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권이 200페이지도 못되는 경우도 있지만, 500페이지에 달하는 책도 있다. <좀머씨 이야기>처럼 책이 얇으면 다 읽고나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두껍다고 다 좋냐면 그런 건 아니다. 너무 두꺼운 책을 읽고나면 어디 갇혀있다가 탈출한 기분이 들고, 당분간 책 생각이 나지 않는다. 한참 전에 읽은 <비치>가 그랬다. 그 책은 600페이지를 넘는 두꺼운 책인데, 읽는데 정말 힘들었다. 재미있게 쓰여진 책이었기에 두권으로 나왔다면 훨씬 빨리 읽었을텐데, 한권짜리라 어찌나 지겨웠는지! 그러니까 이런 거다. 생맥주를 마실 때 500cc짜리를 시키면 다섯잔을 먹을 수 있지만, 1000cc짜리 잔으로 시키면 두잔도 못먹는다는 것.1000cc를 먹을 땐 500 두잔보다 시간이 훨씬 더 걸리며, 맛도 덜하다.

그래서 책은 300페이지 내외가 적당하다. 하지만 한권으로 나와도 될 책을 무리하게 두권으로 만든 걸 보면 눈살이 찌푸려진다. 두권으로 하면 아무래도 값이 비싸지지 않는가? 그런 면에서 462쪽이나 되는, 존 그리샴 원작의 <불법의 제왕>을 한권으로 묶어서 내준 출판사는 양심적이라고 할만하다.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일 것이다. 아무리 두꺼워도 하루만에 읽고픈 책이 있고, 얇지만 진도가 잘 안나가는 책이 있다. <불법의 제왕>이 전자의 예라면, 후자의 예로 칼 세이건이 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이 있다. 그 책은 그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징그럽게 안읽혔는데, 그 책은 내게 좋은 수면제였다. 그 책만 보면 대번에 잠이 왔으니까. 결국 난 그 책을 석달만에 읽었는데, 그때의 심정은 어둡고 긴 터널을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지겹게 읽은 책 중의 하나가 <월든>이다. 소로우가 지은 명저로 사랑을 받는 바로 그 책, 난 그 책을 읽으면서 시종일관 최면을 걸어야 했다. "이것만 다 읽으면 너한테 여자들이 줄을 설거야"라는 황당한 최면을. 물론 나 스스로가 그걸 믿지 않아 별 효과는 없었고, 이 책을 읽는데 난 두달 가까운 시간을 소모해야 했다. 다 읽어갈 때까지 남들이 왜 이책을 좋다고 했는지 알 수 없었는데, 다만 그가 살았다는 월든 호수는 한번 가보고 싶었을 뿐이다. 하버드대 총장은 <월든>을 졸업생들에게 선물로 주고싶다고 했으니, 내가 그 책의 진가를 깨닫지 못한 거겠지만 말이다. 300쪽 남짓한 책도 나에게 이런 시련을 줄 수 있구나 하는 것이 <월든>이 남긴 교훈이었다.

몇년 전, 이런 생각을 했다. "내공을 좀더 키운 후에 그람시라든지 데리다, 라캉, 김승옥 같은 사람의 책에 도전해야지~ 지금처럼 책을 읽는다면 5년 후면 그렇게 할 수 있을거야"
하지만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지금도 난 독서내공에 있어서는 그때와 달라진 게 없는 듯하다. 여전히 난 읽기 쉬운 책만 읽고 있으며, 읽어서 머리아픈 책은 피하고 있다. 그 내공이라는 건 어떻게 생기는 걸까? 무조건 책만 많이 읽는다고 되는 건 아니잖는가? 이런 고민을 방대한 책을 읽어온 친구에게 털어놓았더니, 그 친구가 이런다.
"당연히 안되지. 그런 건 인문학적 베이스가 있어야 하는데, 넌 없잖아!"

그랬다. 난 베이스가 없었고, 그래서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없는 거였다. 잠시 고민했다. 베이스를 갖춘 후 어려운 책에 도전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이렇게 살다 말 것인가. 내 선택은 후자였다. 책은 하나의 취미일 뿐인데, 뭐 그렇게 목숨걸고 할 게 뭐가 있담? 인문학적 베이스가 있다고 실험이 더 잘되는 것도 아닌 바, 난 그저 즐겁게 책을 읽을 생각이다. 랄-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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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ire 2004-02-11 1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월든,은 저두 정말 지겨운 책이였답니다^^ 그런데, 그람시와 데리다와 라캉과 김승옥이 한 줄에 놓이네요..? 김승옥의 문장이 데리다처럼 난해해서는 아닐 테고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 궁금.. 전 김승옥의 단편을 숨막히게 좋아하는 팬이거든요..^^ 참고로 염소는 힘이 세다, 를 추천합니다...

마태우스 2004-02-11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가 뭔가를 착각했습니다. 김승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인데요... 이름이 생각이 안나는군요. 어쨌든....이번 일로 민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진/우맘 2004-02-1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때, 교과서가 지겨워지거나(언제나 지겨웠고, 별로 들여다보지도 않았지만^^) 읽어야 할 책이 어렵게 느껴질 때면 집에 있는 세계명작전집 중 <일리야드/오딧세이>를 꺼내서 끙끙거리며 독파를 했습니다. 내용은 다 잊었지만, <위대하고 고매하여 이러이러한 일을 한 누구의 아들이며, 훌륭하고 고상하여 이러이러한 지위에 있는 누구의 형제인 모모씨~>와 같은 어투가 생각나네요. 그 어마어마하고 애매모호한 서사시들도... 그렇게 한바탕 읽고 나면 어렵게 느껴지던 문장들이 수월해지곤 했습니다. 비슷한 용도로 단테의 <신곡>도 응용해 봤는데...도저히 한 시간 이상 읽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지금도, 단테의 신곡을 좋아한다는 사람을 만나면 달리보입니다. 존경스러워요.
언문학적 베이스도 베이스지만, 저같은 경우는 성미가 급해서 <어려운 책들>을 못 읽는게 아닐까...싶네요. 그리고 책이란 모름지기 즐거워야 한다! 는 좌우명 때문인지도.^^

chaire 2004-02-1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그렇군요.. 단테의 신곡도 정말 지루하지요.. 그런데 혹 김승옥이 아닌, 박상륭이 아닐까요? 박상륭도 만만찮게 어렵고, 지루하고, 난해하고, 복잡하고...

갈대 2004-02-11 1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라보예 지젝이 쓴 '삐딱하게 보기'라는 책이 있는데 10장도 읽지 못하고 덮었더랬죠.

가을산 2004-02-11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혹시 이름이 비슷한 김용옥씨는 아닌지요?
2. 제가 고생한 책으로는 '이런, 이게 바로 나야!'라는 책을 꼽습니다. 인지이론, 세상과 자신을 보는 다양한 관점, 어느 상태까지를 '나'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인지 등에 관한 다양한 분석을 한 내용입니다. 내용은 꽤 괜찮은 책이었고, 사고실험도 흥미있는 것이 많았는데도 졸렸던 것을 보면, 책 종이에 수면제가 뿌려져 있었던 것 같습니다.
3. '인문학적 베이스가 없다'고 했던 친구분 말씀은 필시 농담이었을 겁니다. 베이스가 없다고 시작을 못하면 아무도 새로운 것을 시작 못하게요?
저도 베이스가 없기는 마찬가지지만, 몇년 전 비슷한 처지의 동료들이 모여 '머쥐모임'을 만들었습니다. '머리에 쥐나는 모임'의 준말입니다.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식으로, 내키는대로 주제와 저자를 정해서 읽고 모이는데, 다른 건 몰라도 컴플랙스 경감에는 효과가 있는 것 같습니다.

겨울 2004-02-11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로우의 '윌든'이라 무척 좋아해서 꽤나 많이 선물한 기억이.... 그 책이 지루하냐 흥미있냐의 차이는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가와 없는가의 차이겠지요. 밥벌이는 최소한의 노동으로 그치고 나머지 시간과 노력을 풍요로운 정신생활을 위하여 쓰라는 메세지가 어찌나 매혹적이던지.... 그런데 이러한 사상이 먹히는 시절이 있어요. 정말 배고프고 절박한 때엔 그보다 좋은 위로가 없더라구요.

마태우스 2004-02-11 2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많은 분들이 좋은 말씀을 많이 남겨 주셨네요?
카이레님/맞아요, 박상륭! 비슷하지도 않은데 왜 김승옥이랑 헷갈렸는지...
갈대님/하하, 하마터면 그 책 살뻔 했는데, 다행이네요.
가을산님/그래요, 여럿이서 읽으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제 친구들은 하나같이 책보다 술을 좋아해서...
우울과 몽상님/그 메시지는 저도 좋은데요, 아무래도 제가 <월든>의 가치를 알아볼만큼 내공이 없는 탓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