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때 내가 느끼는 건 연민이다. 연민은 내 방식의 사랑이다. 내 방식의 증오이고 소통이다. 어떤 사람은 욕망으로 살고 또 어떤 사람은 두려움으로 살아가듯, 세상 속의 나를 지탱해 주는 건 연민이다. - P28
그녀는 어릴적의 욕망 - 힘 - 기적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공식은 연거푸 되풀이되었다. 어떤 걸 소유하지 않고 느끼기. 그러기 위해서는 상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가볍고 순수한, 공복의 상태를 유지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건 마치 날아다니면서, 그러니까 발아래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상태로 지극히 소중한 것을, 이를테면 한 아이를 품에 받아드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는 그게임의 어느 지점에 이르면 자신이 누워 있다는 것조차느끼지 못했다ㅡ그럴 때면 자신이 자신의 모든 생각들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두려워졌다. 그녀는 바다를 원했고 침대 시트를 느꼈다. 하루가 흘러가고 그녀는 홀로 뒤에 남겨졌다. - P29
그녀는 멍하니 누군가를 떠올렸고ㅡ틈새가 벌어진 커다란 치아와 속눈썹 없는 눈ㅡ 자신의 독창성을 확신하던 그 누군가는 진지한 어조로이렇게 말했었다. 내 삶은 엄청난 야행성이야. 그는 그말을 마치고는 거기 그냥 한밤중의 소처럼 조용히 앉아 있곤 했다. 그는 가끔씩 아무런 논리도, 목적도 없이머리를 까딱이다가 다시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는모두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아, 그래, 그남자는 그녀의 어릴 적 기억 속에 있었고, 그와 함께 떠오르는 건촉촉이 젖은 제비꽃 무리, 지천으로 피어 떨리던…………. - P30
그건 아주 작은 열기였다. 만일 죄가 존재한다면, 그녀는 죄를 지었다. 그녀의 인생 전체가 하나의 과오였으며, 그녀는 헛된 존재였다. 그 목소리를 가진 여자는 어디 있었을까? 그저 성별이 여자일 뿐이었던 여자들은 어디 있었을까? 그리고 그녀가 어렸을 때 시작한것들은 무엇을 통해 지속돼왔을까? 아주 작은 열기를통해서. 그 지난 날들이 맺은 결과들은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똑같은 대상을 거부했다가 사랑하기를 천 번쯤반복했다. 어둠과 정적 속에서 보낸 그 밤들, 높은 곳에서 반짝이던 작은 별들. 그녀는 주의 깊은 시선을 머금은 채 어스름 속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흐릿한 흰 침대가 어둠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피로가 그녀의 몸으로 스르르 기어들고, 맑은 정신은 그 문어를 피해 달아났다. 너덜너덜한 꿈들, 환상들의 시작, 오타비우는 다른 침실에서 살고 있었다. 기다림이 가져다주던 나른함은 갑자기 응축되면서 빠르고 초조한 몸동작으로, 침묵의 외침으로 변했다. 그 다음엔 추위가, 그리고 잠이. - P31
어떤 것들에게 소유당하지 않고 그것들을 가질 방법이 있을까? - P45
그녀는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았고, 그 모든 순간들이 어떤 고난, 혹은고통스러운 경험의 정점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순간들에 감사해야 했다. 마치 자신의 바깥으로 벗어난 것처럼, 초연한 태도로 시간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 P47
눈을 반쯤 떴다. 저 아래에 바다가, 양철의 물결처럼 반짝거리며, 깊고, 거대하고, 고요한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짙은 바다는 끊임없이 일렁이며 제 몸을 휘감았다. 바다는 고요한 모래밭 너머에, 사지를 뻗고 누워있었다…………. 살아 있는 몸처럼 누워 있었다. 잔물결 너머에 바다가 있었다-바다. 바다, 그녀는 쉰 목소리로조용히 말했다. - P55
음악의 특정한 순간들, 음악은 생각과 같은 범주에 속해서, 이 둘의 진동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같은 방식으로 움직였다. 음악은 생각처럼 몹시 내밀해서, 그것은 들려올 때에야 비로소 스스로를 드러냈다. 그것은 생각처럼 몹시 내밀해서, 누군가가 그 소리가 지닌 약간의 뉘앙스라도 흉내 내면, 주아나는 어느새 그 음악이 침범당하고 흩어진 느낌을 받고는 놀라곤했다. - P65
그녀는 희미하게 깨달았다. 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더 자유로워지고, 모든 것들에게 더 많은 화가 났으며,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분노가 아니라, 사랑이었다. 너무도 강력한 사랑이어서 그 열정은 증오의 힘으로밖에 억제되지 않았다. 이제 난 혼자있는 독사야. 그녀는 선생님과의 관계가 진짜로 끝났음을, 그런 대화를 나눈 뒤에 그를 다시 찾아갈 수는 없음을 상기했다 - P94
꿈들은 나를 무의식의 늪에 빠뜨리는 현실보다 더 완전하다. 그렇다면 중요한 건 뭘까? 사는 것? 아니면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아는 것? 몹시도 순수한 말들, 작은 크리스털 방울들. 나는 촉촉이 반짝이는 형상이 내 안에서 뒹구는 것을 느낀다. - P107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고갈된 걸 알았고, 처음으로 고통받았다. 자신이 진짜 둘로 쪼개졌기 때문이었다. 쪼개진 두 부분은 서로를 마주했고, 그녀를 응시했으며, 쪼개져나간 상대가 더 이상 줄 수 없는 것들을 소망했다. 사실 그녀는 늘 둘이었다. 그녀가 존재한다는 걸 어렴풋이 아는 하나와, 실제로 심오하게 존재하는 하나. 단지 그때까지는 그 둘이함께 작용하면서 구분할 수 없었던 것뿐이었다. 이제그녀의 존재를 인식하는 한쪽이 단독으로 작용하고 있었으니, 그건 그 여자가 불행하고 지적인 사람이라는뜻이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지어내려고 생각을 해보려고, 주의를 딴 데로 돌리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소용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사는 법밖에 몰랐다. - P120
그녀는 삶 혹은 죽음이라는 본질을 위해 태어났으니, 그 사이의 모든 것들은 그녀에게 고통이었다. - P121
무엇보다도, 그 여자는 삶을 이해한다. 삶을이해하지 못할 만큼 지적이지 못하니까. 논리적 사고가 무슨 소용인가…………. 설령 도중에 미쳐 버리지 않고삶을 이해하게 된다 해도 그 앎을 지식으로 보존하기란불가능하다. 삶을 완전하게 소유하고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 앎을 하나의 태도, 삶의 태도로 삼는 것이다. 그리고 그 태도는 그 목소리를 가진 여자의 토대를이루는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할 수 있는 게너무 적었다 - P122
그녀를 이토록 불타게 하는 건 무엇일까? 권태… 그래, 하지만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그 아래에는불이 있었다. 그 불은 심지어 그것이 죽음을 뜻할 때에도 거기 있었다. 어쩌면 이게 삶의 기쁨인지도 몰랐다. - P127
그녀는 다시 작게 되뇌었다. 그녀는 기도가 자신을 구해 줄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기도하고 싶지 않았다. 고통을 무디게 만드는 모르핀 같은 구제책 모르핀처럼 효과를 보려면 계속 복용량을 늘려야 하는 구제책. 아니, 그녀는 고통을 발견하고, 견디고, 그 안에 있는 신비를다 파헤칠 수 있도록 완전히 소유하기를 원했지, 비겁하게 기도를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직 그 정도로 완전히 지치진 않았다. - P128
자기 바깥에 있는 신을 찾지 않으면 결국 자연스러운 경로에 따라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자신의 고통을 탐색하고, 자신의 과거를 사랑하고, 자기가 떠올린 생각들 속에서 피난처와 따스함을 찾게 될 터였다. 예술 작품이 되기를 열망하며 태어났지만 결국 흉작기의 반쯤 상한 음식 노릇을 하게 되는 생각들 속에서 아니면 아예 고통 속에 자리를 잡고 그 속에서 자신을 체계화할 위험도 있었는데, 그것 역시 악이요 신경 안정제가 될 터였다. - P129
"그래, 난 알아" 주아나가 말을 이었다. "감정과 말의 분리. 이미 그 점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있어. 가장신기한 일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이 오면 내가느끼는 걸 표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가 느꼈던 게서서히 내가 말하는 걸로 변해 간다는 거야. 아니면 최소한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지. 나를 행동하게 만드는건 내 느낌이 아니라 내 말들이라고. 그건 정말 확실하다고." - P151
그녀는 너무도 육체적이었으므로 순수한 정신이될 수 있었다. 그녀는 형태 없는 상태가 되어 사건들과시간들의 틈바구니를 순간의 가벼움으로 빠져나갔다. - P154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갔고, 그녀는 자신을 더발견하기를 갈망했다. 이제 그녀는 강하게 자신을 불렀으며, 숨 쉬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행복이그녀를 지우고, 또 지웠다………. 벌써 자신을 다시 느끼고픈 마음이 들었다. 설령 고통이 함께 하더라도. 하지만 그녀는 깊이, 더 깊이 가라앉기만 했다. - P159
단 한 가지 익숙해지지 않은 건 잠뿐이었다. 잠은하나의 모험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생활이 머물던 편안한 명확성으로부터 어둠을 가로지르며 추락하는 일이었다. 매일 밤, 늘 똑같은, 어둡고 서늘한 신비 속으로 죽었다가 새로 태어나는. - P159
난 그를 떠날 거야, 그녀는 다시 되뇌었고, 이번엔 그 생각에서 가느다란 실들이 뻗어 나와 그녀에게 연결되었다. 이제부터 그 생각은 그녀 안에 머물 거였고, 그 실들은 점점 더 두꺼워져서 뿌리를 형성할 터였다. - P177
"그래서 고통을 겪은 시인들의 시는 달콤하고 다정하죠. 반대로 불우한 삶을 산 적이 없는 시인들의시는 고통으로 불타오르고, 저항적이죠." - P181
그, 이 남자 숨겨진 원천에서솟구친 불안감이 그녀의 온몸으로 밀려들었고, 모든세포들을 채웠고, 그녀의 비참한 고독을 침대 아래로밀어내 버렸다. 세상에, 세상에, 그 후, 그녀는 고통스러운 산고를 치르며, 숨을 헐떡거리며, 굴복의 부드러운 기름이 온몸에 부어지는 걸 느꼈다. 마침내, 마침내그는 그녀의 것이었다. - P213
나는 고통이 오케스트라가 내지르는 비명처럼 터져 오를까 봐 늘 두려워해 왔었다. 내가 어디까지 다다를 수 있는지 아는 타인은 아무도 없다. - P246
"그건 천사의 눈물같은거야. 천사의눈물이 뭔지알아? 작은 수선화의 한 종류인데 아주 약한 바람에도 이리저리 굽지. 랄랑드는 밤바다이기도 해. 아직 아무도 해변을 보지 않았을 때의 바다, 아직해가 떠오르기 전의 바다. 내가 ‘랄랑드‘라고 말할때마다 당신은 시원하고 짭짤한 바닷바람을 느끼고, 아직 어둠에 싸인 해변을 천천히, 벌거벗고서걸어야만 해. 그러면 곧 랄랑드를 느낄 거야…………. 내 말을 믿어. 나는 바다를 아주 잘 아는 사람들 중하나니까." - P271
그녀는 말할 때, 미친 듯이, 미친 듯이지어냈다! 텅 빈 공간만큼 거대한 충만함이 그를 가득채웠고, 그의 고통은 수면 위에 펼쳐진 드넓은 공간처럼 선명해졌다. 왜 그는 늘 그녀 앞에서 말문이 막히고, 달빛에 잠긴 하얀 벽처럼 망연해지는 걸까? 아니면, 어쩌면 그는 갑자기 깨어나서는 소리칠 수도 있었다. 이여자는 누구지? 이 여자는 내 삶에서 버거운 존재야! 난 도저히………… 난 돌아가고 싶어……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그는 갑자기 겁에 질렸고, 길을 잃은 기분을 느꼈다. - P272
그녀는 자신에게 저주였던 그 이상한 자유, 그녀를 심지어 자기 자신과도 연결시켜 준 적이 없었던 그자유야말로 자신의 본질을 밝혀 주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영광의 순간들이 거기에서 나오고, 미래의 모든 순간들 역시 거기에서 창조된다는것도 알아차렸다. - P316
프로푼디스….....자신의 말을 들어!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가볍게 춤추는 저 덧없는 기회를 잡아. 데 프로푼디스, 의식의 문을 닫아. 처음엔 썩은 물을, 어지러운 말들을 지각하지만, 그다음엔 그 혼란 속에서 순수한 물줄기가 거친 벽을 타고 떨리며 흐른다. 데프로푼디스,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첫 물결이 다시 밀려들게해 데 프로푼디스…………. 그녀는 눈을 감았지만, 어렴풋한 그늘만 보일 뿐이었다. 생각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 희미하고 붉은 윤곽을 지닌 가늘고 움직임 없는형상이 보였다. -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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