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페스트 (양장) - 1947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알베르 카뮈 지음, 변광배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고교 시절에 이 작품을 읽었으니 꽤 오래 되었다. 섬뜩하고 두려운 이야기지만 우리와는 관계없는 먼 나라의 이야기였을 것이다. 오랜 시간 지난 지금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치루는 중에 다시 읽은 이 작품은 다르게 다가왔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안전문자, 사회적 거리두기 등을 실천하며 답답한 일상을 보내고 있던 터라 더 실감나고 깊은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알제리 해변에 있는 오랑 시는 비둘기, 나무, 정원이 없는 삭막하고 보기 흉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아름다운 지구촌 곳곳이 코로나 바이러스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점에서 대비를 이룬다. 바이러스는 국경도 인종도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떠올랐다.


  4월 어느 날 진료실 계단에서 죽은 쥐 한 마리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쥐가 있을 만한 장소가 아니어서 장난꾸러기들의 소행이려니 가볍게 여겼는데 어느새 온 동네 사람들이 쥐 이야기를 하게 된다. 며칠 사이에 지하실에서 다락까지, 계단마다 이웃집 쓰레기통에도 온통 쥐들로 가득하자 시민들은 공포심에 사로잡힌다. 시청 구서과(驅鼠科)에 전화했지만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명령을 받아야 조치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듣는다. 그러던 중 기이한 병으로 수위 미셸이 죽음으로써 공포심은 커지고 심상치 않은 사태를 자각하기 시작하는데. 이야기를 읽으면서 난해하게 느꼈던 점은 서술자를 설정한 점이었다. 모호한 인물을 서술자로 내세워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몰입할 수 있는 주제의 이야기임에도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야 했다. 처음엔 보건 위생대를 조직하고 리외를 돕는 장 타루인가 했다. 이건 나중에 밝혀지는데 의사 리외였다. 즉 페스트의 최전선에서 일하면서 그의 시선으로 이 연대기를 써 나가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리외는 수위의 시신을 격리시키고 서혜부 열병에 대해 물어보는 등 여러 의사들에게 조사해서 얻은 결과, 치명적인 병임을 인식하고 의사협회 회장인 리샤르에게 새로운 환자들의 격리를 요청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도청에서 조치를 취해야 할 거라는 답변만 돌아온다. 사건의 제보가 들어오면 자세히 검토하여 신속하게 대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책임 떠넘기기식의 늑장 대응하는 동안에 상황은 심각해진다. 비슷한 사례로 코로나 바이러스 발원지라는 우한에서 30대 의사가 그 위험성을 알렸다는 이유로 추궁을 받았다는 기사가 생각났다.(나중에 사과했다는 기사도 나왔지만.) 언제나 큰일이 일어나는 전조는 별일 아니라는 가벼운 마음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 막는 사태를 만드는 것 같다.


30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서야 페스트 사태를 공표하고 도시를 폐쇄하게 되는데...


  이 소설의 전개방식에서 특이한 점은 타루의 수첩에 묘사 된 이야기가 이 연대기를 완성하는데 꽤 많은 부분을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보기 흉한 도시에 와서 나무가 없는 시내라든가 볼품없는 집 부조리한 도시 구획 등 전차나 거리에서 들었던 대화를 기록하는 등 별 의미는 없어 보이는 것까지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어 오랑시와 사람들의 분위기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쥐 이야기에 심지어 의사 리외의 자세한 묘사까지... 아마도 오랑 시에 깊은 관심과 애정이 있어서 일까 궁금했다. 그 또한 페스트의 위험성을 간파하고 있었고, 어느 날 리외를 찾아와서 이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서 보건 위생대를 조직하고 선두에 서겠다고 제안한다.


  ‘페스트라는 갑작스런 재앙을 맞은 상황에서 사람들의 태도와 반응은 참 다양하다. 우리가 맞은 코로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발 빠르게 대처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별거 아니라는 듯이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눈덩이처럼 확산되어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여기서는 몇 명의 중심인물들의 태도와 반응을 볼 수 있는데 페스트에 맞서는 유형의 사람은 파늘루 신부와 신문기자 랑베르이고 이러한 부조리에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인물로는 의사 리외를 비롯하여 타루와 시청 서기 그랑을 들 수 있다. 그는 페스트 환자를 이송하거나 사망자용 차량을 운전하다가 통계 작업까지 하겠다고 나서며 위생대에 활력을 불어넣는 존재가 된다. 또 어느 팀에도 끼지 않고 페스트라는 상황을 즐기는 듯한 코타르가 있다. 재앙의 와중에 불의의 이익을 챙기는 이기심이 엿보이는 인물이다. 어느 사회에나 있긴 마련인.


  파늘루 신부는 페스트가 찾아온 것은 성찰할 때가 왔기 때문이라며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 신앙의 힘을 강조한다.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내는 이른바, ‘집단적 처벌을 하기 위해서 재앙이 찾아오는 거라고 말했지만 오통 판사의 어린 아들이 페스트로 고통 받다가 죽어가는 과정을 지켜본 후에는 심경의 변화가 온다. 결국 신앙의 힘으로는 페스트를 멈출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함께 이겨내자고 설교하며 남아 있는 사람이 되어야한다고 부르짖지만 그는 페스트에 걸려 치료도 거부한 채 죽어간다.

랑베르는 아랍인의 보건 상태를 취재하러 왔다가 오랑시에 갇히게 된다. 파리에 아내를 두고 왔기에 랑베르는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해서 빠져나가려고 애쓰다가 마음의 변화가 오고 리외를 도와 보건 위생대에 합류하게 된다. 사랑과 행복을 우선시하고 이방일 뿐인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리외를 향해 추상운운하던 랑베르가 바뀐 것이다. 페스트의 공포로 뒤덮인 오랑 시민들의 고통스런 상황을 보고 자각을 한 것이다. 혼자만 행복한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뒤늦게라도 긍정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분명 희망적인 일이다.


  코로나 사태를 맞이한 지 벌써 서너 달이 지나가고 있다. 우리는 평범한 시민으로써 단지 마스크를 쓰고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며 건강유지에 힘쓰고 어서 물러가기를 바라면 될 뿐이다. 이런 상황만으로도 정말 지루하고 답답한 나날이다. 하루빨리 마스크 쓰지 않은 채 거리를 활보하고 싶다는 희망만으로 버티고 있다. 하지만 의료의 최전선에서 환자들을 돌보거나 환자가 되어 격리된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어떻게 버티고 있을까 생각하면 정말 마음이 무겁다. 여기서 의사라는 본분을 다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던 리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처럼 첨단 장비와 시스템이 있는 병원도 아니고 왕진을 하면서 페스트와 투쟁에서 살아남았다는 것이 감격스러웠다. 4월에 시작된 페스트는 이듬해 1월이 되어서 막을 내리고 오랑 시민들은 축제 분위기로 환호하는데 정작 리외는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자신의 왼팔처럼 도와주던 타루가 페스트에 걸려 죽음을 맞는다. 그것도 페스트가 막을 내린 마당에. 또 아내의 부고를 받았는데 이미 일주일 전의 일이라는... 너무나 안타까웠다. 환자를 돌보느라 집에도 가지 못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 의료진들에 대한 기사가 겹치는 부분이다. 진단을 하고 선고를 내리는 것을 반복하면서, ‘격리 명령을 할 뿐 의사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에 자괴감으로 괴로워하면서도 결국은 승리했지만 안타까운 반쪽의 승리였다.


'페스트 간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고, 수십 년간 가구나 옷 속에서 잠들어 있을 수 있어서, , 지하실, 짐 가방, 손수건, 폐지 속에서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사람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깨워 그것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에서 죽으라고 보낼 날이 분명 오리라는 사실을 말이다.’(P410)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은 언젠가 페스트가 다시 찾아올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페스트는 단지 전염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사회적 동물로 살아가는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전쟁잊을 만하면 한번 씩 터져 경악케 하는 온갖 사회악 등을 접하게 되는 것을 보면 의미심장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몇 달 째 계속되는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기는커녕 악화일로를 달리고 있다. 마치 사망자 수를 카운트 하듯이 쏟아내는 뉴스를 보며 놀라는 일상이 되었다. 정말 이게 현실일까 싶을 만큼. 그러면서도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는 이런 현상에 무뎌지는 것이 아닐까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이런 무뎌지는 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집단의 경우만이 아니라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흉악한 페스트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또 경계하는 삶을 살라는 의미로 들렸다. 예전에는 생각지 못했던 상징적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고 더구나 초판본으로  다시 읽을 수 있어서 뜻깊은 시간이었다.




 YES24 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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