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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 빛과 색으로 완성한 회화의 혁명 ㅣ 클래식 클라우드 14
허나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2월
평점 :
지난 6월 도쿄 여행을 갔다가 우에노 공원에 있는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보고 나왔는데, 돌아오는 일정 중에 시작하는 모네와 르느와르의 전시회 예고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림에 거의 문외한이던 내가 조금씩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부터다. 미술 관련 책에서 말로만 듣던 명화 등을 접하고는 학창시절의 미술 시간이 떠올랐다. 화가들이 어느 유파에 속하는지 달달 외워서 시험을 보았던 일 등. 화가 이름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지만 정작 작품은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화가 모네의 전시회 소식을 보고 반가웠지만, 아쉬움 가득 안고 돌아왔다.
그리고 지난 11월 <모네는 런던의 겨울을 좋아했다는데>를 만났다. 이번엔 모네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있겠지 했는데, 모네 외에도 많은 화가와 그림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다. 모네의 작품 수련이 각인되어서인지 다른 그림은 떠오르지 않았다. 런던의 국회의사당을 그린 그림을 처음 보게 되었다. 그 소감을 솔직히 말하면 당황스러움이었다. 안개의 나라인 영국을 떠올릴 때 충분히 그림의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건 어떤 의도로 그려진 걸까 궁금했다. 그 궁금증과 함께 모네의 작품 세계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시간대별로 다른 <런던 국회의사당> 연작이다.
생각해보니 지금까지 나는 선명하고 보기에도 예쁜 그림이 좋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모네는 ‘빛’을 쫓는 사냥꾼이라고도 했다. 모네가 자신의 그림에 ‘빛의 혁명’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스승 부댕의 영향을 받은 덕분이다. 당시만 해도 화가들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한다. 나가서 대략의 스케치를 한 다음 화실로 들어가서 완성했다는 것이다. 수십 년이 지났어도 모네의 그림이 대중적으로 인기를 누리는 이유는 ‘파스텔톤’으로 불리는 화사하고 부드러운 색감 때문이란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히 ‘예쁜 그림’으로만 생각해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당시 고전적인 미술을 추구하던 파리 미술계의 회화에 대한 통념과 선입견을 깨고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물이 모네의 그림에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모네는 대상 자체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대상 사이에 있는 것’을 그린다고 했다. 예를 들면 루앙대성당이라는 대상이 아니라, 루앙대성당과 자신 사이에 있는 공기, 바람, 안개, 온도, 습기, 시간 그리고 빛 등의 요소들을 그리고자 했다. 분명히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거나 만질 수 없어서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졌던 요소를 주목하고 그것을 ‘덮개(enveloppe)’라고 불렀다. 의식하지 않으면 지나치게 되는 여러 요소들을 그림에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건초더미>, <포플러 나무>, <루앙 대성당> 연작까지 하나의 대상을 시시각각 변화하는 빛을 물감의 색으로 구현하면서 모네는 점차 자신이 추구했던 회화의 이상에 가까워져 간다. 모네가 추구했던 신념을 알고 나서 들여다보니 그림이 이해가 되었다. 신기하게도 살아있는 그림으로 보였다.
저자 허나영을 따라가는 여정은 모네의 생애와 예술적 공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주 활동 무대였던 파리부터 카미유와 행복한 시간을 보냈던 아르장퇴유, 가난과 상실의 장소 베퇴유, 예술적 이상을 완성한 지베르니, <루앙대성당>을 그린 루앙, 유년의 기억이 있는 센강 하구, 예술적 영감의 장소,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전쟁을 피해서 갔던 런던 템즈강까지의 여정이 들어있다. 특히 런던에서는 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가 터너의 작품을 보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었고, 평생의 후원자인 뒤랑뤼엘을 만나 부와 명성을 거머쥐게 되는 흥미로운 이야기도 있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빈센트 반 고흐가 떠올랐다. 생전에 한 점의 그림도 팔리지 않았던 가난한 열정의 화가 고흐. 대개의 부모가 그렇듯이 그의 아버지도 모네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열일 곱 살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힘든 시간이 찾아온다. 학교를 감옥 같이 여겼다는 모네가 맞닥뜨린 이런 암담한 상황에 르카드르 고모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부유했던 그의 고모는 모네에게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으며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고 이후, 화가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평생을 동생 테오에게 의지하며 그림을 그리며 열정을 불태웠지만 짧은 생을 마감하고 사후가 되어서야 열광적인 찬사를 받게 되는 고흐와 너무 대비되는 이야기다.
<생타드레스의 테라스> 캔버스에 유채. 1867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미국
<아르장퇴유의 양귀비밭> 캔버스에 유채, 1873년. 오르세미술관, 프랑스
왼쪽 <디에프 절벽> 캔버스에 유채, 1882년. 취리히미술관, 스위스
오른쪽 <푸르빌 절벽 위 산책> 캔버스에 유채, 1882년, 시카고미술관, 미국
카미유와 아들 장이나 알리스의 딸 등 가족을 소재로 그린 그림들이 많았다.
주변에 항상 도움을 주는 이가 끊이지 않았던 것을 보면 모네는 행운아였던 것 같다. 초기에 고모의 지원으로 화실에 들어가서 만난 장 프레데리크 바지유, 바지유가 죽고 나자 카유보트가 나타나 물심양면으로 후원하며 컬렉터가 되기도 한다. 그 누구보다도 모네가 화가로서 부와 명성을 얻기까지는 런던에서 만난 화상 폴 뒤랑뒤엘의 활약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뒤랑뒤엘은 모네와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사들여 전시회를 계약하는 등 미국에 진출하기 위해 파리에 있는 미국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정작 모네를 비롯한 화가들은 그러한 뒤랑뤼엘의 행보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그때까지 세계 미술과 문화의 중심이 파리였고 미국의 새로운 중산층과 상류층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 같다. 뒤랑뒤엘은 1886년 미국미술가협회 뉴욕지부에 전시를 개최해줄 것을 제안했고 결과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과정을 보면 한 사람의 성공이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만은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댄디’ 기질이 있던 모네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생활은 어렵더라도 하녀를 고용했으며 겉모습은 우아하게, 기차를 타고 나가 도시 풍경을 즐기는 파리지앵을 말한다. 양복은 반드시 파리에 가서 맞춰 입고 나중에 지불할 수 없게 되자 예술가인 자신이 입어주는 자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뻔뻔하게 설득했을 정도란다. 아무튼 화가로서의 자긍심은 꽤 상당했던 듯하다. 유행에 민감했던 그런 모네에 의해 <생라자르역>이라는 작품을 보게 된다.
<생라자르역> 캔버스에 유채. 1877년. 오르세미술관. 프랑스
생라자르역은 프랑스에 증기기관차가 들어오면서 1837년에 최초로 생긴 기차역이다. 화가의 꿈을 안고 파리나 노르망디 지역을 여행하며 그림을 그리거나 아르장퇴유와 지베르니 등에 터를 두고 파리를 오갈 때에도 항상 생라자르역을 거쳐야 했는데 그로 인해 그 곳은 자연히 모네 삶의 일부이자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된다. 생라자르 역사와 증기기관차가 그림의 소재로 많이 활용되었지만 역시 모네는 다른 관점으로 그렸다. 역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아서 탄생한 그림이다. 금방 사라져버리는 것에 주목한 모네는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모습을 짧은 시간에 그려낸다. 허락해 준 것은 물론 플랫폼에서 사람들을 내보내고 역사 안에 있는 기차들이 일제히 증기를 뿜어 올리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니 모네의 열정에 끌렸던 모양이다. 덕분에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남게 된다.
혹자는 모네를 두고 굉장히 수완이 좋고 정치적인 인물이라고 하며 세잔은 돈을 밝히는 인물로 평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예술인들이 경제관념이나 자신이 속한 사회적인 관계망에 취약한 사례가 많아서 모네가 특히 눈에 띌 수도 있다. 영감을 주었던 뮤즈 카미유가 병을 얻어 죽어갈 때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오슈데 부부가 파산 지경에 이르러 알리스가 여섯 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데리고 모네의 집으로 들어온다. 세간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껄끄러운 동거는 결국 부부가 되고 가족이 되어 화목하게 지낸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혼자 지냈던 화가들이 많았던 것을 볼 때 여덟 명이나 되는 자녀들을 보살피는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화가로서 부와 명예를 얻게 된 것은 어쩌면 처세를 알았고 강한 삶의 애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상이라고 확신한다. 나도 그 작품(모네의 <인상, 해돋이>) 앞에서 인상을 받았으니까. 이 얼마나 자유롭고 쉬운 작업인가! 이 바다 풍경보다는 벽지 패턴을 위한 기초적인 드로잉이 더 완성도가 있겠다’(P110)
초기에 저널리스트 루이 르루아의 이런 혹평을 받았던 모네의 그림은 1895년 <루앙대성당> 연작 전시를 본 클레망소에게 “모네의 삶도 그 석조 건물만큼 오래 보존되어야” 하며 그만큼 훌륭한 모네의 그림은 “우주를 지각하는 우리의 능력을 더욱 깊고 정교하게 만들어준다”는 칭송을 듣게 된다.
옛것에 얽매이지 않고 급변하는 현재를 들여다보는 시대의 흐름을 읽을 줄 아는,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하려 노력했던 모네에게 역사는 그 손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동료들은 떠나도 마지막까지 남아서 결국은 인상주의의 대표 주자가 된다. 말년에는 시력이 나빠져서 힘들었지만 86세까지 장수할 수 있었고, 항상 곁에서 보필하던 사랑스런 딸이자 며느리인 블랑슈와 모네 예술의 가치를 잘 알고 보존하기 위해 애써준 클레망소가 마지막을 함께 했으니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행복한 화가임에 틀림없다.
<수련> 캔버스에 유채. 1908년. 알퐁스조르주풀랭미술관, 프랑스
‘모네는 자연이 빛을 반영한 색의 효과로 만들어내는 온갖 다양한 모티프들을 연구해온 끝에, 그의 긴 생애의 마지막에서 가장 부드럽고도 모든 것을 관통할 수 있는 요소인 ‘물’을 다뤘다. 물은 투명한 동시에, 보는 각도에 따라 색이 바뀌며, 다른 사물을 비춘다. 물 덕분에 그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그는 빛이 반사하여 흩어지는, 보이지 않는 정신적 표면을 드러낸다. (…) 모네는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든 장인처럼 색에 대한 열정을 갖고 있다. 물의 밑바닥으로부터 몽상에 잠겨 소용돌이치며 색이 떠오른다.(P250)-당시 기자인 폴 클로델의 묘사-(‘물의 풍경’ 중)
명상의 공간, 오랑주리 미술관 '수련방'
모네가 처음 대장식화 <수련> 연작을 구상했을 때, 그는 수련이 떠 있는 물의 풍경 속에서 사람들의 강박과 긴장을 내려놓고 평화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랐는데, 그 꿈이 실현된 오랑주리 미술관의 '수련방'의 모습.
모네의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어 세계적인 화가로 우뚝 서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알게 되어서 유익한 시간이었다. 이제는 모네의 그림 앞에 서서 감상하는 일만 남았다. 파리에 가서 볼 수 있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도쿄의 어느 미술관에서 모네의 그림들을 감상하고 있는 나를 상상한다. 이 책으로 완벽하게 공부했으니 회심의 미소를 짓고 유유자적하며 미술관의 분위기 속에 취해 있는 내 모습...
<모네의 정원>
자연 그 자체를 화실로 삼았던 모네에게 있어 지베르니의 정원은 평생 꿈꿔온 이상적인 공간이었다. 수많은 <수련> 연작이 탄생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