론 이룰 수 없는 사랑이 되지만.
넷. 책으로 하여금 잠들지 못하게 하라!
초두에 사투리 쓰는 테스 대해서 언급을 했지만, 나는 문득 이것을 가지고 낭독회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더 정확히는 '낭독 극장'을 열어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테스와 같은 고향 사람들이 대사하는 부분을 눈으로가 아닌 소리로 들어보고 싶었다. 그랬을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엔 다소 연극 작업과 비슷한데, 배역을 각자 정하고 그 배역에 준하는 목소리 연기를 실제로 해 보는 것이다. 마치 성우가 목소리 연기를 하듯, 라디오 극장처럼 말이다. BGM을 비롯한 효과란 효과는 다 바탕에 깔고. 그럼 대박일 텐데. ㅋ.
우리는 독서는 혼자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가장 최선의 방법이며, 동시에 가장 소극적인 방법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실 나는 이 '낭독 극장'을 생각하면서 우린 왜 책을 이렇게 소극적으로 향유해 왔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책이 해 볼 수 있는 일, 책 가지고 해 볼 수 있는 다양한 실험을 해 보면 안 되는 걸까? 기껏 우리가 하는 일이란 작가와의 만남이나, 도서전시회 또는 서점에서 책을 둘러보는 게 전부다. 그것을 향유하는 독자들이 책을 가지고 해 볼 수 있는 실험실이 없다는 것었다는 것이다.
언젠가 아는 이의 블로그에 갔다, 모처의 북카페가 문을 닫았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적이 있다. 재정난이 결국 이유가 됐겠지만, 그건 한편 이해가 가면서도 그렇게 밖엔 할 수 없었을까? 의문스럽기도 했다. 왜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않는 걸까? 뭔가의 프로그램을 개발했더라면 안타깝게 문을 닫는 일은 없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책을 좋아한다는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움직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책은 머리에 집어넣은 것이지, 즐기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머리에 집어 넣은 일이 즐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다못해 그 카페 주인이 비록 낭낭한 목소리는 아니었어도 낭독회라도 매일했더라면 문을 닫는 사태는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옛날의 카페는 DJ가 있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찾아오는 손님과 소통을 하려고 했다. 그와 비슷한 형식이다. 다시 말하면 복고의 부활?ㅋ
또 예를들면, 출판된지 좀 되긴 했는데, 조경란의 <혀>는 문학에 요리를 접목시킨 아주 훌륭한 소설이다. 나는 그 소설이 차려주는 갖가지 요리의 성찬에 거짓말 조금 보태서 혀를 내둘렀다. 지금도 궁금한 건, 작품에 나오는 송로버섯이 들어간 그 요리가 어떤 요린지 대단히 궁금하다. 그것이 나왔을 당시 바로 이런 궁금증을 채워 줄 뭔가를 어디선가 했다면 쫓아 갔을지 모를 일이다. 또 그것은 책 매출에 영향을 미쳤겠지.
<하정우, 느낌있다>도 보면, 그의 미술을 직접 감상하고, 그의 영화도 어느 카페에서 감상하고, 그가 즐겨 듣는다는 음악도 실제로 같이 공유는 뭔가의 프로그램을 개발했더라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 그거 하는데 돈이 수억 드나? 난 잘 모르겠다.
셰익스피어는 지금도 잘 들 줄 모른다고 한다. 이 지구상 어디에서가는 끊임없이 그의 연극이 쉼없이 올려진다고 한다. 좋으니까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그렇더라도 셰익스피어는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책은 누구든 옆에 끼고 다닐만큼 좋아한다. 셰익스피어가 오늘날에도 그 인기 때문에 잠들 수 없는 것처럼, 책도 잠들 수 없게 해야한다. 어디 선가는 끊임없이 책 때문에 몸살이나고, 책을 가지고 끊임없이 실험을 해 볼 수 있는 장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책 매니아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생산하는 자나 수요자나 말이다. 우린 어쩌면 진정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