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가끔, 당시엔 깨닫지 못했던 일들을 나중에 한참 후에야 깨닫는 때가 있다. 3년 전, 갑자기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맘도 공부를 손에서 놓은지가 10년을 훨씬 넘은터라 우연한 개기에 옛 선생님을 TV에서 보고, 그 선생님 계신 학원을 등록하고, 10개월간 열심히 다녔다. 그것도 웬 뜬금없는 영화 시나리오. 그 길을 가야겠다고 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냥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이제 정말 적지 않은 나이이고 보면, 더 나이들면 못할 것만 같아서(나는 엊그제 한 작가의 독자와의 만남을 다녀왔는데, 내가 이런데를 앞으로 얼마를 더 다닐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즈음 나에게도 신조가 생겼는데, 뭐든지 할 때는 앞뒤 제보지 말고 하자. 눈 감고, 덮어놓고 하자.가 그것이었다. (서글프긴 하지만) 그래야 뭐든 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본래 내가 그렇게 성실한 사람이 못되는데, 뭐든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거나,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면 성실해지는 것 같다. 나는 그 10개월 간은 결석 한 번, 지각 한 번 하지 않고 다녔으니 말이다. 

처음 시작하면서, 또 어떤 만남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나름 기대반, 설레임반이었다. 어딘가를 잘 돌아 다니는 성미도 못되는데, 그 시기만큼은 거짓말 조금 보태서, 원없이 돌아다니고, 사람들과 얘기도 많이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특히 나는 거기서 한 남자 아이(이런 말 쓰기가 어색하긴 하다. 그도 알고보면 객관적으로 적지않은 나인데. 암튼 나 보다는 어리니까)를 알게 되었다. 그는 당시 영화쪽에 몸 담고 있었지만, 극단쪽에도 인맥을 가지고 있어 그를 통해 싸게 연극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어느 날, 우리는 연극을 보고 근처 가까운 곳에서 저녁을 함께 하게 되었다. 밥을 먹다 어떤 무슨 말끝에 사귀는 사람에 대해서 얘기가 나왔다. 공교롭게도 모인 모두가 아직은 서로 조심하느라고 그랬는지, 현재 사귀는 애인이 없거나, 김빠진 맥주 같이 시덥지않은 연애를 하고 있거나 뭐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그는 다소 결의에 찬 어조로, 자신은 지금은 헤어진지가 얼마되지 않아 누군가를 다시 새롭게 사귈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말을 듣는 순간 나는 좀 마음이 짠했지만 함부로 동정하고 나오는 것도 그렇고 해서 농담 삼아 "니가 찼냐? 아니면 채였냐?" 고 대범하게 물었(던 것 같)다. 물론 조심스럽지 않은 건 아닌데,  오빠뻘이었으면 어땠을지 몰라도 동생뻘이고, 왕누나 같은 느낌으로 묻는 건데 뭐 어떠랴 싶었다. 그럴 땐 오히려 시크하게 물어 봐 주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다행히도 내 질문이 좀 우스웠는지, 사람들은 깔깔대고 웃었다. 그러자 그애도 그 웃음 뒤에, "아이, 제가 어떻게 차요? 그냥 채여 줬죠."했다. 마치 그것이 정석인 양. 나는 순간 머리가 복잡했다. 그런 건가? 연애하다 헤어지면 남자는 이미 마음은 떠났지만 여자가 자기를 차 줄 때까지 기다려 주는 건가? 남자들도 많이 차지 않나? 그것도 남자의 에티켓이라면 에티켓이라는 건가? 그럼 뭐야, 남자한테 차인 여자들은? 하지만 난 더 이상 물어보지 못했다. 마침 내 맞은 편에 앉은 여자 아이가 나름 그 애와 비슷한 처지라 한숨을 쉬고 있길래 나는 "너도 차일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거냐?" 해서 또 한바탕 웃었다. 그녀 역시 웃음을 참지 못하며 나에게, "어머, 언니 저는 여자예요. 제가 왜 기다려요?" "아, 너 여자였지. 기다리는 것 같아서..." 그렇게 우린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남녀관계의 복잡성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하랴? 하지만 여자를 찰 수가 없어서 차일 때까지 기다려줬다는 그 아이는 그후 꽤 오랫동안 나에게서 잊혀지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나는 이은조 작가의 <나를 생각해>란 작품을 읽으면서 그를 또 한 번 떠올리게 됐다.  

이 작품은, 현대 여성의 내면과 현대성을 작가 특유의 꼼꼼한 문체에 녹여낸 꽤 잘 쓴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책에 보면, 주인공 유안과 승원이 오랜 연인관계로 나온다. 연애도 오래했으니 승원은 유안과의 결혼을 생각하지만, 유안은  결혼할 생각이 없다. 적어도 지금으로선. 그 둘의팽팽한 밀고 당김이 어느 만치 유지가 되다가, 어느 순간 관계를 놔버리는 쪽은 유안이 아니라 승원이다. 말하자면 승원이 그만 만나자고 이별을 선언하는 것이다. 팽팽히 유지됐다 무너지는 유안의 내면이 행간에서 읽혀진다.  그것은 또한 그 때 그 남자 아이가 나에게 은연중 각인시켜 놓은 뭔가의 사고체계를 무너 뜨리는 것이기도 했다.  

'뭐야? 남자도 이별을 선언하잖아? 그런데 걔는 왜 그렇게 말했지...?' 그리고 한참 뒤에 따라 온 생각은, '그렇구나. 누군지 모르지만 그 얘는 아직도 상대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을 그렇게 얘기했던 거구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가끔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나중에 어느 책을 읽다가 우연히 깨닫게 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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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4 18: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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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4 18: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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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4 19: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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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5 12: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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