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북새통에서 케플러는 재정 지원처를 거의 모두 상실했다.
그의 말년은 돈을 빌고 후원자를 구하러 다니는 동동걸음으로 채워졌다. 전에 루돌프 2세에게 했던 것처럼, 그는 바렌슈타인 대공을 위해별점을 쳐 주었고, 바렌슈타인 대공이 지배하는 슐레지엔 Schlesien 지방의 한 마을인 사간 Sayan 에서 생의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케플러가 스스로 지은 비문을 읽어 보자. "어제는 하늘을 재더니, 오늘 나는 어둠을재고 있다. 나는 뜻을 하늘로 뻗쳤지만, 육신은 땅에 남는구나." 그러나 30년 전쟁으로 그의 묘마저 사라졌다. 오늘날 케플러의 묘비가 다시 세워진다면 그의 과학적 용기를 기리는 뜻에서 이런 문장을 새겨넣으면 어떨까. "그는 마음에 드는 환상보다 냉혹한 현실의 진리를 선택한 사람이었다." - P152

요하네스 케플러가 자신의 일생을 바쳐 추구한 목표는, 행성의 움ElIsaac직임을 이해하고 천상 세계의 조화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는그가 죽고 36년이 지난 후에 결국 결실을 맺게 된다. 그것은 아이작 뉴Isac Newton의 연구를 통해서였다. 뉴턴은 체중 미달의 미숙아로 1642년크리스마스에 태어났다. 훗날 그의 모친이 뉴턴에게 들려준 이야기에따르면 출생 당시의 뉴턴은 쿼트(약 1리터)들이 컵에 넣어도 될 정도로 작았다고 한다. 일생 동안 병약했고 스스로를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자식이라 생각했고 걸핏하면 남과 다투었으며 성격이 비사교적인 데다가죽는 날까지 독신으로 살았던 아이작 뉴턴이지만, 그는 아마도 인류 역사상 제일가는 과학의 천재였을 것이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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