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 <천국의 계단> 마지막회를 재방송으로 봄으로써 20회에 달하는 긴 여정이 끝이 났다. 인터넷으로 본 게 15회고, TV로 본 건 다섯번이다. 뭐가 하나 끝나면 아쉬움 같은 게 남아있을 법도 하지만, 이 드라마는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말이 안되도 너무 안되는 게 많은지라 짜증이 팍팍 났는데, 한번 본 건 끝까지 책임을 지는 이상한 성격 때문에 끝까지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다른 건 다 16부작인데, 이건 왜 20회나 한담?"이라며 불평도 해가면서. 원래 일년에 하나꼴로 드라마를 보는 나지만, 이번 드라마를 너무 힘들게 봐서 그런지 당분간 드라마는 안하려고 한다. 악평도 있지만 호평이 더 많은 <발리에서 생긴 일>을 안보려는 건, 이미 늦기도 했지만 <천국>의 후유증 탓이 더 크다. "어쩌면 그가 나보다 그녀를 더 사랑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덜 사랑했다는 건 아니다..." 피아노 치는 권상우는 멋지지만,  끝까지 이런 말장난을 하다니!

옛날만 해도 난 드라마 보는 걸 끔찍히 싫어했다. 남자 친구들이 드라마 얘기를 하면 "인간이냐"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기도 했다 (내 눈이 워낙 작아서 뜻이 제대로 전달된 것 같지는 않지만). <사랑이 뭐길래>같은 장안의 화제작에도 난 초연했다. 그러던 내게 드라마가 볼만한 거라는 걸 가르쳐 준 건 바로 <미스터 큐>였다. 허영만의 원작만화를 읽었던 터라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궁금해서 봤는데, 정말 재미있게 봤다. 송윤아의 악녀 연기가 일품이었던 기억도 나는데, 그건 내가 재미있게 본 드라마 중 역대 4위에 올라있다.


3위는 <진실>. 최지우와 지금은 뭐하는지 모르겠는 유시원이 나오고, 박선영의 악녀연기가 압권이었던 드라마다. 박선영이 얼마나 연기를 잘했는지, 난 지금도 그녀가 싫고, 볼 때마다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거 때문에 월요일, 화요일이면 술약속을 안잡으려고 애를 썼던 기억이 난다.


2위는 <명랑소녀 성공기>. 가수 장나라가 나오긴 했지만, 난 사실 장혁 때문에 그 드라마를 봤다. 권위적이기 짝이없던 그가 가끔씩 양순이(장나라)에게 보여주는 친절이 너무도 따뜻해 보였고, 귀공자풍의 그가 쫄딱 망하니까 몇배는 더 불쌍해 보였다. 조형기 등 조연들의 열연도 드라마를 재미있게 만드는 이유였는데, 끝에 가서 갑자기 장나라가 군대를 가느니 하는 바람에 김이 새기도 했다.


영예의 1위는....<위풍당당 그녀>! <굳세어라 금순아> <봄날의 곰을...> <고양이를 부탁해> <복수는 나의 것> 등 배두나가 나오기만 하면 몽땅 망하는 영화와는 달리, 그 드라마는 최고의 시청률을 보여주며 날 흠뻑 빠지게 했다. 탄탄한 줄거리와 배두나, 신성우의 멋진 연기가 돋보이는 드라마였는데, 그 드라마가 끝났을 때는 세상이 끝난 것 같았다.

그럼 <천국>은 5위냐, 절대 그렇지 않다. 위에 열거한 드라마들은 그래도 줄거리가 말이 되는 편이었고, 결말도 그럴 듯했다. 그런데 <천국>은 그게 아니잖는가. 신현준은 막판을 빼놓고 시종 짜증만 났고, 최지우는 맨날 울고있고, 권상우는....폼만 잡는다. 뻑하면 뛰고, 안뛸 때는 울어댔다. 이런 드라마가 40%의 시청률을 기록한 건 매우 수상쩍은 일이다. 순위고 뭐고, 내가 고른 드라마가 늘 성공만 하는 게 아니라는 쓰라린 경험을 내게 안겨준 드라마로 기억할 거다. 영화에선 <낭만자객>, 드라마에선 <천국>. 그래도 한가지 느낀 건 있다. 권상우가 폼잡을 때 하는 것처럼, 뒤에 애들을 거느리고 걷는 게 참으로 멋있다는 것. 여섯명 정도가 모였을 때 한번 해봐야겠다. 내가 가운데 서고, 애들을 뒤에 서게 하고... 그 생각을 하니까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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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2-12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는 안 봐서 모르겠지만, 검은 양복 빼입은 사람들이 뒤에 서고 중앙에서 바바리 코트 자락 휘날리는...그런 모드 같은데...
바바리 코트 자락이 멋지게 휘날리려면 최소한 175cm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어정쩡한 친구들 모아놓고 그런 행동을 하면...ㅋㅋㅋ 마태우스님이 마음의 상처를 입을까봐 저도 가슴이 뜁니다.

chaire 2004-02-12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체로 '악녀'가 등장하는 드라마를 좋아하시는군요... ^^ ... 위풍당당 그녀!는 정말 멋진 드라마였어요!

마태우스 2004-02-12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이레님/제가 선악구도를 좋아합니다^^ 한번만 봐도 내용파악을 다 할수가 있잖아요? 그리고 생각해보니 <앞집여자>를 빼먹었더군요. 그거 5윕니다.
진우맘님/저 키 176cm어요. 집에 바바리도 있구요. 그러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mannerist 2004-02-13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제 드라마 베스트 5... 를 꼽아보니 쉽지 않네요. 잡히지도 않고. 제대로 본 드라마가 드문 탓에. 하여간 대번에 생각나는 건, 노희경 작가의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드라마 보다 울 뻔한 건 이거 뿐), 거짓말. 두개가 생각나네요. 아직까지 우.정.사 만한 드라마 못 봤습니다. 지금도 꽃보다 아름다워를 즐겁게 보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