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지 않은 설교 믿음의 글들 366
조지 맥도널드 지음, 박규태 옮김 / 홍성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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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비롯한 많은 루이스 애호가들이 이 책을 읽기 전부터 이 책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루이스는 많은 저작에서 조지 맥도널드의 사상을 언급했고심지어 우리나라에도 번역되어 나온 조지 맥도널드 선집을 직접 엮어내기도 했다그 선집의 서문에는 맥도널드에 대한 루이스의 존경과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알 수 있다.


     “전하지 않은 설교라는 이 책의 이름도 그 와중에 몇 번인가 들어왔던 기억이 있다우리나라에는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던 시기알라딘에서 우연히 그 원서가 전자책으로 무료로 풀려 있는 걸 보고 당장에 손에 넣었었다이후 언제나처럼 읽어야 할 많은 책들에 밀려(영어의 압박도 한 몫을 하긴 했다제대로 읽지는 못했지만이번에 이렇게 홍성사에서 이 책을 번역해 내 주시니 감사할 따름.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이 책은 설교집이다조지 맥도널드는 상상력 넘치는 글을 쓴 작가이기도 했지만(무려 루이스 캐럴체스터턴톨킨도 맥도널드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에 앞서 잠시 목사직을 수행하기도 했다그 기간이 그리 길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이 책에 실려 있는 설교는 아마도 그 짧은 기간 동안 했던 설교였던 것 같다.


     전반적으로 설교에서 젊은이의 열정이 느껴진다주제를 다루고 있는 방식(전개)에서는 과감함이 엿보이고개념을 설명하는 데서는 맥도널드의 가장 큰 장점인 풍부한 상상력이 두드러진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들어오는 부분은이 설교집에 담긴 설교의 배열이다실제 설교의 순서를 이렇게 잡았는지아니면 설교집을 만들면서 배열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각각의 설교는 마치 단어 잇기를 하는 것처럼 서로 이어져 있다한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 다음 설교의 주제가 되는 개념이 언급되는 식이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설명이 지나치게 현학적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성경 본문의 해석에서는 창의성과 본문에 충실한 해석 사이의 균형을 잡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번역은 전반적으로 괜찮은 편인데이런 이유 때문에 후반부의 몇몇 설교문은 조금 지루한 감도 있었다.

 


     루이스 애호가라면 한 번 볼만한 책이다곳곳에서 아 이 부분은 루이스가 영향을 받았겠구나하는 문장들을 발견하는 건 즐거운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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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반주자를 위한 반창고
안선 외 지음 / 올포워십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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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널리 퍼져있는표준화된 예배 방식에서 찬양을 위한 반주는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만약 반주가 없다면 꽤나 예배의 분위기가 밋밋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그러면 예배 반주자들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해야할 것이다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서이에 대한 이해는 생각보다 부족한 경우가 많다.


     사실 반주자라는 자리가 교회 안에서 그리 눈에 잘 띄는 곳은 아니다정해진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반주가 나오고예배 참여자들의 시선은 스크린 속 가사나손에 든 찬송가에 집중될 뿐이다하지만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서그 중요성마저 우리의 생각에서 지우면 안 될 일이다.

 


     이 책은 어렸을 때부터 교회 반주자로 섬겨왔던 다섯 명의 대담자들이 만나 교회 반주자로 일하는 것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걸 엮은 것이다크게 네 가지 주제를 두고 각 주제에 맞춰 이야기를 하지만딱히 제한되는 것 없이 자유롭게 말하는 형식 때문인지 책 전체에 약간 생동감이 느껴진다.


     책은 사례비음향 시스템반주자의 신앙생활교회와 관련된 다양한 경험들 등의 네 가지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사례비와 관련해서 교회 음악을 전공했는데도 교회 안에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의 교회가 영세하기 때문이겠지만교회 음악을 전공한 이들이 교회를 통해 생계를 유지할 수 없다면이 분야의 발전은 불가능한 게 아닐까더 좋은 기독교 음악을 향유하고 싶다면그에 대한 투자혹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반주자들의 신앙에 관한 고민도 귀담아 들을 부분이다작은 교회의 경우 반주자 한 명이 여러 자리에서 반주를 해야 할 경우들이 생기는데이런 경우 교회 안에서도 제대로 된 멤버십을 누릴 수 없게 되곤 한다책에서는 신앙생활을 꼭 일주일에 한 번 교회에서만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식으로 좀 엉뚱하게 내용이 흘러가긴 하는데사실 이 문제도 대책이 필요한 부분이다.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지만기독교는 처음부터 한 번도 그렇게 개인적 신앙으로 머문 적이 없었다교회란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사람들의 모임이고그 안에서 교제를 이루는 것도 매우 중요하니까반주자들이 교회의 일원으로서의 의식을 느끼기 어려워진다면그건 큰 문제다.

 


     앞서 이 책이 약간 생동감이 느껴진다고 했었는데사실 이 말은 조금 바꿔보면 약간 정리가 안 되는 느낌이라는 뜻도 된다함께 대화하고자 하는 주제의 방향에 대한 이해가 서로 좀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았고특정인들이 대화를 좀 많이 이끌어간다 싶기도 하고대화에 앞서 어떤 설문조사가 있었던 것 같은데각 챕터의 앞쪽에 그 설문의 내용과 결과를 시각적으로 배치했더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고.


     이 책을 보면서 평소에 제대로 관심을 갖지 못했던 교회 반주자라는 자리를 한 번 더 돌아볼 수 있다면 좋을 듯하다교회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들음악을 담당하는 책임자들은 꼭 한 번 읽어봤으면 싶고어디다 제대로 얘기하기 어려웠던 고민을 안고 있던 반주자들교회의 여러 음악 사역자들도 읽어볼 만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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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식사에서 시작되었다 - 사회적 실험 그리고 초기 기독교의 정체성
할타우직 지음, 예가교회 엮음, 조익표 외 옮김 / 동연출판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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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해 보면 신약성경 속에는 수많은 식사 자리가 묘사되어 있다당장 복음서 속 예수님만 하더라도 다양한 사람들과 식사를 하셨고이 과정에서 중요한 교훈들이 여럿 있었다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예식 중 하나인 성찬은 식사를 그 모티브로 하고 있다그러니 이 책의 제목인 기독교는 식사에서 시작되었다는 말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이 책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는 주장을 펼친다저자는 아예 초기 기독교의 예배가 식사의 형태를 띠고 있었으며이 식사는 의식적 성격을 지닌 헬레니즘 연회의 변형으로그 자체로 특별한 저항과 변혁의 의식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말한다그리고 이런 식사’ 모델이 1-2세기 유일한 예배 형태였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꽤 과감하다.



     사실 저자의 주장에 공감이 가는 면이 많다오늘날 우리가 흔히 예배하면 떠오르는 정교한 예전에 따른 공식적 의식이 초기 기독교 시대에 있었을 것 같지는 않다아마도 예수님께서 그러셨듯이종종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과정에서 대화가 오고가며 하나님과 그분의 새로운 통치에 관한 이야기들이 오고갔을 것 같다.(이 점은 IVP에서 최근에 나온 ‘1세기 교회 시리즈에서도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에 관한 한 가지 대안은 회당 모델이다유대인들은 포로기 이후 오랫동안 회당을 중심으로 한 예배 전통을 유지해 왔고초기 기독교회도 이를 차용해서 예배를 진행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저자도 책에서 이를 언급하지만회당을 가리키는 시나고게가 폭넓은 회집을 가리키는 용어였다면서 이 모델을 탈락시키려고 한다그러나 이 단어가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과 초기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예배 형태를 회당예배에서 가져왔을 수도 있다는 주장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저자의 판단은 조금 성급해 보인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식사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녔을 것이라는 주장에는 상당부분 공감이 되면서도그것이 유일한’ 모델이었다는 데까지는 쉽게 동의가 되지 않는다무엇보다 당시 예배의 유일한 형태가 식사였다면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다른 문헌들예컨대 1세기 속사도들이나 교부들의 편지혹은 디다케나 헤르마스의 목자’ 같은 당대의 유명한 글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저자의 주장은 성경 속 여러 에피소드가 식사라는 배경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데 근거한다하지만 이는 저자가 말한 대로당시 식사가 폭넓은 인적 교류의 자리였기 때문에그 자리에서 기록될 만한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에 일어난 결과이지는 않을까그렇다면 이 식사모델이 과대대표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이 책에서 살펴본 당시 식사모델이 가지고 있는 의식적 성격그리고 비스듬히 기대어 눕는 것부터 시작해연회의 여러 순서들과 이에 대한 기독교적 변형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등은 기억해 둘만한 부분이다.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책의 번역 수준에 관한 것이다예컨대 책 초반에 이런 문장들이 있다. “그러한 구두의 연습이 어디에서 일어났는가를 물을 때증거들이 암시하는 것은 거의 유일하다”, “여기서는 참고문헌을 알려주는 각주가 있는 짧은 요약에서 두 주제의 상호관계에 대한 일부 제안을 잇는 정도로 만족할 것이다”.


     네 명의 번역자가 번역을 나눠서 진행했기에 부분에 따라 어느 정도 번역의 질 차이는 나지만사실 책 전체가 이런 문장들로 가득하다원 저자가 문장을 복잡하게 쓰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이런 문장으로 400페이지가 채워져 있는 책을 읽는 건 좀처럼 머리가 아픈 일이다.


     또이미 언급된 주장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되면서독자를 지루하게 만든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마치 논문처럼 주장과 관련된 다양한 내용들을 모두 싣기도 했지만대중들에게 읽히고자 한다면 나라면 핵심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이 책의 절반 정도의 양이 되는 책을 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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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룩스 크리스티
박지훈 지음 / 좋은땅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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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보기 드문 기독교 소설이다기독교 분야에서도 제법 많은 책들이 매일 쏟아지고 있지만유독 소설이라는 분야서는 그리 많은 작품들이 보이지 않는다물론 서양 작가들의 책은 조금 보이지만(예를 들면 윌리엄 폴 영이 쓴 오두막』 같은), 국내 작가들의 작품은 더더욱 적다이 책은 그런 출판 상황 가운데서 기독교 소설을 표방하고 나왔다시도 자체는 고무할 만한 일이다.


     왜 기독교 소설이라는 장르는 적을까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꼭 판타지가 아니라고 하더라도소설을 쓴다는 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과 같다그리고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세계는 대부분 온전치 못하기에 버려지고 만다물론 특정한 주장을 하기 위해 소설이라는 옷을 입은 글을 쓸 수도 있다그러나 그런 세계에는 독자가 들어갈 수 없기에먹음직스럽게 만든 플라스틱 전시물처럼 느껴질 뿐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기독교 소설이 갖는 주제의 한정됨 때문일 것이다많은 기독교 작가들은 자신의 신앙을 독자에게 전하고 설득하기 위해 작품을 쓴다물론 이 목적이 틀린 것은 아니다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으니까하지만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이 시종일관 전도일 뿐이라면그 사람과의 대화는 쉽게 피곤해질 것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작가가 만들어 낸 이야기 속 세계가 그리 실감나지도 않고그 안에 들어가서 인물들과 함께 호흡하기도 어려웠다가장 중요한 이유는 인물들의 대화 말고 다른 부분에 관한 묘사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인물들은 서점으로강의실로왔다 갔다 하지만 독자로서는 전혀 그런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이들이 어디 잠수함 속에서 토론을 하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 같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책에서 다루고 있는 두 가지 주제가 개인적으로 썩 잘 조화된다고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주인공은 서양문화사 수업 과제를 위해 십자가라는 주제를 탐구하는 동시에주인공이 꾸는 꿈을 통해 복음서의 십자가 처형 장소와 이어지는 경험을 한다.


     문제는 이야기의 핵심에 십자가에 관한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다는 것인데그 핵심에는 십자가를 기복주의적 상징물로 변질시키는 작업이 있었다는 것이다하지만 기독교의 기복주의화가 십자가의 의미 전환이라는 작업을 통해 일어난 것일 리 만무하고(그런 불필요한 작업 없이도 일어났을 것이다), 이게 주인공이 꾸는 꿈그리고 회심과 직접적인 연계가 되는 부분도 별개의 사건처럼 느껴진다.

 


     물론 소설의 주제의식은 쉽게 동의할 수 있다하지만 충분히 좋은 이야기소설로서의 문학으로는 조금 아쉬운 점이 많았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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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이란 무엇인가 - 개정판
톰 라이트 지음, 안정임 옮김 / IVP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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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찬은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교회의 아주 중요한 상징적 의식이었다물론 다양한 종교의식에서 그 참여자들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 관습은 흔하게 발견되지만신자들이 먹는 음식이 그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존재의 몸과 피라는 의미를 담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그만큼 독특한 의식이었고이 때문에 인신공양을 한다거나어린 아이들을 잡아먹는 야만적 종교라는 식의 가짜뉴스에 의한 공격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교회는 그런 오해를 받으면서도 이 의식을 바꾸거나 없애려 하지 않았다그만큼 이 의식에 담긴 상징과 그것을 기념하는 일이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종교개혁 시대를 전후해 개혁을 바라는 사람들이 요구했던 핵심 사항 중 하나도이 성찬에 제대로 참여할 수 있게(당시에는 일반 교인들에게는 빵만 떼어주고포도주는 성직자들이 독점했다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성찬은 교회의 역사와 신앙체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에도오늘날 많은 신자들은(특히 가톨릭교인들보다는 개신교인들 사이에서이 성찬의 의미는 많이 퇴색된 감이 있다성찬의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또 그 의미를 인식하고 있더라도 고작 일 년에 몇 차례만 행해지는 의식을 통해 얼마나 오랫동안 그 의미를 간직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성찬의 역사와 의미에 관한 짧은 드라마를 보여준다. 1부에서 저자는 엿보기라는 형식을 통해 독자들을 BC 2세기 터키의 한 마을로, 1세기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으로 데려가유월절에서 시작한 이 식사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변화되고 새롭게 재정의되었는지를 부드럽게 설명한다.


     2부에서는 성찬의 신학적 의미에 대해 좀 더 살핀다이 식사를 통해 과거 하나님의 약속이 되새기지는 동시에그분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하셨던 미래가 당겨져 온다이 식사를 통해 과거와현재그리고 미래가 한 자리에서 만나는 복된 시간이 열린다는 것.

 


     톰 라이트의 다른 책들처럼현란한 수사와 아름다운 문장이 돋보이는 책이다성찬의 자리를 과거와 현재미래가 한 자리에서 만나는 시간이라고 묘사할 줄 누가 알았을까그리고 짧은 몇 개의 드라마를 통해 자연스럽게 성찬의 의미가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그려내는 솜씨도 능숙하다여기에 이 문제를 두고 여러 개의 경쟁적인 의견들이 존재하며어떻게 핵심적인 가치를 중심으로 모아나갈지를 제안하는 현실적 접근도 의미가 있다.


     다만 여전히 남아있는 고민은저자가 말한 성찬의 맛보기로서의 성격이 어떻게 실제적인 신앙생활에서 적용될 수 있을지가 좀 더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는다예를 들면 코로나로 인해 사업이 망하고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성찬은 어떤 힘을어떤 식으로 줄 수 있을까성찬을 통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영적으로 먹고 마신다는 것은 우리의 기분과 생각을 넘어실제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얇은 책이라 금세 읽을 수 있을 것이다다만 이런 책은 읽고 끝낼 게 아니라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필수적이다아마 저자도 이를 알았는지각 장의 말미마다 두 개의 질문을 배치해 두었던 것 같다함께 이야기를 시작해 볼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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