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멍청이’는 느닷없는 내 난동에 당황했다. (그는 나를 어릴 때부터 맡아서 길러주며 곡예도 가르친 사람이다. 그는 나를 데리고 곡예를 사람들한테 보여줄 때 일부러 우스꽝스런 바보짓을 하면서‘멍청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물론 그럴 때에는 괴상한 피에로 분장이다.)
멍청이는 채찍으로 나를 후려치기도 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꿀을 그릇째 갖다 줘 보기도 하고 일부러 굶겨 보기도 했으나, 그래도 난동이 멈춰지지 않으니까 난감한 얼굴로 한참 궁리하다가 ‘텔레비전’을 갖다 놓았다. 내 철장 바로 앞에 말이다. 나는 그 때부터 난동을 멈추었다. 그 순간 희희낙락하던 멍청이의 표정이라니!
멍청이는 이렇게 외치기까지 했다.
“이 미련한 새끼야! 그렇게 텔레비전이 보고 싶었으면 말로 하지.”
그러고는 ‘아 참, 곰 새끼는 말을 못하잖아.’하면서 자기 머리를 긁적이다가 사라져 버렸다.
그 때의 진상을 이제 밝히고 싶다. 멍청이가 텔레비전을 갖고 올 즈음에 나는 이미 지쳤던 것이다. 아무리 요동을 쳐도 철장을 벗어날 수 없을 뿐더러, 내 몸만 상할 뿐인지라 지치고 만 때였다. 하도 철장을 붙잡고 흔들어서 내 발톱들에서 피까지 나던 참이었다. 그렇게 지쳐 있을 때 텔레비전이 눈앞에 놓이는 게 아닌가.
낡은 텔레비전.
멍청이가 그것을 내 앞에 갖다 놓을 생각까지 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새끼 곰일 때 그가 나를 품에 안고 우윳병꼭지를 빨려가며 키웠는데 그럴 때 그 텔레비전이 눈앞에 있었다. 그는 비좁은 방에서 곰 새끼나 기르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그것을 발치에 두고 보면서 지냈던 것이다. 그 까닭에 나는 새끼 때부터 텔레비전의 화면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 낯익은 물건이 오랜 세월 뒤에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나는 그 날부터 난동을 부리지 않고 텔레비전의 화면을 보는 일에 집중했다. 먹이를 받아먹거나, 잠자거나, 곡예를 하러 철장 밖으로 나갈 때 이외에는 내 굴속(철장 안에 있는, 바위들로 만들어진 인공 굴이다.) 바닥에 엎드려서 그 텔레비전 화면만 보았다.
그런 나의 모습에 곡마단 사람들이 신기해하며 지켜보기도 했으나 사나흘 지나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철장 안의 곰에게 달리 낙이 없으니 그럴 수가 있겠다’고 이해하거나 ‘곰이 저러다가 말 거다’라고 편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하긴, ‘쳐 박아둔 낡은 텔레비전이 저렇게 요긴하게 쓰일 줄이야!’하는 감탄도 사나흘이면 족하지 않을까.
이제야 하는 말이지만 그 사나흘은 내 확장된 생각들이 지식까지 얻게 된 중요한 계기였다. 그것이 다시 내 눈앞에 놓이기 전까지 내 생각들은 단순하게 확장된 수준이었다. 그런데 그 화면을 온종일 볼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자 나는 그것이 보여주는 다양하고 깊은 지식들까지 내 생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내가 어린 새끼였을 때에는 명멸하며 바뀌는 것으로 여겨지던 화면들이 그렇게 오랜 세월 (나는 아직도 내가 몇 년을 산 곰인지 알지 못한다. 단발적인 생각들이 대부분이던 과거에서는 시간조차 짧게들 끊겨 있었기 때문이다.) 지나 다시 지켜보니 놀랍게도 의미 있게 이어지는 장면들이었다. 돌이켜보면, 단발적인 생각들이 이어지던 나의 지적변화가 텔레비전 보기에도 깊은 영향을 준 게 틀림없다.
온종일 켜져 있는 그것을 지켜보며 나는 갖가지 깊은 지식들까지 얻게 되었다. 내게 지식들이란 의미 있게 이어지는 장면들의 모음이었다. 곡마단 사람들이‘전기료가 더 들긴 하지만 텔레비전을 켜 두면 순하게 철장 안에 잘 있는 곰이다’고 판단했는지 온종일 텔레비전을 켜 두기 시작했다. 첫 번째 텔레비전이 수명을 다해 화면이 나오지 않게 되자, 멍청이는 두 번째로 다른 낡은 텔레비전을 구해서 갖다 놓았다. 아마도 쓰레기장에서 주워 왔을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온 사방에 버려진 게 흑백텔레비전들이었다.
벌써 오래 전부터 텔레비전이 당신네 사람들의 생활을 점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그조차 흑백이 아닌 컬러텔레비전의 시대로 바뀌면서 그런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 세 번째, 네 번째…… 낡은 텔레비전들 수십 대가 갈리도록 오래 살아온 셈이다, 나는.
사실, 텔레비전을 줄곧 보며 살게 되었다 해도 ‘재방영’이 없었더라면 내가 지식을 습득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히도 텔레비전은 재방영이 흔한 기계였다. 하다못해 돌발적인 사건이나 사고까지 늘 엇비슷한 장면들로 되풀이되니, 재방영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같거나 비슷한 장면들을 끝없이 반복해 보게 되면서 나는 이렇듯 박식한 곰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내 존재에 대한 절망감은 커져갔다. 나는 곰이었다. 생각이 있어도 그 생각을 표현할 마땅한 수단이나 방법이 없는 짐승이었다. 내 뭉툭한 아가리 구조가 어디 제대로 된 발음 하나 낼 수 있는 구조이겠으며, 내 무딘 앞발이 작은 볼펜 하나 쥘 수 있는 구조이던가? 당신네 사람들이 나만 보면 흔하게 외치는 ‘곰 새끼’란 발음 하나도 내 아가리를 통해 나오면 으르렁거리는 소리밖에 되지 못했다. ‘내 몸이 내 생각대로 움직여지질 못하는구나!’하고 깨달았을 때의 절망감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