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바타 야스나리 -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클래식 클라우드 10
허연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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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로 셰익스피어, 뭉크에 이어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만나게 되었다. 부끄럽게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을 단 한 권도 읽어 본 적이 없다. 나쓰메 소세키를 좋아하여 일본문학을 꽤 읽는 편인데 어쩐 일인지 한 번도 인연이 없었다. 어쩌면 내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대해 백지상태여서 더욱 재미있고 공감하며 읽지 않았나 싶다. 불안의 아이콘의 대명사인 뭉크가 떠오르기도 했다. 공교롭게 가와바타 야스나리도 두 살, 세 살에 아버지, 어머니를 잃고 그 후, 누나와 조부모까지 잃고 10대에 완전히 혼자가 된다. 어린 나이부터 혈육을 잃은 상실감으로 점철된 삶을 마주하였으니 작품 전반에 허무가 배어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 아닐까 싶었다. “고독과 비애와 소극적 성격 때문에 문학을 했다”(P49)는 그의 회고도 이것을 충분히 뒷받침해준다.

 

 저자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삶과 문학의 궤적을 찾아가는 여정은 마치 함께 그 여정을 따라 가는 듯 실감나는 여행 같았다. 지난주 일본여행을 다녀왔는데, 떠나기 바로 직전에 이 책을 받고서 마지막 부분만 읽고 갔다. 여행일정 중에 가마쿠라에 가 볼 예정이었기에 기대감이 있었다. 저자는 이 여정을 1. 설국의 세계로 2.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삶과 문학 3. 가마쿠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마지막, 이렇게 세 개의 장으로 나누어 이야기한다.

 

 1장에서는 작품설국의 배경이 된 에치고유자와를 소개한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머무르며 설국의 중심 무대이며 초안을 집필했던 다카한 료칸의 안개의 방등 에치고유자와에서 설국이 탄생할 수밖에 없는 기후로 인한 숙명과 등장인물들이 마시는 사케를 주제로 한 배경이야기도 재미있게 풀어낸다.

 

 

 

 

 

 설국은 흔히 읽기 힘들고 읽었어도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접한 적이 있다. 그래서 꽤 난해한 작품인가 했다. 흔히 소설이라 하면 기승전결이 자연스럽게 스며있어 핵심적인 줄거리가 기억에 남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설국줄거리 소설이 아니라 이미지 소설’(P62)이라고 한다. 설국에 나오는 모든 배경은 일종의 논리가 아닌 이미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설국을 가장 잘 읽는 방법은 한 행 한 행, 시를 읽듯 이미지로 읽어나가는 것’(P82)이란다.

 

거울 속에는 저녁 풍경이 흘렀다. 비쳐지는 것과 비추는 거울이 마치 영화의 이중노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설국12(P63)

 

 천천히 읽어보면 저녁노을이라든가 어두워지는 저녁 풍경의 이미지가 보인다. 시적으로 쓰인 작품을 일반적인 소설과 같은 맥락으로 읽는다면 본래 전하고자 하는 작가의 메시지가 온전히 전해지지 않을 것임은 틀림없겠다.

 

 거울을 빼놓고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을 논할 수 없다고 한다. 거울은 현재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지만 비쳐진 모습은 실제와는 다른 환상도 불러일으킨다. 설국의 백미라는 부분을 감상해 보자.

 

시마무라는 작년 세밑의 그 아침, 눈이 비치던 거울을 떠올리며 경대 쪽을 보았다. 거울 속에는 차가운 꽃잎 같은 함박눈이 한층 크게 나타나, 옷깃을 들추고 목덜미를 닦는 고마코 주위에서 하얀 선으로 감돌았다.

고마코의 살결은 금방 헹궈낸 듯 깨끗해서 시마무라가 어쩌다 내뱉은 말 한마디조차 그런 식으로 오해할 여자로는 도저히 여겨지지 않는 데에, 오히려 거역하기 힘든 슬픔이 있는 것 같았다.’설국,129(P93)

 

 이 작품에는 에치고유자와의 지명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고 하는데, 이런 의도적인 장치는 독자를 환상과 미궁에 빠뜨리기 십상이다. 가족을 잃은 상실감과 허무가 거울 너머로 바라보는 듯한 관조적인 삶을 추구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작품을 통해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다”, “평생 동안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다”(P243)는 그의 고백을 보면 시대적 상황이나 주변의 눈치에 발 빠르게 맞추어가며 자신의 입신을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자신의 문학 세계를 구축했던 것 같다. 또한 온통 상실감으로 점철된 삶이었기에 모든 것을 허무로 단정 짓고, 그 허무를 ’의 추구에 받쳤는지도 모르겠다.

 

탐미주의 소설의 대가라는 미시마 유키오가 야스나리의 제자이자 문학적 도반이었다는 것도 꽤 흥미를 끌었다. 미시마 유키오는설국의 주제가 어떤 특정한 순간이 아니라, 항상 움직이고 있는 인간 생명의 각 순간을 이어주는 순수지속(純粹持續)”(P82)이라고 설명했다는데 이 언급만 보더라도 작품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답이 될 것 같다.

 

이렇게 독자들이 읽으면서 자주 미궁에 빠지게 되는 지극히 일본적인 이 작품이 어떻게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을까. 당시 일본에서는 미시마 유키오나 다니자키 준이치로 등 인기를 누렸던 작가와 달리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은 고루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엔 2차 대전 당시 군 복무를 하면서 일본어를 배우고 일본 문학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던 에드워드 사이덴스티커의 공이 상당히 컸다는 흥미로운 일화가 있었다. ‘번역 불가능한 작품이었다는 설국을, 일본어의 사용이 너무 미묘하고 모호한 표현이 많았던 작품을 번역해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동양적인 가치관과 정신, 그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었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그 덕분에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자연과 인간의 운명이 가진 유한한 아름다움을 우수 어린 회화적 언어로 묘사했다”(P127)는 평가를 받으며 일본에서 첫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갖게 된다.

 

대표작설국외에도 산소리,이즈의 무희, 천 마리 학등의 작품세계와 배경이 되는 지역의 여정은 계속된다.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고 왜소하고 조용한 학생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918년 혼자서 이즈반도로 여행을 떠나는데, 유랑극단과 동행했던 경험이 출세작 이즈의 무희의 모티프가 된다. 무희 가오루는 약혼자였던 이토 하쓰요의 분신이라고도 한다. 이렇듯 작가의 삶과 생각이 작품에 어느 정도 투영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다. 유난히 무희에 대한 작품이 많았는데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이름난 무용 평론가이자 무용 애호가였다고 한다. “무용은 보이는 음악이고, 움직이는 미술이며, 육체로 쓰는 시이자, 연극의 정화다”(P209)고 했을 정도로 무용 지상주의자였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옳고 그른 것도 없고 시대와 사회적 상황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 자체를 추구하며 절대미의 세계에 도달하고자 했다는 작가의 관점에 초점을 둘 때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그가 태어난 오사카,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이바라키, 청년시절을 보낸 도쿄, 말년까지 35년의 흔적이 서려있는 가마쿠라의 여정을 돌아보며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알아가는 알찬 시간이었다. 일본 최초의 노벨상의 명예를 누리고 가질 것을 다 가졌던 그는 드라마틱하게 삶을 마감한다. 저자는 이것을 두고 무용을 숭배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답다고 했다. 무용이 끝난 후, 아무것도 기록이 남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떠났다고.

 

책을 읽다보면 처음의 기대와 달리 안 읽혀질 때가 있다. 감동을 느끼기는커녕 도중에 손을 놓아버린 경우도 있다. 전에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나 버지니아 울프 등의 여러 작품을 그렇게 중단한 적이 있다. 설국이 시마무라의 행동을 따라가는 소설이 아니라 시마무라의 생각을 따라가는 방법으로 읽어야 하는 것처럼 그 작품들도 그것을 염두에 두었어야 했다는 것을 알았다. 당연히 생각에는 순차적인 시간도 공간도 필요 없고 떠오르는 것이 곧 이야기라는 것. 미시마 유키오의 말처럼 어떤 시대관념도 기만하지 못했을 만큼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했던 설국절대미의 세계를 제대로 한 번 음미해 보고 싶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느껴 보았던,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일본적인 멋과 분위기를 새삼 확인받은 느낌이다. 사실 국경과 문화는 달라도 인간의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작품 설국을 읽고 미궁에 빠진 적이 있거나 아직 읽지 못한 독자에게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충실한 키워드가 되리라 믿는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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