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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내가 최봉석을 죽인 것 같다.

 

한참 망설이다가, 휴대폰에서 사내의 번호를 찾아 발신 버튼을 눌렀다. 엊저녁 횟집 앞에서 헤어질 때 원주에 오실 일이 있으면 말입니다하면서 사내가 직접 입력시켜 놓은 그 번호다. 초면인데도 내가 술값을 다 냈더니 자기가 사는 원주에서 한 번은 보답하고 싶어 했다.

발신 신호가 가는 중에 전화가 잘못 걸리기를 바라는 엉뚱한 마음이 생겼다. 웬 여자가전화 잘못 거셨어요.’하며 전화를 끊는 일 같은. 하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어제 그 사내가 내가 건 전화임을 알고 이렇게 외쳤으니.

아이고, 어제 춘천에서 신세 많이 졌습니다!”

컴퓨터 자판 소리도 약하게 들리는 것으로 봐, 사내는 사무실에 출근한 것 같았다. 춘천에서 마신 술의 취기도 다 털어냈는지 활기찬 목소리의 사내한테, 아침부터 최봉석의 사망 여부를 묻는다는 것은 실례가 아닐까. 내게 최봉석은 대학교 동창이지만 사내한테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우선은 안부부터 물어야 했다.

신세라니요? , 전화를 잘 받으시는 것을 보니까 무사히 귀가를 잘 하셨나 봅니다.”

그럼요.”

하면서 이어지는 껄껄 웃음. 어젯밤 여덟 시 경, 사내는 시외버스를 타고 원주로 돌아갔다. 막차가 아홉시 이십 분에 있다지만, 우리는 그 쯤 해서 두 번째 술자리를 끝내고 헤어진 것이다. 사내의 껄껄 웃음이 끝나기를 기다려, 쌀쌀해진 아침 날씨 얘기도 늘어놓다가 본 용건을 밝혔다.

, 제가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사내가 아연 긴장했다.

……러시죠.”

다름이 아니고 어제 술자리에서 얘기 나왔던 최봉석이 말입니다. 그 녀석이 벌써 오래 전에 술만 퍼 마시며 지내다가 죽었다고 하셨는데…… 그 때가 몇 년도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긴장이 사라지고 편한 어조로 돌아온 사내가 말했다.

그게 말입니다…… 너무 오래 전이라서.”

정확한 연도가 아니고 대충이어도 됩니다.”

가만 있자. 그러니까…… 제가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서 녀석이 그렇게 죽었다는 소식을 막 들은 것 같으니까, 1977년도가 될 것 같은데요.”

순간 나는 거대한 파도에 온몸이 휩쓸리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귀에 대고 있던 휴대폰을 떨어트릴 뻔했다. 이어지는 사내의 말.

그런데 그 연도를 아는 게 중요한 일입니까? 꼭 필요하시면 제가 오늘 중으로 다른 동창들한테 물어서 77년이 맞는지 재차 확인한 다음에

아닙니다. 그 정도면 됩니다.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제가 왜 그 녀석의 사망연도를 알려고 했는지, 까닭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

그럼, 다음에 또 만나서 한 잔 합시다.”

다음에는 원주에서 제가 낼 차례지요.”

그러면서 껄껄 웃으며 통화를 마쳤다.

1977년이라 했다. 두렵던 예감대로다. 내가 최봉석 그 녀석을 동해안 묵호읍에서 마지막으로 본 게 1974년 가을이니 그로부터 딱 삼 년 뒤에 죽은 것이다. 녀석이 삼 년 간 깡 소주만 마시며 한탄하다가, 술병이 나면서 스물일곱 살 한창 나이에 죽었다. 홧병에 의한 병사 같지만 사실상 자살이다. 자살의 동기를 내가 제공하였다. 내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

 

사람 사이의 인연은 하찮은 이유로 맺어지기 일쑤다.

내가 어제 아는 집의 결혼식에 갔다가, 하객을 접대하는 식당에서 사내와 술친구가 되었듯이 말이다. 만일 그 때 식당의 좌석이 남아돌았더라면 굳이 낯선 사내와 합석할 까닭이 없었다. ‘술을 마실 게 뻔해서 차도 두고 시외버스로 왔는데, , 합석한 인연으로 제 술 한 잔 받지 않으시렵니까?’하며 사내가 내게 소주 한 잔을 권하면서 우리는 대낮부터 술친구가 된 것이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얘기를 나누다보니, 집이 원주라는 사내와 나는 처음 만났지만 나이도 같고 아는 이들도 겹쳐서 친구사이가 될 만했다. 내가 잘 가는 횟집으로 자리를 옮겨 가며 친구사이가 됨을 자축하다가……최봉석 그 녀석이 죽은 지 오래 되었다는 얘기까지 듣게 된 것이다.

 

내 오랜 기억의 창고 속에서 두꺼운 먼지를 털고 떠오른 그 이름 최봉석’.

그 녀석과 내가 사십 년 전 사범대학교 영어과 동기라는 인연을 맺게 된 이유도 하찮았다. 그 즈음, 여기 춘천에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사범대학교가 생겨난 게 그 이유다. 춘천에서 사는 나야 그렇다 치고 먼 원주에서 사는 녀석이 굳이 춘천으로 유학 올 때는 그런 이유밖에는 달리 없지 않을까? 지금이야 찻길이 좋아 원주가 한 시간이면 닿지만 그 시절에는 세 시간 가까이 버스 타고 가야 되는 먼 곳이었다.

1970년 삼월 초 어느 날이다. 먼 산 구석진 데에 겨울눈이 아직도 허옇게 남아 있던 그 날, 201 강의실에 모인 사범대학교 4기 영어과 신입생들은 우선과대표를 뽑아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반장이나 실장이란 이름으로 학급의 리더가 있었는데 대학에 들어오니 명칭도 달랐다. 그 날 과대표로 뽑힌 아이가 최봉석이었다.

그 순간 우리는 자존심이 상했다. 여기서 말하는우리는 과 재적 사십 명 중 열다섯 명이나 되는 춘천 모 고등학교 출신 남자애들이다. 물론 나도 그 일원이다. 우리가 많은 인원이었던 까닭은 등록금도 싼데다가 집에서 다닐 수 있는 대학이라며 고 삼 때 담임선생들이 적극적으로 진학 지도한 때문이다.

과대표란 자리가 대단한 자리는 아니지만, 우리 중에서 차지할 것 같은 그 자리를 외지 녀석이 불쑥 차지하니 마치 굴러들어온 돌에 차인 것같이 된 우리 심정이었다. 더구나 여학생들 수가 반 가까이 되는 4기 영어과의 과대표라니, 필경 그 인기도 독차지할 것 같았다. 하긴, 여학생들의 전폭적인 성원에 힘입어 과대표로 선출된 것이다.

낯을 제대로 익히기도 전인데 여학생들의 전폭적인 성원을 얻은 과정은 요상했다. 사흘 전인 이월 말일, 수강신청 건으로 201 강의실에 4기 영어과 신입생들이 어수선하게 모였을 때 녀석이 스스로 나서서 통솔했던 것이다. 기억컨대 이랬다.

여러분, 잠깐 자리에 앉아 주시겠습니까?”

고등학교 적 빡빡머리가 아직 덜 자라 밤송이 꼴을 이룬 것으로 봐서는 분명히 선배는 아니고 같은 신입생으로 보이는 어떤 녀석이 칠판이 있는 앞쪽 여유 공간에 서더니 그렇듯 점잖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로 주변에 있던 학우들이 얼떨떨하게 각기 의자에 착석하자 녀석은 말을 이었다.

여러분,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국립사범대학교의 지성인들이라 다르시군요!”

그 말에 우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서로 얼굴을 보았다. 누군가는 쟤는 뭐야?’라고 쑤군거렸다. 그런데 여학생들은 학우들을 대상으로 한 마디 하는 웬 남자 아이녀석한테 호기심을 넘어 경의의 눈길로 주목했다. 녀석이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다. 단지, 좀 큰 키에 넓적한 얼굴이었다. 조용해진 강의실을 녀석은 미소 띤 표정으로 둘러보며 할 말을 계속했다.

급한 대로 누군가 나서서 과의 일을 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양해해 주신다면 제가 임시로 그 일을 볼까 합니다.”

그러자 여학생들이 박수를 쳤고 우리는 떨떠름한 낯으로 침묵했다.

, 제 소개가 늦었군요.”

그러더니 녀석의 어조는 갑자기 시조 창 어조로 바뀌었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로다. 오백년 왕업이 목적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가는 손이 눈물겨워 하노라. 누구의 시조인지 아시죠? 그렇습니다. 저는 고려 말 충신 운곡 원천석, 그 분의 고장인 원주에서 왔습니다. 성명은 최봉석이고요.”

그렇듯 언변을 과시하며 자기존재를 확실하게 드러냈기에 며칠 뒤 정식으로 과대표를 뽑을 때 여학생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선출된 것이다.

요즈음 대학생들이야 남녀가 거리낌 없이 어울려 다니는 모습이지만 그 시절 1970년경에는 그렇지 못했다. 강의실에 앉을 때에도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이 마치 휴전선이라도 중간에 둔 듯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앉았다. 심지어 하나뿐인 난롯가에 모여 불을 쬘 때에도 반걸음 정도의 간격을 두었다. 돌이켜보면 어처구니없지만 여하튼 당시는 보수적인 분위기였다.

그러한 때 최봉석, 그 녀석은 과대표가 되자마자 과의 통솔에 앞장섬은 물론이고 여학생들과 어울리기도 잘했다. 과대표라는 자리를 적극 이용해, 쉬는 시간마다 몇몇 여학생들을 거느리며캠퍼스를 누볐다. 당시의 남녀유별한 분위기 탓에 녀석 뒤로 여학생들 몇이 한 걸음 정도 떨어져 같이 다니는 모습이었지만 심기가 불편한 우리 눈에는 녀석이 여학생들을 거느리며다니는 것처럼 고깝게 보였을 게다.

치졸하지만 텃세가 엄존했다.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녀석을 외진 곳에 따로 불러다 놓고 너 좀, 설치지 말고 조용히 지낼 수 없겠니?’하며 겁을 줘 기를 꺾어놓을 수도 있었다. 그러질 못한 까닭은 녀석이딱히 뭐라고 트집 잡을 만한 허물없이맡은 과대표 일을 잘 해냈기 때문이다.

편치 않은 눈길로 지켜보는 우리를 의식한 것일까, 녀석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과대표라는 위상을 다지며 생활하는 모습이었다.

우선은 그 복장이다. 녀석은 처음 등장하던 날부터 검남색 외투를 걸쳤다. 우리는 잦은 신입생 환영 모임 탓에 옷에 막걸리 국물자국 등이 흔했으나 녀석은 그 외투에 국물자국은커녕 밥풀 하나 묻히지 않았다. 입학 기념으로 부모님이 사 줬을 그 외투를 정갈하게 걸치고서 마치 충신 원천석의 후손이라도 된 양점잖은 선비 걸음으로 강의실 사이의 복도나 캠퍼스 정원을 누볐다. 혼자도 아니고, 뒤를 따르는 여학생들한테 간간이 고개를 돌려 뭐라 한 말씀해서 고개들을 끄덕이게 하거나 깔깔깔 웃기거나 하면서.

그런 광경이 부럽지만 우리는 애써 관심 없는 척 담배나 열심히 피워댔는데 그조차 서툴러서 , 기침들이 잦았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 하찮게 맺어지기 일쑤라는 깨달음처럼 또 하나의 깨달음이 내게 있다. 세상에서는, 아무리 별스럽던 것도 얼마 후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되기 마련이라는 깨달음이다.

녀석의 별스런, 여학생들의 인기를 끌던 모습도 얼마 후면 아무 것도 아닌 게 될 게 분명했다.

 

녀석이 맡은 과대표 일이란 게 대부분 개강하던 즈음에 있었다. 수강 신청 조절 문제라든가 지도교수를 모시는 자리 주선, 과 회비를 걷기, 같은 과 선배들과의 모임, 사범대학생회와의 연락 관계 등의 일들이 그렇다.

그런 일들로 녀석이 학우들 앞에 서서 뭐라 지시하고 설명하고 권유하는언변을 구사할 때에는 예의 검남색 외투차림이 멋져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한 달 정도 지나 그런 일들이 마무리 되고 나면 과대표로서 언변을 구사할 일 없는, 별 볼 일 없는 존재가 되면서 괜히 검남색외투 하나 걸치고 거들먹거리는 싱거운 원주 촌놈인 것이다. 키가 컸으니 분명히 싱겁게 보일 게다. 그렇게 되면, 뒤 따라다니던 몇몇 여학생들도 제풀에 떨어져 버리지 않을까?

그렇다. ‘철학개론강의 덕분이다. ‘철학개론강의가 없었더라면 녀석은 그런 꼴이 날 뻔했다. 그 강의 덕분에 녀석은 매주 한 번씩 언변을 과시할 기회를 가졌고, 그럼으로써 과대표로서 구축한 위상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철학개론. 교양필수 과목으로서, 화요일마다 두 시간씩 하던 그 강의. 담당 철학교수는 체구도 작은데다가 간이 안 좋은지 늘 어둑한 낯빛이었다. 대개의 교수들이 묵은 노트나 두꺼운 책을 펴놓고 일방적인 설명식 강의를 진행하는 데 비해 그분은 항상 학생들의 발표를 전제로 한 강의를 진행함으로써 따분할 수 있었던 철학 강좌를 긴장되고 흥미로운 장으로 만들었다.

구체적으로는 이렇다.

강의가 시작되면 먼저 학생들이 칠판 앞에 나와 그 날 진도 나갈 교재내용에 대해 자기의견을 보태어 발표한다. 그러면 교수가 다 듣고 나서 총평한 뒤 덧붙여 손수 교재내용도 설명해 줌으로써 강의를 마치는 식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항상 교재내용을 예습하고 발표할 준비도 해야 한다.

처음에 그런 강의방식을 천명했을 때 학우들이 일제히 웅성거리며 반발했다. 교재를 매주 예습해 오는 것까지는 참을 수 있지만 학우들이 지켜보는 칠판 앞에서 발표도 한다니? 그분은 머지않아 교단에 설 미래의 교육자들을 위한 좋은 방법이라 강변했지만,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몇 달밖에 안 된 애송이들로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 아닐까?

학우들의 반발하는 소란이 쉬 가라앉지 않자, 그분은 ,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 어둑한 얼굴에 흰 치아로 씨익 웃으면서 모두 진정하도록 한 뒤 일부 수정해서 말했다.

다만, 희망하는 학생들에 한해 앞에 나와 발표하라는 겁니다. 작년에는 말입니다, 앞 번호 학생부터 지명해서 발표시켜 봤는데, 글쎄,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나 잡아 잡수하며 서 있는 경우가 태반이라서 올해는 이렇게 발표 방식을 개선해 본 것입니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학우들은 박수까지 쳐댔다. 그분은 만일!’ 하고 외쳐서 성급한 박수를 제지한 뒤 덧붙였다.

발표하는 학생이 없으면 그 때는 제가 일방적으로 출석번호 순으로 발표를 시킬 겁니다. 작년 방식대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발표하는 학생에게는 가산점을 부여합니다. 알겠습니까?”

그러면서 그분은 우선은 첫 시간이므로 당신 혼자 백 분 강의를 강연식으로 열강 하였다. 그렇다, 열강이었다. 얼마나 인상 깊은 열강인지 사십 년 넘은 세월인데도 눈앞에 선하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 첫 강의의 제목은 철학은 무엇인가?’였다. 그분은 자기 몸을 가리는 교탁을 한 옆으로 밀쳐두고서 마치 일인극의 배우처럼 손짓발짓에 침까지 튀겨가면서 열강 했다.

철학, 그것은 주변 사물에 대한 놀라움이다. 늘 하늘에 떠 있는 별이지만 왜 저 별이 떠 있는지, 놀라운 눈길로 쳐다볼 때 철학은 시작되는 것이다. 그것을 경이라고 하는데

하면서 칠판에 驚異라고 백묵으로 휘갈겼다. 얼마나 격렬하게 휘갈겼는지 백묵이 부러지기도 했다.

이것을 영어로는 'WONDERING'이라 한다. 아아, 원더링!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얼마나 원더링한가?”

그분은 쉬는 시간 십 분도 무시하고 계속 백 분 간 혼자 열변을 토하는 것으로 첫 강의를 마쳤다. 강의를 끝내면서 엄포성 당부도 잊지 않았다.

다음 주 이 시간에는 여러분이 교재의 제 2장인 인간의 본성에 대해 각자 예습한 것을, 나와서 발표하는 것입니다. 일인당 십분 내외로 발표시간이 주어지는데, 그러나 만일 처음부터 발표 희망자가 없거나, 발표자가 있다 해도 다음 발표자로 이어지지 않을 시에는 작년 방식대로 출석번호 순으로 나와서 발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차 알립니다.”

그 분이 강의실을 나가자, 남학생들은 젠장, 괴상한 원더링 교수를 만나서 매주 두 시간씩 욕봤다!’며 탄식들이나 하는데 잔꾀가 많은 여학생들은 달랐다. 벌써 해결책을 찾았다.

점잖게 앉아 있는 최봉석한테 몰려가우리 과대표님께서 다음 주 철학시간에 발표자로 나서서 아주 멋지고, 길게, 길게 발표해 주세요!’하며 매달렸다. ‘길게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그래야만 교수가 자기네까지 발표시킬 시간이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다른 학우였다면 부담스러워 고개를 저었을 텐데 녀석은 달랐다. 정갈한 검남색 외투의 목깃을 두 손으로 잡아 올리더니 잘 알았으니 걱정들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하였다.

마침내 일주일이 지나 화요일, 문제의 철학개론 시간이다.

강의시작 시간에 맞춰 시계바늘처럼 등장한 철학교수. 그분은 작은 체구에 번뜩이는 눈빛으로 우리를 둘러보고는 칠판 앞을 지나, 창가에 빈 의자 하나를 갖다 놓더니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쥐 죽은 듯이 있는 우리를 향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자아, 지난주에 예고한 대로 오늘 배울 2장 인간의 본성에 관해, 앞에 나와 발표할 희망자는?”

그러자 여학생들의 눈길이 일시에 과대표 최봉석에게 쏠렸다. ‘으흠!’헛기침을 한 번 한 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검남색 외투자락을 잔잔하게 팔락이면서 칠판 앞으로 나아갔다. 교수한테 자기 학번과 이름을 대며 고개 숙여 인사드리고는, 학우들을 향하여 그 넓적한 얼굴에 잠깐 미소를 띤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천성이 착했다는 성선설이 있습니다. 이는 맹자께서 하신 말씀이고요, 그러나 인간은 본래 악하게 태어났다는 이른 바 성악설도 있는데 이것은 순자께서 말씀하셨지요. 교재의 내용은 이런 두 가지 인간성에 대한 설명을 다뤘습니다. 저는 그 중에서 성악설을 중심으로 제 의견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얼마나 못됐습니까? 오늘날 사방에서 벌어지는 흉악한 범죄들만 보아도

하면서 장황하게 자기의견을 발표하는데 결론은인간성 타락이 극에 달한 것 같은 오늘날, 우리 모두는 삼강오륜의 참 정신을 되살려야 한다.’였다. 솔직히, 어버이날 같은 때 국영방송의 해설시간에나 나올 진부한 내용이었다. 젊은 대학 일년생의 발표내용 치고는 고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 해도 어둑한 낯으로 간간이 눈빛을 번뜩이는 철학교수가 가까운 창가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별 실수 없이 첫 발표를 수행했다는 점에서, 녀석은 언변 좋은 과대표로서의 위상을 다시 한 번 다진 셈이다.

다만, ‘길게시간을 끌어주지 못하고 십여 분 정도밖에 안 됐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녀석은 의기양양하게 제 자리에 돌아와 앉았으나시간을 길게 끌지 못했기때문에 여학생들, 특히 출석번호가 빠른 학우들은 불안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과연 그분은 적당히 넘어가지 않았다.

최군이 첫 번째로 나와서 자기 의견까지, 발표를 잘했습니다. 그에 따른 평은 나중에 제가 하겠습니다. , 그럼 두 번째 발표자로 나설 학생은?”

그 어조는, 만일 발표학생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지난주에 공언했듯이 출석번호 순으로 그냥 시키겠다는 뜻이었다. 학우들끼리 서로 보며네가 두 번째 발표자로 나가면 안 되겠니?’하는 애타는 표정들인데 그분이 재차 촉구했다.

, 그럼 두 번째 발표자는?”

조용한, 곤혹스런 침묵이 강의실에 자리 잡는가 싶을 때다. 불쑥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 앞으로 나갔다. 생각지도 못한 등장에 학우들이 놀라면서도 안도하는 표정인데, 나는 앞서 녀석이 그랬듯 그분한테 학번과 이름을 대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발표를 시작했다.

오늘 배울 교재 내용은 앞서 최봉석군이 발표한 대로입니다. 그 부분에 관해서는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최봉석군이 주장하는 의견과 다르다는 입장에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미 세상은 삼강오륜 같은 옛 성현의 말씀들로는 어쩌지 못하는 복잡다단한 시대에 접어들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삼강 중 부위부강이라 하여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을 말하는데 어디 그런 것이 만인이 평등하다는 현 시대에 들어맞겠습니까?”

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걸맞은 윤리의식의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거창한 결론을 내리고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언뜻 들어서는 참신한 주장인 듯싶지만 사실 녀석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진부한 내용이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녀석을 뒤이어 발표자로 나섰으니.

나도 모르게왜 그랬을까? 오랜 세월이 지난 이제 돌이켜보면 그럴 만한 동기들이 있었다.

첫째로, 생각지도 못한 나의 영웅심이다. 그분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 그럼 두 번째 발표자는?’했을 때 나는, 난감한 침묵으로 있는 학우들 속에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과장되게 표현한다면 ‘4기 영어과의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할까? 더구나 최봉석 녀석이 그 상투적이고 케케묵은 의견을 발표하고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마치 학우들의 난감한 침묵을 내심 즐기는 표정 같아 나는 더 이상 의자에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 같다. ‘이 자식아, 그깟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어! , 이제부터 지켜 봐.’하듯이.

이런 심리도 겸했을 수 있다. 수만 많았지 정작 아무 것도 아닌 세력처럼 된 우리 불쌍한 춘천의 모 고등학교 출신들을 대표해 무언가를 보여주자는 심리. 나중에 깨달았지만 영어과로 들어온 우리 동기들은 한결같이 양순한 애들이었다. 오죽하면 내가 다 발표자로 나섰을까?

둘째로, 오랜 세월 드러내지 못했던 나의 발표욕구이다. 맞다. 이 동기가 더 확실하다. 이 부분을 얘기하자면 사연이 좀 길다.

이런 사연이다.

본래 우리 집은 춘천 시내에서 사십 리쯤 떨어진 시골에서 살았다. 그곳의 조그만 초등학교에서 나는 항상 반장이었는데 그럴 만했다. 많지 않은 학우들 중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기 때문이다. 시골학교에서 공부 잘하면 반장을 맡기 마련이라, 나는 장장 육 년 간이나 반장을 맡았다. 그러니 얼마나 숱하게 칠판 앞으로 나가서 학우들을 향해 뭘 발표하고 그랬을까? 의기양양해서 말이다.

그런데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의기양양하게 발표하는 위치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아버지가 오남매나 되는 자식들의 장래를 위한결단으로 시내로 이사를 강행하면서 시내의 중학교를 다니게 된 나는 발표는커녕 아무 말도 못하고 조용히 지내는 아이가 되고 만 것이다. 시내 학교에서는 나 정도로 공부하는 애들이 널렸을 뿐만 아니라 나보다 더 잘하는 애들도 많아서 나는 그만 기가 콱 죽었다. 더는 칠판 앞에 나가서 발표할 일 없는, 반장이 아닌 극히 평범한 아이로 추락한 것이다.

그런 공부 차원의 이유 이외에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렵게 된 가정형편이 그것이다. 시내로 이사 온 뒤 아버지가 차린 연탄직매소가 망하면서 어머니가 어느 식당의 주방보조 일로 집안의 생계를 맡게 되었다. 가정형편이 안 좋게 되자 나는 그 영향으로 하루 종일 학교에서 말이 없는 내성적인 아이가 되고 말았다.

남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처지에 툭하면 말다툼이던 부모님, 교복이라고는 외삼촌의 낡은 교복 한 벌을 얻어 입고서 등교하던 나, 학기 초마다 장남인 내 등록금은 마련되었지만 누나나 여동생은 계집애라는 이유로 그렇지 못해 자매가 집 앞 골목에서 동네 창피하게 울고불고 난리치던 일……. 정말,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단 하나도 추억하고 싶은 게 없다. 돌이켜보면 그런 열악한 가정형편에서, 학비가 저렴한 사범대학일망정 어떻게 진학할 수 있었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부모님이 어떻게 해서든지 장남 하나만은 대학교에 보내자고 뜻을 모은 것일까? 그 순간만은 부부싸움을 멈추고?

여하튼 그런 사연을 지닌 채 대학에 들어왔는데, 그 날, 최봉석 녀석이미소를 지어가며 공자 왈 맹자 왈 떠들어대는 것을 목격하고는 저깟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충동에 휩싸이면서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발표에 나선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터진 나의 발표 욕구였다. 그래서 실수하기 딱 좋은 발표였는데 뜻밖에 무난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물론 내 목소리는 떨렸다. 발음이 두어 번 헛나가거나 반복되기도 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나의 등장과 언변에 놀랐다가 주목하는 학우들의 표정들이라니……. 특히 맞수로 등장한 게 분명한 나란 존재를 착잡한 눈길로 지켜보던 녀석의 표정. 그렇다면 나의 첫 발표는 성공적이라 해도 좋았다.

역시 그분이 씨익 웃으며 칭찬했다.

두 번째 이군도 아주 잘했습니다.”

손목시계를 보며 다시 말했다.

자 그럼, 또 이어서 발표할 학생은?”

부드럽게 변한 어조로 봐서, 굳이 세 번째 발표자를 기다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긴, 나까지 두 사람이 발표하면서 오십 분 강의시간 중 이미 삼십 분이 지났으니 남은 시간 이십 분은 당신이 총평하기 알맞은 시간이 아닐까. 짐작대로 그분은 창가 의자에서 일어나 칠판 앞에 서더니 총평으로 들어갔다.

오늘 최군과 이군, 두 학생이 처음인데도 발표를 아주 잘했습니다. 두 학생의 인간성에 대한 견해와 해법이 갈리는데 저는 어느 쪽이 옳다 그르다 재단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성에 대하여 생각도 해 보고 그런 생각을 학우들한테 거침없이 표현해 봤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깨어 있는 자세요, 철학하는 자세입니다.”

그런 내용의 총평으로 한 시간을 마쳤다. 쉬는 시간 십 분 뒤 둘째시간이 이어지자 그분은 비로소2장 인간성단원의 내용을 당신이 자세히 해설해주는 것으로 강의를 마쳤다. 정말, 성실하고 멋진 철학교수였다. 항상, 당신이 맡은 철학 강의시간에서 단 일분도 허투로 쓰지 않았다. 치밀하게 계획하여 남김없이 매주 두 시간의 백 분 강의를 수행하였다. 특히 강의에 들어갈 때마다 학생들의 발표시간을 가짐으로써 강의실 분위기를 환기시킴은 물론, 본질적으로 강의의 주체는 교수가 아니라 학생이라는 사실마저 일깨우려 애썼다.

안타까운 일은, 최봉석과 나 이외의 다른 학우들은 그분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분이, 그럼 세 번째로 발표할 학생은?’해도 언제나 과묵하게(?)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들로 버텼다.

그렇긴 하다. 사십 명의 눈길들이 일제히 주목하는 가운데 주어진 주제에 대하여 자기 의견을 흔들림 없이 펼친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가? 상상만 해도 두려운 일일 게다. 다른 과의 철학개론 시간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우리 4기 영어과의 경우에는 과대표 최봉석과 라는, 특이하게도 발표를 즐기는 존재들을 둔 덕분에 학우들이 별 고생 없이 잘 지낸 셈이다.

결국 최봉석 녀석과 내가 학습할 내용에 대해 의견발표를 하고 나면 그분이 나서서 총평하는 식으로, 세 사람이 등장하여 전개되는 연극처럼 4기 영어과의 철학개론 강의가 매주 이루어졌다.

발표 학생에게는 가산점을 부여한다는 그분의 천명이 있었지만, 나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비록 철학개론 교재 내용을 전제로 하는 의견발표이지만, 매주 한 번씩 내 생각을 마음 놓고 떠들어댈 수 있다는 즐거움에 그깟 부가점은 염두에도 없었다. 귀가해야 우울한 집안이고, 등교해도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대학 캠퍼스였다. 지금이야 재적 학생 수가 이만 명을 넘는, 빌딩들의 집합체 같은 거대한 대학교이지만 당시에는 고작 삼사백 명 학생 수에 불과해서 초라한 건물 두어 채가 전부였다. 학교로 가는 길도 비포장 자갈길에, 다니는 시내버스도 없어 그 먼 길을 터벅터벅 걸어 다녀야 했다. 이래저래 답답한 현실에서 그렇듯 사십 명의 눈길이 나를 지켜보는 가운데 한바탕 떠들어대는 그 즐거움.

더구나 먼저 발표한 자의 주장을 비판하면서 내 주장을 펴는 그 묘한 즐거움이란!

즐거운 기회부여만으로도 감지덕지할 판인데 무슨 가산점은? 그런데 녀석은 가산점 부여에 어떤 생각이었을까?

막걸리 흘린 자국 많은 바지에 중고 군화를 질질 끌고 다니는 나와 달리 모든 면에서 정갈한 품위를 유지하는, 빈틈이 없어 보이는 녀석이었으니 가산점 부여 문제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내가 오늘까지 다섯 번 발표를 했으니까 최소한 오 점은 벌었다는 식으로.

매주 철학개론 시간마다 맡아 놓고 가산점을 받는 식이 되면서 그런 계산은 어느 시점부터 무의미하게 될 수밖에 없을 터. 그렇다면 녀석에게도 철학개론 시간의 의견발표는 즐거운 기회부여의 시간이었을 게다.

앞서 지적했던, 하마터면 별 볼 일 없는 과대표로 전락했을 것을 막아줌과 동시에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맹자 왈 공자 왈 떠들어 대는 즐거움을 계속 누리도록 한 기회 말이다. 그래서일까, 녀석은 열심히 철학개론 교재내용을 예습하고 그에 따른 자기의견 준비를 철저히 하는 것 같았다. 발표할 때마다 뭘 메모한 종이를 한 장 들고 있는 것은 기본이고, 어려운 한자를 칠판에 써대는 빈도도 나날이 잦아지는 등, 날로 치밀해지던 모습이 입증한다.

그와 달리 나는 교재내용을 한 번 읽어보는 것 이외에는 달리 의견 준비를 하지 않았다. 녀석이 먼저 발표할 때 그 내용을 잘 듣고 나서 두 번째 발표자로서 나서서는, 녀석의 의견을 비판함과 동시에 그것을 바탕으로 내 의견을 즉흥적으로 마련했다. , 비겁한 짓을 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으나 듣는 모두가 재미있어 하며 경청들 하니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물며 철학교수마저 재미있게 경청하는 표정인 바에야.

초등학교 시절 장장 육 년 간이나 반장 하며 발표를 즐기던, 갖가지 다양한 언변 기술을 구사하던 내 숨은 이력이 어디로 사라진 게 아니었다. 이제는 놀랍게도 예의까지 갖추어 가며 직전 발표자를 공격하는, 발전된 모습이었다. ‘최군이 고전에 관한 해박한 지식까지 동원하며 의견발표를 하신 것에, 경탄을 금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최군은 혹시, 이번에 다뤄질 주제와 상관없는 엉뚱한 고전을 참고로 한 것은 아닐까요?’하는 식이다. 그럴 때마다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고생하던 학우들. 그런 학우들을 짐짓 못 본 체, 능청스레 계속 발언하던 나.

 

어느 날, 녀석이 내게 말했다.

이군. 이제는 나도 이군의 의견을 비판하는 그런 재미 좀 보고 싶은데……?”

쉬는 시간, 201 강의실 옆 복도 창가에서였다. 201 강의실은 4기 영어과의고등학교 적 교실처럼 애용되던 장소이다. 녀석이 예의미소를 빠트리지 않고 제의하는 것이라 차마 거부할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하기로 순서를 바꾸어 봤는데…… 학우들이 사적으로 과대표가 하는 공격은 너무 점잖고 시시하다고 항의하면서 다시 순서를 환원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 그분까지 학우들과 같은 생각이었던 듯, 발표순서가 환원되자 안도하는 표정 같았다. 역시 그 성향으로 봐도 거창하게 공자 왈 맹자 왈 하기를 좋아하는 녀석이 먼저 발표하고, ‘눈앞의 현실에 근거하여 신랄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내가 그 다음으로 발표순을 갖는 게 훨씬 긴장되고 재미있었다.

그렇다고 녀석과 내가 척지고 지내는 것은 아니었다. 녀석과 나는 일단 철학개론 시간이 끝나면 더 이상 발표내용을 언급하지 않고 지냈다. 마치 링에서 한바탕 맞붙은 권투선수들이 게임이 끝난 뒤 별 일 없이 지내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녀석과 나는 가까이 어울리며 지내지도 않았는데 그건 여러 모로 다른 둘의 차이 때문이라 여겨진다.

출신지뿐만 아니라 성향도 다르고 하다못해 술 담배 문제까지 달랐으니 딱히 어울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대학 들어오면서 술 담배를 시작했는데 녀석은 그런 면에서는 청교도나 다름없었다. 남학생들 세계에서 술 담배를 즐기느냐 여부는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친구가 되느냐여부와 일치했다.

사적으로 늘 이군’ ‘최군이라고 서로를 호칭하던 일도 그렇다. 철학교수가 학생들을 그리 부르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학생인 우리끼리 그런다면 얼마나 촌스러운가. 나는 녀석한테 그러지 말고 다른 애들처럼 그냥 이름을 부르자.’고 제의하고 싶었지만 결국 못했다. 녀석이 워낙 한결같이 점잖은 목소리로 이군!’하고 불러대니 말이다. 그 때 나는일단 어떤 어조로써 이뤄진 인간관계에서 그 어조를 바꾸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해가 바뀌어 이학년으로 접어들면 그런 어쭙잖은 호칭 대신 이름을 부르는, 편하게 부르는 상대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일 년 이상을 같은 강의실에서 대하는 얼굴이었으니.

끝내 그러지 못하고 만 것은, 녀석이 일학년이 끝나자마자 자퇴해 버렸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참 안타깝다. 만일 녀석이 자퇴하지 않았더라면 하다못해 호칭만이라도 이름으로 바꿔 부르는, 편한 사이가 되었을 것 같아서다.

결국 그런 미해결의 호칭 문제 또한 그대로 남아서, 몇 년 뒤 녀석과 동해안 묵호읍에서 우연히 만나 술자리를 갖게 되었을 때 여전히 거리감을 갖고서 대화하다가 인연이 악연으로 바뀐 게 아닐까?

 

회상이 너무 건너뛰었다. 다시, 철학개론 시간마다 녀석과 내가 맞수가 되어 의견발표를 빙자해 논쟁을 벌이던시절로 돌아가자.

여기서논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녀석도 내 의견을 비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늘 다음 순서인 나한테 비판당하는 처지에 서자 어느 날 녀석은 발표에 앞서 먼저, 지난주에 이군이 발표한 주장에 대해 제 생각부터 말씀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하며 학우들의 양해를 구했다. 그 날부터 자기도 비판의 대열에 들어섬으로써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

어디까지나 철학개론 강의시간 중에 전개되는 논쟁이었으므로, 녀석과 나는 논쟁이 말다툼으로 변질되지 않도록주의하였다. 둘 다 그런 정도의 인격은 되었다. 둘 사이의 논쟁이 매주 이어지면서, 간간이 미소까지 지어가며 발표를 점잖게 잘하는 녀석 못지않게 나라는 존재도 학우들 사이에 재미나게 발표 잘하는 친구로 금세 떠올랐다.

그러면서 내게도 과의 여학생 두 명이 한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따르며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점잖기가 대단한 녀석한테나 있는 일인 줄 알았더니 내게도 그런 일이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별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여학생들이어서 무성의하게 대꾸해주고 그랬더니 얼마 못 가 제풀에 떨어져 버렸다는 사실이다. 여학생들이라 해서 모두 예뻐야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렇지, 하필 예쁜 구석 하나 없는 여학생들만 내 뒤를 따르면서 수시로 말을 건네는 데는 나도 모르게 부아도 치밀면서 과히 좋은 대답을 해 주기 어려웠다.

이런 회상일 때, 나는 혼자 얼굴이 붉어진다. 왜냐면 철학개론 시간에 녀석과 논쟁을 벌일 때마다 나는인간은 외면이 아니라 내면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곧잘 했기 때문이다. 말은 그러면서 정작 실제로는 그러지를 못했다. 아니,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발표시간이 끝나면 기억조차 못했다.

나도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녀석도 잘생기진 않았다. 그럼에도 항상 몇몇 여학생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녀석.

그 중에는 과에서 제일 예쁜 여학생도 끼어 있었다.

녀석에 못지않게 발표 잘하는 내가 왜 녀석과 달리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없었을까?

돌이켜보면 이런 분석이 가능하다. 우선은 표정이다. 수시로 미소를 띠는 부드러운 표정의 녀석과 다르게 나는 우울한 가정환경 탓인지 밝은 표정이 못되었다. 누가 나를 잘못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듯 어두운 표정이었다. 게다가, 옷차림도 녀석은 항상 정갈했으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날씨가 무더워지자 녀석은 마침내 그 대단한 검남색 외투 대신 마치 동사무소의 모범공무원 같은하얀 반팔 남방과 검은 바지차림으로 다니기 시작했는데, 나는 여전히 검게 물들인 군복 차림이었다. 당시에 그런 군복 차림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내 경우에는 유행을 따랐다기보다 그 옷을 갈아입을 만한 여유가 없었다는 게 바른 해명이다. 마땅히 갈아입을 만한 옷들도 없었던 데다가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내 성격이었다. 그 탓에 내게서는 늘 퀴퀴한 땀내가 나지 않았을까?

그런 남학생이라면 아무리철학개론 시간마다 앞에 나가서 발표를 잘한다해도 여학생들이 따를 리 없었다.

이런 분석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가능한 것이고 당시에 나는나보다 더 잘생긴 것 같지도 않은 저 녀석한테 왜 항상 여학생들 몇몇이 팬처럼 따를까?’하는 의문을 떨쳐버리기 힘들었다. 게다가 녀석의 그 미소라니. 솔직히 그 미소는 그토록 작위적일 수가 없었다. 넓적한 얼굴이 일시에 입가 중심으로 조작해냈다가 다시 얼른 원 상태로 돌아가는, 그런 조잡한 미소에 다 큰 여학생들이 반해서 따라다닌다는 건 정말 이해 못할 일이었다.

어찌 되었건 녀석은 강의실에서 뭘 발표할 때도 항상 그 미소를 잃지 않음으로써원주 치악산 골짜기에서 도를 닦다가 춘천에 등장한, 인자한 도사나 선비 같은 이미지유지에 성공하였다.

그렇다. 화요일마다 있었던 철학개론 강의가 일학기 종료와 함께 사라지고 난 다음에도 녀석은 그렇게 구축된 인자한 이미지 하나로써 계속 그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이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비록 철학개론 시간은 사라졌지만 녀석 뒤로는 한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따르는 몇몇 여학생들이 여전히 존재하던 게 그 증거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가을빛으로 물들어가는 캠퍼스 정원을 녀석이 점잖게 걸어가다가, 뒤를 따르는 몇몇 여학생들에게 뭐라고 한 마디 하여 그 말씀에 감동하는 탄식도 나오고 깔깔깔 웃게도 하던그 광경이 눈앞에 선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강의실에서 우연히 녀석의 뒷자리에 앉게 되었다. 아직은 낮이 더운 가을 날씨라서 학우들 대부분이 여름옷 차림이었는데 녀석은 남다르게, 검남색 외투를 벌써부터 걸치고 점잖게 앉아 교수의 강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뒤에서 그 외투의 목깃 부분을 무심히 보다가 놀랐다.

목깃 너머로 보이는 또 하나의 목깃하얀 와이셔츠의 목깃이었던 듯싶다.부분이 땟자국으로 더러웠다. 밥풀 하나 외투자락에 묻히지 않고 항상 단정한 품위를 유지하는 녀석한테 그런 부분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천만뜻밖이었다.

녀석은 학교 부근에서 하숙한다는데, 다른 외지 출신 애들과 다르게 혼자 방을 쓴다 하였다. 경제적으로 괜찮게 사는 부모를 둔 덕에 객지생활일망정 호강하는 녀석 같았다. 그렇다면 녀석은등록금이 저렴한 대학을 찾아서 춘천의 사범대학으로 유학 온애들과 달리 정말참된 사도를 실천하고자유학 온 경우일지도 몰랐다.

녀석은 철학개론 시간에 의견발표를 할 때도 항상 건전하고 바른 내용이었다. 우울한 가정환경 탓인지 비비꼬인 의견을 구사하기 일쑤인 나와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러니까 녀석과 나는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지내는 것이다.

하는, 결론까지 혼자 내린 적이 있었기에 그 날 녀석의 땟자국으로 더러운 목깃을 발견하기란 뜻밖이었다. 하숙방도 혼자 쓸 정도라면 빨래 정도는 주인집아주머니가 도맡아 해 줄 텐데, 꾀죄죄한 목깃의 꼴은 최소한 일주일 이상 빨래가 되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 된 일일까? 하숙비가 밀려서 빨래거리를 내놓지 못했나?

지루한 강의 탓에 나는 쓸데없는 의문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철학개론 강의마저 사라진 그 이학기.

가을은 깊어 가는데 나는 재미도 없고 지루한 대학생활에, 그저 학우들과의 잦은 술자리 낙으로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녀석에 대한 기억이, 그 기간에는 어느 날 본 목깃의 때이외에는 공백이나 다름없이 되고 만 것이다.

누가 내게어떻게 한 학기 동안, 어떤 학우에 대한 기억이라는 게 고작 목깃의 때뿐이라니, 그게 말이 되냐?’고 힐난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사실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남자들 세계에서는 술 담배를 할 수 있느냐 여부가 친구가 될 수 있느냐 여부와 일치한다. 나는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고 그 즈음 술 담배에 젖어 살았다. 대학생이 되었다고 용돈을 주는 집안형편이 못되었으므로, ‘주말에 초등학생 세 명을 가르치는 과외지도까지 하며 술 담배에 드는 경비를 스스로 충당했다.

강의가 끝나면 곧바로 하숙집으로 귀가해, 방 한복판에 책상을 펴놓고 앉아 고전들을 항시 읽는다는 최봉석 녀석과는 전혀 어울릴 일이 없었다. 아쉬운 일이다.

어제 결혼식장의 식당에서 만나, 나중에 횟집으로 자리를 옮기면서까지 술잔을 나눈 그 사내가 최봉석이가 아마, 대학에서 자퇴하기 몇 달 전부터 어렵게 자취하며 살았을 겁니다술회하는 순간 나는 속으로 내가 당시에 녀석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더라면 그런 고생을 진작부터 알았을 텐데!’한탄했다.

하지만 녀석의 어려운 처지를 진작부터 알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졌을까? 나 또한 초등학생들을 주말에 가르치던 일이 사라져 버려 돈 한 푼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새벽까지 술을 마신 탓에, 애들을 지도하다 말고 책상에 엎드려 잔 뒤 그 날 이후로 최초의 제자들이라 할그 애들이 더 이상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녀석이 이학년 일학기를 등록하지 않고 자퇴해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71년 삼월 초의 어느 날이다.

201 강의실에 불쑥 나타난 영어과 조교가 여러분. 새로 과대표를 뽑아야 하지 않습니까?’하고 말하기 전까지, 나는 최봉석 녀석이 자퇴했다는 사실도 몰랐다. 자퇴는커녕 녀석이 201 강의실 어디에 앉아 있는 줄 알았다. 그만큼 녀석한테 별 관심이 없었다. 철학개론 강의가 있었을 때에는 논쟁의 맞수로서 녀석을 확실히 의식하며 지냈지만, 이듬해인 71년 삼월 초경에는 녀석이 강의실에 있는지 없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녀석이겨울방학 중에 잇달아 부모님을 잃으면서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자퇴했다는 사연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여학생들이 쑤군대는 얘기를 엿들은 거라서 그 이상의 자세한 사연은 알 수 없었다.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남학생이 녀석의 자세한 사연을 몰랐을 듯싶다. 이십 명의 남학생 중 열다섯 명이 우리 춘천 모 고등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일 년이 지났음에도 우리의 녀석에 대한 거리감 내지 경원감은 여전했다. 대학 이학년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녀석은 원주에서 온 촌놈이었다. 그 즈음 원주는 춘천에서 시외버스로 세 시간은 가야 닿는 데라서, 먼 시골 같았다. 우리에게 춘천은강원도 도청 소재지라는 자부심의 도시였다.

 

74년 시월 어느 날이었다.

어두워지는 하늘 아래 상점들이 하나둘 불 밝히던 저녁 시간, 동해안의 묵호읍 거리에서 나는 녀석과 맞닥뜨렸다. 녀석은 자전거 짐받이에 짐을 높이 싣고 조심스레 페달을 밟으며 오고 있었다. 큰 키라서 구부정하게 상체를 숙여 핸들을 잡은 모습.

야아, !”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맞닥뜨린 녀석에 나도 모르게 반말로 불러 세웠다. ‘최군!’같은 예전의 어줍은 호칭을 잊었다.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하면서 녀석은 자전거를 세운 뒤 왼손으로 자전거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나와 악수를 했다. 내가 말했다.

아니, 어떻게 된 거야?”

녀석이 얼른, 짐받이의 높은 짐으로 휘청거리려는 자전거를 두 손으로 잡으며 답했다.

어떻게 되긴, 건어물 가게 직원이지.”

멋쩍은 표정으로 낄낄 웃더니건어물 배달 일이 곧 끝날 테니 가까운 술집에서 만나자고 제의했다.

내가 단골로 들르는 인천 식당이 묵호역 앞에 있었다. 10평 내외의, 할머니 혼자 꾸려가는 식당 겸 술집인데 동태찌개를 맛있게 끓여내서 손님들이 많았다.

인천 식당 어때?”

그 집 좋지. 내가 배달을 마치고 갈 테니까 미리 가 있으라고.”

인천 식당에서, 나는 동태찌개부터 시켜놓고 녀석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게 뒤바뀐 녀석과 나의 처지였다. 녀석이 마치, 학창시절의 나처럼 검게 물들인 군복을 작업복으로 걸친 데 비해 나는 정갈한 신사복 차림이었다. 녀석은 가게 점원이지만 나는 어엿한 중학교 영어선생이었다.

묵호읍에서 삼십 리쯤 되는 면소재지 시골 중학교에, 그 해 74년 삼월 일일 자로 부임해 어느덧 시월이었다. 시골에서 지내는 답답함에 나는 주말마다 묵호읍에 바람 쐬러 나왔었다. 목욕탕에 들러 목욕 겸 이발하고, 인천 식당에 들러 동태찌개를 안주로 소주 몇 잔을 걸친 뒤 하숙집으로 귀가하곤 했다.

교사 임용이 하늘의 별 따기 같다는 요즈음과 달리, 사십 년 전에는 사범대학교를 졸업만 하면 교사로 임용되었다. 대학 졸업을 앞둔 사학년 이학기 때 나는 밀린 학점들을 보충하느라 여간 고생했던 게 아니다.

어쨌든 나는 점잖은 위상을 갖추었는데, 녀석은 예전의 나처럼 입은 옷 여기저기에 무엇이 묻고 냄새도 나는 신세였다. 이런 경우를 인생역전의 한 예로 들 수 있을까? 생각할 때 녀석이 술집으로 들어왔다.

깨끗한 남방으로 갈아입었고 세수도 한 듯했다. 야윈 얼굴이지만 향긋한 비누냄새마저 났다. 동태찌개를 안주 삼아 우리는 소주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영동선과 태백선의 승객들이 내리는 묵호 역 앞에는 늦은 시간까지 합승택시들이 대기해 귀가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취해 가며 그간 몰랐던 서로의 사정을 알았다. 녀석은, 내가 가까운 시골 중학교에 영어교사로 있다는 말에 놀란 표정을 일부러 지으며 아이고 우리 영어선상님!’하면서 다시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건어물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게 된 사연도 털어놓았다.

부모님이 거의 동시에 돌아가시면서 졸지에 고아가 되고 만 게 아니겠니? 공부도 공부이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사는 게 가장 시급한 일이었지. 어린 동생이 둘이나 있거든. 그런데 마침 여기 묵호에서 건어물 가게를 하는 고모님이 내게 전화해서 , 여기 와서 가게 일 좀 도울래?’하기에, 원주 집에다 동생들을 놔두고 나 혼자 여기로 온 거지. 온 지 벌써 삼 년이 되어가네.”

같은 지역의 중학교로 부임한 지 일 년이 돼가는 나와 어떻게 그 동안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는지, 참 모를 일이었다. 삼십 분만 걸어도 한 바퀴 다 도는 좁은 묵호 바닥이었다. 각자 동선이 달랐기 때문에 그 동안 못 봤던 게 아닐까? 나는 목욕탕, 다방,‘인천 식당을 들러서 귀가하는 동선이지만 녀석은 건어물을 배달하느라 정해진 장소나 오갔을 것이다. 또한, 주말이 돼야 읍에 나올 수 있는 내 처지도 있었다.

나야 퇴근하면 하숙집에서 지내는 생활이지만…… 그래, 가게에서 지내는 생활이 어때?”

고모님이 잘 해주시니까 큰 고생은 없지. 하루에 댓 번 건어물을 자전거로 나르는 게 다라고 보면 될 거야. 원주에 있는 동생들을 최소한 고등학교까지는 공부시켜 놓아야 제 밥벌이라도 하지 않겠니? 그래서, 고모님이 매달 용돈 조로 주시는 봉급을 받는 대로 원주에 송금하고 있지.”

바로 사 년 전 201 강의실에서, 정갈한 검남색 외투차림에 점잖은 목소리로 공자 왈 맹자 왈 하던 녀석이 이제는 빛바랜 남방차림에 어쩔 수 없이 생선비린내를 풍겨가며 그간의 신산한 역정을 털어놓고 있었다.

큰 고생은 없다했지만 바닷바람에 깎인 것처럼 야윈 얼굴은 결코 편하게 사는 게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취기가 더해가면서도 여전히 상대방 이름을 부르지 못했다. 예전처럼 최군’‘이군이라고도 못해, 하는 수 없이 상대를 부르는 호칭은 생략한 채 대화를 나누었다. ‘일단 어떤 어조로써 이뤄진 인간관계에서 그 어조를 바꾸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나는 재차 절감했다.

별로 심각하지 않은 얘기들이나 나누다가, 적당한 시간에 우리는 헤어졌어야 했다. 그랬더라면 그 후로도 가끔씩 인천 식당에서 만나 우정까지 쌓는 좋은 관계로 발전했을 테다. 먼 객지에서, 한 때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한 학우와 재회한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인연이니까.

결국은 그렇지 못했다. 모처럼의 술자리는 파국으로 끝났다. 인연이 악연이 되고 만 것이다.

 

화기애애하게 술잔이 오가다가 우리는 어느 새 논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대학 시절 철학개론 시간에의견발표를 빙자한 논쟁을 한 학기 동안 벌였었는데 그 짓을 재현했다. 시작은 녀석이 했다. 갑자기 점잖은 어조가 되어 이렇게 말했다.

실존주의에서의 실존이라는 게 말이야, 결국은인간이 어떠한 짓을 하거나 말거나 사물은 변함없이 그대로 존재한다.’는 뜻이거든. 예를 들어서 여기 묵호역 앞에 사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거나, 혹은 병들거나, 이혼하거나, 교회 가거나, 하는 다양한 모습들로 살아가지만, 그러나 역의 건물이라든가 주변 산천, 하다못해 늘 역에 들렀다가 다시 떠나는 수많은 기차들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항상 그 자체 그대로 존재한다는 말일세. 참으로 이런 사물들이 무심하게실존하는 가운데 이러쿵저러쿵 하면서 사는 우리 인간들은 얼마나 무상한 존재인지! 내가 그런 실존에 대한 생각들을 요즈음 한창 정리해 보고 있지.”

순간 나는 녀석의 초라한 허상을 목격했다. 녀석이 말도 되지 않는실존운운한 것은 내가 지금은 비록 건어물을 배달하는 신세이지만 여전히 책을 읽고 사색을 멈추지 않는, 예전처럼 품격을 갖춘 사람이다.’라고 허세를 부리는 것에 불과했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는실존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그것은극한상황 같은 데서 잘 드러나는 인간의 주체적 상태를 뜻했다. 녀석이 말한 실존은실재라고 해야 옳았다. 물론 실재는 인간이 아닌 사물에 한했다. 녀석은 실존이란 글자의 한자 뜻만 보고 무리수를 내게 던진 것이다.

사실, 나도 얼마 전까지실존이란 말뜻을 제대로 몰랐었다. 교무실에서 철학과 출신 사회선생과 대화를 나누다가 정확한 말뜻을 설명 들었던 것이다. 대화라기보다 내가 일방적으로 설명 들었다는 게 맞는 말이다. 공교로웠다. 철학 전공자한테서 바른 해석을 들은 지 며칠도 안 되어 녀석한테서 엉뚱한, 잘못된 해석을 듣게 되다니!

들어서 마시려던 소주잔을 상에 다시 내려놓으며 나는 녀석한테 말했다. 냉소적인 어투였을 게다.

무식한 자식 같으니라고. 임마,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제대로 공부를 해. 네가 지금 실존에 대해서 엉뚱한 소리를 했거든? 이제부터 내 설명을 잘 들어. 실존주의에서 말하는 실존은 그런 뜻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중심으로 한 의미 탐구인데.”

하면서 자세하게 그 뜻을 설명해 주었다.

하얘지면서 참담하게 일그러지던 녀석의 표정이라니. 예전에 필요할 때마다 지어내던 미소는커녕 고개마저 떨어뜨리고 내 앞에 침묵하며 앉아 있었다. 할 말을 잃은 녀석을 두고 나는 술자리에서 일어났다. 할머니한테 미리 술값을 치르고는 녀석한테 한 마디 말을 침처럼 뱉었다.

, 간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역 쪽으로 걸어갔다. 어서 합승택시를 타고 하숙집이 있는 시골로 가야 했다.

그 후로 최봉석 녀석을 만날 일도, 마주칠 일도 없었다. 좁은 묵호보다는, 동해안에서 가장 번듯한 도시인 강릉으로 바람 쐬러 다녔기 때문이다. 오가는 시간은 더 걸려도 음악 감상실, 영화관, 레스토랑…… 다닐 데가 많았다. 시설 좋은 목욕탕도 여러 군데 있었다.

시간을 보내다가 밤늦게 출발하는 청량리 행 영동선 열차를 타면 한 시간도 안 돼 묵호역에 닿고, 거기서 합승택시를 타고 하숙집에 갈 수 있었다.

그 해 겨울방학이 들어가기 직전인, 십이월 중순경의 어느 날이다.

나는 묵호읍에 나와 일을 보았다. 귀가하기 전에 인천 식당이 떠올랐다. 추운 날씨라, 할머니의 따듯한 동태찌개가 먹고 싶었다.

여전히 삐거덕거리며 열리는 식당의 미닫이문. 몇 달 만이지만 할머니는 나를 기억했다. 손님 대부분이 노동자인데 드물게 회사 다니는 청년으로 보였을 내 차림이나 인상 때문일까? 반가워하며 이런 말을 하였다.

언젠가, 건어물가게 총각하고 왔었죠? 글쎄, 그 총각이 요즈음에 툭하면 깡 소주만 마시고 가게 방에서 자빠져 잔다지 뭐요. 주인이 기가 막히다고 합디다. 뭔 일이 있었는지, 전에는 착실했는데, 갑자기 변해서 말썽을 부리니까 내쫓아야 하나 고민이 많다 하더라고요. 참한 총각이라고 소개받아 그 동안 잘 데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고주망태가 돼 속을 썩이고 있으니 우환덩이가 된 거지요. 나 참, 알다가고 모르는 게 사람 속이라지만 그 총각 대체 왜 그렇게 됐는지…….”

나는그 자식이, 지난번에 나한테 허세를 부리다가 호되게 망신당한 일로 그러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잠깐 했던 것 같다. 그뿐이었다.

녀석과 나는 처지가 달라져서, 대학시절처럼 논쟁을 벌이는 맞수 관계도 못 되었다. 삶의 바닥에 떨어진 녀석과, 영어교사로 중학교에서 근무하는 나는 같이 어울릴 일도 없었다. 지난 가을 이 식당에서 술잔을 마주한 게, 애초에 부질없는 짓이었다. 나는 녀석을 뇌리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다.

해가 바뀌어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휴직원을 내고 우선 고향 춘천으로 가기 위해, 묵호역에서 영동선 기차를 타고 떠나며내가 바다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차창 멀리로 검푸른 수평선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내 청춘의 한 페이지가 무심하게 지나가 버렸다는 허망감. 나는 괜히 눈시울을 붉히면서 멀어져가는 바다풍경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최봉석 그 녀석을 더는 볼 일 없이 75년 봄에 동해안을 떠난 것이다.

 

그럼, 최봉석이도 아시겠네?”

어제 사내가 물었을 때 순간 수십 년 전 과거가 두꺼운 먼지를 털고 선명해지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최봉석이름이었다. 검남색 외투차림, 넓적한 얼굴에 지어내던 미소, 항상 고전에서 인용하는 성현의 말씀들…….

알고말고요. 같이 사범대학교 영어과를 다녔죠. 그런데 어떻게?”

최봉석이가 나하고는 고등학교 동창이잖소. 원주에 있는.”

그 녀석…… 지금 뭐합니까?”

그 말뜻은, 우리 나이가 대개 퇴직한 나이에 속하니 녀석도 집에서 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이었다.

죽은 지, 벌써 오래 되었죠. , 날마다 깡 소주를 마시면서 살다가 죽었다고 하던데?”

무겁게 철렁 가라앉던 내 가슴. 사내한테 물었다.

그 녀석이 왜?”

사내는 기억을 되살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대학 동기라니까 아시겠지만 그 녀석이 대학을 잘 다니다가, 잇달아 부모님이 돌아가시니 하는 수 없이 학교를 그만 두고, 동해안 어디로 가서 노가다를 뛴다나 뭐라나 하면서 살다가…… 힘에 부쳐 그리 죽은 것 같던데? 왜냐면 여하튼 대학을 중퇴했으니 고졸 학력이 아니겠소. 그런 학력으로는 힘든 노가다 일밖에는 달리 할 게 없거든.”

어떻게 부모님이 잇달아 돌아가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에는 최봉석이가 춘천에서 하숙할 때도 혼자 방을 쓸 정도로 가정형편이 좋아 보였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가정형편이 어려워졌다며 자퇴를 해 버리니까 지금도 영 이해가 안 된다는 거지요.”

사내는 자기 소주잔을 단숨에 비워 내게 건네며, 반쯤 눈감은 표정으로 얘기를 이어갔다.

내가 아는 대로, 기억나는 대로 다 말씀드리지요. 녀석이 원래 원주 놈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평창 어느 산골에서 살다가 중학교 때부터 원주로 진학한 놈이었거든요. 그 과정이 재미나단 말입니다. 걔가 평창의 어느 산골 초등학교에서 꽤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들이 항상 칭찬하니까, 걔 부모님이 흥분했더란 말입니다. 잘하면 집안에서 처음으로 판검사가 나올 것 같았던 거죠. 그래서 말입니다, 걔가 졸업하는 시기에 맞추어 농사짓던 것을 다 정리하고 원주 시내로 이사를 했다는 게 아닙니까? 집도 중학교 가까운 곳에 전셋집을 얻어 살았다지요. ,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했나 봅니다.”

어쩜, 녀석의 초등학교 시절 얘기는 내 경우와 닮았을까.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사내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 녀석이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을 때는 또다시 이사를 해서 고등학교와 담벼락이 붙은 전셋집을 구했다는 게 아닙니까? 그럴 때 내가 녀석과 같은 반의 짝이 되며 친구가 됐지요. 그 집에 자주 놀러가고 그랬는데, , 학교 담을 넘으면 걔네 집 마당이니까 놀러가기가 쉬웠지요. 그런데 그 집이, 웃기는 겁니다. 마당이고 뒤란이고 담 아래고, 심지어는 방 한 구석까지 폐휴지니 고철이니 하는 것들이 잔뜩 쌓여 있더란 말입니다. 알고 보니까 독채로 쓰는 전셋집에서 고물상을 한 것입니다. 그럴 만했지요. 평창 산골에서 농사짓던 땅을 다 팔아 원주 시내로 나왔다니, 그게 몇 푼 되겠습니까? 산골에 있는 밭뙈기는 값이 별로이거든요. 제가 부동산 하는 사람 아닙니까? 잘 알죠. 녀석의 부모님이 돈이 부족하니까 폐휴지와 고철을 주워 모은 뒤 그것들을 팔아 녀석의 중, 고등학교 공부를 시킨 거지요. 솔직히 가정환경이 그런 애라면 친구사이에서 불쌍한 아이로 여겨져서 안돼 보이고 그래야 할 텐데, 녀석이 워낙 아는 게 많다고 떠들기를 잘하니까, 잘난 체를 잘하니까…… 좋아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단 말입니다. 말하자면 녀석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왕따 당하면서 사는 셈이었는데, 그나마 옆 짝인 나와 친한 편이었지요. 그러다가 녀석이 법대는 자기 성격에 안 맞는다고 춘천의 사범대학교로 진학했단 말입니다. 사실, 원주 시내바닥을 리어카 끌고 다니면서 모은 고물로 아들 유학을 보낸다는 게 어디 가당한 일입니까? 그럼에도 녀석의 부모님은아들 공부를 위해, 춘천에 혼자 방을 쓰는 하숙집도 얻어놓았다하더라고요. 하긴, 녀석은 성질도 이상해서, 원주 집에서도 독방을 썼다니까요! 그 집이 방이 딱 두 개인데 하나는 부모와 동생들이 함께 쓰고 녀석은 혼자 방을 썼더란 말이죠. , 방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책을 볼 때 집중이 안 된다나 뭐라나.”

껄껄껄, 사내는 자기가 늘어놓는 최봉석의 독방얘기에 자기가 웃었다. 나도 따라서 웃을 수밖에. 사내는 웃음을 거두고 다시 얘기를 이었다.

녀석이 형편에 맞지 않은 호사를 춘천에 유학해서도 누리는 것 같다는 얘기를 어느 친구한테서 들은 기억이 있지요. 그 친구도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데 춘천에 있는 교대로 진학했지요. 같은 동창이니까 춘천에서 최봉석이와 가끔 만나서 막걸리라도 한 잔 할 것 같았는데, 그 친구가 내게 하는 말이, 내가 춘천까지 힘들게 유학 가서 잘난 체 떠들기 좋아하는 그 역겨운 놈을 또 본단 말이냐? 그건 아니다.’하더라고요. 최봉석 녀석이 얼마나 잘난 체하던 놈인지, 이제 아시겠죠?”

그쯤해서 나는 소주잔을 사내한테 건넸다. 사내가 긴 얘기를 하느라고 입술이 말라 보였다. 사내도 내 잔에 소주를 따라, 우리는 술잔들을 가볍게 부딪치고 마셨다. 사내가나 참!’하면서 얘기를 다시 이었다.

하숙을 해도, 다른 친구들과 같이 방을 쓰면서 하숙비를 더는 게, 그게 정상이거든요.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그럼에도 녀석이 혼자 방을 써야 공부가 잘된다니까, 부모님이 비싼 하숙비 대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면 녀석이 과외지도 자리라도 찾아서, 조금이라도 보탰어야 하는데 녀석의 그 고매한 성격이, 책 읽기는 즐기지만 돈과는 담을 쌓은 성격이라 그러지도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 바람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아십니까? 아버지 혼자 고물들을 잔뜩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가다가, 고개에서 내려오는 길에 리어카의 가속 속도를 못 잡아 그만 어느 집 담벼락에 세게 부딪쳤다는 게 아닙니까? 몸을 몹시 다쳤는데도 병원에 오래 있을 형편이 못되니 그냥 집으로 모셔다가 방에 눕혔더란 말입니다. 녀석한테 하숙비도 제대로 보내주지 못하게 되니까, 하는 수 없이 녀석이 하숙집을 나와 싼 월세 방에서 자취한 거로 압니다. 어려운 일은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전혀 운신을 못하고 누운 와중에 어머니 혼자 리어카를 끌고 다니다가 당신도 쓰러지고 만 거죠. 원래 당뇨가 심해 과로해서는 안 되는데 집안 상황이 그리 돌아가니까 당신이 추운 겨울에 혼자 나서서 그 고생을 하다가, 잘못된 거지요. 그러면서, 아버지가 병 수발이 제대로 안 되어 그런지 먼저 세상을 뜨고, 얼마 안 돼, 상심이 큰 어머니마저 당뇨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잇달아 세상을 뜬 거지요. 추운 겨울에 한두 달 간격으로 부모가 세상을 뜨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거지요. 그 뒤로 이어지는 얘기는 아까 제가 말씀 드렸으니까, 이 정도로 최봉석이 얘기를 마치지요.”

녀석에 관한 궁금증이 대부분 풀렸다. 70년 가을 어느 날 201 강의실에서 내가 녀석의 바로 뒤에 앉았다가, 평소의 이미지와 다르게 목깃에 때가 꾀죄죄한 것을 보며 놀라갖게 된 궁금증도 풀렸다. 녀석은 난생처음으로 어려운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사내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녀석이 정확하게 몇 년도에 세상을 떴는지를. 사내가 얘기 처음에 그 녀석이 죽은 지, 벌써 오래 되었죠.’라고 모호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녀석이 세상을 뜬 때가 묵호역 앞 인천 식당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74년 가을에서 한 십 년은 지난 때라면, 나는녀석의 자살이나 다름없는 죽음과 무관하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차마 묻지 못했다. 아무래도 74년 가을에서 머지않은 때로 드러날 것 같은, 두려운 예감 때문이었다. 사내와 나는 화제를 돌려 얘기를 나누다가, 대낮부터 술을 마시느라 몸이 힘들어져 그 정도로 하고 헤어졌다. 그 시간이 밤 여덟시 경이었다.

 

오늘 아침.

조금 전 사내한테 그 연도를 확인해 보는 통화를 마쳤다. 두려운 예감이 적중했다. 77년에 사망했다니, 74년 묵호역 앞 인천 식당에서 헤어진 지 삼 년만이었다.

삼 년 간 자신을 철저하게 술독에 빠트려극한상황에서 잘 드러나는 인간의 주체적 상태가 실존이라는 내 설명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보인 것 같은 녀석.

회한에 내려앉는 이 가슴.

엊저녁 술자리에서 사내한테 들었던 녀석의 초등학교 시절 얘기는 나의 초등학교 시절 얘기와 어찌 그리 닮았을까? 부모님이 자식 공부를 잘 시켜 보려고 시내로 나왔다가 고생 많았다는 얘기마저.

녀석과 내가 사범대학교 영어과에서 만났을 때 겉으로 드러난 각자의 모습은 대조적이었지만 살아온 내력은 빼닮은 꼴이었다. 소름끼치도록 말이다.

언변을 즐기던 짓까지.

그런, 나를 닮은 사연이 있는 녀석과 무엇 하러 묵호의 인천 식당에서 마지막으로 논쟁을 벌였을까? 삶의 바닥으로 내려앉은 불쌍한 녀석과 벌인 그 논쟁은 일방적으로 죽이는 짓에 불과했다.

 

1970, 화창한 햇살이 창 밖에 가득하던 201 강의실에서 논쟁이 있었다. 체구는 작으나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철학교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창 젊은 녀석과 나 사이에 벌어졌던 그 논쟁이마지막 논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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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에 관한 궁금증이 대부분 풀렸다. 70년 가을 어느 날 201 강의실에서 내가 녀석의 바로 뒤에 앉았다가, 평소의 이미지와 다르게 목깃에 때가 꾀죄죄한 것을 보며 놀라갖게 된 궁금증도 풀렸다. 녀석은 난생처음으로 어려운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사내한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녀석이 정확하게 몇 년도에 세상을 떴는지를. 사내가 얘기 처음에 그 녀석이 죽은 지, 벌써 오래 되었죠.’라고 모호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녀석이 세상을 뜬 때가 묵호역 앞 인천 식당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74년 가을에서 한 십 년은 지난 때라면, 나는녀석의 자살이나 다름없는 죽음과 무관하다고 여길 수도 있었다.

차마 묻지 못했다. 아무래도 74년 가을에서 머지않은 때로 드러날 것 같은, 두려운 예감 때문이었다. 사내와 나는 화제를 돌려 얘기를 나누다가, 대낮부터 술을 마시느라 몸이 힘들어져 그 정도로 하고 헤어졌다. 그 시간이 밤 여덟시 경이었다.

 

오늘 아침.

조금 전 사내한테 그 연도를 확인해 보는 통화를 마쳤다. 두려운 예감이 적중했다. 77년에 사망했다니, 74년 묵호역 앞 인천 식당에서 헤어진 지 삼 년만이었다.

삼 년 간 자신을 철저하게 술독에 빠트려극한상황에서 잘 드러나는 인간의 주체적 상태가 실존이라는 내 설명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보인 것 같은 녀석.

회한에 내려앉는 이 가슴.

엊저녁 술자리에서 사내한테 들었던 녀석의 초등학교 시절 얘기는 나의 초등학교 시절 얘기와 어찌 그리 닮았을까? 부모님이 자식 공부를 잘 시켜 보려고 시내로 나왔다가 고생 많았다는 얘기마저.

녀석과 내가 사범대학교 영어과에서 만났을 때 겉으로 드러난 각자의 모습은 대조적이었지만 살아온 내력은 빼닮은 꼴이었다. 소름끼치도록 말이다.

언변을 즐기던 짓까지.

그런, 나를 닮은 사연이 있는 녀석과 무엇 하러 묵호의 인천 식당에서 마지막으로 논쟁을 벌였을까? 삶의 바닥으로 내려앉은 불쌍한 녀석과 벌인 그 논쟁은 일방적으로 죽이는 짓에 불과했다.

 

1970, 화창한 햇살이 창 밖에 가득하던 201 강의실에서 논쟁이 있었다. 체구는 작으나 목소리가 카랑카랑한 철학교수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창 젊은 녀석과 나 사이에 벌어졌던 그 논쟁이마지막 논쟁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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껄껄껄, 사내는 자기가 늘어놓는 최봉석의 독방얘기에 자기가 웃었다. 나도 따라서 웃을 수밖에. 사내는 웃음을 거두고 다시 얘기를 이었다.

녀석이 형편에 맞지 않은 호사를 춘천에 유학해서도 누리는 것 같다는 얘기를 어느 친구한테서 들은 기억이 있지요. 그 친구도 같은 고등학교 출신인데 춘천에 있는 교대로 진학했지요. 같은 동창이니까 춘천에서 최봉석이와 가끔 만나서 막걸리라도 한 잔 할 것 같았는데, 그 친구가 내게 하는 말이, 내가 춘천까지 힘들게 유학 가서 잘난 체 떠들기 좋아하는 그 역겨운 놈을 또 본단 말이냐? 그건 아니다.’하더라고요. 최봉석 녀석이 얼마나 잘난 체하던 놈인지, 이제 아시겠죠?”

그쯤해서 나는 소주잔을 사내한테 건넸다. 사내가 긴 얘기를 하느라고 입술이 말라 보였다. 사내도 내 잔에 소주를 따라, 우리는 술잔들을 가볍게 부딪치고 마셨다. 사내가나 참!’하면서 얘기를 다시 이었다.

하숙을 해도, 다른 친구들과 같이 방을 쓰면서 하숙비를 더는 게, 그게 정상이거든요.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한다면 말입니다. 그럼에도 녀석이 혼자 방을 써야 공부가 잘된다니까, 부모님이 비싼 하숙비 대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면 녀석이 과외지도 자리라도 찾아서, 조금이라도 보탰어야 하는데 녀석의 그 고매한 성격이, 책 읽기는 즐기지만 돈과는 담을 쌓은 성격이라 그러지도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 바람에 무슨 일이 생긴 줄 아십니까? 아버지 혼자 고물들을 잔뜩 실은 리어카를 끌고 가다가, 고개에서 내려오는 길에 리어카의 가속 속도를 못 잡아 그만 어느 집 담벼락에 세게 부딪쳤다는 게 아닙니까? 몸을 몹시 다쳤는데도 병원에 오래 있을 형편이 못되니 그냥 집으로 모셔다가 방에 눕혔더란 말입니다. 녀석한테 하숙비도 제대로 보내주지 못하게 되니까, 하는 수 없이 녀석이 하숙집을 나와 싼 월세 방에서 자취한 거로 압니다. 어려운 일은 그 정도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전혀 운신을 못하고 누운 와중에 어머니 혼자 리어카를 끌고 다니다가 당신도 쓰러지고 만 거죠. 원래 당뇨가 심해 과로해서는 안 되는데 집안 상황이 그리 돌아가니까 당신이 추운 겨울에 혼자 나서서 그 고생을 하다가, 잘못된 거지요. 그러면서, 아버지가 병 수발이 제대로 안 되어 그런지 먼저 세상을 뜨고, 얼마 안 돼, 상심이 큰 어머니마저 당뇨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잇달아 세상을 뜬 거지요. 추운 겨울에 한두 달 간격으로 부모가 세상을 뜨는, 기막힌 일이 벌어진 거지요. 그 뒤로 이어지는 얘기는 아까 제가 말씀 드렸으니까, 이 정도로 최봉석이 얘기를 마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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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동기라니까 아시겠지만 그 녀석이 대학을 잘 다니다가, 잇달아 부모님이 돌아가시니 하는 수 없이 학교를 그만 두고, 동해안 어디로 가서 노가다를 뛴다나 뭐라나 하면서 살다가…… 힘에 부쳐 그리 죽은 것 같던데? 왜냐면 여하튼 대학을 중퇴했으니 고졸 학력이 아니겠소. 그런 학력으로는 힘든 노가다 일밖에는 달리 할 게 없거든.”

어떻게 부모님이 잇달아 돌아가실 수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기억하기에는 최봉석이가 춘천에서 하숙할 때도 혼자 방을 쓸 정도로 가정형편이 좋아 보였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가정형편이 어려워졌다며 자퇴를 해 버리니까 지금도 영 이해가 안 된다는 거지요.”

사내는 자기 소주잔을 단숨에 비워 내게 건네며, 반쯤 눈감은 표정으로 얘기를 이어갔다.

내가 아는 대로, 기억나는 대로 다 말씀드리지요. 녀석이 원래 원주 놈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평창 어느 산골에서 살다가 중학교 때부터 원주로 진학한 놈이었거든요. 그 과정이 재미나단 말입니다. 걔가 평창의 어느 산골 초등학교에서 꽤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들이 항상 칭찬하니까, 걔 부모님이 흥분했더란 말입니다. 잘하면 집안에서 처음으로 판검사가 나올 것 같았던 거죠. 그래서 말입니다, 걔가 졸업하는 시기에 맞추어 농사짓던 것을 다 정리하고 원주 시내로 이사를 했다는 게 아닙니까? 집도 중학교 가까운 곳에 전셋집을 얻어 살았다지요. , 맹모삼천지교를 실천했나 봅니다.”

어쩜, 녀석의 초등학교 시절 얘기는 내 경우와 닮았을까.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사내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래서, 녀석이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을 때는 또다시 이사를 해서 고등학교와 담벼락이 붙은 전셋집을 구했다는 게 아닙니까? 그럴 때 내가 녀석과 같은 반의 짝이 되며 친구가 됐지요. 그 집에 자주 놀러가고 그랬는데, , 학교 담을 넘으면 걔네 집 마당이니까 놀러가기가 쉬웠지요. 그런데 그 집이, 웃기는 겁니다. 마당이고 뒤란이고 담 아래고, 심지어는 방 한 구석까지 폐휴지니 고철이니 하는 것들이 잔뜩 쌓여 있더란 말입니다. 알고 보니까 독채로 쓰는 전셋집에서 고물상을 한 것입니다. 그럴 만했지요. 평창 산골에서 농사짓던 땅을 다 팔아 원주 시내로 나왔다니, 그게 몇 푼 되겠습니까? 산골에 있는 밭뙈기는 값이 별로이거든요. 제가 부동산 하는 사람 아닙니까? 잘 알죠. 녀석의 부모님이 돈이 부족하니까 폐휴지와 고철을 주워 모은 뒤 그것들을 팔아 녀석의 중, 고등학교 공부를 시킨 거지요. 솔직히 가정환경이 그런 애라면 친구사이에서 불쌍한 아이로 여겨져서 안돼 보이고 그래야 할 텐데, 녀석이 워낙 아는 게 많다고 떠들기를 잘하니까, 잘난 체를 잘하니까…… 좋아하는 친구들이 별로 없었단 말입니다. 말하자면 녀석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왕따 당하면서 사는 셈이었는데, 그나마 옆 짝인 나와 친한 편이었지요. 그러다가 녀석이 법대는 자기 성격에 안 맞는다고 춘천의 사범대학교로 진학했단 말입니다. 사실, 원주 시내바닥을 리어카 끌고 다니면서 모은 고물로 아들 유학을 보낸다는 게 어디 가당한 일입니까? 그럼에도 녀석의 부모님은아들 공부를 위해, 춘천에 혼자 방을 쓰는 하숙집도 얻어놓았다하더라고요. 하긴, 녀석은 성질도 이상해서, 원주 집에서도 독방을 썼다니까요! 그 집이 방이 딱 두 개인데 하나는 부모와 동생들이 함께 쓰고 녀석은 혼자 방을 썼더란 말이죠. , 방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책을 볼 때 집중이 안 된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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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바뀌어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휴직원을 내고 우선 고향 춘천으로 가기 위해, 묵호역에서 영동선 기차를 타고 떠나며내가 바다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차창 멀리로 검푸른 수평선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내 청춘의 한 페이지가 무심하게 지나가 버렸다는 허망감. 나는 괜히 눈시울을 붉히면서 멀어져가는 바다풍경을 망연하게 바라보았다.

최봉석 그 녀석을 더는 볼 일 없이 75년 봄에 동해안을 떠난 것이다.

 

그럼, 최봉석이도 아시겠네?”

어제 사내가 물었을 때 순간 수십 년 전 과거가 두꺼운 먼지를 털고 선명해지는, 흔치 않은 경험을 했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최봉석이름이었다. 검남색 외투차림, 넓적한 얼굴에 지어내던 미소, 항상 고전에서 인용하는 성현의 말씀들…….

알고말고요. 같이 사범대학교 영어과를 다녔죠. 그런데 어떻게?”

최봉석이가 나하고는 고등학교 동창이잖소. 원주에 있는.”

그 녀석…… 지금 뭐합니까?”

그 말뜻은, 우리 나이가 대개 퇴직한 나이에 속하니 녀석도 집에서 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짐작이었다.

죽은 지, 벌써 오래 되었죠. , 날마다 깡 소주를 마시면서 살다가 죽었다고 하던데?”

무겁게 철렁 가라앉던 내 가슴. 사내한테 물었다.

그 녀석이 왜?”

사내는 기억을 되살리는 표정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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