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그 누구도 고립된 섬에 살지 않는다. 그렇기에 살아감이란 언제나 '함께 살아감(living -with)'이다. 성찰하는 것이란 나의 삶만이 아니라 타자들, 그리고 우리가 몸담은 사회와 세계에 대하여 성찰해야 함을 의미한다. ㅡ질문빈곤사회, 강남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읽다 말았었는데 <질문 빈곤 사회>의 프롤로그를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여러 사상가들에게 아직까지도 학문의 초석으로 여겨지는 그리스 철학. 그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철학자 소크라테스. 그는 누구보다 질문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어쩌면 그로 인해서 죽음을 맞이했다. 개인적으로 그의 죽음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는데 '질문'의 관점에서 보니 이건 상징적 사건인 듯 보인다. 문제의식을 갖는다는 것이 그로인해 질문한다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고 또 위험하다는 상징 말이다. 역사상 가장 지혜로웠다는 소크라테스도 그로 인해 죽음을 당했는데 일반인들에게 질문이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하지만 질문은 사유로 가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사유는 그런 의미에서 무지의 불안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하는 뼈대가 아닐까.
한나 아렌트는 '악(evil)'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와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정의를 내린다. 아렌트에 의하면 "악이란 비판적 사유의 부재"다. (...) 소위 '선량한 사람'이 비판적 사유를 하지 않을 때, 왜곡된 정치적 이데올로기 또는 왜곡된 종교적 가치에 의해 '선동'됨으로써 자신도 모르게 '인류에 대한 범죄'에 가담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늘 상기해야 하는 중요한 점이다. ㅡ 질문빈곤사회
'질문하기'를 통해서 인간은 자신의 인식 세계를 넓힘은 물론 타자와 세계를 보는 시각 또한 확장했다. 그 결과 다양한 의미의 '포용의 원(circle of inclusion)'을 확대 할 수 있었고 이는 질문하기를 통한 중요한 정신 세계의 발전이다. 이러한 발전은 사회정치적이고 제도적인 발전과 맞닿아 있다. (...) 노예제도의 폐지, 인종에 대한 제도적 차별의 폐지, 여성에 대한 제도적 성차별의 인식과 개선, 성소수자 차별을 넘어서는 제도적 평등의 모색 등 다차원적 변화가 일어난 것은, 새로운 질문을 묻기 시작하는 이들에 의해서 가능하게 되었다. ㅡp.8
한국은 가정교육은 물론 공교육에서도 질문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게 하는 문화다. 주입식 교육방식 그리고 그에 따른 입시제도는 질문을 봉쇄하는 문화를 지속시키고 강화한다. 더 나아가서 가족, 친척, 직장, 군대 등 도처에서 작동되는 '장유유서'의 변형된 관계관과 가치관은 가정, 학교, 직장은 물론 사람 간의 위계주의적 관계를 지배하고 있다. p.9
독서라는게 만능은 아니지만 책을 읽기 전에는 제대로 된 질문을 해 본 기억이 없다. 질문은 특정한 사람들, 뭔가를 가진 사람들이 하는 거라는 의식이 내 안에 있었고, 동시에 위압감 같은 것이 보이지 않지만 공기중에 떠 있다고 느꼈다. 지금도 완전히 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문제제기를 하는 것, 어떤 것에 대해 내 나름의 생각을 글로 써 내는 것은 아직도 용기가 필요하다. 숨겨두었던 것을 사람들 앞에 전시하는 셈이니까. 비판받을 것을 어느정도는 감수해야 하고 이해받지 못함이나 오독도 감안해야 한다. 사람들과 섞여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같다. 어떤 식으로든 충돌은 피할 수 없다. 많은 면에서 여성들은 그런 두려움이 더 강한것 같다. 감추는 것에 더 익숙하고 능숙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말해야 하고 말 할 수 있어야 한다. 침묵은 때로 외부의 힘에 굴복을 의미하니까.
질문의 가능성은 위계를 드러내기도 한다. 아프고 경직된 사회일수록 그렇다. 권위적인 사람일수록 자기 기준 밖의 질문에 예민하다. 그들에게 '질문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다. 그 경계에서 벗어난, 즉 권위가 없는 이들의 질문은 '도전'이고 그 자체로 '문제'시 된다. 하지만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의 질문을 통해서 우리의 세계는 확장될 수 있다. 사람들이 인지하는 세계는 '전부'가 아니니까. 인간은 볼 수 있는 것들만을 겨우 보고 인지한다고 하지 않나. 품고 있는 질문들이 밖으로 나와 모이면 어떤 일이 생길까...
어디에서, 어디에서 당신의 영혼은 무너지나요? p .265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글쓰기에 관해 내가 들은 견해 중 가장 무용했던 말은 글을 쓸 때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치 우리의 목소리가 작동할 준비가 된 자동 피아노처럼 우리 내면에 숨어 있다는 듯이. 개성과 마찬가지로, 목소리의 존재야말로 세계와 나의 상호작용에 달린 것인데. p.23 . 세라 망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