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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하루 ㅣ 일본문학 컬렉션 4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외 지음, 안영신 외 옮김 / 작가와비평 / 2023년 3월
평점 :
이 책은 일본문학 대표작가라고 할 수 있는 나쓰메 소세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 여러 작가들의 수필 모음이다. 그중 하기와라 사쿠타로 등 몇몇 작가는 처음 접하는 작가인데 수록된 글이 많고 공감이 가는 내용이 많아서 시선을 끌기도 했다. 여기에 실린 수필들은 몇 가지 주제로 나뉘어 있는데 작가의 문학관이나 소소한 일상의 행복, 옛 추억, 인생을 살면서 늙어감과 죽음에 대한 철학,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작가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핑크톤의 표지 디자인과 ‘눈부신 하루’라는 제목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4월이라는 계절만큼 ‘눈부신’ 계절이 또 있을까. 겨우내 굳게 다물고 있던 나뭇가지의 눈은 앞다투어 연두색 새싹을 경쟁이라도 하듯이 밀어내고 있다. 작가들이 말하고 있는 그들의 일상은 언뜻 보면 ‘눈부신 하루’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창작의 고통을 에누리 없이 털어놓고 병상에서 깨달은 소소한 행복, 죽음에 대한 철학 등 작가들의 하소연을 듣다 보면 숙연해지면서도 나도 모르게 미소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창작의 고통이란 작가로서 누려야 할 특권이며 작은 행복이 아닐까. 다자이 오사무는 ‘의무를 수행하기’위해서 글을 쓴다고 말한다. 천재 작가가 한다는 말이 다섯 장 정도의 수필을 쓰는 것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푸념한다. 나흘 동안 다섯 장 정도는 어떻게든 쓸 수 있고 써야 하고 그 의무감 때문에 살아있다고 말하는 부분에서는 그의 귀여운 타박(?)에 웃음마저 흘렀다. 천재 작가가 그럴진대 보통의 작가들은 어찌하라고.
나의 최애 작가 나쓰메 소세키는 원래 뭔가를 꼭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고 거의 주변 지인에 의해 글도 쓰고 교사가 되고 유학을 떠나고 신문사에 들어가고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권유에 의해 이루어졌다면서 결국 ‘나’라는 자신은 주위 사람들이 만들어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듣고 보면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이것도 겸손이다. 여러 방면에 재능이 있었고 책임감과 소명 의식이 있었기에 많은 역할을 수행하고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작품을 길이 남겼던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 작가들은 홀로 고독과 싸우며 많은 시간을 견뎌냈을 것이다. 오랜 병상 생활도 작가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하기와라 사쿠타로는 마사오카 시키의 무미건조하고 지루한 시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는데 병상 생활을 하면서 깨달았다고 한다. 지금 우리 현대인도 그렇지만 100년 전에도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없었나 보다. 그런데 병에 걸리고 나서 그러한 삶의 초조함이 완전히 사라지고 욕심없는 마음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모든 의무감과 초조감으로부터 해방되고 하루 종일 하는 일 없이 빈둥대고 염치없이 누워 있어도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작가의 말이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아 힘이 솟았다. 4월이 되자마자 내가 호되게 앓았기 때문이었다. 내 몸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고 보니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꿈과 목표가 무엇이란 말인가.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 같은 것처럼 생각되었다.
‘평범함을 평범한 필치로 쓴다’
‘지루함을 지루함의 느낌으로 쓴다’(p46)
이것은 시키를 비롯한 자연파 문학의 주장인데,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눈에는 도대체 무슨 흥미를 위해 이런 문학이 만들어졌는지 수수께끼였다고 한다. 동병상련이라고 병이 들어 아파보니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그 삶에서 건져 올린 시가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단다. 큰 감동을 주는 것, 시적 정열이 불타는 것보다는 다실에서 들려오는 쇠 주전자의 물 끓는 소리를 즐기게 되고 평범한 것에서 시적 풍취를 느끼게 되었다는 작가의 말에 깊이 공감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이치란 참 신기한 것 같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느냐에 따라 주변의 사물이 다르게 보이고 어떤 것을 이해하는 계기도 되니 말이다.
에도가와 란포는 추리소설의 대가답게 <동생의 일기장>에 얽힌 사연을 풀어놓았다. 혹시나 사랑도 못 해보고 스무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난 건 아닌가 싶어 동생을 그리워하며 그가 남긴 일기장을 읽게 된다. 동생이 먼 친척 유키에와 주고받은 편지를 마치 암호를 풀 듯 분석해서 결국 알아냈는데, 아뿔사! 자신이 너무나 이기적이었음을 통탄하며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친다.
시마자키 도손의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은 인생을 살면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어둡고, 불편하고 두려운 일들을 의인화 기법으로 쓴 글이다. 손님은 ‘겨울’, ‘가난’, ‘늙음’, ‘죽음’이다. 초대하고 싶지 않고 초대하지 않아도 어김없이 우리 앞에 나타나는 불청객들이다. 하지만 작가는 슬기롭게 나이를 먹고, ‘죽음’에서도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거라며 더 이상 의기소침하지 않는다.
<한신 견문록>은 여기 실린 다른 수필과는 결이 다른 이야기다. 다니자키 준이치로가 오사카와 고베를 여행한 소회를 밝히는 이야기인데 100년 전의 당시 문화 수준을 엿보게 한다. 오사카에서 전차를 탔는데 아이에게 소변은 물론 똥까지 싸게 했다는 엄마 이야기가 나온다. 신문을 들고 있으면 아무렇지 않게 빌려가고 돌려주지도 않는 등 예의없는 오사카 사람들을 신랄하게 흉을 본다. 도쿄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얘기라면서. 작가들의 기록이 있었기에 알 수 있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지 않은가.
위대한 작가들도 모두 나름대로 고민거리가 있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이 힘겹고 어떻게든 견디며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일도 직업이 되면 괴롭다고 한다. 의무감이나 사명감이든 생활을 위해서건 어떻게든 삶을 꾸려나가게 되는 것 같다.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가 ‘눈부신 하루’는 아닐지라도 누군가에게는 간절히 원하는 ‘눈부신 하루’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들의 일상을 엿보는 기쁨도 기쁨이지만 묘하게 위로가 되는 건 왜일까. 특별한 존재일 것 같은 작가들의 삶도 한 발 더 들여다보면 자연인인 그들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