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브게니 오네긴 열린책들 세계문학 79
알렉산드르 세르게비치 푸시킨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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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 작품을 읽게 된 것은 몇 해 전 세기의 발레리나 강수진의 자전 에세이를 읽고 깊은 감동과 여운이 남아있었고 그녀가 공연한 동명의 작품이기도 해서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푸시킨의 이 소설에서 소재를 얻어 차이콥스키는 같은 이름의 3막 가극을 작곡하였으며 1879년 모스크바에서 초연되었다고 한다. 세상은 모두 연결되어 있다고 하듯이 문학작품의 영감으로 음악이 만들어지고 여기서 또 예술가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면 세상은 서로 공존하며 조화를 이룬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 글을 쓰면서도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 하여 발레 공연 영상이나 오페라 음악을 찾아 들어보았다.


 이 작품은 7년여 동안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푸시킨 문학적 역량이 응축되었다는 작품이다. 시와 소설을 탈피하여 시의 리듬과 소설의 전개를 곁들인 독창적인 운문 소설이다. 모두 8장으로 구성으로 각 장은 40~60개의 연으로 이루어져있다. 서구의 소네트와 같은 형식으로 한 개의 연은 14개의 행으로 되어있다. 낯선 장르라서 그런지 처음부터 재밌지는 않았다. 좀 더 진행이 될수록 흥미로웠다.


 자세한 내용은 잘 몰랐지만 나는 먼저 발레 공연의 작품으로 알게 된 것이 더욱 뇌뢰에 남아서 읽으면서도 극적인 요소를 느낄 수 있었다. 화자는 오네긴을 알고 있는 친구로 느껴졌다. 하지만 어떤 때는 작가인 푸시킨이 되고 연인 따찌야나가 되기도 하면서 그들의 내면을 훤히 꿰뚫고 있는 인상을 주었다. 또한 중간 중간 연을 생략한 기법으로 독자의 상상의 여지를 준다. 화자는 독자를 소설로 끌어들여 참여를 유도하는 참신한 구성도 흥미를 유발한다. 한마디로 일반 소설은 독자 참여의 여지가 없이 관망하는 것과 달리 자유분방을 추구한 푸시킨의 의도가 깔린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친척의 유산을 상속받은 오네긴이 시인인 친구 렌스키와 이웃 마을의 영지에 갔다가 그에게 사랑의 포로가 된 따찌야나의 사랑의 고백을 냉정하게 거절한다. 사랑했지만 이룰 수 없었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다른 사람……! 아니, 이 세상에 제 마음을

바칠 사람은 그대밖에 없어요!

높으신 분의 섭리…… 하늘의 뜻으로

결정된 일, 저는 그대의 것입니다.

이제까지 제 인생은

그대와 어김없이 만나기 위한 저당이었어요.

알고 있어요, 신께서 그대를 보내 주셨다는 걸.

죽는 날까지 그대는 제 수호자라는 걸……

그대는 저의 꿈에 나타나셨어요.

보이지도 않는 그대께 제 마음 끌렸어요.

(P101 따찌야나가 오네긴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임.)

 



미인을 보아도 사랑의 느낌이 없어

그냥 꽁무니만 좇을 뿐.

거절당해도 금세 안정을 찾고

배신을 당해도 오히려 잘됐다 기뻐하고

미녀들의 사랑과 증오에 무감각.

사랑의 환희도 없이 그들을 탐했다가

미련의 아픔도 없이 차버렸다.

마치 무관심한 손님이

저녁때 휘스트* 게임을 하러 찾아와

앉아 있다가 게임이 끝나면

훌훌 털고 일어나

제 집에서 편히 잠들고

아침이 되면 깨어나

오늘 저녁엔 어디로 갈까 망설이듯.

주석) *휘스트-트럼프 놀이의 일종.(P113~114)



 젊은 상속자 오네긴에게 아무런 삶의 의욕이나 충만함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주인공 예브게니 오네긴은 국외자, 잉여인간으로 살아가던 당시 지성인들의 자화상을 보여주고 있다. 목적도 의미도 없이 살아가지만 그는 자신과 그가 처한 세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으며, 당시 지성인의 정체성 문제를 심도 있게 다루면서 아울러 자신의 모습을 투사하고 있다.


 자유분방함을 삶의 목적으로 여기던 오네긴은 은둔생활을 마치고 사교계의 야회에서 따찌야나를 마주하게 되는데...

 첫눈에 그녀를 알아보고 오네긴은 자신의 눈을 의심한다. 상사병에 몸살을 앓으며 자신에게 사랑을 구걸하던 나약한 여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당당하고 한 치도 흐트러지지 않는 차가운 모습의 따찌야나에게 자신도 모르게 사랑에 빠진다. 이미 결혼하여 공작의 부인이 되었는데...




오네긴 님, 저에게 이 화려함.


허위에 찬 이 역겨운 삶.

사교계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제가 거둔 성공.

저의 멋진 저택과 야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당장에 이 모든 가면 무도회의 누더기와

모든 광휘와 소음과 악취를 버리고

책장과 황량한 정원이 있는

제 초라한 고향집으로,

당신을 제가 처음 뵈었던

그곳으로,

제 가엾은 유모가 묻힌 무덤 위에

십자가와 나무 그림자 어른거리는

소박한 교회 묘지로 가고 싶어요…….


, 행복은 손에 잡힐 듯

그토록 가까이 있었건만……! 그러나 제 운명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어쩌면 제가

경박하게 처신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거듭거듭 말리셨습니다. 그러나 이 불쌍한

따냐에겐 어떤 운명이 주어지든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결혼했습니다. 그러니 부탁입니다.

제발 절 그냥 내버려두세요.

당신의 가슴속에 자존심과

순수한 명예심이 있다는 걸 전 압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감춰서 뭐 하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 몸,

영원히 그이에게 성실할 겁니다.(P265~266)

 


 뒤늦게 따찌야나에게 사랑에 빠진 오네긴의 정열적인 편지를 받았지만, 묵묵부답인 그녀를 만나기 위해 집으로 찾아간다. 그리도 도도했던 그녀, 수수한 옷차림에 창백한 모습으로 편지를 읽으며 말없이 눈물을 철철 흘리는 따찌야나를 발견한다. 화려하고 당당했던 겉모습과는 달리 오네긴을 잊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한 따찌야나의 직언에 오네긴은 벼락을 맞은 듯 참담한 상황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서 아름다운 것일까.


★ 발레리나 강수진의 <오네긴> 유투브 바로가기★

https://www.youtube.com/watch?v=i2Mb3SDNqqM


 객기어린 행동으로 렌스키의 약혼녀인 올가(따찌야나의 동생)와 춤을 추며 렌스키를 분노에 떨게 하고 그에게 복수했다는 만족감도 잠시 렌스키가 결투를 신청해 온다. 결투... 이 결투로 렌스키는 주검으로 사라지는데... 이 장면 또한 푸시킨의 드라마틱한 짧은 삶의 투영이 아닐까 싶다. 실제로도 미모의 아내 때문에 연적 단테스와의 결투로 생을 마감했다는데 어쩌면 예언과도 같은 이 작품에 섬뜩해진다. 짧은 생애를 살다갔지만 러시아 문학에 지대한 공헌을 한 푸시킨은 지금까지도 후대의 작가의 작품들에 살아있다는 것이다.


 결핍에서 꽃이 핀다고 했던가. 유배 생활, 정치적인 괴롭힘 등 황제의 시종으로 살아야했던 굴욕 속에서도 그의 문학은 꽃을 피웠다. 뿐만 아니라 자녀교육과는 거리가 멀었던 부모 아래서도 산더미 같은 책과 가정교사, 할머니의 이야기가 푸시킨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이백 여 년이 지난 작품임에도 오늘의 삶에서도 작품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그려졌다. 어렸을 때 아무 뜻도 모르고 읽었던대위의 딸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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