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친구에게 - 믿음의 길 위에서 대화가 필요할 때
유진 피터슨 지음, 양혜원 옮김 / IVP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요약 。。。。。。。

 

     저명한 기독교계 저자 유진 피터슨이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신앙생활의 다양한 상황에 필요한 조언을 책으로 엮었다. 책 속의 친구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저자가 실제로 마주했던 사례들이라고 한다.

 

     ​편지 속 친구는 오랫동안 신앙을 떠났다가 일흔에 가까운 나이에 미네소타 인근의 한 작은 루터파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여기에서 그는 새로운 신앙적 경험들을 하면서 점점 기독교에 관심을 가져가고 있고, 기도와 예배 등에 관해 더 나아지고자 하는 욕구를 갖고 있다.

 

     화려한 외형이나 극적인 장치들보다 일상 속에서 잠잠히 변화해 가는 과정을 강조하는 유진 피터슨답게, 책 전반에 걸쳐 알찬 조언들이 가득 차 있다.

 

 

2. 감상평 。。。。。。。

 

     처음 몇 페이지를 읽을 때부터 이 책이 담고 있는 내공이 느껴졌다. 하긴 유진 피터슨과 IVP의 조합이니까. 책에는 모두 54통의 편지가 실려 있는데, 거의 매번 따로 표시를 해 두고 싶은 문장들이 발견된다.

​ 

     저자는 좀 더 깊은, 단순하면서 핵심에 제대로 다가갈 수 있는 신앙생활의 모습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런 신앙생활은 우리가 익숙하게 보고, 경험하는 교회생활과는 사뭇 다른 느낌일 것이다. 복잡한 교인양육 프로그램도 없고, 최신의 신학적 동향을 바탕으로 한 교재나 강의도, 화려한 조명과 울림이 좋은 음향도 없다. 성도들은 한 주에 한 번 모여 예배하고, 나머지의 날들에는 각자가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 

     저자에 따르면, 영적인 성장은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우리 삶 속에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100). 물론 여기에는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건 삼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지지, 프로그램이나 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피터슨의 조언은 매우 직설적이다. 그리고 이런 조언은 특정한 상황을 표적지로 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이 책에 실린 특정한 문장을 따로 떼어서 그것이 저자의 일반적인 견해라고 여기면 안 된다. 때로 강력한 비판은 (누구처럼) 그것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부분이 좀 더 보완되고 제대로 서야 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한다. 때문에 이 책은 어느 정도 신앙생활의 맛을 아는 사람, 행간을 읽을 줄 아는 사람에게 라야 권해줄 수 있을 듯하다.

 ​ 

     ​하지만 오히려 신앙생활에 관심을 두고 있는 초심자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다. 이런 저런 선입관 없이, 처음부터 확실한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도 있을 테니까. 이 책은 신학적인 내용 보다는 신앙생활을 말하는 데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충분히 읽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 

     얇지만, 훌륭한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 교회가 신앙을 지켜온 치열한 역사
알리스터 맥그라스 지음, 홍병룡 옮김 / 포이에마 / 201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요약 。。。。。。。

     저자는 오늘날 이단에 대한 감상적 관점이 역사적 사실(근거)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다음 문장을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처음부터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다. 개방적이고 느긋하고 성적 중립을 지키는 관대한 이단과 편협하고 독단적이고 가부장적이고 경직된 정통을 서로 대비시키는 일은 역사적으로 옹호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접근법은 오늘날의 문화에 맞춘 산뜻하고 매력적인 대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역사적 자료와는 양립할 수 없는 접근 방식이다.”(125)

  

      우선 초대 교회는 정통에 반대하는 이들을 제거할 만한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3세기 초까지 기독교회는 지속적으로 당국의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초기 고전적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에비온주의, 도세티즘(가현설), 영지주의, 발렌티누스주의, 마르키온주의 등은 적어도 권력에 의해 제거된 자유운동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단을 배제하는 움직임의 원인은 무엇일까? 저자는 이단이 교회의 권위나 구조에 제기하는 도전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의 미래에 주는 의미 때문”(134)이었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교회의 다수파(정통파)는 이단의 주장을 따를 경우 장기적으로 기독교가 가진 독특함을 상실하고 결국 소멸해버릴지도 모른다고 우려했고,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는 것이다. 물론 중세에 이르면, 신앙이나 교리보다는 교회와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는 것을 이단으로 규정하는 좀 다른 분위기가 되어 버린다(160).

 

     책 후반에는 이단이라는 집단을 만들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인지종교학이라는 연구를 통해 추적해 본다. 크게 다섯 가지로, 문화적 규범(기독교를 당대의 문화에 어울리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합리적 규범(기독교의 특정 교리가 비논리적이라고 여겨질 때 이를 합리화시키려는 의도), 사회적 정체성(특정한 이단교리가 일부 사람들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는 현상), 종교적 타협(다른 종교와의 공존을 위해 교리의 일부분을 완화시키는 것), 윤리적 관심(‘정통파가 특정한 윤리적 규범에 적절한 대답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 이에 대한 자체적인 답변을 제시하려는 시도)가 그것.

     여기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의 관계설정에 관한 짧은 논의들이 덧붙여지는데, 이 부분도 나름 흥미롭다.

 

  

2. 감상평 。。。。。。。

     초기 기독교의 역사는 박해와 이단과의 투쟁,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만큼 이단이라는 존재는 큰 영향을 끼쳤다. 그건 교회가 교리를 좀 더 정교하게 만드는 데 자극을 주었고,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물론 로마가 기독교화 된 이후, 그러니까 박해가 사라진 후의 이단 논쟁은 분열을 조장하거나(아리우스 논쟁) 투쟁에 참가한 이들의 개인적인 적대감이 반영된 경우(네스토리우스 논쟁)도 없지는 않다. 특히 고대 후기의 몇 차례 공의회에서는 매번 같은 주제(단성론 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인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단 논쟁은 단순한 감정싸움이 아니었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단순히 억압적 권력에 의해 제거된 힘없는 자유주의자들이라는 그림도 사실에 부합하지 않다. 이 책의 가장 큰 공헌은 바로 이 부분을 밝혀내고 있다는 점이다. 초기 기독교 내의 권력 관계, 그리고 실제 이단들의 성향은 현대의 낭만적 이상주의자들이 그리는 것과 전혀 달랐다.

     이단과의 투쟁 가운데서 정통교리에 대한 의식이 싹트고 정립되었다는 점은 기억해야 할 유익이다. 저자는 이 때 정통교리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만약 그랬다면 이단에 대한 배제가 그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기독교 사상과 예배 가운데 내재해 있었다’(45)고 말한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관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이를 보존하기 위한 이론적 틀을 세우기 위해 교리를 발전시켰다는 것(48).

 

     이 책의 장점은 정말로 있었던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부분이다. 고대의 주장과 현대의 주장이 섞여 시대착오적인 결론을 내는 이들이 빠진 함정을 피하기 위해, 실제로 있었음직한 사건들을 역사적 연구를 통해 재구성해 낸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부분은 이단의 본질, 혹은 이단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연구를 통해, 그들이 처음부터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악한 목적을 갖고 나온 이상한 집단이 아니었음을 보여준 부분이다. (이 점은 현대의, 특히 우리나라의 여러 교주들과는 사뭇 다른 부분) 초기 기독교회 안에서이단은 발생했고, 그들은 자신들이 기독교를 좀 더 나은 형태로 발전시키고 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책 전반에 걸쳐 저자는 이 의도면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인 연구를 마치고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 장에서 상상력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한다. 교회가 단순히 지적으로, 영적으로 정통에 맞닿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만 해서는 충분치 않다는 것. 정통이 갖는 강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데 실패한다면 얼마든지 또 다른 데서 그와 비슷한 상상력을 제시하는 이들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상상력이 결여된 의식만큼 따분하고 지루한 것도 없다(각종 기념식의 일반적인 축사 시간을 떠올려 보라). 정통이 진짜 기독교라면, 그건 따분해서는 안 된다. 그 메시지와 형식 모두가 세상을 뒤집었던 복음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정말로 중요한 일은 초기 기독교 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주변부를 단속하기 보다는 그 중심을 제대로 강조해 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 홍병룡 선생님의 훌륭한 번역은 크게 나무랄 데가 없지만, 책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이름을 당대에 사용하던 라틴어나 그리스식으로 표기하면서도, 일부(예컨대 순교자 저스틴유스티누스혹은 유스티노스라고 해야 하지 않았을까)에서는 영어식 표기가 등장해서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했다는 점이 살짝 아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괜찮아 그냥 너 하나면 돼 -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전하는 젠틀 위스퍼 그림 묵상 에세이
젠틀 위스퍼(최세미) 지음 / 42미디어콘텐츠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요약 。。。。。。。

     온라인상에 그림과 글로 자신의 묵상을 나누던 작가가 지난 내용들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그림 신앙 에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전체적으로 글과 그림으로 채워진 페이지가 반반 정도 되는 것 같다.

     각각의 장마다 두세 장으로 구성된 짧은 에피소드가 모여 있는 형태인데다,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면서 은혜를 새롭게 되새기는 식의 비슷한 내용들인지라, 총 여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크게 구분되는 느낌은 아니다.

 

 

2. 감상평 。。。。。。。

     일단 글자가 많지 않아 금세 다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림이 많은데, 복잡하게 그린 게 아니라 펜 그림 정도의 단순한 선들로 되어 있어서 보기에 편하다. 표지에 그려져 있는 예수님의 얼굴은 적당히 볼이 빨갛고 뭉툭한 코가 솟아 있는 귀여움을 강조하고 있는데, 책의 안쪽에 그려져 있는 그림들도 비슷하다. 잠시 머리를 식힐 수 있는, 편하게 볼만한 수준과 내용의 책이라고 생각하고 손에 든 건 자연스러운 일.

     하지만 막상 책장을 넘기다 보면, 여기에 실려 있는 작가의 고백이 단순히 책을 내기 위해 만들어 낸 내용이 아니라, 깊은 묵상과 기도, 그리고 깨달음이 배어 있는 문장들임을 금방 알아챌 수 있다.(수 만 페이지의 책들을 읽다 보면 저절로 생기는 감각이다) 잘 보이기 위한 어려운 용어와 문장들을 억지로 꾸며 쓰는 대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떠오른 생각들을 조심스럽게 모아서 예쁜 그림과 함께 배치한 책이었다. 그 덕분에, 처음에는 금방 읽어내고 말 것 같았던 이 적은 내용의 책을 보는 동안, 포스트잇을 몇 개씩이나 붙여가며 생각에 잠기게 된다.

     솔직한 고백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작가의 성향이 파악되어 버린다. 자신만만하게 나서기 보다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하고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그런 성격. 당연히 이 책도 그런 섬세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신앙인에게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브라함 카이퍼의 정치 강령
아브라함 카이퍼 지음, 손기화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요약 。。。。。。。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던 목회자이자 정치가였던 아브라함 카이퍼가 그가 주축이 되어 시작했던 반혁명당이 어떤 정치적 견해를 갖고 있는지를 정리 해 쓴 책이다.

     반혁명당이라는 이름 가운데 있는 혁명18세기 말 일어났던 프랑스 혁명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카이퍼가 왕권신수설에 기초한 절대왕정으로의 회귀를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책 전반에 걸쳐서 그는 입헌군주국인 네덜란드 왕국의 왕인 빌럼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각론에 있어서 카이퍼는 공정한 선거제도, 지방분권 같은 의제들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퍼가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 혁명의 근본에 있었던 무질서와 인간 본성에 대한 과도한 믿음, 나아가 무신론적 철학 때문이었다. 그는 이런 것들이 결국 국가적 독재, 혹은 전체주의로 나아갈 가능성을 우려했고(실제로 프랑스에서는 그런 역사가 있었다), 이에 대항하는 카이퍼의 정치철학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국가를 비롯한 각 영역에 자체적인 권위를 부여하셨기에, 국가는 가정이나 학교, 사회의 각종 기구에 전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영역주권론이다. 그는 철저하게 전체주의에 반대하는 분권적, 연합적 국가관을 표방한다

 

     ​책의 중후반부에서는 세금, 사법 제도, 예산안과 교육 등 국가 운영의 각 영역에 있어서 반혁명당의 견해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2. 감상평 。。。。。。。

     10년도 훨씬 전에 읽어봤던 아브라함 카이퍼의 원전이 번역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손에 들었다. (사실 이 책은 주제보다는 저자의 이름이 선택의 이유였다) 그가 보여주었던 개혁주의 정치학을 정리해 봐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 역시 편집본이나 발췌보다는 원적을 직접 읽는 맛이 있겠다 싶은 기대도 있었고.

     미주나 참고문헌 같은 페이지도 거의 없는 600페이지가 넘는 두께도 만만치 않았지만, 번역이 참 답답한 수준. 물론 대체적으로는 읽을 수 있는 정도였지만, 어느 정도의 선 이해를 갖고 때로 적당히 넘겨짚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다. 예를 들어 편집자 서문의 한 문장(11)은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우리에게 이것은 우리 시대와 동등한 증언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의 도전을 제시한다.” 이게 우리나라 말이긴 한가? 본문의 각주 중 하나는 뭔가 중요한 조사가 빠져 있다.(“카이퍼는 기억으로부터 인용하는 있다.” 401)

 

     카이퍼의 영역주권론은 기독교적 입장에서 세속정치를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제시했다는 의의가 있다. 그 때까지 기독교인들은 현실정치에 휩쓸려 어느 한 정파를 지지하거나, 영적 조언자로서의 영향력을 주는 정도였지만, 카이퍼는 아예 기독교적 관점에서 정치를 재구성하려 했다. 물론 그의 이론에는 현실을 수용하는 면적 적지 않지만, 이런 종류의 체계를 세우는 일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다만 그의 정치이론은 기독교인이 70%를 상회했던 네덜란드의 인적 구성을 배경으로 하고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정부가 일요일에 영화상영이나 여행, , 카지노 같은 업장들의 운영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은 기독교적 전통이 없는 세속국가나 지역에서는 쉽게 관철시키기 어려운 주장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정치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카이퍼는 자신의 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되는 것을 반대한다. 오히려 기독교인이 아닌 국민들에게도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을 몇 번이나 강조한다.(“자유롭게 하라. 일단 정부가 잡초를 뽑기 시작하면 밀을 가라지로 오인하기 쉽기 때문이다.” 136) 카이퍼가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가 가진 가치를 침해하지 않는 정부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과,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권한이 전능한 데까지 이르는 것으로 여기지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데 있다.

     지방 분권의 필요성이 점점 더 강조되고 있는 이 즈음, 카이퍼의 이론은 꽤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예컨대 선거제도에 있어서 카이퍼는 다수가 소수를 두 번 이상 이기도록 허용하는 제도를 반대한다. A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1만 명이고, B정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9천 명이라고 해 보자. 선거구는 3,500명의 A정당 지지지와 3,000명의 B정당 지지자가 있고, 선거구에는 4,000명의 A정당 지지자와 2,500명의 B정당 지지자가, 선거구엔 2,500명의 A정당 지지자와 3,500명의 B정당 지지자가 있다면, 선거 결과는 2:1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각 정당의 지지자 비율인 10:9와는 큰 차이가 있다. 그런데 실제 의회의 의사결정에는 사실상 2:0과 마찬가지의 결과를 가져온다.

     카이퍼는 이런 상황이 정치에 대한 불신을 키우고 결과적으로 국민들의 분열을 증폭시킨다고 본다. 시민들의 직접참여로 이루어지는 선거제도 자체가 반드시 정당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 혁명의 열정 안에서 때로 민주적인 제도를 통해서도 다수의 억압, 나아가 전체주의가 발생할 수 있음을 경계하는 이런 태도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꽤나 사려 깊은 통찰이다.

 

     다양한 면에서 기독교적 정치세력이 어떤 것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참고해 볼 수 있는 작품. 이 정도의 보편적 정서를 갖추어야 집권까지 할 수 있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의 한심한 자칭기독교 정당들의 꼴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독교는 이슬람을 어떻게 볼 것 인가 - 종교개혁자들이 바라본 이슬람
유해석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 요약 。。。。。。。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가장 먼저는 마르틴 루터, 장 칼뱅(책에서는 칼빈으로 표기), 불링어(책에서는 불링거로 표기) 등의 종교개혁자들이 이슬람교에 대해 했던 발언들, 저작 속 내용들을 정리하는 부분이다. 종합하면 당시 유럽의 기독교계의 부패상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이슬람교도들의 종교적 열심에 대해서는 일부 호의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가지고 있는 교리상의 문제점을 강력한 어조로 비판했다.

 

     ​책의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사실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2부에서는 이슬람 국가 안에서 살았던 기독교인들(딤미)이 어떤 핍박을 받으며 살아왔었는지 잠시 설명한 뒤, 할랄 제도가 갖는 신학적 함의로 넘어간다. 하지만 딤미에 관한 논의는 주로 오래 전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할랄은 현대적 의의에 집중해 구성상 매끄러운 연결은 아니다.

 

     ​3부는 최근 들어 이슬람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보고로 시작한다. 나아가 선교사 경력을 갖고 있는 저자답게, 이슬람교 선교를 위한 예비적 조치들을 제시한다

 

  

2. 감상평 。。。。。。。

 

     ​어떤 책을 낼 때 일반적으로 상정하는 목표가 세 가지 있다. 1) 새로운 정보 전달, 2) 저자의 주장 설득, 3) 작가의 감동/감상 전이가 그것. (오로지 개인의 만족을 위한 출판이라면 논외다.) 이 책은 이 중에서 어떤 것을 목표로 했을까? 대략 1)에 집중을 하려 했던 것 같지만, 여기에 충실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저자 자신의 주장을 덧붙여 가며 2)의 영역을 더해버린다. 물론 이 둘이 좋은 구성 아래 적절히 조화가 된다면 나름 성과를 낼 수 있겠지만, 그런 게 쉽지는 않다

 

     ​이 책이 갖는 비교우위는 종교개혁자들의 이슬람교에 대한 관점을 잘 정리해 내고 있다는 부분이다. 이런 내용은 다른 책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내용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점을 좀 더 부각시키려면 책의 제목과 부제가 서로 바뀌는 것이 더 좋을 뻔했다. ‘종교개혁자들이 바라본 이슬람이 제목이 되고, ‘기독교는 이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부제로.

 

     ​책의 주요 논지 가운데 하나가 종교개혁자들이 이슬람을 이렇게 생각했기에, 기독교는 이슬람교를 그대로 생각해야 한다는 식인데, 이 논제는 반론의 여지가 많다. 우선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의 모든 주장이 옳다고 믿지 않는다. 차라리 그들의 주장을 잘 정리해서 소개하는 데에만 힘을 쏟았더라도 책의 평점은 1점 이상 올라갔을 것. 그 뒤에 저자 자신의 주장을 부록처럼 덧붙였더라도 괜찮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의 구성 면에서의 아쉬움과는 별개로, 이슬람교도들을 무작정 적대하기 보다는 친구로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기면서, 동시에 기독교가 가진 독특성을 전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기억해 둘만하다. 이렇게 보면 이 책의 제목이 어느 정도 어울리지만, 전체적인 분량이라든지 하는 부분으로 보면 앞서 내 제안처럼 가는 게 좀 더 나았을 듯. 물론 더 중요한 문제는 책의 방향성을 좀 더 분명히 하는 것이었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