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새 아시아 문학선 22
메도루마 슌 지음, 곽형덕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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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미지의 세계, 신비와 환상의 섬이라는 오키나와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무참히 깨주는 작품이었다. 비교적 짧은 소설임에도 느낌은 강렬했다. 전부터 읽고 싶었던 책의 목록에 있던 오키나와의 눈물의 작가라는 것을 알았고 이벤트를 통해서 만나게 된 책이다. 메도루마 슌은 오키나와 현 출신으로 1983어군기로 등단한 후 1997물방울로 아쿠타가와 문학상을, 2000년에혼 불어넣기로 가와바타 야스나리 문학상과 기야마 쇼헤이 문학상을 수상했다.


 1995년은 메도루마 슌 문학의 전환점이 되는 해인데, 당시 오키나와 북부 나고에서 13살 소녀가 미군 세 명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 이후 미군기지와 관련된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이 작품 무지개 새를 시작으로희망,』『기억의 숲으로 이어진다. 특히 무지개 새는 구상에서부터 연재, 출판까지 총 9년이나 걸려 나왔다는데 그만큼 작품의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의 시작부터 끝까지 잔혹하고 끔찍한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 폭력의 당사자나 대상자에게 연민이나 응징의 말은 없다. 그저 피사체처럼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더욱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마치 이것을 제대로 응시하고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라고 여지를 남겨주는 듯하다.


 폭력조직의 절대적 권력자 히가, 히가의 명령에 순종하며 성매매 여성을 관리하며 상대 남자들의 사진을 찍어서 넘기는 가쓰야, 학교폭력의 피해자였던 마유가 히가 그룹에 들어와 그야말로 폭력의 지옥도를 펼쳐나간다. 열일곱 살 왜소한 체구의 마유는 학교에서 성폭력을 당하고 찍힌 사진을 되찾기 위해 히가에게 예속된다. 가쓰야는 중학교 시절부터 선배 히가의 상납금을 관리하면서 친구들과 멀어지고 더 많은 돈을 바치며 히가의 눈에 들어 안전한 삶을 유지해 간다. 폭력을 당하고 돈을 뺏기면서 왜 말하지 않는 걸까. 돈 걱정 없는 집안이지만 외도를 일삼는 아버지, 그것을 눈감아주는 대가로 자신의 가게를 갖는 꿈을 이루는 어머니, 거의 파친코에서 살아가며 자립 의지가 없는 두 형 등 소원한 가족의 분위기는 더욱 히가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한다. 소통의 부재와 함께 무엇이 중요한 삶의 척도인지 모른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가족 중 가장 의지가 되는 누나 히토미에게라도 털어놓았다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까.


 히가의 절대적인 권력은 졸업을 하고나서도 계속 이어진다. 폭력, 상납금 근절을 위해 교사들이 나섰지만 교사의 어린 아이를 향해 자행한 폭력으로 어느새 고개를 숙이고 만다. 결국 부모와 선생님 모두 아이들을 보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건의 예가 되는 데모 장면이 나오는데 85천명의 군중이 모여 미군 철수를 외친다. 무대에 선 여학생을 보고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마유를 떠올리는 가쓰야. ‘한 순간의 차이로 다른 운명이 된 마유의 삶이 교차된다. 이전에 품지 못한 생각이 고개를 들 때마다 돈을 낳는 생물을 사육하는일을 하는 거라고 했던 히가의 말을 떠올리며 자신을 합리화시킨다.


 나쁜 일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기서 빠져나오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가쓰야를 계속해서 보는 것은 답답했다. 사람의 굳어진 생각이나 습관을 깨뜨리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버지의 돈을 받아 도박으로 삶을 낭비하는 두 형들을 혐오하면서도 자신을 안전하게 해 주는 을 받는 것을 뿌리치지 못한다. 누나 히토미의 독립적으로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뿐이다. 그의 부모는 군용 용지 대여료를 받아 부유하게 살아간다. 사건이나 사고가 있어야 군용지 대여료가 인상된다는 가쓰야의 아버지, 데모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는 엄마를 보며 소학교 시절의 아픈 기억을 떠올리는 딸 히토미, 한 울타리에 살아도 이렇게 모를 수도 있구나 하는 마음에 싸해졌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과 소통의 부재는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하는지. 예의 외부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성매매 산업, 학교폭력 등 내부적인 폭력구조가 얽히고설켜 오키나와 전체에 만연해 있는 일상과 연계시켜 보여준다.


 가쓰야는 뭔지 모를 약을 먹이는 등 히가의 명령을 수행하면서 천천히 무너져가는 마유를 지켜본다. 결국 마유가 손님을 받지 못하자 가쓰야는 상납금을 마련하러 어머니 가게에 가는데... 네 힘으로 살아야 한다는 누나의 진실 된 조언도 자신의 발등의 불을 끄는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어느 덧 미군 세 명에게 제압당한 소녀의 얼굴에서 소학생 시절 누나의 모습을 떠올리기에 이르렀지만, 안타까움은 어쩌지 못한다. 얀바루 숲의 무지개 새를 떠올린다. 본 사람만 살아남고 다른 동료는 모두 죽게 된다는. 바뀌지 않는 현실을 누가 바꾸어주었으면 싶다.


 자신의 성매매 대상인 교사에게 가한 마유의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행위는 보복이었을까. 가정과 사회가 막아주지 못해 받은 고통과 상처를 자신이 직접 응징한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상처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는 이렇게라도 해서 폭력의 가혹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 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을까. 다 죽어가던 소녀 마유의 마지막의 변화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다. 인과응보라더니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정당한 행위는 아니지만 폭력의 위험성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전설의 새, 무지개 새 이야기를 내세워 마유와 가쓰야를 새 삶으로 꺼내주는 이야기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무수한 동식물의 보고라는 얀바루 숲의 생명력과 묘한 조화를 이룬다. 아름다운 섬 제주가 많은 상처를 품고 있듯이 그와 닮은 섬 오키나와의 정치적 현실과 역사를 작가의 상상력으로 빚어낸 이야기라서 더욱 공감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을 계기로 작가의 다른 작품을 만날 일이 정말 기대된다. 폭력으로 점철된 이야기였지만 여운이 아름답게남는 건 왜 일까. 아마도 새로운 삶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의 삶을 파괴해야만 한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전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모두 죽어 없어지면 된다.

몸 깊숙한 곳에서 웃음이 치밀어 오른다. 백미러에 비친 마유의 잠든 모습은 아름다웠다

액셀을 더욱 세게 밟으며 가쓰야는 얀바루 숲에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기를 염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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