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이론은 권력과 불평등에 관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에, 다양한 형태의 페미니스트 이론은 최악의 상태에 있는 이들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그들을 끌어올린다. (중략) 그것은 소녀들과 여성들의 삶과 투쟁을 직접 반영할 뿐만 아니라, 이분법적으로 설정된 성역할을 상대로 싸우는 남성과 여성을 포함한 모든 개인들을 위하여, 삶의 기회를 왜곡하는 관행을 이해하고 바꾸고자 하는 노력을 반영한다. p.9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발췌한 문장은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이해하고 그래서 페미니즘을 계속 덕질 하게 한 중요한 가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좋은 가치가 이런저런 이유로 훼손되고 폄하 되는 일을 적지 않게 목격하면서 이 가치를 추구하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실감한다. 민주주의가 그렇듯 여성의 권리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고난의 시간들이 있었다. 이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많은 법적 권리도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거저 주어진 것은 없었고 피와 땀과 눈물이 소모되었다. 지금도 약자들의 많은 요구가 말도 안된다며 무시되고 불법으로 치부되고 당연한 듯 침해 당하고 있다. 







나는 책을 한가득 사 놓고는 죄책감을 느끼며 곁눈질로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트윗 하나만 더 올리고. 독서량은 여전히 많았지만 해가 갈 수록 하행 에스컬레이터를 뛰어오르는 기분이었다. 당시 나는 막 40이 되었고, 동년배들이 한자리에 모일 때마다 우리는 집중력이 없어진 것을 개탄했다. 마치 한 친구가 어느 날 바다에서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것처럼. p.12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중력을 도둑맞은 내게 아픈 제목이다. 뭐든 심각한 문제는 그냥 벌어지지 않는다. 어느 정도 누적의 결과다. 외면하고 덮어두고 미루고 별것 아니라고 유지하다 보면 눈덩이처럼 불어나 누군가를 깔아뭉갠다. 예전에 읽은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게으른 자가 한가로이 누워 있는데 도둑이 집에 들어온다. 게으른 자는 그대로 누워 생각한다. '아니 도둑이 들어오다니 마당에 들어오기만 해봐라 가만 안 둘 테니!' 도둑은 마당에 들어선다. 게으른 자는 생각한다. '아니 감히 마당에 들어와? 집 안으로 들어오기만 해봐라 내가 혼쭐을 낼 테다! 도둑이 집 안에 들어선다. 게으른 자는 분노하며 생각한다.' 방 안으로 들어오면 절대 참지 않겠어!' 결국 도둑이 방안에도 들어오고 게으른 자는 고가의 물건들을 도둑에게 다 털린다. 떠나는 도둑을 향해 게으른 자는 혼자 생각한다. '다음에 다시 오기만 해봐라' 뭐 이런 식의 내용이었다. 어처구니 없지만 냉정하게 일침을 가하는 이야기다. 많은 사례에 적용이 될 것이다. 그저 게을러 할 일을 미루는 사람은 물론,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는 사람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있지 않을까? 가령 후퇴하는 민주주의를 무기력하게 바라봐야만 하는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아프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나도 아프다. 







이 작품에 대해 글을 남겼던 것 같기도 하고 생각만으로 그친 것도 같다. 학폭을 다룬 시리즈다. 주인공이 아이돌 출신 배우라는 사실을 드라마를 다 본 뒤 알고 살짝 놀랐었다. 제법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주어 당연히 배우 출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원빈을 좀 많이 닮아서 내 맘대로 영화 '아저씨'의 어린시절 성장기라고 생각하며 봤다. 스토리도 제법 탄탄한 편이고 고구마 없이 시원시원하다. 기존에 학폭을 다룬 드라마와 차이점을 두 가지 정도 짚는다면 주인공이 싸움 실력이 본래 뛰어나기 보다는 머리 회전이 빨라 주변 사물을 잘 활용한다는 점, 연대하던 친구의 배신이 인간성의 어두운 면을 잘 드러냈다는 사실 정도다. 실제로 우리나라 학폭 문제가 심각해진지 오래다. 누적되고 오래 묵은 것은 묵히는 사람들이 더 힘이 세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제는 징글징글해진 이 현실이 어느 정도 스토리에 담겨야 보면서도 납득하게 된다. 이 시리즈는 그런 측면이 만족스럽고 개인적으로는 1화만 으로도 퀄리티가 꽤 높다고 느꼈다. 주인공 연시은은 우등생이다. 아버지와 단 둘이 함께 사는데 그의 아버지도 선생님이고 엄마는 이른바 일타강사라 바빠서 잘 만나지 못한다. 친구도 없고 외톨이인 연시은이 진심인 것은 오로지 공부! 그런 그에게 일진들이 어느 날부터 시비를 걸기 시작한다. 시은은 일단 건들지 말라고 잘 타이른다. 그들과 문제에 휘말려 성적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였겠지. 하지만 그가 성적에 예민하다는 걸 눈치챈 일당들이 잠이 오는 패치를 그의 몸에 붙여 시은은 시험을 망쳐버린다. 채점 하면서 점점 분노한 시은은 펜(존윅의 영향일까)과 책, 커튼으로...


싸우는 장면을 보면 꽤 잔인하기도 하다. 그런데도 속이 후련했던 건 물리적인 폭력 이상으로 치가 떨리는 현실의 위선 때문인지 모른다. 학폭으로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려 놓고도 아버지 찬스로 응분의 대가를 치르지도 않고 오히려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가해자들. 드라마를 통한 대리만족으로 현실이 달라지진 않지만 갑갑한 상황 속에서 숨 돌릴 틈을 주었다. 







난 내가 뭘 안 원하는지 밖에 몰랐어. 늘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 하나가 있거든, 그래서 항상 생각을 해. 이 가시만 빠지면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을 해보겠다고. 한데 막상 그 가시가 빠지고 나면 또 텅 빈 기분이 되더라고. 그러다 금세 또 새로운 가시가 옆구리를 파고들지. 그러면 또다시 그 가시에서 벗어날 생각밖에 할 수가 없는 거야. 도무지 내가 뭘 원하는지 생각할 시간이 없어.p.31



어디에 어떻게 집중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달라질지도 모른다. 내 옆구리를 찌르는 가시에 집중할 수도 있고 아님 외부의 다른 문제에 집중할 수도 있다.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영드 '보디가드' 중에서>



여기 데이비드라는 한 남자가 있다. 군 시절 아프가니스탄에 다녀 온 후 트라우마로 마음 고생중인 경찰. 그로 인해 알콜 문제가 생겨 아내와도 별거 중이다. 아이 둘을 엄마에게 데려다 주기 위해 열차를 탔는데 폭탄 테러범이 탑승했다는 걸 눈치챈다. 그의 순발력과 기지로 승객들은 무사히 구조되고 능력을 인정받아 정부 고위급 인사(내무부 장관 몬터규)의 보디가드가 된다. 그런데 알고 보니 몬터규(사진 우측)는 극우 보수로 군의 파병을 누구보다 앞장서 추진했던 사람이었다. 데이비드는 다름아닌 자신을 사지로 내몬 장관을 호위하게 된 것. 함께 파병 가서 동고동락했던 전우와 만난 자리에서 그는 이 황당한사실을 이야기하고. 역시 전쟁 후유증으로 얼굴까지 망가진 그 친구는 분노하는데. 그럼에도 계속되는 테러 위협으로 불안하던 상황에 몬터규와 데이비드는 급격히 가까워지게 된다. 더구나 남녀사이라 수많은 변수가 묘한 분위기로 급반전 되기도 함. 상황은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로멘틱하면서스릴넘치게 흘러가게 된다.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다 보면 초반에는 재미있다가도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때가 더러 있는데 이 드라마는 시종일관 탄탄한 구성과 긴장감을 동력으로 끝까지 완성도가 높았다. 데이비드는 아내와도 멀어지고 한번씩 트라우마로 괴로워했었다. 그런 그가 위협적인 상황에 놓이자 오히려 힘을 얻는 것 처럼 보였다.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행복추구' 같은 뜬구름 잡는 목표만이 아니다. 때로 외부의 적이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한다. 







분위기를 깬다는 것은 삶을 열어젖히는 것이고, 삶을 위한 공간, 가능성과 기회의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ㅡ행복의 약속. 사라 아메드



지금 민주주의가 바보들에 의해 후퇴하고 있다. 당연한 권리들이 도둑맞고 있다. 도둑들이 똑똑했다면 덜 억울했을까? (똑똑했다면 애초에 그들이 이런 짓을 할 리가 없겠지) ㅡ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이란 인간은 욱일기를 욱일기라 말하지 못하고 기레기들은 욱일기를 '햇살무늬 자위함기'라고 하질 않나. 이른 새벽에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국가 경보 문자와 사이렌이 울려 불안하게 만들고 대통령 말을 들리는 대로 기사화 했던 정직한 기자가 이상한 이유를 핑계로 압수수색을 당하고. 황당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ㅡ바보들이 사회를 혼돈 속에 빠트리면서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그 어느 때보다 집중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시은이가 주변에 있던 물건들로 일진 패거리들을 혼쭐낸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하지 않을까? 바보들이 똑똑한 사람들이 두려워 도서관 지원금을 대폭 삭감한다면 더 가열차게 읽고 쓰고 공부하는 것도 방법이다. 적어도 그들이 싫어하는 걸 하는 거지.흐흐  여러분 이럴 때일수록 더 열심히 읽고 씁시다. 저도 그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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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3-06-03 09: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꾹꾹 눌러 포장한 선물세트, 미미님 페이퍼!
슬금슬금 중앙까지 침범하는 도둑에 비유하시다니, 뜨끔뜨끔.

저도 지금 얼렁 알라딘 로그아웃 해야 공부를 할텐데요^^

청아 2023-06-03 09:32   좋아요 3 | URL
알라님 어쩜 그렇게 예쁜 표현을! ㅎㅎ
저 이 책 영향인지 스마트폰에 각종 앱을 지웠어요^^

독서괭 2023-06-03 10:0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이렇게 긴 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 반갑네요^^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한 한탄스런 마음이 절절히 느껴집니다..ㅠㅠ 이럴때일수록 더 열심히 읽고 쓰자! 저도 그럴게요! 힘내요 우리!

청아 2023-06-03 10:40   좋아요 4 | URL
질 보다는 양으로 채운 글인데 반가워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괭님^^
이 맘때 꽉 찼었던 도서관 신간 코너가 휑하더라고요.ㅠ.ㅠ 아웅...
이럴 때일수록 같이 더 파이팅 해요!!

잠자냥 2023-06-03 12: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다시 긴 글을 쓰게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청아 2023-06-03 13:02   좋아요 3 | URL
오래간만이라 더 힘들었는데 자냥님 말씀 감사해요!! ^^

새파랑 2023-06-03 14: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미미님의 필력은 대단하십니다~!!
요새는 드라마도 많이 보시나봐요.
북플에 미미님이 잘안보이셔서 썰렁합니다 ㅋ

6월에도 많이 읽고 쓰시길 바라겠습니다~!!

청아 2023-06-03 14:37   좋아요 3 | URL
진짜 필력 대단하신 분들이 돌 던지실 것 같은데요?ㅋㅋㅋ
얼마 전까지 많이 봤어요. 이제 다시 책에 집중하려고요,
새파랑님이 계셔서 알라딘이 늘 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

자목련 2023-06-03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미 님, 좋은 글 감사해요. 열심히 읽고 즐겁게 쓰는 미미 님을 응원할게요^^

청아 2023-06-03 16:31   좋아요 1 | URL
자목련님 응원 고맙습니다. 쉬어 보니 읽고 쓰기가 제게 보약이었음을 실감합니다 ^^

건수하 2023-06-03 16: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글 오랫만에 읽으니 반갑고 이제 자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기뻐요. 각자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아요 :)

도둑맞은 집중력 도서관에 있나 (있겠죠?) 찾아봐야겠어요.

청아 2023-06-03 16:33   좋아요 3 | URL
수하님 프사 사진 바뀐 거 넘 사랑스럽네요!ㅎㅎ
네. 읽고 쓰면서 스스로 치유하고 힘도 기르고 싶어요. 견디는 힘.

이 책 인기 있어서 있을 것 같네요 ^^

잠자냥 2023-06-03 17:59   좋아요 3 | URL
앗 진짜 바뀌었네요?! ㅋㅋㅋㅋ 요즘 을집 애들도 털 때문에 벌써 더운지 낮엔 다 저러고 잠만 쿨쿨 ㅋㅋㅋㅋ

그레이스 2023-06-04 14: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행 에스컬레이트 뛰어오르는 기분 !
비유가 넘 좋아요.
저 그 기분 뭔지 백퍼 알아요.

청아 2023-06-04 15:12   좋아요 1 | URL
네!ㅎㅎ 생각만 해도 조마조마한 ㅎㅎ

거리의화가 2023-06-05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이제 자주 뵐 수 있을 것 같아 기뻐요^^ 저도 출퇴근 길, 아니면 짬짬이 드라마 보고 원서 읽고 책 읽고 그러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집중력은 아무래도 SNS가 들어온 이후에는 쉽지 않은 것 같아요. 불굴의 의지력이 아니면...ㅎㅎ 미미님 글 보니 저는 뭔가 막혔던 기가 뚫리는 기분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읽고 쓰자구요^^

청아 2023-06-05 17:40   좋아요 1 | URL
화가님 말씀 고맙습니다^^ 화가님 원서 읽기 꾸준히 하시는 모습 귀감이 됩니다. 집중력 문제로 요즘 고민입니다 방법을 찾아 헤매는 중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