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된장은 할머니의 소중한 유품이다. 제발요. 부디 겨된장만이라도 남아 있기를…………. 기도하듯이 문을 열자, 어둠속에서 낯익은 항아리가다소곳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뚜껑을 열고 안을 확인했다. 분명히 오늘 아침, 내가손으로 다독거려 놓은 모양 그대로 있다. 쌀겨 표면에는연녹색을 띤 무잎도 보인다. 껍질을 벗기고 잎을 조금남긴 뒤, 꽁무니에 열십자로 칼집을 넣어 담가 둔 순무는 달콤하고 싱싱하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나는 양손으로 항아리를 들고 가슴에 꼭 껴안았다. 항아리는 서늘했다. 이제 내게는 이겨된장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 - P15
도시의 불빛이 차창 너머로 흘러간다. 안녕. 나는 마음속으로 손을 흔들었다. 눈을 감자,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이 늦가을 찬바람에날리는 시든 나뭇잎처럼 의식 속을 떠돌아다녔다. 산골짜기의 조용한 마을에 있는 우리집은 풍요로운자연 속에 있어서, 나는 그곳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중학교 졸업식을 한 그날 밤, 나는 혼자 집을 나왔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심야 고속버스를 타고. - P17
언제부터일까? 나는 요리사가 되기를 꿈꾸었다. 요리는 내 인생에서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떠 있는 덧없는 무지개 같은 것이었다. PR대도시에서 고군분투한 끝에 겨우 남들처럼 얘기하 - P19
고 웃을 수 있게 됐을 즈음, 할머니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밤늦게 튀르키예 음식점에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밥상 위에 종이 냅킨으로 덮어 둔 도넛이 잔뜩 쌓여있고 그 옆에서 할머니가 잠을 자듯 죽어 있었다. ㄱㅁ & 기타 기 - P20
나는 어떤 사실을 깨달았다. 어젯밤 창구에서 심야 고속버스 표를 살 때, 아니 주인에게 열쇠를 돌려주러 갔을 때, 아니 실은, 텅 빈 집의문을 연 순간부터. 내 목소리가 투명해졌다는 것을. 간단히 말하면 정신적 충격에서 오는 일종의 히스테리 증상일지도 모른다.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목소리만 내 몸의 조직에서 쏙 빠져나간 것이다. 라디오 음량을 ‘0‘으로 둔 것처럼. 음악과 소리는 나오는데밖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 P25
나는 목소리를 잃었다. 조금 놀랐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아프지도가렵지도힘들지도 않다. 그저 그만큼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이제 아무하고도 말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게만 들리는 마음의 소리에 귀를기울이려고한다. 그렇게 해야만한다, 꼭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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