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티크님이라는 분이 계시다. 뿔달린 사슴(순록?)이 그분의 마스코트인데, 앤티크님이 쓰신 코멘트를 보다가 이런 답글을 달았다.
"어머님께 노경이나 해드리고 싶네요"
앤티크님: 노경이 뭐죠?
나: 노경을 모르시다니...저희 집만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사슴뿔을 노경이라고 하지요. 사슴뿔이 보약이잖습니까???
앤티크님: 헛...사슴뿔을 노경이라고 합니까!! 사슴뿔을 썰어논 약재를 녹용이라고 하는건 알지만...^^;; 혹시 노경=녹용일까요?? ㅎㅎ

그랬다. 사슴뿔은 '녹용'이었다. '노경'을 본 사람들이 얼마나 날 비웃었을까 생각하니,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노경을 모르시다니"라고 잘난 체만 안했으면 조금 나았을텐데. '노경'뿐만이 아니다. '배게'인지 '베개'인지, '육계장'인지 '육개장'인지, '목욕재계'가 맞는지, 헷갈리는 단어들이 너무 많다. 언젠가는 "여관에 묶다"라고 썼다가 지탄을 받은 적도 있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맞춤법을 틀리는 어른들을 맘 속으로 비웃곤 했었는데, 이젠 내가 그 꼴이 된 거다. 글을 쓸 때 오자에 민감한 나지만, 무지에서 비롯된 오자는 고칠 수도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한가지 이유는 고교를 졸업한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거다. 졸업 당시만 해도 맞춤법을 대충 다 알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고 손으로 글씨를 쓰는 일이 줄어들면서 정확한 철자에 점점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게다가 인터넷은 교정 기능이 전혀 없어서, 말도 안되는 단어를 써도 글 등록이 된다. 한글만 해도 틀린 글자를 치면 자기가 알아서 고쳐 버리거나 빨간 줄을 긋는데 말이다. 또하나. 맞춤법이 자꾸 바뀌고 있는 것도 바른 철자를 쓰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했읍니다"가 맞았고, "아름다와(이게 모음조화인가 그랬다)"가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했습니다"고, "아름다워"다. 쓰기 편하게 한다고 바꾸는 맞춤법 표기안이지만, 나처럼 재교육을 받을 길이 없는 사람에겐 그게 더 불편하다.

그런데 꼭 그렇게 슬퍼할 것만은 아닌 것이, 요즘 젊은 아이들의 맞춤법은 더 엉망인 것 같아서다. 그들은 난이도가 높은 글자를 틀리는 게 아니라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의 철자를 틀린다. "안냐세요"처럼 인터넷 용어로 정립된 거야 이해할 수 있어도, 정말로 몰라서 틀린다는 인상을 주는 경우가 많다. 모 신문 독자마당에 오른 글의 일부다.
[정~말 실타 시러~  총선 투푯날 몇달 남지두 안았는데 고새를 못 참고..]
'실타시러'는 인터넷 용어로 봐줄 수 있다. 그런데 "안았는데"와 "투푯날"도 일부러 그리 쓴걸까? 이건 그래도 양호한 편이고, 진짜 젊은 아이들은 온갖 이모티콘과 기호를 조합해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로 글을 쓴다. 일부에서 제기되는 '한글파괴' 주장에 동조할 마음은 없지만, 사소한 오자도 부끄러워하는 나와 달리 그들 세대는 맞춤법이 틀리는 걸 전혀 어색해하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처음엔 장난이라도, 자꾸 하면 나중에는 못고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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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2-12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카이레님의 서재에서 <언문세설>이라는 책의 리뷰를 발견하고는 제게 꼭 필요한 책이라고 무릎을 쳤더랬죠. 얼른 사서 얼른 읽고 마태우스님에게도 적합한 처방전 같으면 얼른 권해드리겠습니다. 물론...그 얼른이 언제일지는 모르지만요.^^
그런데...나도 나지만, 마태우스님도 심하게 서재에 붙어계시는군요.ㅋㅋ 밥은 드셨는지.

비로그인 2004-02-1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제이름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답니다. 근데 정말루...노경=녹용이었군요?? 전 사실 '노경이라는 것을 모르다니...너무 무지한 것일까'라고 진지하게 고민했더랬는데...^^ 저두 예전엔 맞춤법 꽤나 정확하고 했었는데, 지금은 뭐가 맞는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인터넷을 하게 되면서, 쉽게 글을 쓰고, 발음나는 대로 적고, 이런 것들이 너무 습관이 되서 그런가봐요.

mannerist 2004-02-13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종석 선생의 언문세설... 맞춤법과는 좀 거리 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냥 그분의 글 속에서 두어 시간 허우적댄 기억밖에 안 남네요. ㅋㅋㅋ

진/우맘 2004-02-13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엉...어제 주문했는데TT
뭐, 꼭 맞춤법을 기대한 것만은 아니지만요.

chaire 2004-02-13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맞춤법하고는 거리가 좀 있어요... 어쩌죠? 괜실히 죄송... 그래두 재밌게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그저 고종석의 산문 읽는 기분으로 읽었거든요...

마태우스 2004-02-14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그 책을 읽어야 할지 혼란스럽네요. 찬성쪽이 진우맘님, 카이레님, 반대쪽이 매너리스트님, 2: 1이니 읽어야 쓰겄네요 (매너리스트님께 죄송)
 

 

 

 

 

 

 

 

* 이 글까지 올리면 제가 뭐하는 놈인지 다 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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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이 인터넷에 쓴 고백수기의 일부다.
[초등학교 때 기생충에 걸렸었다....똑똑 끊어져 대변에 섞여 나오기도 하고 수업 중에도 항문을 간지럽히며 나오기도 하였다. 회충약 아무리 먹어도 소용없었다. 어느날 아버지의 강요로 석유를 반컵정도 먹었다. 속이 뒤틀려 죽는줄 알았고 몇분 후에 엄청난 설사가 나오면서 그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항문에 걸려있는 그놈을 보고 질려버렸다. 몇미터가 넘는놈이 나왔는데도 아직 또 남았다니...정신을 차린 후 휴지를 대고 한참을 잡아뺐다. 기분나쁜 느낌을 억누르며 몇미터를 더 빼낸 후에 그놈을 제거할 수 있었다....]

이 기생충은 광절열두조충이라는 기생충으로, 몇미터에 달할 정도로 길다란 몸을 가지고 있는데, 매일같이 끝조각을 외계로 내보냄으로써 자손을 전파시킨다. 이것은 조충(촌충)에 속하므로 회충약을 백날 먹어야 소용이 없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아버지가 그 조각을 들고 병원이나 인근 대학의 기생충학교실을 찾았다면 약 한알로 충분히 해결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결국 그의 아들은 석유를 마셔야 했다. 어린 나이에 얼마나 속이 쓰렸을까를 생각하면 정말이지 마음이 아프다.

이 아버지가 병원을 찾지 않은 이유는 뭘까? 회충약을 먹인 것으로 보아 기생충은 약에 잘 듣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맞다. 기생충은 대부분 약에 잘 듣는다. 하지만 아무리 먹여도 낫지 않는다면, 석유를 먹이는 대신 병원에 데리고 왔어야 하는 게 아닐까? 모르긴 해도 아버지는 기생충을 부끄러운 병으로 생각했을 테고, 병원에 가기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했을게다. 이 아버지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기생충을 자신과의 싸움으로 생각한다. 이 기생충에 걸린 또다른 사람은 "좋다! 한번 싸워보자!"며 석달 동안 별 짓을 다 했단다. 온갖 요법을 다 썼지만 기생충은 몸 안에 그대로 있었는데, 그는 결국 내가 준 프라지콴텔 한알을 먹고서 벌레를 퇴치할 수 있었다. 그의 말이다.
"누구에게 말하기도 부끄럽고 해서.. 제가 이것 때문에 그동안 잠을 못잤어요"
이해한다. 길다란 벌레가 몸 안에 있는데 잠이 오겠는가. 문제는 왜 그런 걸 혼자 끙끙대며 고민하는가다. 그건 아마도 기생충이 더러운 것이며, 못사는 사람의 질병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일선 학교에서 채변검사를 의무적으로 했던 어린 시절, 기생충에 걸린 아이는 다른 아이들의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영화 <클래식>에서도 누군가가 산속에 싸놓은 대변을 제출한 주인공이 온갖 기생충에 다 걸렸다며 담임으로부터 놀림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경험들이 머리 속에 각인되어 기생충에 걸리는 걸 죄악시해온 게 아닐까? 감기에 걸린 게 부끄러운 게 아니듯, 기생충에 감염된 자체가 지탄받아야 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기생충이 성병보다 더 말하기 곤란한 질병이 되어버린 작금의 현실은 분명 문제가 있다. 기생충이 못사는 사람들의 질병이라는 건 이미 옛날 일이고, 지금 유행하는 기생충들은 생선회나 육회같이 비싼 음식들을 통해 전파된다. 그러니 기생충에 걸렸다는 건 자신이 인텔리임을 입증하는 증거일 터, 부끄러워하지 말고 전문가와 상담하는 게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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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2-12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생충에 대한 올바른 대처방법인 것 같은데, 제시된 예는...아찔하구만요...ㅎㅎ

가을산 2004-02-12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 TV 프로에서 돼지의 X을 받아 다가, 그것도 친구 몇이 '의리'를 팔며 나누어달라고 해서 나누어 냈다가 '콜레라'에 걸렸다며 격리되어서 혼났다는 독자 체험이 연상되는군요. ^^


마태우스 2004-02-13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티크님/석유라니 좀 엽기적이죠?
가을산님/그런 일도 있었나요? 호호호.
 

 

 

 

 

 

지난 일요일, <천국의 계단> 마지막회를 재방송으로 봄으로써 20회에 달하는 긴 여정이 끝이 났다. 인터넷으로 본 게 15회고, TV로 본 건 다섯번이다. 뭐가 하나 끝나면 아쉬움 같은 게 남아있을 법도 하지만, 이 드라마는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말이 안되도 너무 안되는 게 많은지라 짜증이 팍팍 났는데, 한번 본 건 끝까지 책임을 지는 이상한 성격 때문에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른 건 다 16부작인데, 이건 왜 20회나 한담?"이라며 불평도 해가면서. 원래 일년에 하나꼴로 드라마를 보는 나지만, 이번 드라마를 너무 힘들게 봐서 그런지 당분간 드라마는 안하려고 한다. 악평도 있지만 호평이 더 많은 <발리에서 생긴 일>을 안보려는 건, 이미 늦기도 했지만 <천국>의 후유증 탓이 더 크다. "어쩌면 그가 나보다 그녀를 더 사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덜 사랑했다는 건 아니다..." 피아노 치는 권상우는 멋지지만,  끝까지 이런 말장난을 하다니!

옛날만 해도 난 드라마 보는 걸 끔찍히 싫어했다. 남자 친구들이 드라마 얘기를 하면 "인간이냐"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내 눈이 워낙 작아서 뜻이 제대로 전달된 것 같지는 않지만). <사랑이 뭐길래>같은 장안의 화제작에도 난 초연했다. 그러던 내게 드라마가 볼만한 거라는 걸 가르쳐 준 건 바로 <미스터 큐>였다. 허영만의 원작만화를 읽었던 터라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서 봤는데, 정말 재미있게 봤다. 송윤아의 악녀 연기가 일품이었던 기억도 나는데, 그건 내가 재미있게 본 드라마 중 역대 4위에 올라있다.


3위는 <진실>. 최지우와 지금은 뭐하는지 모르겠는 유시원이 나오고, 박선영의 악녀연기가 압권이었던 드라마다. 박선영이 얼마나 연기를 잘했는지, 난 지금도 그녀가 싫고, 볼 때마다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거 때문에 월요일, 화요일이면 술약속을 안잡으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2위는 <명랑소녀 성공기>. 가수 장나라가 나오긴 했지만, 난 사실 장혁 때문에 그 드라마를 봤다. 권위적이기 짝이없던 그가 가끔씩 양순이(장나라)에게 보여주는 친절이 너무도 따뜻해 보였고, 귀공자풍의 그가 쫄딱 망하니까 몇배는 더 불쌍해 보였다. 조형기 등 조연들의 열연도 드라마를 재미있게 만드는 이유였는데, 끝에 가서 갑자기 장나라가 군대를 가느니 하는 바람에 김이 새기도 했다.


영예의 1위는....<위풍당당 그녀>! <굳세어라 금순아> <봄날의 곰을...> <고양이를 부탁해> <복수는 나의 것> 등 배두나가 나오기만 하면 몽땅 망하는 영화와는 달리, 그 드라마는 최고의 시청률을 보여주며 날 흠뻑 빠지게 했다. 탄탄한 줄거리와 배두나, 신성우의 멋진 연기가 돋보이는 드라마였는데, 그 드라마가 끝났을 때는 세상이 끝난 것 같았다.

그럼 <천국>은 5위냐, 절대 그렇지 않다. 위에 열거한 드라마들은 그래도 줄거리가 말이 되는 편이었고, 결말도 그럴 듯했다. 그런데 <천국>은 그게 아니잖는가. 신현준은 막판을 빼놓고 시종 짜증만 났고, 최지우는 맨날 울고있고, 권상우는....폼만 잡는다. 뻑하면 뛰고, 안뛸 때는 울어댔다. 이런 드라마가 40%의 시청률을 기록한 건 매우 수상쩍은 일이다. 순위고 뭐고, 내가 고른 드라마가 늘 성공만 하는 게 아니라는 쓰라린 경험을 내게 안겨준 드라마로 기억할 거다. 영화에선 <낭만자객>, 드라마에선 <천국>. 그래도 한가지 느낀 건 있다. 권상우가 폼잡을 때 하는 것처럼, 뒤에 애들을 거느리고 걷는 게 참으로 멋있다는 것. 여섯명 정도가 모였을 때 한번 해봐야겠다. 내가 가운데 서고, 애들을 뒤에 서게 하고... 그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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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2-12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는 안 봐서 모르겠지만, 검은 양복 빼입은 사람들이 뒤에 서고 중앙에서 바바리 코트 자락 휘날리는...그런 모드 같은데...
바바리 코트 자락이 멋지게 휘날리려면 최소한 175cm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정쩡한 친구들 모아놓고 그런 행동을 하면...ㅋㅋㅋ 마태우스님이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봐 저도 가슴이 뜁니다.

chaire 2004-02-12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로 '악녀'가 등장하는 드라마를 좋아하시는군요... ^^ ... 위풍당당 그녀!는 정말 멋진 드라마였어요!

마태우스 2004-02-12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이레님/제가 선악구도를 좋아합니다^^ 한번만 봐도 내용파악을 다 할수가 있잖아요? 그리고 생각해보니 <앞집여자>를 빼먹었더군요. 그거 5윕니다.
진우맘님/저 키 176cm어요. 집에 바바리도 있구요. 그러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mannerist 2004-02-13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제 드라마 베스트 5... 를 꼽아보니 쉽지 않네요. 잡히지도 않고. 제대로 본 드라마가 드문 탓에. 하여간 대번에 생각나는 건, 노희경 작가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드라마 보다 울 뻔한 건 이거 뿐), 거짓말. 두개가 생각나네요. 아직까지 우.정.사 만한 드라마 못 봤습니다. 지금도 꽃보다 아름다워를 즐겁게 보고 있지요.
 

 

 

 

 

 

책 한권이 200페이지도 못되는 경우도 있지만,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도 있다. <좀머씨 이야기>처럼 책이 얇으면 다 읽고나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두껍다고 다 좋냐면 그런 건 아니다. 너무 두꺼운 책을 읽고나면 어디 갇혀있다가 탈출한 기분이 들고, 당분간 책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한참 전에 읽은 <비치>가 그랬다. 그 책은 600페이지를 넘는 두꺼운 책인데, 읽는데 정말 힘들었다. 재미있게 쓰여진 책이었기에 두권으로 나왔다면 훨씬 빨리 읽었을텐데, 한권짜리라 어찌나 지겨웠는지! 그러니까 이런 거다. 생맥주를 마실 때 500cc짜리를 시키면 다섯잔을 먹을 수 있지만, 1000cc짜리 잔으로 시키면 두잔도 못먹는다는 것.1000cc를 먹을 땐 500 두잔보다 시간이 훨씬 더 걸리며, 맛도 덜하다.

그래서 책은 300페이지 내외가 적당하다. 하지만 한권으로 나와도 될 책을 무리하게 두권으로 만든 걸 보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두권으로 하면 아무래도 값이 비싸지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462쪽이나 되는, 존 그리샴 원작의 <불법의 제왕>을 한권으로 묶어서 내준 출판사는 양심적이라고 할만하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일 것이다. 아무리 두꺼워도 하루만에 읽고픈 책이 있고, 얇지만 진도가 잘 안나가는 책이 있다. <불법의 제왕>이 전자의 예라면, 후자의 예로 칼 세이건이 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 있다. 그 책은 그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징그럽게 안읽혔는데, 그 책은 내게 좋은 수면제였다. 그 책만 보면 대번에 잠이 왔으니까. 결국 난 그 책을 석달만에 읽었는데, 그때의 심정은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지겹게 읽은 책 중의 하나가 <월든>이다. 소로우가 지은 명저로 사랑을 받는 바로 그 책, 난 그 책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최면을 걸어야 했다. "이것만 다 읽으면 너한테 여자들이 줄을 설거야"라는 황당한 최면을. 물론 나 스스로가 그걸 믿지 않아 별 효과는 없었고, 이 책을 읽는데 난 두달 가까운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다 읽어갈 때까지 남들이 왜 이책을 좋다고 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다만 그가 살았다는 월든 호수는 한번 가보고 싶었을 뿐이다. 하버드대 총장은 <월든>을 졸업생들에게 선물로 주고싶다고 했으니, 내가 그 책의 진가를 깨닫지 못한 거겠지만 말이다. 300쪽 남짓한 책도 나에게 이런 시련을 줄 수 있구나 하는 것이 <월든>이 남긴 교훈이었다.

몇년 전, 이런 생각을 했다. "내공을 좀더 키운 후에 그람시라든지 데리다, 라캉, 김승옥 같은 사람의 책에 도전해야지~ 지금처럼 책을 읽는다면 5년 후면 그렇게 할 수 있을거야"
하지만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도 난 독서내공에 있어서는 그때와 달라진 게 없는 듯하다. 여전히 난 읽기 쉬운 책만 읽고 있으며, 읽어서 머리아픈 책은 피하고 있다. 그 내공이라는 건 어떻게 생기는 걸까? 무조건 책만 많이 읽는다고 되는 건 아니잖는가? 이런 고민을 방대한 책을 읽어온 친구에게 털어놓았더니, 그 친구가 이런다.
"당연히 안되지. 그런 건 인문학적 베이스가 있어야 하는데, 넌 없잖아!"

그랬다. 난 베이스가 없었고, 그래서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없는 거였다. 잠시 고민했다. 베이스를 갖춘 후 어려운 책에 도전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이렇게 살다 말 것인가. 내 선택은 후자였다. 책은 하나의 취미일 뿐인데, 뭐 그렇게 목숨걸고 할 게 뭐가 있담? 인문학적 베이스가 있다고 실험이 더 잘되는 것도 아닌 바, 난 그저 즐겁게 책을 읽을 생각이다. 랄-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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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re 2004-02-11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든,은 저두 정말 지겨운 책이였답니다^^ 그런데, 그람시와 데리다와 라캉과 김승옥이 한 줄에 놓이네요..? 김승옥의 문장이 데리다처럼 난해해서는 아닐 테고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 궁금.. 전 김승옥의 단편을 숨막히게 좋아하는 팬이거든요..^^ 참고로 염소는 힘이 세다, 를 추천합니다...

마태우스 2004-02-11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가 뭔가를 착각했습니다. 김승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인데요... 이름이 생각이 안나는군요. 어쨌든....이번 일로 민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진/우맘 2004-02-1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 교과서가 지겨워지거나(언제나 지겨웠고, 별로 들여다보지도 않았지만^^) 읽어야 할 책이 어렵게 느껴질 때면 집에 있는 세계명작전집 중 <일리야드/오딧세이>를 꺼내서 끙끙거리며 독파를 했습니다. 내용은 다 잊었지만, <위대하고 고매하여 이러이러한 일을 한 누구의 아들이며, 훌륭하고 고상하여 이러이러한 지위에 있는 누구의 형제인 모모씨~>와 같은 어투가 생각나네요. 그 어마어마하고 애매모호한 서사시들도... 그렇게 한바탕 읽고 나면 어렵게 느껴지던 문장들이 수월해지곤 했습니다. 비슷한 용도로 단테의 <신곡>도 응용해 봤는데...도저히 한 시간 이상 읽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지금도, 단테의 신곡을 좋아한다는 사람을 만나면 달리보입니다. 존경스러워요.
언문학적 베이스도 베이스지만, 저같은 경우는 성미가 급해서 <어려운 책들>을 못 읽는게 아닐까...싶네요. 그리고 책이란 모름지기 즐거워야 한다! 는 좌우명 때문인지도.^^

chaire 2004-02-1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렇군요.. 단테의 신곡도 정말 지루하지요.. 그런데 혹 김승옥이 아닌, 박상륭이 아닐까요? 박상륭도 만만찮게 어렵고, 지루하고, 난해하고, 복잡하고...

갈대 2004-02-1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라보예 지젝이 쓴 '삐딱하게 보기'라는 책이 있는데 10장도 읽지 못하고 덮었더랬죠.

가을산 2004-02-11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혹시 이름이 비슷한 김용옥씨는 아닌지요?
2. 제가 고생한 책으로는 '이런, 이게 바로 나야!'라는 책을 꼽습니다. 인지이론, 세상과 자신을 보는 다양한 관점, 어느 상태까지를 '나'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인지 등에 관한 다양한 분석을 한 내용입니다. 내용은 꽤 괜찮은 책이었고, 사고실험도 흥미있는 것이 많았는데도 졸렸던 것을 보면, 책 종이에 수면제가 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3. '인문학적 베이스가 없다'고 했던 친구분 말씀은 필시 농담이었을 겁니다. 베이스가 없다고 시작을 못하면 아무도 새로운 것을 시작 못하게요?
저도 베이스가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몇년 전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이 모여 '머쥐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머리에 쥐나는 모임'의 준말입니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식으로, 내키는대로 주제와 저자를 정해서 읽고 모이는데, 다른 건 몰라도 컴플랙스 경감에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겨울 2004-02-11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로우의 '윌든'이라 무척 좋아해서 꽤나 많이 선물한 기억이.... 그 책이 지루하냐 흥미있냐의 차이는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가와 없는가의 차이겠지요. 밥벌이는 최소한의 노동으로 그치고 나머지 시간과 노력을 풍요로운 정신생활을 위하여 쓰라는 메세지가 어찌나 매혹적이던지....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 먹히는 시절이 있어요. 정말 배고프고 절박한 때엔 그보다 좋은 위로가 없더라구요.

마태우스 2004-02-11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많은 분들이 좋은 말씀을 많이 남겨 주셨네요?
카이레님/맞아요, 박상륭! 비슷하지도 않은데 왜 김승옥이랑 헷갈렸는지...
갈대님/하하, 하마터면 그 책 살뻔 했는데, 다행이네요.
가을산님/그래요, 여럿이서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제 친구들은 하나같이 책보다 술을 좋아해서...
우울과 몽상님/그 메시지는 저도 좋은데요, 아무래도 제가 <월든>의 가치를 알아볼만큼 내공이 없는 탓이지요...
 

 

 

 

 

 

내 친구 중에는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나: 얼마 전에 고속도로에서 160 밟다가 걸렸어.
친구: 야, 난 200킬로로 달리다 걸린 적 있어.

나: 얼마 전에 큰일날 뻔했다. 맥주 한병 마시고 운전하다 검문에 걸렸는데, 정말 무섭더라.
친구: 야, 난 소주 세병 마시고 부산까지 왕복한 적 있어.

나: 배고픈데 밥 먼저 먹지 않을래? 나 어제 저녁부터 쭈욱 굶었어.
친구: 난 너보다 더 배고파. 지금 사흘째 굶고 있어!

난 이 친구가 매우 특이한 경우인 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엊그제 밤 9시쯤, 평화롭게 독서를 하고 있는데 친구에게서(아까랑 다른 친구다) 전화가 왔다. 술마시러 강남까지 나오란다. 알았다고 하고 옷을 챙겨입으려는데, 창밖을 보니 눈까지 온다. 눈이 오는 날, 술마시고 택시가 안잡혀 고생한 기억도 있고, 며칠째 술을 마셔서 몸이 안좋기도 해 나가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오늘 술 안마시면 안될까? 나 오늘 마시면 5일짼데...
친구: 너만 그러냐? 난 지금 일주일째 하루도 안빼놓고 술 마셨다.
나: 밖에 눈도 오고 한데, 집에는 어떻게 가?
친구: 야, 난 너보다 집이 훨씬 더 먼데도 마시잖냐.
나: 그래도 좀 봐주면 안될까? 사실은 몸살기운이 좀 있어서...
친구: 나도 지금 약먹어가면서 술마시는 거야.

말로는 안되겠다 싶어 친구에게 울며 호소했다. 한번만 봐달라고. 친구는 "다음에 크게 한번 쏴"라며 전화를 끊었는데, 술 약속을 거절하는 건 이렇게 힘이 들고, 한번 거절한 건 빚으로 남는다. 언제나 술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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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nyside 2004-02-10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거절이... 거절이 문젭니다. -.- 친구관계 뿐만 아니라, 업무에서도 거절 못해 받는 불이익이 얼마나 많은지.. 왜 세상은 저의 여리고 선한 심성을 지키며 살 수 없게끔 돌아가는지 모르겠어요. ^^;;; 그래서 저 위의 책표지 <거절을 즐겨라>가 눈에 확 띄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품절이네요.

비로그인 2004-02-10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처음 친구분은 정말 사소한 것도 지기 싫어하시나보다-라는 생각을 했는데, 두번째 경우는 저두 종종 겪는 일인거 같네요. 나는 너보다 더 심해-라며, 나의 거절 사유를 결코 용납해주지 않는...결국은 마음의 빚으로 남죠. 에휴~

waho 2004-02-11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들이랑 저런 경우에 저두 거절하는 법에 익숙하지 않아 곤란 할 때가 많읍니다. 요즘은 온통 "거절"해야 할 일들 투성인데...곤란하거든요. 집이 강릉이다 보니 집이 스키 시즌이면 콘도처럼, 여름이면 바다 보로 오는 사람들이 들려가는 통에 신경이 많이 쓰이거든요. 직장에 다니면서 사회 생활을 해봤더라면 좀 더 노련했을텐데...후회하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