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성이란 "물체가 현재의 운동상태를 지속하려는 성질"이다. 사람 중에는 관성이 강한 사람이 있고, 별로 없는 사람도 있는데, 난 전자의 대표적인 예다.

대학에 입학하고 난 뒤, 난 열심히 공부만 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애들도 다 그랬다. 우린 동료가 아닌, 자신이 남기 위해 남을 제껴야 하는 경쟁자였다. 그런 우리한테 선배들은 이렇게 말했다. "예과 때 놀아야지!" 심지어 이런 노래도 가르쳐 줬다.

'노세 노세 예과때 노세/ 본과 가면 못노나니/ 예과는 천국이요 본과는 지옥이라/얼씨구 얼씨구 차차차/지화자 좋구나 차차차/예수도 공자도 아니놀지는 못하리라 차차차

이런 말들에 세뇌된 탓도 있을 테지만, 중간고사가 끝나고 나자 다들 긴장이 풀려버린 우리는 그야말로 노는 데 전념했다. 별 이유없이 수업을 제꼈고, 대낮부터 술을 퍼마신 걸 무슨 무용담처럼 떠벌이기도 했다. 그렇게 2년을 놀고 우리는 본과에 갔다. 많은 친구들이 공부만 하는 학생으로 잽싸게 변신했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본과 때 노니까 더 재밌네!" 이래가면서 허우적대던 내가 정신을 차린 것은 3학년이 어느정도 지나간 무렵이었다 (그래서 난 3학년 때 성적이 가장 좋다).

졸업 후 난 4년간 조교 생활을 했다. 아침 일찍 출근해서 밤까지 일하는 고달픈 삶을 난 용케도 잘 견뎌냈다. 그러다 군대를 갔다. 운이 좋게도 난 국립보건원에서 3년간을 있게 됐다. 소속과로 가서 과장님께 인사를 드렸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아무것도 안하고 이틀을 보냈다. 사흘째가 되니 좀이 쑤셨다. 과장님께 찾아갔다. "저...무슨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커피를 마시던 과장님은 매우 당황하신 눈치였다. "벌써 일하려고? 좀 쉬었다 천천히 생각해 봅시다"

그날 난 나처럼 할일없는 애들을 모아 노는 모임을 만들었고, 3년을 내리 놀기만 했다. 밤마다 술을 마셨고, 낮엔 테니스를 쳤다. 제대 때가 되자 사회에 복귀할 날이 슬슬 걱정이 되었지만, 그런 불안감을 씻기 위해 더욱 악착같이 노는 데 매달렸다. 사회에 복귀해 직장을 구한 뒤에도 난 2년 정도는 더 '관성의 법칙'에 시달려야 했다.

꼭 나쁜 관성만 있는 건 아니다. 언젠가부터 시작한 독서는 이제 내 삶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내가 읽은 책들은 벽돌이 되어 황폐해진 내 정신을 재건해 주고 있으니까. 읽으면 읽을수록 더 읽고 싶고, 해마다 읽는 책의 양이 많아지는 걸 보면 '관성'이라기보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좀더 가까운 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난 그걸 내가 관성이 강한 놈이라서, 라고 우기련다.

좀더 일찍 독서에 취미를 붙일 걸, 하는 후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술 대신 몇배 더 큰 관성을 가진 책을 대학 시절부터 취미로 삼았다면, 아예 졸업도 못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1월과 2월 읽은 책의 권수를 보건대, 올해도 작년 기록을 깰 수 있을 것같다. 지금 난 관성여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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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4-02-15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책도 안 읽다보면 영 안 읽게 되지만, 읽다보면 계속 읽게 되죠. 저두 관성여행에 동참하고 싶네요~ ^^

진/우맘 2004-02-15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인데, 글 머리에 관련된(어떤 식으로든^^) 책 한 권 골라넣는 솜씨...거의 경지에 오르신 듯 하네요!

마태우스 2004-02-16 1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앤티크님/그러시죠. 아주 즐거운 여행이랍니다.
진우맘님/아, 네.............(으쓱으쓱)
 

 

 

 

 

 

조카-누나 아들이다-가 졸업을 했다. 삼촌인데 뭐 하나 해준 게 없어서 졸업식이라도 가줘야겠다고 갔고, 간김에 매형이 사는 졸업식 오찬을 얻어먹었다.

평소에도 인터뷰 같은 걸 좋아하는 나, 조카에게 이것저것을 묻다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졸업을 하는 심경은?"
좋지 않단다. 그래서 친구랑 헤어지는 게 서운하냐고 했더니 그게 아니란다.
"이제부터 공부만 해야 하니까"

누나와 매형 모두 다, 중학교에 가면 놀 생각 하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했단다. 매형이 어제 한 말이다. "너에게 해줄 말이 있다. 자기 절제와 집중, 이걸 명심해라. 그걸 실천해야 공부를 잘할 수 있다"
듣는 나도 숨이 막힐 것 같은데, 조카는 오죽하겠는가. 졸업식장에서 그의 표정이 어두웠던 게 이해가 되었다.

그렇다고 졸업하기 전에 조카가 논 것도 아니다. 매일같이 학원을 다니며 영어, 수학, 국어, 과학을 배웠고, 밤늦게 집에 와서는 숙제를 했다. 누나집에 놀러가서 애들하고 놀려치면-애들은 날 무지 좋아한다-누나는 "숙제했어?"라며 애들을 쫓았다.

조카는 사실 선택받은 아이다. 연수를 간 매형을 따라 2년간 미국에 갔었으니까 말이다. <반지의 제왕3>같은 영화도 문제없이 볼 정도로 영어가 유창하다. 역시 어제 들은 얘기.
매형: 지난번에 토플 몇점 맞았어?
조카: 550점.
매형: 또? 지난번에도 그 점수였잖아!

550점이라니, 난 토익을 봐도 그 점수가 안나올텐데... 유창한 발음으로 미국 사람과 대화를 나누던 조카가 보기에 중학교에서 가르치는 영어는 얼마나 우스울까? "I am Tom. You are Jane"을 읊조리는 아이들과 조카의 격차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일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나 부부는 조카를 닥달한다. 중학생이니 공부만 해야 한다고. 조카는 아마도 엄마 아빠의 기대에 부응해 공부를 잘 할 것이고, 원하는 대학에 갈 것이다. 하지만 난 전력을 다해 달리는 말에게 가해지는 채찍질이 그의 인성을 피폐하게 만들지나 않을지 걱정이 된다. 인생은 경쟁이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친구를 멀찌감치 떼어 놓아야 한다고 배운 아이들에게 사랑과 관용은 설 틈이 없을 것이다. 공부밖에 몰랐던 애들이 이끄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노라니 조금은 섬뜩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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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2-14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자식을 획일화된 경쟁에서 이기게 하기 위해 구속하는 모습이 너무 싫습니다. 이러다가는 우리나라에도 일본에서처럼 방 안 숨어 나오지 않는 사람이 분명 나올 겁니다.

가을산 2004-02-14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에 저도 중학교 가서 초등학생 동생들 노는 것을 보면서 '아~ 얫날이여'를 부르짖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애들 공부는 장난이 아니죠? 참 불쌍해요.

만월의꿈 2004-02-14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불쌍하죠.. 점점 커갈수록 세상이 무서워져요.. 1년전만해도 대학교가면 다 될줄 알았는데, 고등학교가서 힘들게 공부해 대학가면 대학가서 힘들게 취업준비해야하고, 운좋게 취업했다고 해도, 경쟁시대란... 휴=3 북한으로 확 도망가버릴까요?(이러다 잡혀가지-_-)

마태우스 2004-02-14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대님/비극이죠...이러니 대학가면 공부를 안하죠...
가을산님/정말 불쌍하더군요.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지.
만월의꿈님/세상 무섭죠. 나이가 들수록 그렇다는 것도 맞는 것 같습니다. 전 어른 되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사업차, 아니 선배 누나와 술을 마시러 대전에 갔다. 그 누나는 다음 달이면 미국에 갈 것이기에 드릴 것도 있으니 인사나 할 생각이었다. 돌아오는 차표를 밤 10시 46분차로 예약했는데, 생각해보니 그 누나가 짐을 싸느라 바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차 안에서 들었다. 애가 둘 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나는 내가 가면 언제나 자정 무렵까지 같이 술을 마셔주곤 했지만, 그리고 술도 무지 셌지만, 어제는 어찌될지 모르는 일, 일단 전화를 걸어 "몇시까지 놀아줄 건데요?"라고 물어보려 했다. 역시나 전화를 안받는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누나의 오래된 휴대폰이 잘 안터진 탓이었지만, 난 "그래! 역시 바쁘군!"이라고 확신을 했다. 난 늦게까지 놀 생각으로 갔는데, 8시쯤 일어나면서 "민아, 나 바빠서 들어가야 되거든?"이라고 해버리면 애매하잖아?

그래서...난 이왕 대전에 간 거, 두탕을 뛸 계획을 세웠다. 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그리고 졸업 후에도 자주 만난 친구가 대전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던 것. 2년 전에 만난 후, 한번 놀러오라는 요구를 계속 묵살하고 있던 터였다. '8시 무렵까지 같이 저녁을 먹고, 그다음에 친구를 만나야겠다'는 깜찍한 계획을 세우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나: 저기 오늘 나랑 두시간만 놀아줄 수 있니?

답이 왔다.

그: 누구세요

 

윽, 내 번호를 지웠나보다.

나: 나 민이야. 내가 그간 좀 무심했지?

그: 아니 몰라 ^^

윽, 이 녀석이! 하지만 웃음을 뜻하는 이모티콘(^^)이 있기에 장난인 줄 짐작을 하고선 전화를 걸었다. 안받는다. 난 그의 회사로 전화를 했다. 오늘 시간 있느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있다고 한다. "내가 연락 자주 안해서 삐졌냐?"고 물으니 전혀 아니란다. 그럼 그렇지...

선배 누나와 저녁을 먹는 와중에 문자를 보냈다.

나: 나 지금 저녁 먹으니까 너도 대충 밥 먹어. 8시 반쯤 갈께.

답이 왔다.

"눈깔 썩었어? 누구냐구!! 씨바!"

얘가 나 기다리느라 너무 배가 고파진 걸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장난으로 넘어가긴 심한 말이었기에, 난 그 친구 휴대폰이 번호가 바뀐 걸로 생각을 했다. 전화를 걸었더니 웬걸, 그 친구가 받는다. 8시 반쯤 간다고 했더니 의외로 담담하게 그렇게 하란다. 오래 안봤더니 얘가 좀 이상해진 걸까?

그 친구를 만나고서야 알았다. 휴대폰 메시지는 그가 보낸 게 아니라는 걸. 그는 집에다 휴대폰을 두고 다녔고, 마침 놀러왔던 딸의 친구가 그런 문자를 보낸 거였다. 내가 상황을 설명해 주자 그가 이런다.

"걔가 좀 성격이 거칠더라고. 이름도 장미고, 얼굴도 이쁘게 생겼는데..."

어쩐지 이상하더라 했다. 아이들은 휴대폰을 갖고 놀길 좋아하는 바, 휴대폰이 이상하면 아이들을 의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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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2-14 0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종일 두문불출 하셨구나... 님의 글이 안 보이니 심심함을 넘어 쓸쓸하기까지 했답니다.
여성 알라디너에게 어필하고 계시다니...왕 축하드립니다. 저도 팬인거, 아시죠?^^ 그런데, 여친께는 이 서재를 공개 하셨는지. 이런 글귀를 보면 서재 금족령을 내리는 거 아닌가 싶어 걱정스럽네요.ㅋㅋㅋ

waho 2004-02-14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저 같으면 애들 장난인 줄 모르고 오해하고 제가 삐졌을텐데...딸 친구 몇 살인데 그리 입이 거친지...문제있네...마태우스님...성격 좋으시네요 ^-^

마태우스 2004-02-14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어머 그렇게 걱정해주시다니! 우린 서로의 팬이군요. 팬의 팬이라... 여친은 이 서재에 별 관심이 없지만, 제가 어필하는 걸 좋아할 거에요.
강릉댁님/걔는 초등5학년이랍니다. 좀 터프하죠? 사실은 저 성격 나쁘구요, 잘삐져요.
 

 

 

 

 

 

"오리는 각인학습에 의해 어미를 알아본다. 그 각인 과정에 사림이 끼어들면 오리는 그 사람을 어미로 생각하게 된다" 이거야 다 아는 얘기일 거다.

그런데, 잭 트라우스와 알리스는 이런 주장을 했단다 (난 둘이서 같은 주장을 했다는 게 참 신기하다. 어떻게 동시에 같은 생각을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보나마나 먼저 생각한 이가 있었을테고, 그 주장이 멋져 보이니 자기 이름도 끼워달라고 했겠지. 이 경우 나이가 어린 사람이 오리지널인 경우가 많다. 아니면 말고)

[사랑에 빠지는 것도 어떤 면에서 보면 이와 마찬가지다. 물론 사람은 오리보다 훨씬 뛰어난 선택안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하고 있는만큼 그렇게 뛰어나지는 못하다. ...결혼이란 가장 좋은 사람과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대적으로 좋은 맨 처음의 사람과 하는 것이라고 봐야 옳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사라더라!"라는 말이 나오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좋은 맨 처음의 사람과 결혼을 했는데 진정한 사랑이 나타나면, 자신의 성급한 결정이 후회되지 않겠는가? 드라마 <불꽃>을 보면 진정한 사랑을 만나고도 이미 늦어버린 네 남녀가 고통을 겪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경우는 정말이지 아깝기 그지없다. 하지만 언제 올지도 모를 진정한 사랑을 위해 눈 앞에 있는 상대적으로 좋은 사람을 놓칠 수는 없는 일이다. 늙어 죽을 때 찾으면 완전히 망하는 거 아닌가? 진정한 사랑이라고 이마에 딱지를 붙이고 있는 것도 아닐 터, 봐도 모를 수가 있으니 만났더라도 별 느낌 없이 헤어지기도 하겠지.

이래서 오리가 좋은거다. 처음 본 사람이 엄마라고 믿고 평생을 따라다니는 오리처럼 인간도 처음 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어버리면 안될까? 인간의 문제는 너무 여러가지를 재고, 복잡한 생각을 한다는 거다. 자기 배우자를 보면서 "쟤가 진정한 사랑이 맞을까? 아닐거야. 코가 너무 낮잖아!" 이런 생각을 하면 아무리 이쁜 배우자라도 싫어지지 않겠는가. 결혼해서 살 때는 오리가 되자. 나는 오리다. 꽥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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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우맘 2004-02-13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부터 나도 오리다...오리다...꽃돼지가 아니고 오리다...
....자기 최면 중.

비로그인 2004-02-13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오리가 되더라도, 사랑이 변하지 않을수 있으면 좋겠네요. ^^

겨울 2004-02-13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에서 헤어지자고 하는 이영애를 향해 유지태가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하지만 사랑이 변한다는 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죠. 그렇다면 불멸의 사랑에 대한 믿음없이 결혼이 가능한가요? 이런 순진한 질문을 하는 한, 절대 결혼 못하겠죠, 아마도.
'

마태우스 2004-02-14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님/ 웃겼습니다. 유머 포인트 8점(10점 만점) 드립니다.
앤티크님/전 오리가 되긴 싫어요! 인간이라 다행입니다. 조류독감으로 학살될 뻔...
우울과 몽상님/그거야 그렇죠. 그러니 배우자를 '진정한 사랑'이라 최면을 걸어야죠^^
 

 

 

 

 

 

[책을 다 읽고 났을 때는 사위에 눈이 그쳐 있었고, 세상은 안으로 조금씩 더 젖어가고 있었다. 창밖에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다, 책 속의 명화들을 바라보다… 그럭저럭 행복한 휴일이었다]

카이레님이 쓰신, 최영미의 <화가의 우연한 시선>에 대한 마이리뷰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멋진 시작에, 리뷰 제목도 쿨하게 "그림, 생으로부터 발신되어온 모티브"다. 이것만 그런 게 아니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서평은 이렇게 시작된다.

"소설을 덮고 난 후 읊조리었다, 그렇지, 유쾌한 패배로다, 우리의 인생은!"

<나쁜 남자, 착한 여자>의 서평 첫머리, "이만교의 미덕은 재밌게 쓸 줄 안다는 것이다. 이런 미덕은 김영하도, 은희경도 지닌 것이다. 이 세 작가의 특징은 현실을 문학적 분위기로 치장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과 일상, 인간 내면과 인간 관계 같은 것들을 싸그리싹싹 그 밑바닥까지 훑어내버린다"

 

카이레님의 글을 보면서, 난 서평이 쓰기 싫어져 버렸다. 왜? 1단계: 그래, 서평은 저렇게 써야돼! 2단계: 그럼 내 서평은 서평도 아니네? 3단계: (문천식 버젼으로) 나 안해! 나 안해!

해도 안될 때 사람은 포기하게 되는 법이지만, 그럼에도 내가 서평쓰기를 중단하지 않는 이유는 10편당 한장씩 지급되는 상품권 때문이다. 어쩌면 70위권을 달리고 있는 내 서재 점수의 상승을 바라서일 수도 있다. 못쓰는 서평이지만 열심히 쓰다보면 발전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한 적도 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기대는 접은 상태다.

 

사실 난 서평을 어찌 써야 하는지 모른다. 배운 적도 없다. 어려서 내야 하는 독후감은 죄다 책 뒤에 붙은 해설을 베껴서 냈고, 그나마 책은 읽지도 않았다. 그러니 내가 서평을 잘쓰면 그게 이상한 거다. 서평을 쓸 때는 줄거리를 쓰면 안된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만, 그게 다다. 도대체 뭘 써야 할지, 책을 읽고 나면 쓸말이 없어 고민이다. 남들은 2천자가 적다면서 두편으로 나누어 서평을 게시하기도 하는 모양이던데.... 그래서 난 나 나름의 방식으로 서평을 쓰고 있다. 예컨대 내가 얼마전에 쓴 폴 오스터의 <환상의 책> 서평을 보자. 난 이 책을 이렇게 정의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겠지만, 이 책은 '미남 주변에는 이쁜 여자가 꼬인다. 하지만 이쁜 여자를 너무 밝히면 망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냉정하기 짝이 없는 알라디너 여러분들은 이렇게 내 서평을 응징했다.

"4분중 0분께서 이 리뷰를 추천하셨습니다 "

 

이 책은 원래 어떤 내용인지 알기위해 다른 분의 서평 두개를 인용한다.

-'내 삶이 내 것이기도, 내 것이 아니기도 하다면..그럼 기왕이면..'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우리는 친밀했던 이들의 존재를 그들과 관련된 '기억'으로서 확인받고, 잘 알지 못했던 이들의 존재는 그들에 관련된 '기록'들로 확인받는다...환상의 책>에는 누군가,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경험이 있는 이의 어깨를 조용히 다독거리는 듯한 따뜻함이 배어있다.

 

보라. 미남, 이쁜 여자 하는 얘기는 언급되지도 않고, 다들 존재가 어떠니 하는 얘기뿐이다. 사실 나도 그런 말을 하고 싶긴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표현이 안되는데. 나도 좋아서 저런 서평을 쓴 건 아니란 말이다.

역시 최근에 쓴 <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의 시작 부분을 보자.

"이 글의 작가는 외과 레지던트다. 우리나라의 레지던트들은 박봉에 무지하게 바쁜 일상을 영위하느라 책을 쓸 여력이 전혀 없을 테지만, 미국의 레지던트는 좀 다른가보다"

작가의 직업을 말하고, 봉급이 어떻고.... 카이레님이 쓴 "사위에 눈이 그쳐 있었고"와 그야말로 천양지차 아닌가. 이런 서평을 계속 써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마이페이퍼만 쓰면 이상하니까, 가끔 리뷰도 써야지. 내가 쓴 리뷰를 읽는 분도 괴롭겠지만, 쓰는 나는 더 괴롭다. 나도 서평을 잘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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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 2004-02-13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안해! 나 안해!..ㅋㅋ

ps 라플라니스꽃님의 서평도 감동의 물결~

진/우맘 2004-02-13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카이레님의 서평도 좋지만, 마태우스님의 글도 좋습니다.
환상의 책 리뷰를 응징한 분들은, 마태우스님이 얼마나 유쾌하고 기발한 분인지 몰라서 그런 걸거예요. (아마 단순히 폴오스터의 안티세력...쯤으로 이해한 거 아닐까요?)
제가 님에게 처음 반한 문장이, 페이책 글 중 <왜? 안 이쁘니까!> 였는걸요!

그리고...<알라딘 리뷰 중 제일 추천을 못 받은 리뷰>같은 기록으로 명예의 전당에 오른다면, 그거 기분 나쁠까요? ^^;;;;;

chaire 2004-02-13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태우스 님, 정말 왜 이러십니까. 칭찬해주신 걸로 알고 감사히 받겠습니다만, 전 마태우스 님의 리뷰가 훨씬훨씬 좋습니다. 아무래도 괜히 제 글 인용하면서, 역시나 유쾌한 글쓰기를 보이시는 마태우스 님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 같은데요?^^. 하룻만에 접속했다가 이상한 얘기가 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암튼 전 마태우스 님의 '환상의 책' 리뷰 읽고는 그 명쾌한 독후감에 혀를 내두르며 뒤집어졌답니다. 지금처럼 독특한 개성이 번뜩이는 리뷰... 지속적으로 올리지 않으시면... 저를 두 번 죽이는 겁니다(아이고 썰렁해라^^)

도서관여행자 2004-02-1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백하자면, 어제 리뷰를 쓸 때, 너무 귀찮아서 쓰기 싫어졌는데, 마태우스님의 유쾌하고 정력적인 리뷰와 페이퍼 들을 떠올리며 꿋꿋이 한 자 한 자 적어나갔답니다. ^^ 마태우스님은 좋은 스승이고 벗입니다.

.... 저도 옛날에 학교에서 검사받을 일기 대충 채울려고 책 뒤에 해설을 베끼곤 했죠! ㅋㅋㅋ

Arch 2004-02-13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훅~ 마태우스님의 리뷰를 많이 읽진 않았지만, 인간 본성이야 어찌됐든 글은 참 순진하게 쓰는듯 싶어요. 그리고~ 그러함이 살랑 꼬리를 쳐서 여성 알라디너에게 어필하는게 아닐까요. 물론 의도하시는건 아니겠지만. 흡. 앞으로도 좋은 리뷰 많이 부탁해요~ 이왕이면 상품권 5만원에 도전하는건 어떠실지.

만월의꿈 2004-02-13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는 정말 대단한 분들이 많죠ㅠ-ㅠ; 나도 동참할까요? 나 안해~ 나 안해~!!
마태우스님 스스로는 못 느끼시겠지만, 마태우스님 역시 저에게는 우상이십니다..

digitalwave 2004-02-13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쵸... 알라딘 리뷰어 분들이야... 정말 대단하죠... 덕분에 알라딘 리뷰 쓸 적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다가 "나 안해~ 나 안해~"라고 절규하고 그냥 책소개만 줄창 해버린 편집팀 직원도 있답니다. ㅠ.ㅠ

마태우스 2004-02-14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대님/맞아요. 라스꼴리니꽃님의 서평도 대단하지요.
진우맘님/이런 글을 쓰면 한분 정도는 추천을 해주실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7분 중 한분께서 이 리뷰를 추천하셨습니다"로 나오는군요. 한분은 해주셨지만, 흐흐흑...

마태우스 2004-02-14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이레님/ 스스로도 썰렁하다고 하셨지만, 유머 면에서는 제가 카이레님보다 조금 나은 것 같네요. 다행입니다. 하나라도 나은 점이 있어서요^^
ExLibris님/부끄럽습니다. 스승보다는 '벗'을 택하렵니다.

마태우스 2004-02-14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개속 토끼님/앗! 처음 뵙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성 알라디너에게 어필'하는 게 사실입니까? 호호호,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는군요. (김미연 버전으로) 앞으로도 계속 순진한 척 해야지~~~
만월의 꿈님/ 우상이라니, 부끄럽게 무슨 그런 말씀을! 알라딘에 대단한 분이 많다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digitalwave님/호호, 그런 일도 있었군요. 알라딘 리뷰가 없어진 게 그래서였네요.

digitalwave 2004-02-14 09: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가 리뷰를 잘 안 썼다는 거지, 알라딘 리뷰가 없어지진 않았습니다. 메인 첫 화면에 보이던 걸 추천도서 코너로 위치를 옮긴 겁니다. 거기로 가보시면 아직 그대로 있답니다. ^^

마태우스 2004-02-14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그, 그렇군요. 부끄럽습니다...

가을산 2004-02-14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흐... 제 리뷰가 딸랑 두 개인 이유.
첫번째 리뷰: 서재가 열리기 전에 어려서 읽었던 '끝없는 이야기' 재출간이 반가워서 씀. (아무도 안보는건 줄 알고)
두번째 리뷰: 서재가 열렸는데, 첫 화면에 동화책 리뷰가 뜨는거다. 첫번째 리뷰를 가리기 위해 하나 더 씀.
그 이후로는 부끄러워서 더이상 못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