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 수행이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해야 한다. 왜 사는가. 어째서 글을 쓰는가. 그것은 의무를 수행하기 위함입니다. 라고 지금의 나는 대답할 수밖에 없다. 돈을 위해 쓰는 것은 아니다. 쾌락을 위해 사는 것도 아니다. 요전 날에 들길을혼자 걷다가 문득 생각했다. "사랑이란 결국 의무를 수행하는일이 아닐까." - P75

현재 나는 의무를 위해 살고 있다. 의무가 내 생명을 지탱해주고 있다. 한 개인의 본능으로는 죽어도 좋다. 죽든 살든, 병들든 그다지 차이는 없다. 하지만 의무는 나를 죽지 않게 한다.
의무는 내게 노력을 명한다. 쉼 없이 더, 더 노력하라고 명한다.
나는 비틀비틀 일어나서 싸운다. 지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단순하다. - P76

"또 못썼어요?"
아내가 묻는다.
"안 돼, 안 돼."
"속 썩이네요."
"오늘 밤, 할 거야. 오늘 밤이야말로…………29이렇게 말하고는 양지바른 툇마루를 걷거나 정원의 나무 사이를 거닌다. 팔짱을 끼고 끊임없이 흥이 샘솟기를 기다리면서.
T 잡지의 편집자가 오는 것이 무섭다. 틀림없이 찾아온다.
그리고 기어코 원고를 손에 넣지 않는 한 가만두지 않겠다는기색을 한껏 내보일 텐데…………. 당신은 빨리 쓰니까요, 이런 말에도 여러가지 복잡한 기분이 교차한다. 쓴다, 하찮은 글을 쓴다. 그것이 세상에 나온다. 비평된다. 이 생각만 하면 몸도 마음도 구석의 구석의 구석으로 내몰리는 기분이다. - P77

다시 책상 앞에 앉아본다. 역시나 안 써진다. 끝내는 펜과 종이를 보는 일조차 고통스럽다. 펜과 종이와 내 마음 사이에 악마가 사는 듯하다. 아내는 걱정이 되는지 슬며시 엿보러 온다.
내가 알면 화를 낼 테니까 들키지 않도록 몰래. 그리고 펜을 쥐고 앉은 모습을 보고 안심하며 자리를 뜬다. - P81

그런데 갑자기 한밤중에 흥이 솟는다. 나는 홀로 일어나 펜을 잡는다. 펜이 손과 마음과 함께 달린다. 그 기쁨! 그 강함!
또 그 즐거움! 순식간에 두장, 세 장, 네 장, 다섯 장을 써 내려간다. 아까 괴로운 직업이라고 말한 푸념은 어느새 잊어버린다.
옛날 문하생 시절로 마음이 되돌아가 있다. 어두운 램프 아래서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채 글쓰기에 몰두하던………. 문단도 없고 T 군도 없고 세간도 없다. 그저 펜과 종이와 내 마음이 함께움직일 뿐이다. -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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