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에서 내 잇몸 뼈에 임플란트 나사를 박았다. 원래는 작년에 시술하려 했었다. 예약까지 했었다. 그런데 막상 당일이 다가오자 나는 집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사정이 생겨서 내년으로 미루겠습니다라는 전화를 치과에 걸고 말았다. 전 날 밤임플란트가 잘못돼 고생하는 사람들얘기를 TV뉴스로 보고 겁을 잔뜩 먹은 탓이다.

해가 바뀌어 우여곡절 끝에, 용기를 내어 임플란트 시술에 응한 것이다. 어금니가 빠진 상태로 계속 방치했다가는 다른 치아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치과 관련 책자를 읽은 때문이다. 시술 순간에 눈감고 있어서 못 봤는데 의사가 무슨 드릴로 내 잇몸 뼈를 파는 게 역력했다. 내가 살다 살다 드릴로 몸의 뼈까지 파일 줄이야 정말 몰랐다. 어디 그뿐인가. 판 곳에 쇠 나사까지 박았다.

생각해 보면우리 몸의 구성요소에 철분이 있었다. 철분 결핍 또한 심각한 병의 증세로 친다. 따라서 내 잇몸 뼈에 쇠 나사 하나 심은 게 기이한 일이 못된다. 다른 치아들의 무너짐을 막아준 것은 물론이고 음식물 저작 상의 문제까지 미연에 방지한 게 아닌가. 현대의술의 대단한 발전이다.

그런데 말이다. 아무래도 몸에 나사 박은 사나이가 된 심정을 어쩔 수 없다. 노후에 들었다고 해서 누구나 임플란트를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부터 치아 관리에 신경 쓰며 살았을 텐데아쉽다. 알게 모르게 나는 사이보그 인조인간이 돼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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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젊은 날에 아폴로 싸롱이 있었다.

 

아폴로 싸롱을 매일같이 갔던 것은 아니다. 사나흘에 한 번 꼴로 가지 않았을까.

72년 초겨울에는 한 열흘만에 아폴로 싸롱에 갔다. 커피 한 잔 값을 내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영업공간이 분명함에도, 나는 왠지결석하다가 오랜만에 출석한교실인 듯 감회가 남달랐다. 그럴 만했다. 외수 형을 따라 그 먼 인제의 어느 깊은 골짜기 분교에서 일주일을 지내다가, 다시 춘천으로 돌아온 직후였으니 말이다. 춘천교대를 7년인가 다니다가 중퇴하고 고향 인제로 내려가 취직했다는데 인제읍내도 아닌, 하천을 따라서 20여 리는 걸어가야 나타나는화전민 아이들 대여섯이 전부인골짜기 분교가 형의 직장이었던 거다. 한낮에 형의 수업이 끝나면 그 때부터는 둘이 부근 하천에서 가재를 잡았다. 붙잡은 개구리를 나뭇가지 끝에 매달아 하천 물에 담그면 얼마 안 돼 가재들이 붙었고 그러면 그것들을 솥에 넣어 쪄먹었다. 고소한 가재 맛도 하루 이틀이지 사흘째는 질려서 더 못 먹고 다 버렸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이라 밤이 되면 석유냄새 나는 호야 불을 켜야 했다. 전임자들이 몇 달을 못 가 사직했다는 벽지 분교의 임시교사가 형이었다.

문학 이야기도 하루 이틀이지 라디오 청취로 밤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기이한 것은 우리 남한의 방송보다 북한의 방송이 잘 잡혔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깨달았는데 인제는 북한이 가까운 접경 지역이었다. 남한에 밀파돼 있는 자기네 간첩들에게 보내는 이상한 숫자 방송.

나는 차마 사흘만에 춘천으로 가야겠다는 말을 못하다가 일주일이 됐을 때에야 말했다.

. 제가 춘천 집에 가서 할 일이 있어요. 그만 가 봐야 됩니다.”

형은 외롭고 쓸쓸한 골짜기 분교 생활에서 하루라도 함께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포기했다. 나는 그런 형과 헤어지고서 다시 춘천으로 돌아온 것이다. 1972년 당시 춘천은 인구 10만 내외의 작은 도시였다. 하지만 거리에 2층 건물 하나 찾기 힘든 인제 읍에 비해서는 호화찬란한 대도시 느낌이었다.

어쨌든 나는 오랜만에 아폴로 싸롱에 들어와 앉았다. 일주일을 보냈던, 저 먼 인제의 외진 골짜기는 돌이켜볼수록 쓸쓸하고 외로운 곳이었다. 그곳에 형이 남아 있었다.

상념에 잡혀 있을 때 오우오우오우예이하며 'I love you more than I can say’가 어둑한 지하공간에 흘러나왔다. 형이 인제 내려가기 전, 석사동 자취방에서 기타 치며 즐겨 부르던 노래가 아닌가. 아아, 형과 나의 젊은 한 계절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내 젊은 날에 아폴로 싸롱이 있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GKnSdikqjw

 

사진출처 : http://cafe.daum.net/f4984/6b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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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도 사람이 하는 일. 따라서 전쟁터에 나선 병사들 또한 음식을 먹어가며 전투한다.

 

'박인로'가 지은 가사 작품 중 '누항사'가 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박인로의 모습이 잘 나타나는 작품이다.

그 부분만 인용하면

"우탁 우랑(于槖于囊)의 줌줌이 모아 녀코,

병과(兵戈) 오재(五載)예 감사심(敢死心)을 가져 이셔"

 

이를 풀이하면

전대와 망태에 한 줌 한 줌 모아 넣고 전란 5년 동안에 죽고 말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란 뜻이다. 여기서 우리 조상님들이 손수 전대와 망태에 챙겨온 낟알을 꺼내먹으며 왜놈들과 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라의 운명은 물론 자기 목숨이 걸린 전쟁터에서도 먹는 문제는 그만큼 절실했다. 첨단무기의 경연장처럼 변한 현대전에서도 병사들을 배불리 먹이는 병참 문제는 선결사항이다. 식후금강산이라 했듯이 사람은 배가 불러야 행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과거의 전쟁들이 기록된 역사에서수십만 군대라든가 수백만 군대라는 표현이 나오면 병사들 수() 못지않게 그만큼의 식량을 떠올려야 한다. 예를 들어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를 치기 위해 백만 대군을 동원했다면 그에 따른 엄청난 군량미가 소 수레로 줄지어 운반됐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식량은 후방의 백성들이 자신이 먹을 식량에서 덜어 낸 피땀 같은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 군에 패하여 비참하게 퇴각했을 때, 엄청난 식량들을 쓰고도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는 사실 또한 놓쳐서는 안 된다. 많은 양식들을 낭비한 것처럼 된 패전의 후유증은 엄정했다. 수나라는 몇 년 뒤 멸망했다.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이 나서는 안 된다. 전쟁이 나는 순간부터 목숨 걸고 전선에 나가야 하는 청춘들의 안타까움도 그렇고, 후방에 남은 이들 또한 어려운 여건에서 먹고 살아야 하는 다른 의미의 처참한 전쟁을 겪기 마련인 때문이다 

사진출처 : http://cafe.daum.net/busanman

˝우탁 우랑(于槖于囊)의 줌줌이 모아 녀코,
병과(兵戈) 오재(五載)예 감사심(敢死心)을 가져 이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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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동란 때 피란가지 못하고 춘천에 남아 있다가 중공군들까지 봤다는 장모님이다. 중공군 장교가 당시 한창 젊은 친정아버지를 수상하게 여겨 총살하려 하자, 열다섯 살 나이 장모님(현재 80대 중반인 장모님의 소녀 모습을 상상하려니 감이 안 잡힌다. 상상력 하나로는 알아주는 사위이지만 이럴 때는 한계를 느낀다.)이 그 장교 바지를 붙잡은 채 땅바닥에 뒹굴며 울었단다. 말은 안 통하지만 우리 아버지 살려주세요!’하는 몸부림의 뜻은 통했다. 중공군 장교가 마음이 흔들려 권총을 다시 갑에 넣고 친정아버지를 그대로 살려주는 기적이 일어났단다.

나는 그런 정도로 장모님의 지나온 삶을 대충 얘기 들어 알고 있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러 장모님은 일흔 나이를 지날 즈음부터 몹쓸 당뇨가 시작돼 여든 중반의 현재 병석에서 지내는 생활이다. 고생 많은 삶의 여정 속에서 학교 가기는 언감생심. 그저 한글을 가까스로 읽는 정도라고 나는 알고 있다.

그런데 이따금 문학적인 표현을 해서, 글 쓰는 사위()를 놀라게 할 때가 있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아끼는 큰딸(내 아내)이 남편()과 둘이서 척박한 골짜기 땅을 일구어 밭농사는 물론 화초들까지 키워 꽃밭 천지가 되자 이런 표현을 하던 것이다. 큰딸의 이름을 부르며.

네가 내 평생소원을 이루었구나!”

좁은 마당이거나 답답한 아파트 내에서화초 키우기로 낙을 붙이고 살아온 당신 눈에 800평 밭 곳곳의 꽃들은 바로 평생소원의 광경이었던 거다. 문학 하는 내가 듣기에는 정말 뜻밖의 문학적인 표현이었다. 그래서 속으로 이렇게 정리했다. ‘하긴, 문학과 상관없이 살아왔다고 해서 문학적인 표현을 하지 말란 법은 없지. 어쩌다가 그런 표현이 나온 거다.’

 

그런데 어제 오후 늦게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든 사건이 벌어졌다. 아내가 무슨 전화를 받아 잠시 통화하더니 잠깐만하며 내게 전화를 넘겨줘 벌어진 사건이다. 바로 장모님의 전화였다. , 그 전에 빠트린 얘기가 있다. 빠트린 얘기부터 해야 한다. 내가 두 번째 작품집으로 ‘K의 고개를 내자 아내가 그 중 한 부를 친정집에 주었는데장모님이 병석에서 며칠째 그 책을 계속 보고 있다지 않은가. 당뇨 악화로 시력도 안 좋은 거로 아는데 노인네가 그러는 거 같아 나는 좀 걱정도 되고 도대체 이해도 되지 않았다. 춘향전이나 홍길동전 같은 고대소설을 읽는다면 이해됐을지 모른다. 사위의 ‘K의 고개라니. 나약한 현대 지식인의 어떤 표상을 다룬 작품집인데 그걸 노인네가 읽는다고?

하지만 전화 통화가 되자 나는 충격을 받았다. 당뇨악화로 치아들이 부실해져 발음도 잘 안 되는데 사위인 내게 이러던 것이다.

책 내느라 고생 많았어. 내가 다 읽었는데 잘 썼더라고. 내가 말이야, 옛날에 책 읽는 걸 좋아했다니까? 이광수의 유정도 읽었고 김래성이가 쓴 탐정소설들도 읽었지. 뭐야, 닥터지바고도 읽었다니까.”

그 충격이라니. 솔직히 나는 닥터지바고 같은 경우, 영화로나 봤지 책은 못 읽었다. 장모님은 이런 말도 했다.

, 소설을 읽으면 머릿속에 선하게 그려지는 게 있잖아.”

세상에. 그건 내가 ‘K의 고개앞에 썼던 작가의 말에 등장했던 말과 똑같다! 작가의 말에서 나는 소설책이 안 팔리는 시대에 소설 쓰기를 그만 둘 수 없는 건 책을 읽는 순간 머릿속에 펼쳐지는 세상맛을 못 잊어서라고 했다.

소설 쓰는 당신의 맏사위를 자랑스러워하는 말로써 장모님의 얘기가 끝났다. 통화가 끝났다. 뜻밖의 통화 내용에 놀란 내게 아내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우리 엄마가 예전에빙점이라고, 일본 사람이 쓴 소설도 보고 그랬어.”

빙점은 내 사춘기 적 감성에 적지 않게 영향을 준 장편소설이다. 아내가 또 말했다.

우리 엄마 무식하지 않아. 당신이 늘 무시하는 것 같은데그렇지 않다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렇다면 2년여 전 첫 번째 작품집숨죽이는 갈대밭을 냈을 때도 장모님이 다 읽어봤다는 말인가? 그런 기미가 전혀 없었으니 이상하다. 아내가 이런 내 의구심을 풀어주었다.

당신이 지난번 첫 번째 책을 냈을 때에는 엄마가책을 낼 수도 있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국어선생을 하다 퇴직한 사위였으니 말이지. 그러나 이번에 두 번째로 책을 내자 사위가 취미가 아닌 전업으로 소설 쓰는구나여긴 게 아니겠어? 그래서 눈도 안 좋은데 며칠 걸려서 다 읽은 거지. 왜정 때 여고를 다녔다는 시어머니보다 우리 엄마가 책도 더 많이 보고 더 똑똑한지도 몰라.”

잘 나가다가 이상하다. 내가 얼른 제동을 걸었다.

갑자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어쩌거나 장모님이 내 두 번째 소설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다는 건사건이다. 그 사실 하나는 분명하다. 우선은 이 정도로만 알고 있자. 또 다른,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길 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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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 무대 세팅 사진 한 장이 내 눈앞에 있다. 나는 그 공연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런데 왜 이리 가슴이 설레는 걸까. 악기들이 사람 없이도 무대를 차지할 수 있다는 사실의 발견 때문일까. 또는 무수한 시선들이 집중됐으나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절체절명의 느낌 때문일까.

저대로 공연이 끝내 이뤄지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객석의 침묵이 무너지기 시작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갖가지 생각이 꼬리를 물기 시작했다. 그런 생각들을 짐짓 모른 체 하는 조명 빛과 어둠의 합동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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