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여자들의 삶
앨리스 먼로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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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의 체호프라고 평가되고 있는 단편의 명수 엘리스 먼로의 작품을 두 권을 읽었는데 특히 디어 라이프를 읽고 감동했던 기억이 있어서 유일한 장편이며 자전적 소설이라는 이 작품이 무척 궁금했었다. 역시 단편과는 다른 느낌이다.디어 라이프에 나오는 단편들은 짧은 이야기 속에 절제된 감정 표현과 단호함에서 깔끔한 글이 느껴졌었다. 이 작품은 보통의 장편소설과 달리 전개가 복잡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플롯의 힘이 별로 강하지 않고 밋밋하다. 그렇다고 해서 재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궁금한 게 있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작가 자신의 이야기이고, 어느 만큼이 허구일까 하는 것이다. 화자를 통해서 비춰지는 말이나 태도에서 작가가 세상을 읽어나가는 관점이나 성격을 가늠하고 추측해보는 은밀한 기쁨을 충족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장편이지만, 여러 편의 단편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웃 사람들, 가족, 친척, 친구들의 관계의 얽힘 속에서 바라본 욕망과 상실, 사랑과 죽음을 이야기한다.


 첫 이야기는 이웃사람 베니 아저씨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물고기를 잡는 아저씨를 도우며 와와나시강에서 개구리를 잡으며 야생의 자연을 즐긴다. 아저씨 전해주는 이야기, 그가 사는 공간은 물건으로 넘쳐나는 고물상을 연상케 하지만 거기서 아주 쓸모 있는 물건을 찾아낸다. 바로 신문이다. ‘가장 좋아하고 절대 지겨워하지 않았던놀이도구였던 것이다. 그것도 부모님이 보는 흔한 전쟁과 선거 이야기가 아닌, 아웅다웅 살아가는 사람 냄새가 나는 사건 사고들, 그야말로 델이 찾던 이야기의 소재였던 것이다. 어린 아이였음에도 작가의 꿈을 꾸고 나아가는 야무진 결심이 보여서 마음이 훈훈해졌다. 주변의 어떤 것에도 어떤 소리에도-특히 어머니에게는 더욱 더- 고분고분하게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자기주장이 있었던 것이다. 결코 순진하지 않은 꼬마 악당이라고 할까.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듯이 세세하고 솔직한 심리 묘사를 통해 긴장감의 분위기도 감돈다. 이런 생각을 하다니 그 당돌함이 웃음 짓게도 한다.


 ‘젠킨스 벤드라는 친척 크레이그 종조부 집에서 놀다가 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어느 날, 그 종조부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엄마에게 듣는다. 인자한 모습으로 자신을 배웅하던 종조부를 떠올리며 혼란에 빠진다. 죽음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하면서도 장례식에 가지 않겠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두려워서 그랬을까. 보통 그 정도의 어린 나이에는 부모님이 이끄는 대로 하기 마련인데. 역시 자의식이 싹튼 영악한 어른 아이를 떠올리게 된다. 이에 어머니의 입을 빌어 죽음을 이야기한다.


, 그보다 먼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일까? 상당한 비율이 물로 이루어져 있어. 순수한 물로. 사람을 구성한 물질 중에서 그리 대단한 건 없어. 탄소, 아주 단순한 원소들이야. 이런 걸 뭐라고 하지? 값으로 따지면 98센트나 할까? 그게 다야. 놀라운 건 그게 조합되는 방식이야. 조합된 방식에 따라 심장도, 폐도 있는 거야. 간도. 췌장도. 위도. 뇌도. 이게 뭐라고? 원소들의 조합! 이 조합을 조합하고-그 조합을 또 조합하고-그러면 인간이 되는 거야! 우린 그걸 크레이그 종조부, 네 아빠 혹은 나라고 불러. 하지만 다 이런 조합에 불과할 뿐이라고. 이런 부분들이 하나로 합쳐져 한동안 특정한 방식으로 흘러가는 거야. 그러다 한 부분이 기능을 멈추거나 고장 나는 거지. 크레이그 종조부의 경우에는 심장이었어. 그래서 우리는 크레이그 종조부가 죽었다고 말하는 거야. 그 사람은 죽었다, 이렇게. 하지만 그게 우리가 그 현상을 보는 방식이야. 우리 인간의 방식. 우리가 늘 인간의 방식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자연의 방식으로도 생각한다면, 자연은 계속 흘러갈 뿐이고 죽어가는 건 그 일부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어-, 죽는 건 아니고 변하는 거. 변한다, 이게 내가 쓰고 싶은 단어야.(후략)(P90~91)



 나아가 미래의 죽음까지도 아우른다. 장기의 이식을 통해 누군가의 일부로서 계속 살아있게 된다면 죽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살아있는 몸의 상속자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죽음이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게 된다. 무거운 죽음에 대한 명쾌한 설명은 그것을 가볍게 해준다. 그저 자연의 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흔히 엄마와 딸의 사이는 애증의 관계라고 한다. 여기서도 델과 엄마의 관계가 그랬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모르는 사이에 대물림되는 것일까. 그래서 제목이 소녀와 여자들의 삶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오빠의 흔적이 별로 없던 집에서 종교에 빠진 어머니가 물려받은 약간의 돈을 모두 탕진하고 그로 인해 고생을 하고, 고등학교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몰래 집을 나가 학교에 다니게 된 이야기, 어둠 속의 감금과 고통으로 시작해서 용기, 저항, 탈출로 이어지는 벅찬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다. 꿈을 이루기 위한 열정과 현실 사이의 갭은 컸고... 아빠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한 이야기. 그럼에도 엄마는 자기만족이 되지 않았다. 신문사에 편지를 써서 보내고 백과사전을 팔면서 자신의 지식을 표현하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하는 엄마가 싫었다. 그러한 엄마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며 은근하고 헷갈리는 비웃음을 보내는 늙은 대고모들의 표정을 엄마는 눈치도 못 채는 것일까. 델은 엄마의 괴짜 같고 무모하고 당혹스러운 면을 아주 조금씩 꼬집어 이야기하는 대고모들과 엄마 사이에서 부끄러움과 측은함으로 갈등한다.


 엄마는 자의식이 좀 강하게 느껴지고 다른 사람을 의식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눈치다. 가난하거나 약한 사람들에게 동정을 보였지만 술에 빠져 살거나 성적인 방탕, 욕설, 무계획적이고 무지에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면에서 볼 때 엄마의 삶이 옳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이에겐 숨 막히는 삶일 수도 있을까. 엄마를 바라보는 델이 그랬다. 그래도 유일한 공감대가 있었으니 바로 지식욕이었다. 기억력이 뛰어나고 영리한 델과 함께라면 엄마의 백과사전 사업에 도움이 될까 하여 동행을 하다가 델의 마음속에서 싹트는 자의식 때문에 중단이 되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인다.

 

내 생각엔 처녀들, 여자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 분명히 그래. 하지만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건 우리 손에 달려 있어. 지금까지 여자들이 한 건 모두 남자들과 관계된 것뿐이었어. 우리한테는 여태 그게 전부였어. 정말로, 집에서 기르는 짐승만큼이나 우리 삶이라는 게 없었다고.”

하지만 나는 네가…… 머리를 쓰는 삶을 살면 좋겠어. 머리를 써야지. 마음을 딴 데 빼앗기지 말고. 남자 때문에-마음을 빼앗겨서-실수를 하게 되면 네 삶은 네 것이 아니게 될 거야. 모든 여자들이 늘 그래왔듯 너도 짐을 짊어지게 될 거야.”(P318)


 엄마의 걱정과 이런 바람에도 불구하고 델의 속마음은 다르다. 여자가 피해를 입기 쉬운 존재이니까 자기보호가 필요하다는 충고임을 이해하지만 남자들과 똑같이 세상을 경험할거라고 결심한다. 못하게 말리면 왠지 더 하고 싶고, 거기서 벗어나 일탈하면서 느끼는 쾌감을 맛보고 싶어 하는 델이 보였다. 성적인 호기심을 누르려고 하지 않고 조금씩 알고 싶어 하고 조금씩 대담해진다. 엄마가 싫어하는 부분인데 들키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도 가지지 않는다. 여린 듯 느껴지면서도 용감무쌍하게 나아가는 행동에 놀랍기도 했다. 작가가 되기 위한 실험정신을 충실히 경험하고자 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단짝 나오미와 비밀이 없을 정도로 친하지만 삶의 방향에 있어서는 관점이 다르다. 평범하게 살아가겠다는 나오미를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결심한다. 한 쪽의 삶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대쪽의 삶이 존재해야 한다. 그런 삶이란 양쪽을 취하고 모두에게 익숙한 결혼이라는 것. 델은 그러느니 샬럿 브론테가 되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린다. 나오미와의 여태까지의 우정은 희미해지고 남자친구 제리 스토리와 모험 같은 사랑을 거쳐 또다시 가닛 프렌치와의 사랑에 이끌려간다. 사랑의 완성을 위해서는 세례를 받아야한다는 가닛의 말과 태도에서 폭력을 느낀다. 어느 날, 단순한 사랑 놀음이 아니라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고 거기서 빠져 나온다. 엄마의 엄마가 종교에 빠져 엄마에게 떠넘겨진 고통으로 얼룩진 삶이 떠올랐을까.


나는 마침내 지난날의 실수와 혼란을 끊어내고 마침내 환상이나 자기기만 없이, 비장하고 단순하게, 집을 떠나고 수녀원을 떠나고 애인을 떠나는 영화 속 여자들처럼 작은 짐 가방을 들고 버스에 올라타면서, 내 진정한 삶이 시작되려 한다고 생각했다.

가닛 프렌치, 가닛 프렌치, 가닛 프렌치.

진정한 삶.

(P434)


 이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 아련하고 싸한 느낌이 들었다. 멋지고 비장한 느낌과 더불어 희망이 보였다고 할까. 결국 델은 늪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직시한다. 오랫동안 성장통을 겪고 나아가는 삶을 선택한다. 흔들리지 않는 삶이 없다고 한다. 주저하고 망설이다가 못해 본 것을 후회하는 삶도 있고 용감하게 정면으로 부딪히면서 상처받고 깨지면서 멀리 돌아간 것을 후회하는 삶도 있을 것이다. 델은 엄마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으며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자신의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했지만 결국은 엄마의 말대로 언젠가는 정면에서 부딪치는 법을 배워야한다는 것을 따른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과정에서 깨닫고 얻은 것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고 정신은 강해지고 좀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10대나 20대 시절에만 방황을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방황은 한 시절로 마감하고 안정된 채 살아가고 싶지만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은 죽을 때까지 흔들리는 삶을 마주하게 될 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사랑과 욕망, 죽음도 살아가면서 맞이하는 자연스런 삶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거기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도 오로지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사람은 특히 여자는 작은 희망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다. 어떤 희망으로 채워가야 할지, 어떤 선택을 할지는 우리에게 달려있다. 정답이 없다는 인간의 삶은 한 편의 소설일 수도 있고, 그래서 우리는 답을 찾기 위해 때로는 소설을 읽지 않을까.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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