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디외는 파업 지지 운동 같은 정치 참여를 통해, 결코 공적인 삶의 방관자가 돼서는 안 되는 작가의 책무를 몸소 보여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사회학자가 사회투쟁에 참여하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그의 목소리를 곁에서 듣는다는 것은 내게 무한한 기쁨과 해방감을 선사했다. 쥐페가 우리에게 허리를 굽히기를 원했다면, 부르디외는 우리에게 당당하게 고개를 들도록 했다.
대게 장기간의 혹독한 파업은 일상의 흐름을 깬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1995년 파업의 특이한 점은, 일부 시민이 자가용 외에 다른 교통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일터로 출근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서로 연대하고, 각종 기발한 묘수를 생각해냈다. 즉흥적으로 카풀을 조직했고, 자전거 판매율도 급증했다. ㅡ아니 에르노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속에는 선과 악이 뚜렷하게 구분되었다. 악은 일단 외모부터 평범하지 않았고 행실도 나빴으며 사람들에게 괴로움을 주었다. 선은 그 반대였다. 독자인 내가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하는지 어떤 아이가 되어야 하는지 동화책에서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악이라고 늘 악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고 선이라고 늘 선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악에는 선함이 선함에는 악이 공존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조금 더 이쪽이 두드러지고 어떤 때에는 저쪽이 좀 더 두드러지는 그런 정도의 차이였다. 내 주변부터 정치에 이르기까지 그런 양상은 더욱 복잡해 보일 때가 많다. 특히 한국 정치는 사안별로 옳고 그름을 따져 뭐가 더 나은지 함께 해결 방안을 찾기보다는 되도록 문제 그 자체는 건드리지 않고 편가르기, 갈라 치기로 피로감을 높이는데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기본적인 것부터 합의가 되지 않는다고 느낀다. 장애인이, 노동자가, 여성이 기득권자라는 말을 듣고 특권을 누리고 있다고도 한다. 예전에는 약자였을지 모르나 요즘의 그들은 기득권이라고. 마치 그 안에 무수한 다양성, 개개인은 없고 단일한 것으로만 가득차 있는 것처럼.
어제 팟케스트에서 <정희진의 공부> 2월 호를 들었다. 결국 사람들이 똑똑해져야 똑똑한 리더가 나온다고. 맞는 말인 것 같은데 그럼에도 그리 간단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똑똑한 사람들이 많아져도 멍청한 사람이 리더가 될 수 있다. 똑똑한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불의의 목소리가 더 크면 가능한 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요즘은 멍청이들도 재력이 뒷받침되고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사람들의 지원을 받으면 높은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지 않은가? 용기 있고 훌륭한 사람들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용기 있는 행동을 하다가 피해를 입을까봐 미리 겁을 집어먹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나서주기만을 기다리는 경우가 더 많지 않은가? 넘어져 있는 사람을 일으키려고 하면 주변에서 저 사람 위험한 사람이라고 괜히 도우려고 건드렸다가 소송에 휩쓸린다고 말하면 나서려다가도 주저하게 되는 게 사람 심리 아닌가? 어떤 행동을 해야 옳을지 분명하지 않을 때, 헷갈릴 때, 혼란스러울 때, 도와야 한다고. 이럴 때 주변에서 힘을 합쳐야 한다고 행동하는 사람, 말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용기도 비굴함도 전염되니까 감정도 전염되니까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한계에 머무르며 스스로를 경계하는 것뿐이다. 그것이 계몽이든 낭만이든 모든 좋은 것은 언제든 나쁜 것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긴장을 놓치지 않고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직시하는 것, 그 분열됨에 머물러 있는 것, 어쩌면 그것이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ㅡ <철학책 독서모임>
얼마전 유수님 글에서 찾은 인용문. 요즘 내가 갖고 있는 질문들에 가장 적절한 대답이지 않을까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