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하루의 영원한 밤
김인숙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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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마도, 아니 확실히 난 김인숙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참 이런 일도 다 있다. 아무리 그의 작품 제목을 들여다봐도 읽었다고 확신을 주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왠지 김인숙의 소설은 세련된 도시인들의 일과 사랑에 대해 쓴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한 편 한 편 읽어나가면서 그것은 나의 선입견이라는 것을 알았다. 맨 처음에 실린 <델마와 루이스>를 읽으면서부터가. 의외였다. 우리 주변에서 친숙한 사람들이 등장인물이었다.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그리 특별하지도 않은 어디서 본 듯한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 실수도 하고 그것으로 인해 평생을 어두운 마음으로 살아가기도 한다. 아무리 그래도 남아 있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 이제라도 인연이 되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 차용했다는 제목의 <델마와 루이스>87,89세 할머니 자매들의 유쾌한 일탈을 그려낸 이야기다. 이렇게 연로한 노인의 이야기가 나와서 놀랐다. 환갑이 넘은 며느리와 아들의 집에서 살고 있는 동생 델마를 보러 미국에 살던 루이스가 며칠만 있겠다고 왔다가 아예 눌러 앉게 된다. 며느리의 분노는 남편에게 향할 수밖에. 그 공간의 불편함을 감지해서였을까. 자매는 어느 날 밤에 택시를 잡아타고 가출을 한다. 아무도 모르게 그것을 모의하면서 마음은 들떴으리라. 모텔에서 하룻밤을 거의 뜬 눈으로 보내고 매운탕집에서 밥을 먹으려다가 지갑을 잃어버렸음을 알게 되고 모든 것이 뒤엉키기 시작한다. 사장의 지갑을 가지고 유유히 사라진다. 자유분방한 미국에서 살던 영향인지 성격 때문인지 몰라도 루이스는 델마에 비하면 무척 대범하다. 가출로 인해 며느리에게 격렬한 분노를 안겨 주었다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신속하게 판단하고 움직인다. 델마와 루이스의 얘기를 듣고 있던 다른 식당 여자 최영자와 딸 부영희는 서로 의기투합하여 바다를 보러 간다. 매이고 매인 삶, 핍박 받던 삶에서 벗어나 눈앞에 펼쳐진 바다를 바라보는 마음은 얼마나 후련했을까.

 

이 나이에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가. 최영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래전에 돌아가신 엄마 손을 잡듯이 델마의 손을 잡았다. 델마가 그 손을 마주잡았다. 그러나 쪽지 한 장만 달랑 놓고 떠나온 집의 자식들을 떠올려서는 아니었다. 델마는 자식 생각들을 그때 아주 잊었다. 첫 새끼를 낳고부터 그날에 이르도록 육십여 년이 넘게 자식 생각을 잊어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P55)



 그 나이가 되면 걱정을 끼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서글프다. 노인이 되면 주변의 보호 아래 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하고 성가신 존재로 여기는 반면 그것을 당하는 편에서는 얼마나 불편하고 괴로울까하는 내면을 읽을 수 있었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함박웃음을 웃는 그녀들을 보며 후련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달라질 것도 없이 지리멸렬하게 이어가는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남녀의 이야기를 그린 <아홉 번째 파도><내 이럴 줄 알았어>에 나오는 화자인 의 부모와 언뜻 닮은 모습이 보인다. <아홉 번째 파도>의 그 남녀는 헤어지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헤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서로 뜨거운 열정도 없이 만났다가 헤어지는 삶, 버리지 못하고 그렇다고 끈끈이 엮어지지도 못하는 삶이 안타깝기도 했다. 혼자 여행을 떠났다가 휴대폰을 도둑맞돌아온 후 어느 날 클라우드에서 도둑이 찍은 사진을 발견한다. 햇살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빨간머리의 여자의 얼굴. 여자는 그 모습을 보고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싱싱한 사랑, 햇살처럼 환한 웃음'을 환기시킨다. 이제 앞으로의 삶은 더이상 '버티는 삶'이 아니라 '이겨낼 수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후자는 더는 같이 살아서는 안 될 것 같은부모의 홍콩여행에 실직자인 아들이 따라가는데 극심한 태풍을 만나 호텔에 묶이는 상황이 나온다.



좀 무서웠지만, 사는 건 안 무서웠나, . 꿈속에서 울면서도 그렇더라고. 왜 우는지를 모르겠는 거야. 죽는 게 슬픈가? 그럼 사는 건 안 슬펐나. . ‘그는 이처럼 기꺼이 굴복하는 삶을 다시 묵인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P252)

 

 어머니는 혼자 암 검사를 받고 암이란  암은 다 아니라고 했다는데 왜 아픈거냐고 아들에게 묻는다. 헤밍웨이의 소설에 나오는 이 구절을 말하면서 지나온 삶을 토로하는 어머니가 낯설기만 하다. 어쩌면 어머니의 지난날을 그토록 괴롭혔던 것은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내 이럴 줄 알았지. 결국 이럴 줄.'(P258) 마치 의지하고 싶었던 일이 엇나가서 실망스럽다는 듯이 쓸쓸하게 들린다. 특별히 행복하지 않더라도 특별히 불행하지 않다면 그냥 견디며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것일까. 어쩌면 모나지 않고 타인의 눈에 띄지 않는 무난한 삶에 안주하려는 보통 사람들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다.

 

 반면 하루하루 견디는 삶이 얼마나 지독한 일인지 일깨워주는 <넝쿨>도 있다. 형오와 형윤은 연년생 남매다. 형오의 군 입대를 앞두고 송별식이 있던 날 오빠의 친구 김정호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난장판이 된 분위기를 피해 밖에 나갔다가 성폭행을 당하고 만신창이가 된다. 그 범인이 김정호 인 줄 알았는데 진범이 따로 있다는 소식은 그들의 인생에 먹구름을 드리운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었던 기억이 단번에 뒤엉키는 순간이다. 형윤은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고 형오는 동생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의식을 안고 살아간다. 마치 형벌처럼 삶을 점령당한 채 살아가야 하는 그들. ‘아무것도 아니게 된 삶을 끌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

 

토기박물관


 영어학원에서 알게 된 67세의 미라가 65세의 제니와 토기박물관에 가서 발굴된 토기, 깨어진 토기가 온전한 모습을 갖춘 것을 보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이야기다. 딸이 다니다 만 날수를 채우기 위해 대신 다닌다는 제니가 우습고,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신은 그녀와 다르다는 생각에 퉁명스럽게 대한다. 우연히 무너져 내린 제니의 울고 있는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질그릇처럼 다 깨져 더는 담을 게 없어진 인생이라고 생각했지만 다 깨어져 상처투성이인 삶도 살아갈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다. 모두 겉으로는 행복해 보이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고만고만한 사정을 안고 살아간다는 것. 인생이 끝나지 않은 이상 삶도 아직 진행형이라는 것을.

 

단 하루의 영원한 밤


 이 소설집의 표제로 붙은 이 작품은 3인칭 시점으로 선생의 숨겨진 딸 M과 연애를 했던 를 내세워 선생의 삶을 이야기한다. 삼십 년 전, 하룻밤의 실수로 영원한 죄의식을 안고 살아가는 선생이 있다. 선생은 해안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 여제자와 동행했는데 충동적으로 도중에 하차를 하고 밤을 같이 보내고 여자는 딸을 낳는다. 덕망 있는 학자라고 주변에서는 오히려 여자에게만 돌팔매질을 하였다. 여자는 한복집을 운영하며 홀로 딸을 키우는데. 선생은 여자와 아이에 대해서는 한결같이 침묵으로 일관한다. 학문적인 명성보다는 세상의 모든 모욕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우연히 꾼 악몽쯤으로 여겼을까. 나쁜 꿈을 막아준다는 인디언의 부적인 깃털의 힘이라도 빌리고 싶을 만큼 절실했을까.

 

선생은 언제나 기차역이 바라보이는 여관의 창가에 서 있었고, 창문 바깥에서는 키 큰 나무의 잎들이 흔들리고 있었다.’(P143)

 

분명한 것은 선생이 주기적으로 그 기차역의 여관방에 관한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혹은 그것을 꿈이라고 믿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꿈이라고 믿고 싶은 살아 있는 날의 한낮인지, 아니면 살아 있는 날의 한낮으로 굴절된 꿈의 한 장면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선생은 언제나 가방 속에 깃털 하나를 지닌 채 나뭇잎이 흔들리는 창가에 서 있는 것이다.’(P147)



 잊고 싶다고 해서 잊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계속 남아서 자신을 괴롭힌다. 이미 저질러진 일 어떤 방식으로든 책임을 졌으면 되었을 텐데. 그렇게 방관자처럼 회피하지 말았어야 했다. 결국 자신도 용서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세상의 뭇매를 맞은 여자의 삶도 얼마나 고단했을까. ‘꽉 붙들어! 꽉 붙들란 말이야, 이 늙은이야.”(P150) 사랑과 미움이 애증이 되어 메아리치는 삶이었다. 삶이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다. 창피한 마음을 지닌 채 감당해야만 하는 삶, 그 고통을 마주하면서 끝까지 가야하는 삶이었다. 세간의 이목을 떠나 좀 더 용기를 내어 책임을 지려는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했더라면 어땠을까. 선생은 떠났어도 남은 사람은 따뜻한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빈 집


 남편과 27년을 살아온 쉰다섯 살의 그녀가 나온다. 수더분한 남편과 이제는 더 이상 전율도 아니고 고통도 아닌 편안한 느낌을 갖게 된 이 여자는 추리소설을 읽는 것을 낙으로 살아간다. 이삿짐과 화물을 운송하는 남편의 일터에서 젊은 애들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을 보고 부아가 치밀어 중얼거리다가 택시기사의 핀잔을 듣고는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도 그리 나을 것 없다는 것을. 알게 모르게 남편을 경멸했지만 속으로는 사랑했다는 것을. 미웠던 마음이 문득 그에게 얹혀진 삶의 무게가 가엾음을 느낀다. 팔리지도 않는 쓰레기같은 영천 집을 고모부에게 상속받은 남편은 그곳에 자신만의 내밀한 기쁨의 공간을 구축한다. 교통사고로 죽은 개 대신 또 하나의 백구를 키우면서. ‘소리 내는것을 키워 본 적이 없어서. 어쩌면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살아온 답답함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이리저리 치이고 치인 마음의 상처를 보상이라도 하듯이. 남아있는 삶은 그렇게 자신을 위한 세계를 쌓고 서로 보듬을 수 있는 정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으리라.

 

아주 사소한 히어로의 특별한 쓸쓸함


 여기에도 그다지 성공한 인생과는 거리가 먼 소시민이 나온다.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하여 전처가 두 명이고 아들이 두 명인 남자. 두 명의 아들은 히어로를 좋아해서 히어로 영화를 보고 히어로 장난감을 사고 히어로를 이야기한다. 일 년에 한 번 밖에 만날 수 없어서 거슬리는 부분이 있어도 혼을 내지 못하고 오히려 아들의 눈치를 보는 주눅이 든 아빠다. 아들에게조차도 히어로가 되지 못하는 남자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특별한 쓸쓸함이 뭔지는 알 것도 같았다. 적어도 그 쓸쓸하고 달콤한 느낌이 뭔지는 알 것 같았다. 너무나 평범하고 너무나 사소한, 그래서 비루하기까지 한, 그러나 누구에게나 특별한, 아니 오직 자신에게만 특별한. 그걸 아무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 그러니, 그도 어쩌면 저 사소한 히어로들의 소그룹 하나쯤에는 끼어들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P225)


 가진 것도 없고 그렇다고 나중에라도 이룰 수 있는 거창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은 우리는 아주 사소한히어로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안고 힘들게 살기보다는 오직 자신에게만 특별한삶은 살 수 있지 않을까. 내 눈에 비친 타인들은 모두 잘 나가는 인생으로 보일지 몰라도 한두 개의 아픔은 지니고 산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삶의 과정에서 시간은 아픔의 흔적을 조금씩 희석시켜 줄 것이다. 정해진 답이 없는 인생이지만 우리는 문학 작품을 통해서 조금 나은 길을 안내받는다. 알 듯 말 듯한 친근한 이웃처럼 개성이 넘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와 내밀한 감정 묘사는 웃음과 쓸쓸함, 따뜻한 연민을 품어주었다. 마치 이런 삶도 있고, 저런 삶도 있어, 인생 다 비슷하지 않아?’ 라고 위로해 주는 듯했다. 작가의 삶에 대한 깊은 애정과 통찰 너머로 따뜻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 작품은 그녀의 다른 작품을 만날 수 있는 가교가 되고 한동안 울림을 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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