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마지막 시집 『어제오시기를』, 『무로 사이세이 작품집』 열두 권, 자필 하이쿠집 『원야집』이 출간됐다. 거의 문학가의 삶에 매듭을 지은 것이나 다름없다.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어린 문학 애송이도 여기까지 성장하고 보니 인간은 어쨌든 살아야 한다는 것, 뭐든지 마음껏 배워두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글러먹은 인간을 못쓰겠다고 내동댕이치더라도 그가 혼자서 걸어가는 길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어찌 됐든 간에 그 녀석도 어딘가에 다다른다.
좋든 나쁘든 목적지는 당사자에게 맡겨야 한다. - P91

나는 글 쓰는 게 좋은 걸까.

뭔가 쓰려고 마음먹는 순간, 예전 체력이 슬슬 돌아옴을 느낀다. 이제 써볼까 할 때는 약을 먹거나 주사를 맞을 때보다 확실히 병이 뒤로 저만치 물러나는 것 같다. 조금씩 건강해지는기분이다. 음식을 먹으면 맛이 바로 느껴지는 원리와 같다. 병이란 만만치 않은 상대다. 인간은 병과 싸우는 동안 그 어느 피폐한 시기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빼앗긴다.
이렇게 간단하게나마 작품과 이력을 나열한 나의 문학사를써봤다. 내게 제4차 문학사는 더는 있을 수 없다. 만약 있다면그다지 길지 않은 차분한 작품을 뚜벅뚜벅 쓰지 않을까. 그런작은 작품조차 더욱 연마하려는 자신을 발견하는 날을 오늘의즐거움으로 삼아야겠다. 야심 없고 또 소망 없는 나야말로 미래의 나이리라. - P92

내가 가난한 가장 큰 이유는 글 쓰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원고를 재촉하는 편집자들에게 늘 호소하는데,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진심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함께 사는 가족뿐이다. 편집자들은 적당히 흘려듣는 것 같아 억울하기 짝이 없다. 사실 일을 철저히 하지 않으면 직성이 안 풀린다거나 아주 고심해서 문장을 다듬는다거나 하는 점을 간판으로내세우는 게 싫어서 나도 주저리주저리 설명하지 않는다. - P117

가끔 어떤 대목이 잘 풀리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섰다가 앉았다가 마셨다가 피웠다가를 점점 더 자주 되풀이한다. 담배를한 대 피우고 나서 5분이나 10분 가만히 원고를 노려보고, 그래도 안 되면 이번에는 차를 마시고 또 노려본다. 그래도 안 풀리면 소변보러 나갔다가 내친김에 정원까지 걸어 다닌 뒤 돌아와 또다시 원고에 매달린다.  - P117

내가 굼뜨지 않다면, 지금 온 힘을 다해 쓰는 하루치 원고를오전 중에 다 쓴다면 오후 반나절은 유유자적하며 지낼 수 있을 테고 따로 ‘노는 시간‘을 만들 필요가 없으리라. 사실 많은작가가 날마다 잽싸게 일정한 양을 일한 후 산책을 하고 독서를 하고 친구를 만나고 잡무를 처리한다. 사람에 따라서는 한달 걸릴 일을 일주일 또는 열흘 사이에 다부지게 해치운 뒤 남은 기간 느긋하게 생활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 P119

지금 나는 육지의 인어』라는 신문소설을 쓰고 있다. 대체로작가의 일 가운데 신문소설만큼 뼈가 휘도록 힘겨운 일은 없다. 작가 지옥 중 신문소설 지옥이야말로 가장 괴롭다. 『진주부인』을 쓸 때는 기력이 왕성했던 덕분인지 이토록 고달프지 않았건만, 이번에는 문득 푸념을 늘어놓고 싶을 정도다. - P121

나는 아침에만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신문소설은 한 회당 원고지 네 매면 충분하니 금세 쓸 듯해도 펜을 들기 전에 이미 두세 시간 허비한다. 다 쓰고 나면 일이 고된 만큼 두세 시간 넋이 나간다. 결국 하루에 활동하는 시간을 전부 신문소설에 뺏겨버리니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특히 펜이 막다른 벽에 부딪혔을 때의 괴로움이란, 뼈를 깎아내는 것처럼 견디기 힘들다. - P121

도무지 시간이 없어 독서를 못 하니 곤란하다. 신문소설을쓰는 동안은 바빠서 당연히 책을 읽지 못하고, 겨우 다 쓰고 나면 이번에는 그때까지 손대지 않고 내버려 둔 서양 잡지 서너종과 일본 잡지 그리고 외국에서 주문해 받은 책이 쌓여 있다.
그것도 읽어 보고 싶은데, 고새 젊은 친구들이 자신이 쓴 작품을 들고 와서 읽어봐달라, 비평해달라 조른다. 또 편지가 오면답장을 쓰거나 손님이 오면 응대를 하느라 바쁘기 그지없다.
남들은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니까 필시 한가하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웬걸, 그렇지도 않다. 학교에 나갈 때가 지금보다 손님이 적고 훨씬 여유로웠다. 여하튼 이런 식이면 어쩔수 없기에 사이사이 틈을 봐서 독서하려고 애쓰건만 별로 읽지못해서 난감하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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