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이 살아온 세월 중, 나름대로 뜨겁게 산 적이 몇 번 있었다. 그 중 한 번이 충청북도 외갓집에 갔던, 고등학교 여름방학 때다. 그 여름, 달밤에 벌어진 사건은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생각만 하면 가슴 뛰게 만들었다. 분명, 춘천 집에 있을 때에는 양순한 학생이던 내가 그 여름 충청북도에서 마치 활극의 주인공처럼 활약했다니, 스스로도 납득이 잘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혈기 왕성한 사춘기였다는 것 외에 다른 원인이 있었을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는 이 작품 함정을 쓰기 전까지는 깨닫지 못했다.

 

함정의 초고를 쓰고 난 뒤에야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당시충청북도는 통금이 없는 지역이었다는 극히 평범한 사실이었다. 인터넷(나무위키)에서 찾은 관련 기록을 소개한다.

 

“(전략) 통행금지 예외 지역이 있었는데 도서 지역인 제주도와 울릉도는 1964,

충청북도는 1965년 해제됐고, (후략) 

 

 "(전략) 통행금지는 194597일부터 맥아더 장군의 포고령에 따라 시작해서 198215일에 해제되었다. (중략) 당시엔 만 13세 이하의 어린이, 19세 이하의 청소년은 기본이고 이들을 포함해 19세 이상 성인까지 통틀어서 전 연령층이 통금대상이었으며, 이를 어겼을 경우 거동 수상자로 곧바로 체포해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고 다음날 아침에 훈방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당시엔 과장 좀 보태서 경찰서가 일종의 숙박업소 역할을 했다. 19823S정책의 일환으로 전두환 정부에 의해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이 당시 사람들이 새벽 1시에 길거리에 나와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고 한다. (후략)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억압한 인물 중 한 사람인 전두환이 문제의 통행금지를 해제했다는 사실이 역설적이다.

통금이 1982년에야 해제되었다니, 무심의 경우에는 30년 넘게, 늦은 밤마다 늑대가 음험하게 우는 것 같은 통금 사이렌 소리를 들으며 살았던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하루에 일정 시간은 돌아다닐 수 없다는 통제부터 숙명처럼 받으며 살아야 했다니 기가 막히다.

뒤늦게 기억나는 것 중 하나는, 82년 전두환이 전격적으로 통금해제를 선언하자 분명 심야에 범죄가 들끓기 시작할 것이므로 통금해제를 재고해야 한다는 여론도 만만치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후의 세월이 입증하듯 그런 여론은 기우에 불과했다. 마치오랫동안 새장 안에 갇혀 산 새를 밖으로 내놓자 멀리 날아갈 생각도 못하고 새장 부근을 맴돌거나 다시 새장 안으로 들어오려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은 경우라 할까.

68년 즈음의 춘천은 으스스한 군사도시였다. 시내의 반 가까이를 차지한 미군부대부터, 곳곳에 군 부대들이 포진해 있었다. 휴전선이 가까운 탓에 감수해야했겠지만 그 즈음 춘천에 살던 이들은 통금까지 겹쳐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을까.

그런 스트레스 속에서 살던, 사춘기의 무심이 통금 없는 지역 충청북도에서 여름방학을 보내며 겪었던 일을 소설로 쓴 게 함정이다. 통금이 없는 곳에서 밤을 보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심은 마음껏 일탈되었던 게 아닐까.

 

사실 함정의 구성은 극히 평범하다. 환갑 넘은 노인이, 학창 시절인 1968년 여름방학의 어느 달밤에 일으켰던 사건의 현장을 찾아가며 회상하는 구조다. 무심은 이 작품을 써 나가면서 과연 그 사건의 현장이 어떻게 변했는지궁금했지만, 찾아가 볼 시간을 내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인터넷을 활용했다. 인터넷으로 문제의 그 지역 주소를 치고 들어간 뒤, ‘로드뷰기능을 활용하자 놀랍게도 최근의 그 동네 풍경이 생생하게 화면에 떠올랐다. 소설함정의 결말 부분의 풍경 묘사는 그렇게 해결되었다.

놀라운 기술 문명의 시대다.

함정의 창작 배경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은, 통행금지 제도가 사라진 지 34년째 되는 어느 날 새벽시간이다. 34년 전, 통금의 시작과 해제를 늑대울음처럼 음험하게 알리던 사이렌 기계들은 어찌 됐을까? 아마, 고물상의 수레에 실려 다른 좋은 기물을 만들기 위한 용광로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무심은 남은 여생 동안 그런 음험한 기계가 다시는 활개 치는 일이 없는 세상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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