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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찾은 혀 - 어느 청춘의 이야기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80
엘리아스 카네티 지음, 김진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평점 :
어머니는 독일어 책을 항상 내게서 멀리 잡고 있었다. "너는 책이 필요 없어." 어머니가 말했다. "어차피 봐도 넌 이해할 수 없으니까." 그런 이유를 대도 나는 무슨 비밀이라도 되는 양 내게 책을 숨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는 내게 독일어 문장을 하나 읽어주고 그 문장을 반복하게 했다. 내 발음이 어머니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듣기에 괜찮다 싶을 때까지 나는 그 문장을 여러번 반복해야 했다. 그래도 그런 일이 자주 있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내 발음 때문에 나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절대로 참을 수 없는 게 어머니의 조롱이었기에 나는 노력했고, 그래서 곧 제대로 발음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어머니는 먼저 내게 그 문장이 영어로 무슨 뜻인지 말해줬다 그러나 뜻 설명은 절대로 다시 해주지 않았다. 문장의 의미를 나는 단번에 기억해야 했다. 그런 뒤에 어머니는 매우 빨리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다. p.137
<군중과 권력>으로 잘 알려진 카네티의 자서전 시리즈 중 1권이다. 두 살 때부터 16세 까지의 이야기가 담겨있는데 읽어보면 알겠지만 자서전이라기 보다 성장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시작부터 분위기가 위태롭다. 15살 정도의 어린 보모의 품에 안겨 있던 두 살배기 카네티는 아마 보모의 애인이었을 듯한 남자로 부터 혀를 자르겠다는 위협을 받는다. 어린 마음에 꽤나 두려웠을 그는 이후에도 10년간 이 일을 발설하지 않는다. 그의 혀는 시작부터 그렇게 위협 받았지만 가슴은 언어에 사로잡힌다. 불가리아에 사는 스페인계 유대인 사업가의 장남이라는 조건 때문에 스페인어는 물론 불가리아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등 다양한 언어를 접할 수 있었던 것.
영국에서의 삶을 원했던 카네티의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힌다. 결국 가업을 잇지 않고 가족을 데리고 영국으로 떠나겠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저주를 내린다. 일반인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유대인 사회에서 아들에게 저주를 내리는 경우는 아주 아주 드문 사례. 그 저주 때문인지 영국 생활 1년만에 어린 카네티의 아버지는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그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과 아내를 유산으로 남긴채로. 본래 연극배우를 꿈꾸던 아버지는 비슷한 꿈을 가지고 있던 어머니와 빈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그들은 집안 식구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서도 둘만의 언어인 독일어로 사랑을 속삭이며 그들만의 추억을 공유했다. 아들에게도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부제는 크나큰 상실이었지만 독일어라는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을 나누었던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고통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사랑의 언어인 독일어에 대한 갈증 때문이었을까 어머니는 카네티에게 한 달간 혹독하게 독일어를 교육을 시킨다. 빈에 있는 학교에 들여보내기 전 자기가 직접 언어를 가르친거다. 아들에게 쉬운 학습 도구인 책 조차 넘겨주지 않고 말이다. 그녀는 '언어는 구술로 익혀야 하며 그 언어에 대해 뭔가를 알고 난 후에야 비로소 책이 무해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p.139 그렇게 어린 카네티에게 고된 한 달이 지난 후 문제집이 주어진다. 이제 그는 마음껏 독일어를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그는 평생을 독일어로만 책을 썼다고 한다. 나는 범생이의 학창시절을 낯설고도 부러운 마음으로 읽어나갔다. 다양한 언어에 친숙했던 가정환경, 독일어로 사랑을 나누었던 부모님. 이런 자극이라면 외국어에 대해 자연스럽게 친밀감과 동경 비슷한 마음을 갖을 수 있었겠지? 누군가에게 뭔가를 하고 싶게 하려면 그걸 즐기는 모습을 보게 하라는 말을 들었다. 이 책이 그 드라마틱한 모범 사례였다. 20세기 전쟁과 인종주의로 혼란한 시대상황 속에서 언어와 문학에 심취했던 한 소년의 삶을 지루할 틈 없이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나머지 시리즈도 출간되는대로 읽어보고 싶다.
이 시절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장 중요하고 흥분되며 특별했던 것은 어머니와 함께 책을 읽었던 저녁 시간과 매번 읽은 내용을 가지고 나눈 대화였다.(...) 내가 결코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인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이 시절부터, 그러니까 열 살 때부터 내 신조가 되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끌리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하는 데에는 이 시절 접한 인물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 인물들은 어린 시절의 내게 소금과 빵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본질적인 것, 즉 내 은밀한 정신적 삶이었다. p.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