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여행'이라고 하면 풍경을 감상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익숙한 곳을 떠나 낯선 사람들과 낯선 공기 그리고 낯선 풍경 속에 앉아 있는것을 줄곤 상상하곤 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다양한 책을 찾아읽으면서 여행이라는 의미가 달라졌음을 느낀다. 이제는 읽었던 책속으로 떠나는 상상을 하곤 한다. 마치 '사색하기 좋은 도시에서'의 안정희저차 처럼.
라스콜리니코프처럼 걷다. (러시아 상트페테부르크) p215
러시아로 가는 비행기표와 함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벌'을 샀다. 달력을 넘겨 출발일에 동그라미를 치고 매일 조금씩 읽었다. '죄와벌'은 인간에게 죄악이란 무엇인지, 그로 인해 부과되는 형벌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소설은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인색한 고리대금업자를 살해하기 위해 전당포로 향하는 장면부터 시작된다.
찌는 듯이 무더운 7월 초의 어느 날 해질 무렵. s골목의 하숙집에서 살고 있던 한 청년이 자신의 작은 방에서 거리로 나와, 왠지 망설이는 듯한 모습으로 k다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 도스토옙스키, '죄와벌'. 홍대화 옮김.열린책들.2009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다. 날씨를 살피다가 소설 분위기와 꼭 어울릴 것 같은, 적당히 흐린 날을 골라 도스토옙스키를 만나러 갔다. 센나야 광장과 k다리를 지나 라스콜리니코프가 살고 있던 하숙집까지 걸었다. 그가 지내던 건물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떨구니 눈앞에 '죄와벌'을 기리는 벽감이 보였다. 도스토옙스키의 부조 아래 '라스콜리니코프의 집'이라는 문구가, 그아래 '페테르부르크에 살던 사람들의 비극적인 운명은 도스토옙스키의 손을 통해 전 인류를 위해서 선을 설파하는 토대가 되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타흐빈 묘지로 가 도스토옙스키의 무덤을 찾았다. 나뭇잎이 싱그럽게 반짝이는 무덤 앞에 그의 조각상이 서있었다. 굴곡진 얼굴에 움푹 팬 눈과 앙다문 입. 여전히 고뇌하는 듯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100여년 전 당신이 쓴 소설을 읽고 머나먼 나라에서 당신을 만나러 왔다고. 당신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 존재와 근원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어 고마웠다고.p216
10년간 40개국을 떠돌며 보고 듣고 느낀것을 기록한 짤막한 에세이집을 읽다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은 이렇듯 책을 읽고 그곳을 향해 떠다던 순간들이다. 작가가 살아 숨쉬었던 장소를 찾아 그의 생각과 고뇌의 숨결을 머금고 돌아오는 것. 얼마나 멋진 일이며 얼마나 설레이는 일인지. 내 눈으로 직접 그 광경을 바라볼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흥분되고 벅찬 감정을 지니게 되는 것인지. 직접 느끼고 싶은 소망을 품게된다. 함경임 저자가 좋아했던 소설의 배경을 찾아 유럽으로 떠났던 것처럼, '귀향'을 읽고 오로지 갈잔치낙을 만나기 위해 몽골로 훌쩍떠난 배수아 저자처럼, 유년기시절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헤르만 헤세를 찾아 떠난 정여울 저자처럼, 그리고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문학을 즐긴 안정희 저차처럼 한번쯤 이런 여행을 꿈꾸며 바라게된다. 내게도 이런 여행이 깃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