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서재에서 4년 차인 나에게 '인생 네 권'은 처음에 좀 황당하고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40권도 아닌 4권이라니? 아마도 서재 활동하기 전이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테지만. 나보다 더 오래 활동한 분들, 서재 활동은 짧아도 독서에 대해 나름의 관점과 애정이 깊은 분들이라면 목록이 더 길 수도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봤다. 그러니 다들 그렇게들 이고 지고 쟁여 두고(책을 데리고 살다시피)들 사는 것이 아닐지...
거부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웃들의 목록을 가끔 들여다보니 흥미롭기도 하고 자연스럽게 내 목록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4권이라는 다소 말이 안 되는 규칙에 들어가지 못한 나의 인생 책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며 올려봅니다.
1.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내 마음을 뒤흔들어놓은 수많은 책들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라 할 수 있는 프루스트의 소설. 완간되지 않았던 민음사 것으로 '거꾸로 읽기'를 시작해 뒤늦게 출간된 나머지를 작년에 다 읽었다. 어떤 소설은 진입 장벽이 높다. 프루스트의 이 작품은 그중에서도 악명이 높은 축에 속할 듯하다. 여러 작가들 마저도 도중에 읽기를 포기할 정도로 프루스트만의 장황한 묘사와 강박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비유들은 종종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프루스트가 펼쳐놓은 풍경에 제대로 빠져들면 마치 암벽등반에 중독된 사람처럼 남들에게는 비이성적이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가파른 벽이 희열의 순간들로 채워진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우리가 언제나 인지하지는 못하지만 추구하는 어떤 꿈이 들어 있다. 베르고트나 스완에 대한 믿음은 내가 질베르트를 사랑하게 했고, 질베르 르 모베 에 대한 믿음은 게르망트 부인을 사랑하게 했다. 그리고 지극히 고통스럽고 질투 어린, 그리하여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보였던 알베르틴에 대한 나의 사랑에는 얼마나 광대한 넓이의 바다가 마련되었던가! -마르셀 프루스트. 되찾은 시간
2.샬럿 브론테,빌레뜨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얼마나 많이 울고 웃었는지 모르겠다. 최재천 교수가 [이기적 유전자]를 쓴 리처드 도킨스를 처음 만난 일화를 떠올려 본다. 미리 약속을 잡고 방문했음에도 도킨스는 얼마간 최재천 교수를 문 앞에 그대로 세워두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심지어 인사를 하러 나온 도킨스의 부인도 방문객에게 들어오라는 말을 하지 않고 돌아섰다고. 결국 최 교수는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어도 되겠냐?'고 묻고 나서야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이어진 인터뷰도 마찬가지였다. 도킨스는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고 모든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고 한다. 누구라도 무척 불쾌하고 당황스러웠으리라. 이에 최재천 교수는 '나는 당신의 많은 책들을 번역했고 당신의 펜이다. [이기적 유전자]는 차가운 머리로 쓴 것 같고 당신 다운 논리정연함이 돋보이는데 [만들어진 신]은 뜨거운 가슴으로 쓴 글이다. 당신답지 않다. 대필한 것 아니냐? 당신이 직접 쓴게 맞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여기 격노한 리처드 도킨스는 대체 어떤 부분이 그렇냐며 예정된 1시간을 훌쩍 넘어선 4시간 이상을 최재천 교수와의 대화에 할애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를 듣고 생각해 보니 나는 차가운 머리로 쓴 글보다는 뜨거운 가슴으로 쓴 글을 선호했다는 걸 알게되었다. 하지만 [빌레뜨]는 뜨거운 가슴뿐만 아니라 차가운 머리의 느낌도 담겨있다. 어찌 보면 그 둘의 전쟁터를 소설로 묘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샬럿 브론테는 루시 스노우는 이름 처럼 차가운 이성으로 삶을 지탱하는 여성이다. 그녀의 숨겨진 과거는 감정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기질의 원인일 수도 있는데 우리는 그 기원을 알 도리가 없다. 어쩌면 그렇게 과거를 가려둠으로써 각자의 고통을 숨기고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의 공감을 더 얻지 않았을까?
'이성'에 따르면 나는 빵조각이나 벌려고 일하며 죽음의 고통을 기다리면서 평생 낙담한 채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이성'이 옳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우리는 '이성'을 무시하고 '이성'의 채찍을 벗어나 '상상'에게 달려가서 빈둥대지 않는가. 밝고 부드러운, 이성의 적이자 우리의 상냥한 '구원자'이며, 신성한 '희망'인 '상상'에게 말이다. 끔찍한 복수가 되돌아오리라는 것을알면서도 우리는 이따금 한계를 넘어서기도 하며, 또 그래야 한다. -빌레뜨
3.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유시민 작가가 무인도에 딱 한 권 가져갈 수 있는 책을 고르라면 '코스모스'라고 했었다. 그래서 따라 읽었던 책. 내 기억에 이 책을 읽고나서 '총균쇠'도 무난하게 완독할 수 있었다. [태백산맥]은 여러권이니까 제외로 한다면 이 책이 내 인생의 첫 벽돌책이라 할 수 있겠다. 자연스럽게 문과를 선택하고 이과는 나랑 전혀 상관이 없을거라 믿었던 나의 어리석음을 일깨워 준 책이다. 칼 세이건은 과학이 얼마나 문학적일 수 있는지, 인간이 우주 속에서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상상할 수 있게 돕는다. 이런 책이기에 무인도에 가져간다고 유시민 작가가 말했던 거구나...하고 미소지었고 내 인생책이 되었다. 그래도 내가 무인도에 가야 하고 하나의 작품을 가져갈 수 있다면 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가져가고 싶다.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 사이에 성립하는 불변의 관계들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수학보다 더 소중하며, 수학보다 더 쉽게 과오나 오류에서 해방될 수 있고, 수학 보다 더 간단히 기술할 수 있으며, 수학보다 그 통용 범위가 더 넓은 언어는 결코 발견될 수 없을 것이다. 수학이야말로 우주의 모든 현상을 기술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가 단 하나의 설계도를 통해서 가장 단순하게 만들어졌다는 확실한 증언을 우리는 수학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수학을 통하여 불변의 질서가 자연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믿을 수 있다. -조제프 푸리에
4.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이 책은 페미니스트들에게 BIBLE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제2의 성'을 읽지 않고 도대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뭐 이렇게까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만큼 '제2의 성'으로 자리매김한 여성에 대한 거의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는 착각마저 들게 한다. 하지만 그럴리는 없지 않은가. 여성의 지워진 역사는 기록된 남성 역사만큼이나 방대할 것이므로. 이런 책 한권에 다 담길수는 없지. 이후로도 다락방님과 함께 읽은 수많은 여성주의 책들이 그 사실을 보란듯이 증명해 주었다. 그러나 이 책이 여성들의 인식 전환에 끼친 파급력과 기록적인 가치는 오랜 시간 지나도록 유지될 것이다.그 밖에 정희진 선생님의 책이나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또는 필리스 체슬러의 여성과 광기, 마리아 로사 달라 코스타 등 굵직한 저자들의 책들도 후보였지만 재독 했을때 그 경이로움을 잊을 수 없어 보부아르를 선택했다.
사람들은 여자를 부엌이나 규방에 가두어 두고서 여자의 시야가 좁은 것에 놀란다. 여자의 날개를 잘라놓고는 그녀가 날 줄 모른다고 개탄한다. 여자에게 미래를 열어 준다면, 그녀는 더이상 현재에 정착해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자를 그 자아나 가정의 한계에 가두어 두면서 그녀의 나르시시즘과 이기주의 및 허영, 신경과민, 악의 등을 비난하는 것은 모순이다. P.828
이렇게 네권을 인생책으로 골라 보았으나...그 외에도 포함되지 않은 인생책들이 있어 아쉬움에 조금? 열거해 봅니다. 정희진의 글쓰기 시리즈,우치다 타츠루[하류인생], 레이첼 모랜[페이드 포], 수전 손택[타인의 고통], 버지니아 울프[자기만의 방],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타의 [페미니즘의 투쟁], 사강의 [패배의 신호], 에밀 졸라의 [인간짐승],[제르미날],그레이엄 그린의 [브라이턴 록],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 공기속으로],움베르토 에코[장미의 이름].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로제 마르텡 뒤가르[회색노트],사이먼 싱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사사키 아타루[기도하는 그 손을 잘라라],그리고 아직 무서워서 다 읽진 않았지만-다 읽고 나면 더 삐뚤어질 것 같아 멈췄던-니체의 [도덕의 계보], 아모스 오즈의 [블랙박스]....일단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여기까지 쓰겠습니다. 네 권을 어쩔 수 없이 골랐으나 저 처럼 더 열거할 책이 많으신 분들 있을겁니다. 그러니 앞으로 이런 이벤트?는 부디 신중하시길 알라딘 서재지기님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