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부터 나는 마치 그 그림에다 도박을 건 여자처럼 마음을 졸이기 시작했다. 날마다 늘어가는 들개들을 볼 때마다 이상한 기대감 같은 것이 고조되어 갔다. 그것은 이 황량한 겨울을 지탱하는 데 하나의 의지대가 되어주고 있는 것 같았다. 결코 그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림 자체가 가지는 신비성 때문이었다. 날마다 조금씩 늘어가는 들개들의 수를 헤아리거나, 그 들개들의 표정이나 자태를 보는 것은 마치 내 글이 잘 나가는 것처럼 즐거운 일이었다. - P154
"이론이란 언제나 창작에 누더기를 입히는 것에 불과하지나는 세상의 모든 예술가들이 이론에다 꿰어 맞추는 작품들을 결코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그리고 창작은 언제나 알몸 그대로의 아름다움으로 값진 거야.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벌거벗고 있다고 해서 누가 쌍방울표 메리야스 팬티라도 입혀주었다고 가정해 보라구. 웃기는 일이지. - P165
그러나 나는 생각보다는 징그럽게 생각되지 않았다. 이런 경우 이가 생겼다는 것이 뭐가 그리 대수로운가, 나는 쥐고기를먹으면서 가까스로 생명을 연장해 나가고 있다. 하지만 나의정신은 이제 투명하다. 나는 쓸 수 있을 것 같다. 이 어려운 상황에서 벗어나면 누구보다도 감동적인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세상이 점차로 작아져 보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 P174
반드시 저 그림을 완성시켜야 한다.……………. 나는 그 눈발들을 바라보면서 몇 번이나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그 그림은 바로 내 정신적 지주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그림을 사랑하고 있었다. 만약 그의 그림이 없었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쉬운 여자로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 P176
나는 그에게 전혀 사랑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이 차라리 안
타까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림만 머릿속에 떠오르면 가슴이설레고 세포들이 살아 올랐다. 우리는 그림 속에서만 어떤 관계가 성립되는 인연을 맺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물감이 떨어져 그림을 못 그리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니 자꾸만 불안하고 초조해져 왔다. 이제 나는 먹이보다도시급한 것이 물감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 P179
"이제 저 흉악한 바깥세상하고는 상종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학자는 학자답지 않고, 성직자도 성직자답지 않으며, 심지어는 거지조차도 거지답지 않습니다. 인간미라곤 한 푼어치도없고 자기 합리화에만 급급합니다. 이론으로는 모두들 휘황찬란한데 뚜껑만 열면 악취가 풍깁니다. 한마디로 위선과 가면뿐입니다. 절대로 타협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들 속에서 예술을 사랑할 수 있는 가슴 어느 한 기관을 제거당해 버렸습니다. 이제 가까스로 그것을 재생해 놓고는 다시 또 치사해지고싶지는 않습니다. - P180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계기가 와줄 때까지 나는 버티는 데까지 버티어볼 심산이었다. 그때까지 내 정신적인 지주는 그림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을 완성시키는 것을 보지 못하면 나도 영영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 기름과 물감을 구해야만 할 것 같았다 - P191
그의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이 터져나옴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가 행복해 보였다. 적어도 그림을 그리는 순간만은 일체의 고통과 잡념이 사라지고 그의 내부에는 투명한 영혼의 노래만이 괴어 흐르고 있는것같이 보였다. 그러나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언제쯤 다시 글을 쓸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져 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 P199
봄이 보면....... 봄이 오면 정말로 나는 본격적으로 한번 글을 시작해 보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층에서는 어떻게 생활하고있을까, 만약 그림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문득문득 불안해지기도 했었다.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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