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의 마지막 날 읽은 책.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이미 신간 베스트셀러라는 입소문을 들었고 "의사 엄마가 기록한 정신질환자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법"이라는 부제가 흥미를 끌기 충분했다. 서울대 의대 출신 의사 엄마아빠를 둔 총명한 청소년(저자의 둘째 따님)이 양극성 장애 진단을 받고 응급실과 입원실을 들락이며 힘들게 병과 투쟁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 진행형의 7년 동안 아픈 당사자인 따님은 학교를 다니기 힘들었고, 자해로 인해 몸에 흉터를 남겼으며 심신이 지쳐갔다. 그 7년 동안, 그리고 앞으로도 아픈 자식을 돌보는 부모 김현아 저자의 삶은 확 틀어졌다. 다행히 경제적 의료적 지원 면에서 풍족한 환경인지라 감내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은 포지션의 가정에서라면 16번의 입원과 치료에 드는 비용을 감당하기도 힘들었을 터이고 최선의 의료진과 의료정보를 바로 매칭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나는 에세이 초반부 저자가 딸의 병세가 악화 혹은 완화되는 과정을 묘사하는 동시에 중간중간 관련 정신질환에 대한 의학 지식을 풀어내는 서사 방식을 오해할 뻔했다. '저자가 용기 내어 가족의 은밀한(?) 이야기를 열열긴 했지만 전문가다움을 드러내고 싶어하나? 그래서 의학 정보, 관련 예시(정신질환을 앓았던 천재와 유명인사들 예시)를 중간중간 곁들인 게 아닐까? 했다. 오해였다. 그것은 의사 엄마 김현아가 이 에세이를 통해 진정 사회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위한 밑밥이었다. 이 책 마지막 장 "우리는 모두 정신질환자이다"를 어느 한 문장도 놓치기 아깝게 특히 좋았다. 의사 엄마로서 아픈 사람과 그 가족의 삶, 한국의 의료현실 특히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겪어가면서 느낀 점을 한국 사회의 변화를 기대하며 전하기 때문이었다.
나 역시 이 짧은 리뷰에서 "아프다," "정신질환" 등의 표현을 썼지만, 저자는 "신경 다양성"이라는 단어와 인류학자 로이 리처드 그린커 Roy Richard Grinker를 동원하여 '정상성'이라는 환상을 꼬집는다.
로이 리처드 그린커 Roy Richard Grinker는 [정상은 없다]에서 '정상'이란 오랫동안 사회가 누구를 받아들이고 누구를 거부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쓴 개념이며 유해한 허구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김현아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를 신랄하게 비판한 김규항의 글을 인용하며 젊은이들이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세상 만드는 데 관심이 없는(덜한) 기성세대에게 일침도 놓는다.
한 사람이 아프면 개인적 문제이겠지만 여러 사람이 아프면 사회문제이다. 내 아이의 문제와 겹쳐 보면서 우리가 지금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다시 성찰해야 했다...김규향 씨의 몇년 전 칼럼이 다시금 기억났다. "지난 몇해 동안 한국에서 발간된 책 가운데 가장 파렴치한 책을 꼽으라면 단연 [아프니까 청춘이다]일 것이다. '청년의 지옥'이라 불리는 사회에서 기성세대의 한 사람이 청년에게 할 첫번째 말은 '미안하다'여야 한다...그런데 아프니까 청춘이라니.
김현아는 '의사 엄마' 타이틀을 다른 각도에서 성찰한다. '아프니까 청춘'식 태도가 아니라 '당신의 아픔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의 태도로. 그 부분을 저자의 문장으로 옮겨본다.
6년간 아이와 함께 폭풍우치는 바다를 표류하면서 그래도 운이 좋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적, 인적 자원은 아이에게 나름대로는 최선의 치료 조건을 큰 어려움 없이 제공할 수 있게 했다. 특히 인적 자원 측면에서 부뫄 모두 의과대학 교수라는 점은 다른 이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여러 혜택을 가능케 했는데, 의료진과 선후배 사이인지라 내가 답답할 때에 이메일을 보내 상시로 소통할 수 있었떤 것은 특별히 운이 좋았던 예에 속할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도 천길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것같이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다. 쉽게 드러내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며 책을 내게 된 계기도 '우리도 이렇게 힘든데......' 하는 생각과 우리만큼 운이 좋지는 않은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건강의학 전문가가 본다면 한 없이 모자란 이야기를 용기내어 하게 된 이유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쪽으로 바꾸는 데 작은 목소리를 보태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작은 변화 중 하나가 '언어'를 바꾸는 것이다. 정신질환 환자에게 하는 '미쳤다'는 말을 '아프다'로 바꿔보도록 노력한다면 환자에 대한 낙인이 어느 정도 옅어질 수 있다.
작은 변화를 꿈꾸며 어려운 이야기를 해준 김현아 저자에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