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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학교에 전학 간 첫 날, 담임선생님이 내게 물었다.

그래, 어느 특활반에 가고 싶냐?”

미술반입니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답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이 뜻밖의 말씀을 하였다.

미술반은 이미 인원이 꽉 차서 안 되니까…… 독서 3반에 가는 게 어떠냐?”

내가 ○○시의 그 유명한,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에서 활동한 어린이라는 걸 모르시는 걸까? 돌이켜보면 그럴 만했다. 담임선생님이 받아든 내 생활기록부에는 특활부서: 미술반이란 정도로 극히 간략하게 쓰여 있었을 테니까. 어쨌든 어린 나는 뭐라 해명할 엄두도 못 내고 풀죽은 목소리로 네에.’하고 답했다.

독서 3반은, 금요일 6교시 특활시간에 모여서 아무 책이나 한 시간 동안 묵독하는 반이었다. 원래 한 반이었는데 희망 인원이 넘쳐나 독서 1,2,3으로 나뉘었다 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하나뿐이라는 미술반역시 각자 알아서 아무 그림이나 그리다가 종치면 끝나는 반이라 했다. 그런 식으로 특별활동에 관심 없는 학교라면 나의 특출한 그림 솜씨는 드러날 수가 없었다.

학급에서 교과학습으로 하는 미술시간마저 담임선생님이 미술교과서를 읽고 풀이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이 시골학교에서 내 그림 솜씨는 영 빛을 못 볼 것 같았다.

 

한 달쯤 지났다.

담임선생님이 미술시간에, 처음으로 국화 몇 송이가 담긴 꽃병을 교탁 위에 올려놓더니한 장씩 그려 내거라.’ 하였다. 나는 그림 솜씨를 보여줄 좋은 기회다!’라는 생각에 아주 열심히 그려 제출했다. 담임선생님은 놀랐다. 어린이의 그림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햇볕 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무슨 사무를 보느라고, 내가 그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 주변의 애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구경하느라 바빴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내 그림이 교실 뒤의우리 솜씨란에 게시됐다. 다른 애들 그림도 게시됐지만 내 그림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내 그림은 꽃병의 명암까지 살려 다채롭게 색을 쓴 데 비해 다른 애들의 그림은 단색으로 꽃병 모양이나 가까스로 그려낸 정도였다.

그 날부터 나는 아주 그림 잘 그리는, 전학 온 아이가 되었다. 미술시간이 교과서 수업 대신 실제로 그림 그리는 시간으로 바뀌면서, 내 그림들 중 두 점이 교실 옆 복도 벽에까지 붙여졌다. 담임선생님은 내 그림 솜씨에 늘 감탄했지만 정작 그리기를 잘하는 분은 아니었다. 칠판에 백묵으로 어떤 물건을 그리며 설명할 때 보면 원근법에도 맞지 않고 명암도 엉망이었다. 그리기에 관한 한 내가 담임선생님보다도 낫다고 속으로 자부하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가? 저 유명한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에서 활동한 어린이가 아닌가? 이런 사실을 한 번쯤은 드러내놓고 자랑하고 싶었다. 그런 기회는 담임선생님이 마련해주어야 하는데 그런 데까지 세심하게 신경 쓰는 분이 못 되었다. 단지그림을 잘 그리는 어린이가, 내가 맡은 학급으로 전학 왔구나.’하는 정도로 아는 듯했다.

 

4학년이 끝났다. 5학년이 시작되는 삼월 초 어느 날 그분이 나타났다.

연세가 오십 돼 보이는 담임선생님과 달리 그분은 삼십도 안 되어 보이는 아주 젊은 분이었다. 그분이 나타난 때는 쉬는 시간이었다. 여자애들은 교실 뒤쪽 빈자리에서 노래 부르며 공기놀이를 하고, 남자애들은 책걸상 사이로 뛰어다니며 장난 싸움을 하는데 낭랑한 어른 목소리가 내 이름을 부르면서 순식간에 그런 소란을 제압한 것이다.

애들이, 자리에 앉아 만화책을 보는 나와 앞쪽 출입문 가에 서 있는 그분을 번갈아보고 있었다. 깨끗한 옷차림에, 포마드를 발라넘긴 머리라서 선생님인 듯했는데 처음 보는 분이었다. 그분이 내 이름을 다시 불렀다.

네에…….”

뒤늦게 대답을 하며 나는 앞쪽으로 나아갔다. 그분은 허연 얼굴에 빛나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냐?…… 나 따라 와라.”

다시 소란해지는 교실을 뒤로 하고 나는 그분을 따라갔다. 복도에서 쿵쾅쾅 뛰어다니던 애들이 그분 몸에 부딪쳤다가 놀라 고개를 푹 숙이고 지나가기도 했고, 어떤 애들은 낯선 선생님한테 끌려가는 듯한 나를 의아한 눈길로 보며 얼핏 내 손이나 옷을 잡았다가 놓기도 했다.

복도를 지나 본관 끝에 있는 미술실로 나는 따라 들어갔다. 그 때 수업 시작종이 울었다. 내가 걱정스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분은 예의 낭랑한 음성으로 안심시켰다.

걱정 마라. 네 반 담임선생님께 말해 두었다.”

겨우내 방치한 미술실로 알고 있는데 (연료를 아끼느라 그랬는지 겨울로 들어서면 교실 아닌 특별실들은 그냥 문 잠가버리던 시절이었다.) 작은 석유곤로 하나가 따듯하게 피워져 선생님 책상 가까이 놓여있었다. 그 책상 위에는 내가 지난 학기 미술시간마다 담임선생님께 제출했던 그림들 중 세 장이 놓여 있었다. 그분은 의자에 앉더니 그 중 하나를 들면서 내게 물었다.

네 그림, 맞지?”

.”

전학 왔다며? 그래, 먼저 학교를 다닐 적에 그림 그리기를 많이 했나 보지?”

나도 모르게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시에 있는 교대부속초등학교에서 미술반을 했거든요. 거기서 매일, 수업이 끝난 뒤 따로 남아 한 시간씩 그림 그렸습니다. 그런데 작년 구월에 아버지가 여기 군청으로 전근 오면서 모두 이사 오게 되어, 전학 온 겁니다.”

그분은 그럼 그렇지하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 특활반을 정할 때 미술반에 들 거지?”

아직 새 학년도의 특활반을 정하지 않은 때였다. 다음 주에 정할 듯싶었다. 나는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네에.”

내가 미술반을 맡아 가르칠 거니까, 다음 주 금요일에 보자.”

그분은 내 어깨를 두드리면서 이제 그만 가 봐도 된다는 손짓을 했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를 드리고 미술실을 나왔다. 나올 때 미닫이문이 겨우내 안 쓰인 탓인지 잘 닫히지 않았다. 나는 한 손으로 문을 밀다가 잘 안 되어 두 손으로 잡고 힘껏 밀어야 했다. 그럴 때 그분이 내 쪽을 바라다보았다. 창가의 햇빛을 뒤로한 모습이라 웃는 표정인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그 날, 그분이미술반에 들 거지?’하고 물었을 때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겠다고 응답한 것은 얼떨결에 이루어진 느낌이 컸다. 소란한 교실을 일시에 제압하던 낭랑한 목소리, 깔끔한 포마드머리의 젊은 모습, 허연 얼굴빛과 간간이 빛나던 눈빛 등의 분위기가 나를 다른 대답할 겨를이 없도록 만든 게 아니었을까?

만약 후줄근한 옷차림의 노인 선생님이 우리 학급을 찾아와서, 소란스런 애들을 제압하느라 내 이름을 고래고래 불러서 데리고 갔더라면 나는 미술반에 들지 않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 미술실이라니. 작은 석유곤로 하나가 교탁 부근에 불피워있긴 했지만 겨우내 방치된 탓에 아무래도 춥고 을씨년스러웠다. 노인 선생님이 그런 미술실에 있었더라면 더욱 춥고 더 을씨년스레 보였을 텐데……다행히도그분이었기에 덜 춥고 덜 을씨년스레 보인 거라고 나는 회상한다.

전학 온 처음에는, 방과 후 미술반 활동 같은 것도 없는 시골학교라서 나는, 이런 학교가 다 있나?’하며 허탈했었다. 한 학기가 지나자, 만화책도 마음껏 보고 애들과 늦도록 놀기도 하며 방과 후 시간을 편하고 즐겁게 보내는 평범한 생활에 젖어서…… 그분이미술반 활동을 제대로 해 보겠다는 어조였을 때 저는 독서반을 할 건데요하며 응하지 않았을 법했다. 그러기는커녕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 출신이라는 사실까지 상세히 말씀드렸으니, 고생 많았던 방과 후 미술반 활동을 그 순간 나는 깜박 잊었던 걸까? 전형적인 미술선생님의 풍모를 갖춘 그분과 맞닥뜨린 순간에 별 망설임 없이네에하고 미술반 활동에 참가하겠다고 답한 건 그 까닭일까?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날의 내 태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금요일 6교시 특활시간이 다가왔다. 특활반을 정하는 시간이었다. 그분한테서 미리 당부 받은 듯, 담임선생님이올 해 미술반은 금요일뿐만 아니라 토요일에도 따로 남아 할 거라니까, 잘 생각해서들 희망해라했으므로 우리 학급에서 미술반 희망자는 나 하나뿐이었다. 학급 애들이역시 그림 잘 그리는 애는 다르다.’며 쑤군거리거나 이제 너는 고생길에 들어섰다!’며 걱정하는 표정들인 가운데 나는 담임선생님한테서미술반 희망자 명단쪽지를 받아들고 교실을 나섰다.

희망한 특활반을 찾아가는 전교생들로 복도는 붐볐다. 나는 애들 틈을 비집고 가며 간신히 본관 끝 미술실에 다다랐는데 그 앞 복도에는 애들이 하나도 없었다.

미술실 명패가 달려 있는 것을 보면 내가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닐 텐데?’

조심스레 뒤의 미닫이문을 열었더니 애들 여남은 명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마냥 조용히 앉아 있었다. 지난 학기만 해도 희망자가 넘쳐 더 못 받는다던 미술반이 인원부터 확 줄어들어 있었다. 한 교실이라면 보통 육십 명이 정원인데 여남은 명의 애들만 앉아 있으니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그분이 창가에서 밖을 내다보다가, 교단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 앉아 있는 어린이들은 미술반을 희망해서 온 게 맞지요?”

네에.”

내가 이 자리에서 말할 게 있어요. 담임선생님한테 말씀 들었겠지만 올해 미술반은 금요일 특활시간만 하는 게 아니라 토요일 오후도 할 겁니다. 그리고 봐서, 일요일도 할 것이고 어쩌면 여름방학 때도 할지 모릅니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애들이 있었다. 그분은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어요. 아무래도 미술반 활동을 따라가기 힘들겠구나 싶은 어린이는 지금 이곳에서 나가도 좋습니다. 다시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고 다른 특활반을 찾아가도록 하세요. 자아, 그럼?”

안색이 하얗게 질린 애들 대여섯 명이 주섬주섬 일어나 뒤쪽 미닫이문을 열고 나갔다. 최종적으로 확정된 미술반 인원이 일곱 명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순전히 자발적으로 희망해서 온 애들이 세 명, 나처럼 사전에 그림 솜씨로 인정을 받고 참가약속이 되어 있던 애들이 네 명이었다. 대부분 3,4학년생이었고 6학년은 한 명도 없었다. 유일한 5학년인 내가 미술반 반장으로 정해졌다. 그분은 모두 교탁 앞으로 모여 앉도록 한 뒤 말했다.

내일, 토요일 오후부터 그리기 활동에 들어갑니다. 알겠죠?”

이어서, 그에 따른 지시사항들도 말했다.

첫째, 자기 학급에서 수업이 끝난 뒤 오후 두 시까지 성당 마당으로 와야 합니다. 지각하는 어린이에게는 그리기 활동이 끝난 뒤 주변 청소를 맡길 것입니다. 둘째, 화구를 빠짐없이 갖춰 와야 합니다. 갖출 화구는, 천천히 말할 테니까 연필로 적으세요. 화판, 스케치북, 스무 가지 색 이상의 크레파스, 4B연필 한 자루와 보통 연필 한 자루, 연필깎이 칼, 고무지우개입니다. 내가 화구를 검사해서 한 가지라도 빠졌으면 역시 청소를 맡길 것입니다. 셋째, 만일 비가 오면 말입니다, 그냥 이 미술실에서 활동하겠습니다. 자아, 내가 할 얘기는 다 한 것 같네요. 그럼, 혹시 무슨 질문이 있습니까?”

요즈음 어린이들이었다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선생님은 언제 저희 학교에 오셨나요? 어느 대학을 나오셨고 결혼은 하셨나요?’. 당시의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분을 올려다봤을 뿐이다.

그럼 이만 귀가해도 좋습니다.”

나중에 들은 소문으로는, 그분은 임시로 와 있는 선생님이라 했다. 서울에 있는 어느 미대를 졸업하고 군대를 갈 참이었는데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쉬던 중에 우리 학교 미술반을 맡게 된 거라던가. ‘여의치 않은 사정이란 건강이 안 좋은 사정인 듯싶었다. 그분의 마른 몸매에다가 허연 얼굴빛을 보고 나온 추측이 아니었을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이튿날 오후 두 시에 우리 미술반원은 성당 마당에 모였다. 지각하는 사람은 청소를 시킨다고 한 엄포 때문인지, 지각은커녕 이십 분 전에 모두 모였다. 성당은 남향한 석조 건물로써 그리 높지 않은 동산에 위치했음에도 읍내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소였다. 오래된 큰 밤나무들이 울타리처럼 성당 마당을 에워싸고 있어서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드리울 것 같았다.

이른 봄이라, 그 그늘에 들어가면 추웠다. 우리는 그늘이 없는, 나무들 사이의 양지에 모여 있었다. 각자 커다란 화판의 끈을 어깨에 건 채 스케치 북, 크레파스 등을 손에 쥐고 있으니 화구들 틈에 우리가 끼어있는 모습 같았다. 두 시가 되기 오 분 전에 그분은 성당 마당 입구에 나타났다. 햇빛에 포마드 바른 머리를 빛내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자아, 여기서 그리기 좋은 풍경을 각자 선택해서 그리는 겁니다. 연필로 스케치를 한 뒤에 크레파스로 칠한다는 거는, 더 말 안 해도 잘 알겠지요?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그 안에 다 그렸으면 내게 갖고 올 것. 그럼, 각자 그림 그리기 좋은 자리를 찾아서 이동 실시!”

미술반 활동이 시작된 것이다. 토요일 오후 두 시는 물론 금요일 6교시 특활시간에도 우리는 으레 성당 마당에 모여 한 시간씩 그림을 그렸다. 성당은 학교와 멀지 않아, 금요일에는 5교시가 끝나는 대로 화구들을 챙겨들고 부지런히 가면 모임 시간에 늦지 않았다. 우리는 각자 그리기 편한 곳에 화판, 스케치북 순으로 내려놓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읍내 풍경을 열심히 그렸다. 다 그리고 나면 근처 벤치에서 쉬는 그분한테 갖다 보였고, 그러면 그분은 구도 원근법 명암 색칠 순으로 꼼꼼하게 살펴 미흡한 부분은 직접 고쳐 보이며 지도했다.

날씨가 무더워지자, 밤나무 그늘은 그림 그리고 지도 받기에 괜찮은 시원한 장소로 바뀌었다.

한낮의 읍내 풍경은 투명한 햇빛 속에 잠겨 있었다. 자동차 경적이 간간이 들릴 때에는, 햇빛 한두 가닥이 튕겨져 날아오는 것 같았다. 자동차도 별로 없던 육십 년대 초의 시골 읍은 그 자체가 소리 없는 풍경화였다. 그림의 구도를 깨뜨릴 만한 큰 건물도 없고 대부분 아기자기한 규모의 가옥들이 가느다란 도로들을 끼고 장난감 마을처럼 우리 눈앞에 펼쳐 있었다.

그분이 낭랑한 음성으로 우리 그림을 낱낱이 지적하며 지도할 때 그 가늘고 흰 손가락이란. 그림의 미흡한 부분을 직접 고쳐 보이느라 혼합 색 크레파스처럼 변하기 일쑤였다. 나는 미술반 반장이기도 했지만 그리기 솜씨로도 모범이었다. 수 년 간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에서 닦아온 기량에 그분의 섬세한 지도가 덧입혀지자 사실상 더 배울 게 없는 나의 그리기 솜씨였다.

 

어쩌면, 나는 그 때 그분한테 지도를 받지 않는 게 더 좋았을는지 모른다. 오랜 세월이 지난 이제 생각이다…….

 

여름방학에도 미술반 활동은 계속됐다. 방학 전의 활동 흐름을 이으려는지, ‘금요일과 토요일 오후 두 시에는 성당 마당으로 모여야 했다. 한여름의 읍내 풍경은 따가운 햇볕 때문에 조금씩 흔들리는 듯 보였다. 나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손등으로 훔쳐내며, 눈가에 힘을 줘 그 흔들리는 풍경을 붙잡아 그렸다.

어느 날 나는 눈앞에 있는 밤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읍내 풍경만 그리기가 싫증이 났기 때문이다. 밤나무 잎들만 해도 여러 색이었다. 그 시기나 햇빛을 받는 정도에 따라 흰빛이 도는 연두색부터 온전한 연두색, 조금은 짙은 초록색, 초록색에 흙색을 더한 올리브그린 색…… 숱한 녹색 계통들의 어우러짐이 밤나무 잎사귀들이었다. 그런 잎들을, 암갈색 나무그루와 가지가 적절한 균형으로 떠받쳐주는 게 밤나무 전경이었다.

모두 이리로 모여라!”

내가 그 그림을 제출했을 때 그분은 떨리는 목소리로 미술반원들을 불러 모았다. 그분이 그림 그리고 있는 우리를 도중에 불러 모으기는 처음이었다. 그분은 내 그림을 벤치에 펴 놓고 말했다.

과연 미술반 반장이다. , 이 그림을 잘 보고 어떻게 나뭇잎들의 색깔을 칠했는지, 어떻게 줄기나 가지 모양을 그렸는지, 잘 보라고!”

그분이 내 앞에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니, 나는 쑥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고개를 숙이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날이 여름방학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분은 처음으로 눈앞에 놓인 그림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 정도의 그림이라면 더는 손댈 수 없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분은, 고개 숙이고 선 내 어깨를 두 손으로 잡고 이런 말을 하였다.

이 정도 그림이면 전국 그리기 대회에 나가도 단연 특상이야. 아암 그렇고말고.”

 

   이후 그분은 내 그림을 지도할 때는 다른 애들 것보다 더 오래 했다. 단순한 색칠로 끝나지 않고 미묘한 변화를 주는 기교까지 가르쳤다. 예로써 기와집 지붕을 그릴 때 회색 칠로 그치지 않고 부분적으로 연두색이나 노랑을 보탬으로써 이끼 낀 기왓장 느낌까지 표현하는 기교였다. 밤나무그루도 단순한 암갈색 칠로 끝나지 않고 부분적으로 흰색을 보태어 검지 끝으로 문지르면 햇살을 한 쪽으로 받는 밤나무그루가 되었다  

   다른 애들도 따라 그렸으나 아무래도 내 그림만큼 되지는 못했다. 성당 마당으로 놀러왔던 어른들도 내 그림을 보게 되면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탄했다. 나는 말없이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그리기에 관한 한 내가 우리 학교에서 일인자라는 자부심으로 벅찼다  

   사실, 나는 전학 오기 전 다닌 교대부속초등학교의 미술반에 선발된 과정부터 남달랐다. 그 도시의 여럿 초등학교 중 그 학교만 별나게 입학시험을 치러서 어린이들을 골라 받았는데 나는미술반에서 활동하는 조건으로 입학이 허가된 어린이였다. 간단한 읽기 쓰기 셈하기 그리기 달리기를 과목으로 한 입학시험에서 평균 이하 점수로 불합격되었던 내가 미술반 활동을 조건으로 간신히 입학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시골로 전학 가기 전까지, 매일 방과 후에 미술반에 남아 한 시간씩 그리기를 했었다. ○○시 교육청 주최 그리기 대회에서 내 그림이우수상을 탄 적도 있었다그랬던 내가 전학 온 뒤, 그리기 활동도 없이 평범한 어린이처럼 지내다가…… 뜻하지 않게 미대 출신의 그분을 만나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어린이로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드높일 참이었다.

    그 당시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에는 나처럼 미술반 활동을 조건으로 입학된 애가 더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모두 같은 경우였는데 창피해서 말들을 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건부 입학이란 원죄로 어린 우리는 고생을 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재능은 고생하는 노력 끝에 빛을 보는 게 아닐까? 고진감래라는 말이 그 뜻이 아닌가? 나는 바야흐로 숱한 크레파스와 스케치북들을 쌓은 더미 위에서 전국적으로 빛을 볼 참이었다.

       

    9월이 되면서 우리는 성당 마당을 떠났다. 그 때부터는 625때 비행기 폭격으로 망가졌다는 다리 위에 모였다. 읍내 전경이 보이는 명당자리 성당을 떠나 그런 망측한 장소로 옮기는 게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기껏 짐작한 게밤나무에 밤송이들이 달리기 시작하니, 그게 떨어져서 우리가 다칠까 봐 그러는가 보다였다. 그분의 생각은 달랐다. 풍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성당 마당의 시각을 벗어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한 달 뒤, 덕수궁 그리기 대회에 갔을 때 깨달은 사실이다.

    망가진 다리 위는 나무그늘이 없어서 각자 모자를 쓰고 와야 했다. 다리 위에서는 읍내 풍경의 옆과 앞모습이 보였다. 성당 마당에서는 주로 지붕이나 옥상들이 보였지만 이제는 건물의 벽이나 담 등, 그 동안 제대로 보지 못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성당 마당에서 그리기를 하다가 목이 마르면 가까운 데 있는 펌프를 찾아 물을 마셨다. 다리 위는 그렇지를 못해 물병도 각자 갖고 와야 했다. 다리 위는 여러 모로 그리기 활동에 불편한 장소였다. 다행인 것은 그런 불편이 한 달 만에 마감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마침내, 시월 초에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다는 모 신문사 주최 전국 어린이 그림 그리기 대회에 우리 미술반 명단을 보내면서 망가진 다리 위의 활동을 마감했다.

    대회 날까지는 한 주가 남았다.

    미술실에서 대회를 대비하는 총 정리에 들어갔다. 3월부터 9월 하순까지 매주 이틀씩 그리기를 한 결과물은 대단해서, 그 동안 쓰인 스케치북이 일인당 여덟 권씩 되었다. 스케치북의 낱장마다 그분의 가늘고 흰 손가락이 혼합 색이 되도록 애써 가르치고 고친 흔적들이 가득했다. 햇빛에 고요히 잠겨있거나 간혹 구름 밑에 깔려있던 갖가지 읍내 풍경들이 피땀 자국처럼 남아 있었다. 우리는 스케치북을 하나하나 넘겨보면서 그분한테 지적 받은 부분을 다시 연습해 보는 일로 9월의 마지막 주를 보냈다.

    출전의 날이 왔다.

    새벽 다섯 시 서울 행 버스를 타기 위해 우리는 새벽 네 시 반까지 시외버스 대합실로 모였다. 전국에서 쟁쟁한 애들이 참가하는 그리기 대회라 생각하니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일곱 명 모두 푸석푸석한 얼굴이었다. 교장, 교감 선생님은 물론이고 기성회장님까지 나와 있었다. 기성회장님은 사이다 한 박스를 버스 짐칸에 넣어 두었다.’고 그분한테 일러주었다. 그분은 어둠 속에서도 허연 얼굴로 고개 숙여, 배웅 나온 모든 분들께 인사드렸다. 정작 버스를 타는 우리는 그분까지 여덟 명인데 배웅한다고 나온 어른 분들은 이십여 명이나 되었다. 부모님들까지 따라 나온 때문이었다. 대합실이 좁아 밖으로 나와 선 어른 분들은 추워서 몸을 떨기도 했다. 새벽이면 냉기가 도는 가을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서울에 가 보는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크렁크렁엔진 소리를 내며 버스는 어둠 속 거리로 출발했다. 밤잠을 설친 탓에 얼마 못 가 모두들 녹아떨어진 채, 버스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며 서울로 가고 있었다. 두 시간 넘게 걸려 번잡한 서울 시내 한복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아침식사를 한다고 눈에 뜨이는 식당부터 찾아들어갔는데 차멀미가 가라앉지 않았다. 밥공기를 앞에 두고도 숟가락을 들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분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밥맛이 나지 않는 사람은 조금만 먹고 남겨도 좋습니다. 내가 이따가 빵을 살 테니까, 그 빵이라도 먹으면 되는 거지요. 오늘 여러분은 그저 소풍 왔다고 생각하고 그림 그리면 됩니다. 전국에서 그림 잘 그린다는 애들은 모두 온다지만…… 여러분 정도로 열심히 그린 애들은 별로 없을 테니까, 긴장만 하지 않으면 될 겁니다. 그저 성당 마당에서 그린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요.”

    우리 중 한 아이가 물었다.

    망가진 다리 위에서 그린다고 생각하면 안 되나요?”

     , 웃기는 놈 같으니라고!”

     그분은 껄껄껄 웃었다.

     화창한 날씨였다. 덕수궁 안은 전국에서 모여든 그리기 대회 참가 어린이들로 바글바글했다. 우리 학교의 전체 어린이 숫자인 천 명에 가까울 듯했다. 그분이 대회본부에서참가 어린이 이름표를 받아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조심스레 왼쪽 가슴에 달고서 각자 흩어져 그림 그리기에 들어갔다. 주어진 화제는 가을 풍경이었다. 그분은 내 곁에 와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중심으로 그리면 된다.’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건물 주위로 단풍든 나무들이 있고 높고 푸른 하늘에는 구름도 두어 점 떠 있으니, 이게 바로 가을 풍경이 아니고 뭐냐?”

   아하, 이래서 읍내 건물들의 앞이나 옆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리도록 망가진 다리 위에서 그리기 활동을 했었구나!’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다소 비현실적인 화가의 풍모를 갖췄지만 우리 미술반 지도에 있어서는 그토록 치밀하고 철저할 수가 없는 그분이었다.

    전국적인 대회라 해서 참가 어린이들만 대회장에 들어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인솔한 선생님들이나 부모님들까지 들어와서 김밥이나 사이다를 먹으면서 참가한 어린이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중에도 어른 분들이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그림에 몰두하느라 잘 듣지는 못했지만 특상 감이라느니 맡아놓은 당상이라느니소년 화가라느니 하는 말들이었다. 그분 역시 간간이 내 주위를 오가고 있었다. 고개 들고 보지 않아도 그분만의 독특한 체취랄까 분위기가 있어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분은 그리기에 몰입하는 제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녀가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배우고 익힌 모든 역량을 대회본부의 확인 도장이 구석에 찍힌 켄트지 위에 남김없이 쏟아냈다. 대상으로 삼은 건물이 석조이지만 잿빛을 기본 바탕으로 칠해 놓고 부분적으로 흰색이나 검정색을 보탠 뒤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면서, 석조 건물 자체의 명암에 따른 입체감 살리기에 힘썼다. 그림이 완성되어 갈 즈음에는 어른 분들이 와서 탄복하는 소리들이 내 귓전으로 계속 들렸다. 마침내 나는 완성된 그림을 들고 본부석으로 향했다. 마감시간이 오 분 남짓 남아서, 그림을 제출하려는 애들로 긴 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다른 애들 그림을 엿봤더니 유치한 수준이었다. 덕수궁 건물들을 엉성하게 그려놓고 여기저기서 노는 애들 모습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한결같은 단색이었다.

    나는 그림을 제출한 뒤 약속 장소인 분수대 물개 상 앞으로 갔다. 그분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다른 애들도 와 있었다. 수많은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분수대 주변에서 모이거나 떠나느라 소란스러운데도 그분의 낭랑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분은 말했다.

   나 참, 버스에서 사이다 박스를 내린다는 것을 잊고 말았구나. 미안하다. 내가 출장비 받은 게 많으니까 사이다를 두 병씩 사 주마. 그깟 놈의 사이다가 문제냐, 우리 미술반 모두가 상을 휩쓸 텐데!”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읍으로 돌아온 뒤의 얘기는 사실, 회상하고 싶지 않다.

    우리 미술반은 단 한 아이도 상을 받지 못한 것이다. 뜻밖의 참담한 결과였다. 돌아온 이틀 후, 특상부터 가작까지 입상자들 명단이 학교 이름과 함께 백 명 넘게 일간 신문에 실렸는데 단 한 명도 우리 학교 미술반은 뽑히지 못했다. 믿기지 않았다.

    입상자 명단 발표 후 우리는 그분을 볼 수가 없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분이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갔다 했다. 또 다른 소문으로는 몸의 병이 악화되어 급히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했다고도 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더는 그분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금요일 6교시 특활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미술실에 모였다. 나까지 다섯 명이 출석했다. 한 명은 몸이 아파 조퇴했고 다른 한 명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스케치북을 꺼내놓지도 않고 앉아 잡다한 얘기들이나 나누었다. 그분에 대한 소문부터 재미있게 본 만화 얘기, 어느 반 화장실 벽에 그려져 있다는 이상한 그림 얘기 등을 두서없이 나누고 있었다. 십여 분 지났다. 앞쪽의 미닫이문이 반쯤 열리더니 교무과장 선생님이 나타났다. 교장 선생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데, 운동장 조회 때 사회를 보다가 순서를 바꾸거나 할 말이 안 떠올라 허둥대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 선생님은 문도 다 열지 않고 복도에 서서 얼굴만 미술실 안으로 들여놓은 모양으로 우리한테 말했다.

    여기 미술반 맞지요? 내가 당분간 미술반 담당입니다. 뭐 미술이라는 게…… 뭔가 그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각자 만화를 그려도 좋고 낙서로 그려도 좋고, 여하튼 떠들지만 말고 조용히 그림 그리고 있으면 됩니다. 알았죠?”

    알았죠?’에서 이상하게 높아진 그분의 어조에 우리는 겁먹고 힘차게 대답했다.

    네에!”

     교무과장 선생님은 이번에는 어조를 바짝 낮추어 으르렁거리듯 말을 이었다.

    내가 교무실에 있으면서 가끔씩 여기를 와서 살펴볼 겁니다. 그 때 아무 것도 안 그리고 장난치는 새끼는 각오해! ……알았죠?”

     네에!”

     교무과장 선생님은 반쯤 열었던 미닫이문을 다시 닫고 사라졌다.

     

​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서울 덕수궁 사건이 도대체 납득이 안 되었었다. 거대한 사기를 당한 것처럼 황당하게 끝난 결과도 그렇지만, 의욕 넘치던 그분이 황황히 자취를 감추고 만 일까지 떠올려 본다면 도대체가 납득이 안 되는 덕수궁 그리기 대회 사건이었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일까, 얼마 전 그 사건이 비로소 납득되었다. 그분은 우리한테 그림을 지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잊었었다. 어린이 그림에 담겨져야 할 동심을 빠트린 것이다. 당시 일간 신문의 한 면을 가득 채웠던 입상 그림들만 봐도 기교보다는 천진난만한 동심이 넘쳐나고 있었다. 덕수궁 석조 건물이 투박하게 만화처럼 그려졌더라도 그 주위를 넘치는 즐겁고 산뜻한 색칠만으로도 그 그림은 충분했다. 어린이 그림이니까. 어린이는 동심을 가진 유일한 존재이니까.

    단순한 석조 건물을, 갖가지 기교를 동원해서 어른처럼 원숙하게 그렸던 우리 학교 미술반원들의 그림은 당연히 입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분이 기대를 걸었던 내 그림은 그런 어린이 대상 그리기 대회가 아닌,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그리기 대회에서나 적합하지 않았을까? 내가 그 날 덕수궁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때, 여기저기서 자유롭게 사이다도 마시고 김밥도 먹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던 무심한 애들의 모습이 바로 그 그리기 대회의 정답이었다. 그런 애들의 그림에는 천진난만한 동심이 담겨있을 수밖에 없었다.

   덕수궁 사건은 내게 정신적 상처를 준 게 분명했다. 특별한 교육을 내세우는 교대부속초등학교에, 미술반 활동을 조건으로 입학할 정도로 그리기에 재능을 보였던 나는 그 덕수궁 그리기대회 사건 이후로 그림에 영 흥미를 잃어버렸다. 같이 활동했던 다른 애들도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서로 궁금하지도 않을 정도로 우리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매주 이틀씩 한 가족처럼 붙어 다니며 그리기 활동에 매진하던 우리였었는데.

    그분은 우리에게 죄인일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의욕에 넘쳐서 열과 성을 다하여 그림을 가르치던 그분이 오랜 세월 뒤에만화를 그려도 좋고 낙서로 그려도 좋으니까 여하튼 떠들지만 마라는 어느 시골학교 교무과장 선생님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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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서울 덕수궁 사건이 도대체 납득이 안 되었었다. 거대한 사기를 당한 것처럼 황당하게 끝난 결과도 그렇지만, 의욕 넘치던 그분이 황황히 자취를 감추고 만 일까지 떠올려 본다면 도대체가 납득이 안 되는 덕수궁 그리기 대회 사건이었었다.

    나이가 많이 들어서일까, 얼마 전 그 사건이 비로소 납득되었다. 그분은 우리한테 그림을 지도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잊었었다. 어린이 그림에 담겨져야 할 동심을 빠트린 것이다. 당시 일간 신문의 한 면을 가득 채웠던 입상 그림들만 봐도 기교보다는 천진난만한 동심이 넘쳐나고 있었다. 덕수궁 석조 건물이 투박하게 만화처럼 그려졌더라도 그 주위를 넘치는 즐겁고 산뜻한 색칠만으로도 그 그림은 충분했다. 어린이 그림이니까. 어린이는 동심을 가진 유일한 존재이니까.

    단순한 석조 건물을, 갖가지 기교를 동원해서 어른처럼 원숙하게 그렸던 우리 학교 미술반원들의 그림은 당연히 입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분이 기대를 걸었던 내 그림은 그런 어린이 대상 그리기 대회가 아닌,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그리기 대회에서나 적합하지 않았을까? 내가 그 날 덕수궁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을 때, 여기저기서 자유롭게 사이다도 마시고 김밥도 먹으면서 즐거운 마음으로 그림을 그리던 무심한 애들의 모습이 바로 그 그리기 대회의 정답이었다. 그런 애들의 그림에는 천진난만한 동심이 담겨있을 수밖에 없었다.

   덕수궁 사건은 내게 정신적 상처를 준 게 분명했다. 특별한 교육을 내세우는 교대부속초등학교에, 미술반 활동을 조건으로 입학할 정도로 그리기에 재능을 보였던 나는 그 덕수궁 그리기대회 사건 이후로 그림에 영 흥미를 잃어버렸다. 같이 활동했던 다른 애들도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서로 궁금하지도 않을 정도로 우리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매주 이틀씩 한 가족처럼 붙어 다니며 그리기 활동에 매진하던 우리였었는데.

    그분은 우리에게 죄인일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의욕에 넘쳐서 열과 성을 다하여 그림을 가르치던 그분이 오랜 세월 뒤에만화를 그려도 좋고 낙서로 그려도 좋으니까 여하튼 떠들지만 마라는 어느 시골학교 교무과장 선생님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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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시외버스를 타고 읍으로 돌아온 뒤의 얘기는 사실, 회상하고 싶지 않다.

  우리 미술반은 단 한 아이도 상을 받지 못한 것이다. 뜻밖의 참담한 결과였다. 돌아온 이틀 후, 특상부터 가작까지 입상자들 명단이 학교 이름과 함께 백 명 넘게 일간 신문에 실렸는데 단 한 명도 우리 학교 미술반은 뽑히지 못했다. 믿기지 않았다.

  입상자 명단 발표 후 우리는 그분을 볼 수가 없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분이 사표를 내고 고향으로 갔다 했다. 또 다른 소문으로는 몸의 병이 악화되어 급히 서울의 큰 병원에 입원했다고도 했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더는 그분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금요일 6교시 특활시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미술실에 모였다. 나까지 다섯 명이 출석했다. 한 명은 몸이 아파 조퇴했고 다른 한 명은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스케치북을 꺼내놓지도 않고 앉아 잡다한 얘기들이나 나누었다. 그분에 대한 소문부터 재미있게 본 만화 얘기, 어느 반 화장실 벽에 그려져 있다는 이상한 그림 얘기 등을 두서없이 나누고 있었다. 십여 분 지났다. 앞쪽의 미닫이문이 반쯤 열리더니 교무과장 선생님이 나타났다. 교장 선생님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데, 운동장 조회 때 사회를 보다가 순서를 바꾸거나 할 말이 안 떠올라 허둥대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 선생님은 문도 다 열지 않고 복도에 서서 얼굴만 미술실 안으로 들여놓은 모양으로 우리한테 말했다.

  여기 미술반 맞지요? 내가 당분간 미술반 담당입니다. 뭐 미술이라는 게…… 뭔가 그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각자 만화를 그려도 좋고 낙서로 그려도 좋고, 여하튼 떠들지만 말고 조용히 그림 그리고 있으면 됩니다. 알았죠?”

  알았죠?’에서 이상하게 높아진 그분의 어조에 우리는 겁먹고 힘차게 대답했다.

  네에!”

   교무과장 선생님은 이번에는 어조를 바짝 낮추어 으르렁거리듯 말을 이었다.

  내가 교무실에 있으면서 가끔씩 여기를 와서 살펴볼 겁니다. 그 때 아무 것도 안 그리고 장난치는 새끼는 각오해! ……알았죠?”

   네에!”

   교무과장 선생님은 반쯤 열었던 미닫이문을 다시 닫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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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이 되면서 우리는 성당 마당을 떠났다. 그 때부터는 625때 비행기 폭격으로 망가졌다는 다리 위에 모였다. 읍내 전경이 보이는 명당자리 성당을 떠나 그런 망측한 장소로 옮기는 게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기껏 짐작한 게밤나무에 밤송이들이 달리기 시작하니, 그게 떨어져서 우리가 다칠까 봐 그러는가 보다였다. 그분의 생각은 달랐다. 풍경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성당 마당의 시각을 벗어나는 데 목적이 있었다. 한 달 뒤, 덕수궁 그리기 대회에 갔을 때 깨달은 사실이다.

    망가진 다리 위는 나무그늘이 없어서 각자 모자를 쓰고 와야 했다. 다리 위에서는 읍내 풍경의 옆과 앞모습이 보였다. 성당 마당에서는 주로 지붕이나 옥상들이 보였지만 이제는 건물의 벽이나 담 등, 그 동안 제대로 보지 못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성당 마당에서 그리기를 하다가 목이 마르면 가까운 데 있는 펌프를 찾아 물을 마셨다. 다리 위는 그렇지를 못해 물병도 각자 갖고 와야 했다. 다리 위는 여러 모로 그리기 활동에 불편한 장소였다. 다행인 것은 그런 불편이 한 달 만에 마감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마침내, 시월 초에 서울 덕수궁에서 열린다는 모 신문사 주최 전국 어린이 그림 그리기 대회에 우리 미술반 명단을 보내면서 망가진 다리 위의 활동을 마감했다.

    대회 날까지는 한 주가 남았다.

    미술실에서 대회를 대비하는 총 정리에 들어갔다. 3월부터 9월 하순까지 매주 이틀씩 그리기를 한 결과물은 대단해서, 그 동안 쓰인 스케치북이 일인당 여덟 권씩 되었다. 스케치북의 낱장마다 그분의 가늘고 흰 손가락이 혼합 색이 되도록 애써 가르치고 고친 흔적들이 가득했다. 햇빛에 고요히 잠겨있거나 간혹 구름 밑에 깔려있던 갖가지 읍내 풍경들이 피땀 자국처럼 남아 있었다. 우리는 스케치북을 하나하나 넘겨보면서 그분한테 지적 받은 부분을 다시 연습해 보는 일로 9월의 마지막 주를 보냈다.

    출전의 날이 왔다.

    새벽 다섯 시 서울 행 버스를 타기 위해 우리는 새벽 네 시 반까지 시외버스 대합실로 모였다. 전국에서 쟁쟁한 애들이 참가하는 그리기 대회라 생각하니 밤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일곱 명 모두 푸석푸석한 얼굴이었다. 교장, 교감 선생님은 물론이고 기성회장님까지 나와 있었다. 기성회장님은 사이다 한 박스를 버스 짐칸에 넣어 두었다.’고 그분한테 일러주었다. 그분은 어둠 속에서도 허연 얼굴로 고개 숙여, 배웅 나온 모든 분들께 인사드렸다. 정작 버스를 타는 우리는 그분까지 여덟 명인데 배웅한다고 나온 어른 분들은 이십여 명이나 되었다. 부모님들까지 따라 나온 때문이었다. 대합실이 좁아 밖으로 나와 선 어른 분들은 추워서 몸을 떨기도 했다. 새벽이면 냉기가 도는 가을이었다.

    난생 처음으로 서울에 가 보는 애들이 대부분이었다. ‘크렁크렁엔진 소리를 내며 버스는 어둠 속 거리로 출발했다. 밤잠을 설친 탓에 얼마 못 가 모두들 녹아떨어진 채, 버스가 움직이는 대로 흔들리며 서울로 가고 있었다. 두 시간 넘게 걸려 번잡한 서울 시내 한복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 아침식사를 한다고 눈에 뜨이는 식당부터 찾아들어갔는데 차멀미가 가라앉지 않았다. 밥공기를 앞에 두고도 숟가락을 들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분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밥맛이 나지 않는 사람은 조금만 먹고 남겨도 좋습니다. 내가 이따가 빵을 살 테니까, 그 빵이라도 먹으면 되는 거지요. 오늘 여러분은 그저 소풍 왔다고 생각하고 그림 그리면 됩니다. 전국에서 그림 잘 그린다는 애들은 모두 온다지만…… 여러분 정도로 열심히 그린 애들은 별로 없을 테니까, 긴장만 하지 않으면 될 겁니다. 그저 성당 마당에서 그린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지요.”

    우리 중 한 아이가 물었다.

    망가진 다리 위에서 그린다고 생각하면 안 되나요?”

     , 웃기는 놈 같으니라고!”

     그분은 껄껄껄 웃었다.

     화창한 날씨였다. 덕수궁 안은 전국에서 모여든 그리기 대회 참가 어린이들로 바글바글했다. 우리 학교의 전체 어린이 숫자인 천 명에 가까울 듯했다. 그분이 대회본부에서참가 어린이 이름표를 받아 우리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리는 그것을 조심스레 왼쪽 가슴에 달고서 각자 흩어져 그림 그리기에 들어갔다. 주어진 화제는 가을 풍경이었다. 그분은 내 곁에 와서 바로 눈앞에 보이는 건물을 중심으로 그리면 된다.’며 이런 말을 덧붙였다.  

   “건물 주위로 단풍든 나무들이 있고 높고 푸른 하늘에는 구름도 두어 점 떠 있으니, 이게 바로 가을 풍경이 아니고 뭐냐?”

   아하, 이래서 읍내 건물들의 앞이나 옆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리도록 망가진 다리 위에서 그리기 활동을 했었구나!’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다소 비현실적인 화가의 풍모를 갖췄지만 우리 미술반 지도에 있어서는 그토록 치밀하고 철저할 수가 없는 그분이었다.

    전국적인 대회라 해서 참가 어린이들만 대회장에 들어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인솔한 선생님들이나 부모님들까지 들어와서 김밥이나 사이다를 먹으면서 참가한 어린이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중에도 어른 분들이 들여다보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그림에 몰두하느라 잘 듣지는 못했지만 특상 감이라느니 맡아놓은 당상이라느니소년 화가라느니 하는 말들이었다. 그분 역시 간간이 내 주위를 오가고 있었다. 고개 들고 보지 않아도 그분만의 독특한 체취랄까 분위기가 있어서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분은 그리기에 몰입하는 제자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녀가고 있었다. 나는 그 동안 배우고 익힌 모든 역량을 대회본부의 확인 도장이 구석에 찍힌 켄트지 위에 남김없이 쏟아냈다. 대상으로 삼은 건물이 석조이지만 잿빛을 기본 바탕으로 칠해 놓고 부분적으로 흰색이나 검정색을 보탠 뒤 손가락 끝으로 문지르면서, 석조 건물 자체의 명암에 따른 입체감 살리기에 힘썼다. 그림이 완성되어 갈 즈음에는 어른 분들이 와서 탄복하는 소리들이 내 귓전으로 계속 들렸다. 마침내 나는 완성된 그림을 들고 본부석으로 향했다. 마감시간이 오 분 남짓 남아서, 그림을 제출하려는 애들로 긴 줄이 형성되어 있었다. 다른 애들 그림을 엿봤더니 유치한 수준이었다. 덕수궁 건물들을 엉성하게 그려놓고 여기저기서 노는 애들 모습을 그린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한결같은 단색이었다.

    나는 그림을 제출한 뒤 약속 장소인 분수대 물개 상 앞으로 갔다. 그분이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다른 애들도 와 있었다. 수많은 어린이들과 어른들이 분수대 주변에서 모이거나 떠나느라 소란스러운데도 그분의 낭랑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그분은 말했다.

   나 참, 버스에서 사이다 박스를 내린다는 것을 잊고 말았구나. 미안하다. 내가 출장비 받은 게 많으니까 사이다를 두 병씩 사 주마. 그깟 놈의 사이다가 문제냐, 우리 미술반 모두가 상을 휩쓸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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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그분은 내 그림을 지도할 때는 다른 애들 것보다 더 오래 했다. 단순한 색칠로 끝나지 않고 미묘한 변화를 주는 기교까지 가르쳤다. 예로써 기와집 지붕을 그릴 때 회색 칠로 그치지 않고 부분적으로 연두색이나 노랑을 보탬으로써 이끼 낀 기왓장 느낌까지 표현하는 기교였다. 밤나무그루도 단순한 암갈색 칠로 끝나지 않고 부분적으로 흰색을 보태어 검지 끝으로 문지르면 햇살을 한 쪽으로 받는 밤나무그루가 되었다  

   다른 애들도 따라 그렸으나 아무래도 내 그림만큼 되지는 못했다. 성당 마당으로 놀러왔던 어른들도 내 그림을 보게 되면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탄했다. 나는 말없이 그리기에 몰두하고 있었지만, 그리기에 관한 한 내가 우리 학교에서 일인자라는 자부심으로 벅찼다  

   사실, 나는 전학 오기 전 다닌 교대부속초등학교의 미술반에 선발된 과정부터 남달랐다. 그 도시의 여럿 초등학교 중 그 학교만 별나게 입학시험을 치러서 어린이들을 골라 받았는데 나는미술반에서 활동하는 조건으로 입학이 허가된 어린이였다. 간단한 읽기 쓰기 셈하기 그리기 달리기를 과목으로 한 입학시험에서 평균 이하 점수로 불합격되었던 내가 미술반 활동을 조건으로 간신히 입학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시골로 전학 가기 전까지, 매일 방과 후에 미술반에 남아 한 시간씩 그리기를 했었다. ○○시 교육청 주최 그리기 대회에서 내 그림이우수상을 탄 적도 있었다그랬던 내가 전학 온 뒤, 그리기 활동도 없이 평범한 어린이처럼 지내다가…… 뜻하지 않게 미대 출신의 그분을 만나 그림을 아주 잘 그리는 어린이로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드높일 참이었다.

    그 당시 교대부속초등학교 미술반에는 나처럼 미술반 활동을 조건으로 입학된 애가 더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모두 같은 경우였는데 창피해서 말들을 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조건부 입학이란 원죄로 어린 우리는 고생을 했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하지만 재능은 고생하는 노력 끝에 빛을 보는 게 아닐까? 고진감래라는 말이 그 뜻이 아닌가? 나는 바야흐로 숱한 크레파스와 스케치북들을 쌓은 더미 위에서 전국적으로 빛을 볼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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