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 대한 리뷰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털어내지 못한 섞연치 않음이 남아 있다.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지그시 관찰해 본다.   이 책은 명백히 사람을 기만하는 게 있다.  

작가가 조로에 관해서 나름 자료조사를 한 것 같긴하다. 충분히 했는지 어쨌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캐릭터를 부여할만큼은 했다고 치자.하지만 작가는 자료조사만 했을 뿐 결정적인 것을 간과했다. 그것은 그사람의 내면에 관해선 채 건드리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슬픔의 아름다움',  '슬픔의 기쁨' 문장의 뛰어남 뭐 이런 것으로 적당히 이 문학의 성과를 포장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책 중간쯤 보면, 한아름이 도네이션 TV 프로그램에 나가려고 한다. 사전 조사차 PD와 작가가 한아름의 집을 방문한다. 여러 가지 사전 인터뷰를 하다 잠시 쉬는 시간 때, 작가와 PD가 나누는 대화를 한아름이 우연히 엿듣게 된다. 그 둘이 나누는 대화는, 한아름이 저 아이에게도 과연 성욕이 있느냐 하는 것이였다. 작가(작품속의 작가나 원작자나)는 단지 이것에 대해 물음만 할 뿐 긍정도 반박도 못하고 그냥 눙치고 지나간다.  나는 여기서부터 작품의 심각한 결함을 보이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그 부분은 눙치고 지나갈 것이 아니라, 긍정이든 부정이든 뭔가의 반응을 했어야 했다고 본다. 아닌 것 같으면 시작부터도 하지 말고.  

사실 조로는 불치병 이전에 장애이기도 하다. 그 말을 자의로 들었건, 우연히 들었건 이건 심히 인격을 저해하는 말이다. 사람이 몸이 장애라고 그 사람의 인격도 장애일 수는 없지 않은가? 몸은 그래도 17세 소년은 이렇게 살아 있다. 거기에 대한 저항이 없다. 그리고 이 부분은 작가도 독자도 별스럽지 않은 양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수잔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이란 책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 질병에 관해 예를 들면, 암이나 에이즈 같은 질병을 통해 낙인을 찍으며,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고, 그들의 집단적 상상력을 부추겨왔다고 말하고 있다. 말하자면, 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뭔가 추한 것으로 변모시키는 은유의 함정'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를 폭로함으로써 질병은 질병일 뿐이며, 질병은 치료해야 할 대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하고 있다. 

마찬가지다. 여기에 추가해야 할 것이 있다면 장애자다. 우리는 장애자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 너무 몰이해적이다. 김애란의 작품이 그만한 결말을 내고 있는 것엔 장애자에 대한 기존에 막연히 느끼고 있는 편견(그것이 나쁜 것이건, 좋은 것이건간)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작가가 그걸 의식했을까? 못하고 썼을까? 어쨌든 그것은 편견은 편견인데, '순백의 편견'이다.  

사실, 은유로서의 장애자의 문제는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온 문제다. 오래 전 어느 잡지에선가 이것을 지적한 기사를 읽어본 적이 있다. 즉 사람들은 막연히 장애자는 '순백의 영혼'을 지녔을 거라는 것이다. 가끔 방송국 같은데서 연예인이나 MC가 장애시설 가서 그들과 함께 놀아 주고, 밥도 같이 먹는 프로를 보여주곤  하는데, 그들은 너무 고상한 척을 한다는 것이다. 마치 몸은 장애가 있어도, 그들의 해맑음, 구김없음, 등을 말하며 천사니, 순백의 영혼이란 말을 남발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 그들을 모르고 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그렇다면 반대로 순백의 영혼대신 더럽고, 추악한 영혼을 지녔다는 말이라도 하란 말인가? 아니다. 그들도 비장애인과 같다는 말이다. 그들이 몸이 불편한데 어떻게 해맑을 수만 있는가?  단 1초라도 그들의 몸이 되어본다면 쉽게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들이 부모, 형제를 떠나거나 버림 받아 시설에서 남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데, 그속에서 마냥 행복만 하다면 그걸 믿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원래부터 그런 운명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들도 똑같이 질투하며, 욕심을 부릴 수 있고, 그리움을 알며, 단 1분만이라도 온전한 몸이 되어서 자신이 가려운데를 손으로 박박 긁어보고 싶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결국 그들을 단순히 천사로 떠받들고, 순백의 영혼으로만 본다는 것은 백치로 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도 수잔 손택이 말한 은유의 함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몇 년 전, MBC 스페셜에서 장애자의 성에 대해 다룬 것을 기억한다. 장애자 몇명이 나와서 첫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그중 어떤 사람은 실제로 누드 모델이기도 했다. 그들이 이렇게 TV에 나와 이야기를 하는 건 당연 사회와 비장애인 몰이해에 항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애인이 인권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왔구나, 나름 신선했고 보기는 좋았는데, 그 뒷맛은 씁쓸했다. 장애자와 비장애자의 이해가 원래부터 이루어졌다면 저렇게 TV에 나와서까지 저러지 않아도 됐을 텐데, 뭐든지 인식을 바꾸려면 선구자, 희생양이 필요하듯 저들은 그것을 자처했구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이해 못하는 건, 그 프로에 여자들만 나왔지 남자들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튼, 이 은유로서의 장애인의 문제는 문학이나 영화를 포함한 드라마에서 좀 더 심각하게 다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장애도 급수가 있고,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잘 다루지 않거나, 장애를 가진 등장인물이 나온다고 해도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들조차 심각하게 다루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그럴 것 같으면 아예 빼버리던가. 문학적 완성을 위해 슬쩍 차용하는 정도라면 그 정도의 진실성을 알아보는 건 누구보다도 작품을 볼 줄 독자일 것이다. 내가 김애란의 작품에 섞연치 않은 분노를 풀어버리지 못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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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3 09: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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