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자란 성인치고 영어 공부에 최소 십수 년 쏟지 않은 이 없으리. 영어 사교육이 망하지 않을 나라, 초등학생이 TOFEL과 GRE 영단어를 외우는 나라. 그런 대한민국에서 나 역시 시험을 위한 영어 공부에 올인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관점을 바꾸었다. '보다 더 예의 바른 영어 표현, 보다 더 커뮤니케이션 기능에 충실한 영어를 구사하기' 목표를 바꾸니 공부하는 영역도 달라져서 요새는 "사람in" 출판사의 "결정적" 시리즈를 자주 찾아본다. 그중에서도 연휴 기간에 [영어 표현의 결정적 뉘앙스]를 읽으며 'A-ha' 모멘트를 여러 번 경험했다. 예를 들어 대다수 한국인이 'fat'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하는 'skinny'가 실은 '피골이 상접한'의 뉘앙스를 띤 단어라는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휘 자체를 암기할 수는 있어도 그 이면의 문화적 상징성이나 복합적 뉘앙스까지 깨닫기는 참으로 어려운 길이라는 생각을 책 읽으며 여러 번 했다.


마침 이런 에피소드를 겪었다. 소위 "오징어 & 꼴뚜기" 껀이다.


<a href='https://pngtree.com/freepng/dried-seafood--cuttlefish--seafood_6732742.html'>png image from pngtree.com/</a>

설 명절 만난 꼬마 중, 너스레도 잘 떨고 쾌활한 녀석이 나와 친해지고 싶어서였는지 졸졸 따라다니며 이상한 소리를 한다. 다름 아닌

오징어! 오징어!

심지어 "말린 오징어" 실물을 들고 흔들며 내게 "오징어, 오징어!" 하며 따라다닌다. 꼬마가 그러는데도 '허허허!허허.......(야 이 꼬마야.....허허' 너그러운 반응이 나오지 않고 바로 부아가 치민다. 이것이야말로 속 좁은 밴댕이가 아닌가. 돌려 말한다.


꼬마야! 한국에서는 '오징어'가 사람 부를 땐 좋은 말이 아니란다..(허허허허허)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묘용 두상에서처럼 3D 입체 이목구비를 가지지 않았기에 더더욱 "오징어"는 욕이 된다....라는 말을 꼬마에게 직접 하지는 않았다.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이미 눈빛에서 차가운 레이저가 뿜어나가는 것을 감지한 꼬마는 이번에는 다른 단어를 골랐다.

https://www.needpix.com/photo/749093/

꼴뚜기! 꼴뚜기!


아니! 그 많고도 많은 단어 중에도, 그 많고 많은 어류 중에 왜 저 아이는 하필 나를 꼴뚜기라 부르는가. 기분 나쁘게. 저 녀석은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다 시킨다'라는 옛말을 들어봤을 턱이 없지


꼬마가 장난하는 걸 알면서도, 점점 빈정이 상하는 나는 [영어 표현의 결정적 뉘앙스]를 다시 떠올린다. 꼬마가 내게 포식자 이미지 "상어"나 귀여운 "돌고래"라고 놀렸으면 덜 신경질 났을 것 같다. 뉘앙스는 어느 언어에서나 중요하다. 사회생활이 필요한 어른뿐 아니라, 세뱃돈을 기대해야 하는 꼬마에게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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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4-02-11 16: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초등학생이 GRE단어를? 정말요? 세상에나. 어려서부터 영어에 학을 떼게 할 일 있나요.
그 꼬마 맹랑하네요. 친하고 싶어 그러는 것이라면 ‘으른‘된 사람으로서 우리가 이해를 해줘야겠네요. ^^

반유행열반인 2024-02-11 16: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걸 안 갚아주시고 그냥 두세요?ㅋㅋㅋ 저라면 오징어야! 하면 왜 해파리야? 왜 삼엽충아? 오징어랑 놀래? 하고 갚아주지요 ㅋㅋㅋ 부모가 듣고 있으면 더더욱 ㅋㅋ엄마 해파리한테 가 임마! 이러고 ㅋㅋ

transient-guest 2024-02-13 0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애가 아는 단어가 별로 없었나요?? 근데 그 애는 왜 다른 사람을 그런 표현으로 부르는 건지는 이해가 안 됩니다. 아는 단어가 그런 것들만 있었을 것 같지는 않아서 더더욱.
 

요즘 세상에 1500원이면 우유 200cc 사면 끝이다. 컵라면도 1500원 넘는다. 그런데 1500원짜리 커피를 파는 무인카페가 있다. 커피 맛, 좋다. 게다가 점주분께서 매장 관리를 어찌나 철저하게 하시는지 "무인카페"라 적고 "18시간 유인 카페" 수준이다. 점주님께서 매장에 거의 항상 나와 계신다. 이 카페 단골 지인들의 정보를 종합해서 과장한 말이다.

오늘 딱 24시까지만 책 보다 올 생각에 21시 40여 분에 도착했는데, 음료를 뽑아들고 보니 10분 후 마감이다. 허망함. 차라리 23시까지 운영하는 카페에 갈걸...

동시에, "무無인 카페의 18시간 유有인 카페 화"를 선도하신 점주님께서도 쉬실 시간이 필요하니 22시 마감, 나쁘지 않다고 마음을 고쳐먹는다.


음료만 챙겨들고 카페를 나오려는데 웬 남자의 전신 사진이 게시되어 있다. 출입문 쪽에도, 게시판 쪽에도, "05:46"라는 타임라인과 함께. 호기심이 동해 읽어보니 사진 속 남성은 무인카페에서 절도를 했고 점주님께서는 원만한 해결을 희망하셨다. 훔쳐 간 물건을 다시 되돌려 놓으면 법적 대응까지는 안 가겠다는 메시지를 남기셨다.

무인 카페에서 도대체 훔쳐 갈게 뭐가 있지?

놀랍게도 도난당한 물품은 "메모리폼 방석 2개"

검색해 보니 개당 약 1만 원대 제품인 듯하다. 이름 모를 숱한 시민의 엉덩이를 보듬어주었던 그 방석을 몰래 가져가서 쓰면 기분이 찜찜하지 않을까? 남이 신던 양말이나 속옷을 훔쳐 입지 않듯 방석도 절도 품목으로 안 어울리는데? 다 큰 어른이 새벽녘 몰래 무인카페에서 방석을 훔쳐 가는 그 마음은 뭘까?


갑자기 고등학교 때 생각이 난다. 한 반에 50여 명씩 꽉꽉 들어차 있던 그 시절 교실, 아침에 등교했더니 '수학의 정석' 2권 (기본 + 실력)이 온데 간데 없었다. "수1, 수2...기본 + 실력"을 쌓아놓으면 희대의 벽돌책으로 변신했던 [수학의 정석] 시리즈는 워낙 무거워서 다들 학교에 두고 다녔다. 내 책 뿐 아니라 반 친구들 책 전체가 싸그리 사라졌다. 옆 반, 그 옆 반 '수학의 정석'도 사라졌다. 어떤 도둑인지는 몰라도 아마 꽤 큰 자루(?? 트럭?)를 가져왔어야 백여 권의 책을 제대로 훔쳤을 것이다. 그런 걸 다 훔쳐 가나? 헌책방에 팔면 얼마나 받는다고 고3 수험생 책을 훔치나?

그러고 보니, 내가 봉사하는 도서관에서도 "분실"이라는 이름 하, 꾸준히 책이 사라진다. 아주 간혹이지만 막 나온 따끈따끈한 소설책 세트가 사라질 때도 있다. "책도둑은 도둑이 아녀.... 허허허..." 하며 넘어가는 분도 있지만, 나로서는 분개만 할 뿐 결코 용서가 안 된다.

별걸 다 훔쳐 가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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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4-02-13 0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둑은 도둑이죠...액수나 종류에 상관 없이...
 

재미 삼아 꼬마들에게 "나를 잘 관찰하면 알 수 있었을 틈새 비밀 5가지"를 퀴즈 형식으로 만들어 서로 맞추기 놀이를 제안했다. 놀랍게도 한 친구가 꽤나 세상물정에 밝은 눈을 드러냈다. 그 아이가 낸 퀴즈의 한 문항은 다음과 같다.



Q]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돈은?

A] 땀 흘려 번 돈


솔직히 "땀 흘려 돈 벌다"라는 말을 어렸을 때 관용적 표현으로 배웠지 현실 일상 대화에서 들어본 기억이 잘 안 난다. 그만큼 "땀 한 방울 안 흘리고도 폭격받는 돈 (횡재)"라는 상상이 표준이 된 세상인지라 "땀 흘려 번 돈"이라면 왠지 덜 친숙하다.

그 친구에게 물었다. "너한테 왜 땀 흘려 번 돈이 중요하니?" "어떻게 하면 땀 흘려 돈을 버는 거니?" 어린이는 동네에서 빈병 주워다 팔면 번 돈이 아까워 저절로 절약이 될 것같다는 꽤 어른스러운 답변을 내 놓았다.


신용카드는커녕 본인 계좌도 없어 보이는 어린 친구가 "땀 흘려 번 돈"의 소중함을 믿는 게 신선해서 이후 내내 그 문구가 귓속에 울렸다. 그러던 차 마침 독특한 책을 보았다.

[밥 춤]




일을 긍정하는 활기찬 이미지의 일러스트레이션이 가득한 그림책이었다. 공사장에서 무거운 모래를 나르는 일꾼도, 구두를 닦는 일꾼도, 밥상을 머리에 이고 배달하는 일꾼도 모두 일이 너무나 즐겁다는 듯 폴짝팔짝 발레 춤추듯 일하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땀 흘리는 일의 소중함을 평가절하하는 세상에서 그 응원의 메시지가 좋아서 한참 일러스트레이션을 구경했다. 동시에 짠하고 서글픈 마음도 올라왔으니 그렇다면 나는 정녕 "땀 흘리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셈인가? "땀 흘리는 일"의 가치는 10년 후, 20년 후 어린이들 사이에서 어떻게 이야기될까? "땀 흘리는 일"을 모티브로 미래에도 그림책이 나올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아무리 사회가 급변해도 중심추처럼 자리에서 크게 안 벗어나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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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4-01-01 0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얄라얄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얄라알라 2024-01-01 13:57   좋아요 1 | URL
서곡님, 2024년에도 좋은 글 꾸준히 올려주실테지요?^^

감사합니다. 덕분에 눈호강도 하고 배워갑니다.

서곡님 새해복 많이 받으시어요

루피닷 2024-01-01 0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얄라알라 2024-01-01 13:56   좋아요 2 | URL
루피닷님 프사 넘 멋있어요^^ 새해에 딱 어울리는 사진이네요.

감사합니다. 루피닷님께서도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cyrus 2024-01-01 1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하면서 번 돈의 소중함을 어른이 되기 전에 일찍 알면 좋아요 ㅎㅎㅎ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

얄라알라 2024-01-01 13:56   좋아요 0 | URL
오! cyrus님 전 정말 저 Q&A를 첨 듣고 놀라서 열흘이 다 되어가도록 계속 그 말이 불쑥불쑥 떠올라요.
제가 왜 그 말에 놀라는지 돌이켜보면
저는 이렇게 어른이 되도록 돈을 어떤 맘으로 대하고 어떻게 모아야할지( ㅋㅋ) 생각하지 않고 무대책 살아왔기 때문인가봐요.
cyrus님 말씀에 동감입니다.
어른이 되기 전에 일찍 아는게 필요했어요 ㅎ

새해복 많이 받으시고, cyrus님의 2024년, 풍성하고 따스한 깃털이 많아지는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래픽 노블 [샐리 존스의 전설]을 무척 좋아하고 여기저기 많이 추천해왔기에 덩달아 "산하" 출판사에 호감이 크다.



 "산하세계문학" 시리즈 중에서도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갔다]는 예전부터 읽고 싶었다. 어린 친구들에게 선물하려고 십여 권을 한 번에 주문하려다 구하기 어려워 포기했던 적도 있다.


12월 31일 연말 모임 장소로 이동하는 짬짬 비는 시간에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갔다]를 드디어 다 읽었다. 여성학자 정희진이


여성은 자신의 삶보다 가족 구조나 타인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요구(강요) 받습니다. 때문에 여성이 원하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한답니다. 가난한 여성이나 대도시 밖에서 사는 여성은 더욱 그렇지요.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간다]는 여성이 자신을 위한 삶을 포기하지 않고 쉼 없이 추구하는 과정을 잘 보여 줍니다.. 



이라며 추천한 그림책이다. 실존 인물을 모델 삼고 있다. 그리고 쓴 작가 사라 룬드베리는 "외롭고 힘든 길을 씩씩하게 걸어간 베타 한손을 생각하며"라며 첫문장을 시작했다.


Photograph of the Swedish artist Berta Hansson (1910-1994)


 

스웨덴 화가인 베타 한손은 어린이의 교육이 권리로 인식되기보다 어린이, 특히 가난한 농가의 소녀는 노동력으로 인식되던 시대에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폐결핵을 앓는 어머니 외에는 베타 한손의 예술가적 재능과 관심, 영민함을 높이 사주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학교 미술 시간에 복사기로 찍어낸 모범적 당근 색칠하기를 거부하고 "우리 집 당근들은 이렇게 생기지 않았어요. 제가 심은 당근을 그려도 되나요""라고 질문하는 베타 한손에게 담임 선생님은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선을 벗어나지 않게 색칠해라)"라고 근엄하게 지시한다. 우유를 짜고 상을 차리고 동생을 먹이고 집안 청소를 하느라 바쁜 베타 한손의 마음 한편에는 늘 다른 세계가 있었다.

알을 깨고 나오지 못해 답답한 베타 한손에게는 남들에게는 온통 아담과 하느님만 보이는 그림에서 하와가 눈에 들어온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등 뒤에 하와가 있다.

자기가 만들어질 차례를,

자기도 눈에 보이기를,

생명을 얻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도 가끔은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내 안의 새는 원하는 곳으로 날아갔다] 본문




중앙에 서지 못한 배경이지만 중심으로 나갈 열망을 충분히 키웠고 준비까지 하는 하와처럼, 어린 소녀는 내면의 뜨거움을 따라 집 밖으로 나갔다. 매우 도발적이나 조용한 방식의 저항을 통해서. 아빠와 마을 아저씨들이 일을 마치고 와서 드실 점심 식사를 일부러 새카맣게 태우는 동안 꿈쩍 않고 책만 읽으면서 무언의 시위를 했다. 지금부터 100년 전, 가난하고 작은 여자아이의 꿈이나 재능, 열망 따위에는 아무도 신경 써 주지 않을 시대에 그렇게 해서 알을 깨고 나온 베타 한손은 용감했다.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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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의 마지막 날 읽은 책.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이미 신간 베스트셀러라는 입소문을 들었고 "의사 엄마가 기록한 정신질환자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법"이라는 부제가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서울대 의대 출신 의사 엄마아빠를 둔 총명한 청소년(저자의 둘째 따님)이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고 응급실과 입원실을 들락이며 힘들게 병과 투쟁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 진행형의 7년 동안 아픈 당사자인 따님은 학교를 다니기 힘들었고, 자해로 인해 몸에 흉터를 남겼으며 심신이 지쳐갔다. 그 7년 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아픈 자식을 돌보는 부모 김현아 저자의 삶은 확 틀어졌다. 다행히 경제적 의료적 지원 면에서 풍족한 환경인지라 감내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은 포지션의 가정에서라면 16번의 입원과 치료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도 힘들었을 터이고 최선의 의료진과 의료정보를 바로 매칭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에세이 초반부 저자가 딸의 병세가 악화 혹은 완화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동시에 중간중간 관련 정신질환에 대한 의학 지식을 풀어내는 서사 방식을 오해할 뻔했다. '저자가 용기 내어 가족의 은밀한(?) 이야기를 열열긴 했지만 전문가다움을 드러내고 싶어하나? 그래서 의학 정보, 관련 예시(정신질환을 앓았던 천재와 유명인사들 예시)를 중간중간 곁들인 게 아닐까? 했다. 오해였다. 그것은 의사 엄마 김현아가 이 에세이를 통해 진정 사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위한 밑밥이었다. 이 책 마지막 장 "우리는 모두 정신질환자이다"를 어느 한 문장도 놓치기 아깝게 특히 좋았다. 의사 엄마로서 아픈 사람과 그 가족의 삶, 한국의 의료현실 특히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겪어가면서 느낀 점을 한국 사회의 변화를 기대하며 전하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이 짧은 리뷰에서 "아프다," "정신질환" 등의 표현을 썼지만, 저자는 "신경 다양성"이라는 단어와 인류학자 로이 리처드 그린커 Roy Richard Grinker를 동원하여 '정상성'이라는 환상을 꼬집는다.

로이 리처드 그린커 Roy Richard Grinker는 [정상은 없다]에서 '정상'이란 오랫동안 사회가 누구를 받아들이고 누구를 거부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쓴 개념이며 유해한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278쪽

김현아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신랄하게 비판한 김규항의 글을 인용하며 젊은이들이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만드는 데 관심이 없는(덜한) 기성세대에게 일침도 놓는다.

한 사람이 아프면 개인적 문제이겠지만 여러 사람이 아프면 사회문제이다. 내 아이의 문제와 겹쳐 보면서 우리가 지금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다시 성찰해야 했다...김규향 씨의 몇년 전 칼럼이 다시금 기억났다. "지난 몇해 동안 한국에서 발간된 책 가운데 가장 파렴치한 책을 꼽으라면 단연 [아프니까 청춘이다]일 것이다. '청년의 지옥'이라 불리는 사회에서 기성세대의 한 사람이 청년에게 할 첫번째 말은 '미안하다'여야 한다...그런데 아프니까 청춘이라니.

김현아는 '의사 엄마' 타이틀을 다른 각도에서 성찰한다. '아프니까 청춘'식 태도가 아니라 '당신의 아픔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의 태도로. 그 부분을 저자의 문장으로 옮겨본다.

6년간 아이와 함께 폭풍우치는 바다를 표류하면서 그래도 운이 좋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적, 인적 자원은 아이에게 나름대로는 최선의 치료 조건을 큰 어려움 없이 제공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인적 자원 측면에서 부뫄 모두 의과대학 교수라는 점은 다른 이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여러 혜택을 가능케 했는데, 의료진과 선후배 사이인지라 내가 답답할 때에 이메일을 보내 상시로 소통할 수 있었떤 것은 특별히 운이 좋았던 예에 속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천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같이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다.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며 책을 내게 된 계기도 '우리도 이렇게 힘든데......' 하는 생각과 우리만큼 운이 좋지는 않은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224쪽

정신건강의학 전문가가 본다면 한 없이 모자란 이야기를 용기내어 하게 된 이유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쪽으로 바꾸는 데 작은 목소리를 보태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작은 변화 중 하나가 '언어'를 바꾸는 것이다. 정신질환 환자에게 하는 '미쳤다'는 말을 '아프다'로 바꿔보도록 노력한다면 환자에 대한 낙인이 어느 정도 옅어질 수 있다.

290

작은 변화를 꿈꾸며 어려운 이야기를 해준 김현아 저자에게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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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12-31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프니까 청춘이다 이거 진짜 많은 사람들이 싫어했죠..ㅎㅎ
이 책 좋다는 이야기 들었는데, 읽기 좀 괴로울 것 같아서 손이 안 갑니다 ㅜㅜ

얄라알라 2024-01-03 09:34   좋아요 1 | URL
네네 독서괭님,

그래서 김난도 교수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다른 책 혹은 인터뷰에서 보았던 기억이 가물거려요.

김규항이라는 분이 비판하신 건데 급속도로 퍼졌나봐요^^

잉크냄새 2023-12-31 1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느 개그맨이 그러더군요. 아프니까 환자다.

얄라알라 2024-01-03 09:35   좋아요 0 | URL
^^ 그렇네요.

김난도 교수로서는 억울하기도 하겠지만,
김규항님과 비슷한 톤의 비판하시는 분이 많않잖아요.
저도 일정 공감합니다^^

잉크냄새님 좋은 1월 3일 시작하시어요

페크pek0501 2023-12-31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도 건필하십시오.^^

얄라알라 2024-01-03 09:36   좋아요 0 | URL
우아 ˝건필˝...
전 이 단어를 써 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더 멋지게 들려요

감사합니다 페크님! 새해에도 발레 열심히 하시고 건필, 건강하시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