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그림을 보는 법 - 전통미술의 상징세계
허균 지음 / 돌베개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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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란한 마음에 집에 쟁여놓은 동양미술책을 주로 보는 지금 이 글의 제목이 진짜 사실은 아마도 아니겠지만 ,하나같이 흐름이 느껴지지 않다는 아쉬움이다. 총론은 없고 각론만 있는 느낌들. 내가 그런책들만 샀을수도 있지만 본 몇권의 책들에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반영되거나 시대를 선도해간 동양미술의 흐름을 좀처럼 느낄수가 없다. 그런 흐름자체가 부재한 것일까 아니면 그런책을 쓸만한 전공자나 책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가장 가능성 높겠지만 내가 그런 책을 못본것일까. 하여튼 아쉬운 대목이다ㅏ.

 이번책도 그래서 감흥이 떨어진다. 지난번 본책 '옛 그림을 읽는 법'과 제목도 매우 유사하다. 물론 이 책이 더 먼저 나왔고 책의 내용도 좀 더 다양하다.

 이 책 역시 산수부터 다루는데 전반적으로 고미술에 드러나는 여러가지 주제를 설명하고 그림을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그래서인지 미술책을 보는 것인지 조상의 삶을 바라보는 것인지 좀 헷갈리는 부분도 있었다.   

 이 책도 산수부터 다룬다. 하여튼 우리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조상들은 산수를 다루는데 경치와 흥취, 이치 세가지를 우선시했다. 경치는 글자그대로 자연을 그대로 보고 즐기는 것으로 실경산수화에 해당한다. 가장 품격이 낮다. 다음은 흥취로 산수를 보며 인간으로서 자연과의 교감을 즐기는 것이다. 다음 순위라 할수 있다. 마지막은 이치다. 산수화를 통해 자연의 이치를 느끼고자 함인데, 동북아에서 자연의 이치는 불교와 도교, 유교적 이치다. 자연을 통해 우주만물의 이치를 이해하고자 하지만 변하지 않는 이치를 깨닫기에 자연을 항시 변화한다. 실상 공즉시색이고 색즉시공이다.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인데, 이것이 동양적 자연질서의 이치다. 때문에 이치를 드러낸 산수는 우리가 잘 아는 산수화처럼 뭔가 그린듯하고 안그린듯하기도 하며 경계가 흐릿하고 여백이 무척많다. 그림자체에 이런 이치를 실현했기 때문.

 이처럼 뭔가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선비들이지만 복제를 항상 염원하는 유전자를 몸에 담고 생명체인 이상 그들도 속세의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진 않았다. 그래서 오복이란게 있다. 오복은 다섯가지 복으로 수(장수), 부(돈과 출세), 강녕(몸과 마음이 우환없이 편한 것), 유호덕(덕을 쌓아 복을 얻는 것), 고종명(천명을 누리다 편히 죽는 것)이다. 이것이 그림에도 그래도 드러났는데 유교사회에서는 대를 잇는 것이 중요한 만큼 자손의 번창과 관련한 그림도 많다. 연꽃과 석류, 오이, 참외등이 자손의 번창을 드러내는 그림이다. 연꽃은 특이하게 꽃과 열매가 동시에 생겨나 조상과 자식이 연생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며 석류는 임산부가 좋아하는 신맛에 많은 씨의 숫자로 인해, 그리고 오이와 참외는 유독 과일이 많이 맺히고 가지치기가 심하여 그렇단다.

 재밌게도 고양이와 나비가 함께 그려진 묘접도가 장수의 상징이다. 이는 중국어의 발음때문인데 한자는 전혀 달라도 고양이 묘의 발음이 곡례라는 책에서 80을 의미하는 모와 비슷하고, 나비 접자의 발음이 90을 의미하는 질과 발음이 유사해서도, 즉, 고양이 나비 그림이 80-90의 장수를 의미하게 되는 셈. 이처럼 책을 보면 여러가지 복과 관련한 기원은 그 동물이나 상징물 자체의 성격에서 유래한 것도 있지만 이경우처럼 그져 발음이 유사하기에 그런것도 상당하다. 장수를 상징하는 그림중 기러기와 갈대가 함께 그려진 노안도 역시 갈대 노와 기러기 안자의 발음 때문이다.

 출세관련해서는 잉어, 닭, 원숭이 그림이 있다. 잉어는 고대 전설에서 잉어들이 용이 승천하는 용문앞에 모여 다투다 가장 훌륭한 한마리 만이 승천한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는데 이게 바로 등용문이란 말의 시초다. 그래서 잉어그림은 출세를 상징하며 이 전설에 의하면 떨어진 잉어들의 머리엔 검은 점의 상처가 생기는데 이게 점액이다. 그리고 점액은 알려진 것처럼 과거의 낙방을 상징하게 된다. 메기는 비늘하나 없이 매끈한 몸임에도 대나무에 오르는 재능이 있다. 그래서 고난을 극복한 출세의 상징이 된다. 쏘가리는 궁궐의 궐과 발음이 비슷해 그리되었고, 원숭이는 제후의 후와 발음이 비슷해서 역시 그리된다. 수탉과 맨드라미 그림도 있는데 수탉의 벼슬과 맨드라의의 꽃모양이 마치 관을 연상시켜 그렇게 되었다. 관이 두개 인셈이니 출세도 보통 출세가 아니다.

 왕가에선 왕이 나라를 매우 잘 다스리면 상서로운 일이 나타난다고 하여 이를 중시했는데 상서로운 일이 생김은 곳 전설의 동물이나 좋은 일이 일어남을 말한다. 뭐 용이나, 기린, 해치, 봉황 같은 것의 등장이다. 실제로 그런일은 없었겠지만 이를 중시해 궐과 왕의 주변에는 이런 그림을 형상화한 건물이나 옷투성이였다.

 용은 상서로운 동물이지만 그자체가 강한 왕권을 상징한다. 용은 발톱수가 중요한데 중국의 황제가 발톱이 다섯개인 오조룡을 사용하였으나 조선의 왕도 오조룡을 썼다. 이는 황제 뿐만 아니라 중국의 친왕들도 오조룡을 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기회와 틈바구니를 노려 황제와 같은 상징을 쓰려고 애쓴 조선의 왕들이었다. 오조룡이 그렇고, 조상에게 왕이 아닌 '조', '종'을 쓴 것과 자신을 '고'가 아닌 '짐'이라 칭한게 그러하다. 하여튼 오조룡은 왕과 왕비, 사조룡은 왕세자와 세자비, 삼조룡은 왕세손이 써서 위계를 잘 드러낸다.

 색상과 관련한 것도 재밌는데 동양에서는 오방색이 색의 전부다. 서양에서는 색이 광학적인 색 자체를 의미하고 나중에서야 의미나 상징도 중요시했지만 동양에서는 색은 광학적 의미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훨씬 강했다. 동양의 오방색은 가운데가 황색, 동쪽이 적색, 서쪽이 백색, 북쪽이 검은색, 남쪽이 청색이다. 그래서 중국의 황제는 스스로가 중심이라 생각했기에 천자의 복색으로 황색을 썼으면 조선의 왕은 동쪽의 왕이란 점에서 적색의 곤룡포를 썼다. 그리고 조선의 신하들은 아주 고관이 아닌 경우는 청색을 입어 격을 맞추었다.  오방색은 상생의 원리에 맞추어지는데 색하나하나가 자연만물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황은 대지를 청은 목을  적은 불을 백은 금, 흑은 물을 상징한다. 이들은 서로 보완관계로 오방색의 순서는 청-적-황-백-흑의 순서다. 그래서 옷이나 여러 물건의 오방색은 이 순서대로 배치된다. 실제로 색동저고리의 색띠들도 이 원리로 배열디었고, 잔치국수의 오색 고명도 그러했다고하니 무척 재밌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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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목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3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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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목은 사람이나 물건, 심지어 무형적인 것까지 그것의 가치를 알아 보는 눈이다. 안목이 높다면 다른 사람이 알아채지 못하는 그것만의 가치를 알아보는 셈이고 안목이 낮다면 그렇지 못한 셈이다. 코로나사태를 맞아 우리사회의 안목을 생각하게 된다. 사태에 대한 같은 대처를 놓고 어찌 이리 보는 안목이 다른지. 사회전반에 걸친 반지성주의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다. 어찌 자신의 자유로울 권리가 다른 사람의 안위에 우선할까! 

 하여튼 이 책 안목은 문화재청장을 지낸 유홍준의 다른 책이다. 우리 미술을 보는 안목에 관한 책인데 뛰어난 미적 안목을 가졌던 우리의 미술가들과 그러한 안목을 갖고 예술품을 수장하고자 노력한 사람들, 마지막으로 유홍준의 안목으로 주목할 만한 우리 미술가를 소개하는 3개장으로 구성했다.

 이 책에서 우선 인상적인 부분은 도자기 부분이었다. 지금은 좀 관점이 달라진 듯하지만 서양미술의 입장에서 동양미술의 가장 이해가 안되는 부분 중 하나는 도예다. 서양 미술사의 관점에서 도공은 그 역사자체가 매우 일천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예술이 아닌 기능의 차원에서 바라본다. 이유는 도공자체가 쓰임새가 목적이기 때문인데 그로 인해 기교와 디자인이 중요할분 예술가의 정신이나 개성이 발휘될 여지가 없다고 본다. 거기에 도자기에는 작가의 이름조차 남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아 더욱 공예로 보는 관점이 강해진다.

 하지만 동양미술에서는 순수미와 사용의 분리가 엄격하지 않으며 회화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개인주의적 예술보다는 시대나 민족의 미감이 들어가있는 집단적 예술 성격이 강하다. 때문에 동양에서 모예는 마땅히 예술의 하나로 간주된다.

 우리 도자기에서 우선 주목할 시대는 고려시대다. 청자로 유명하여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는데 송대 소경의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고려의 건국과 성읍, 궁전, 인물, 사찰, 풍속이 자세히 수록되어 있어 고려의 모습을 보는데 큰 도움이 되는 책이며 청자에 대해서도 여러 기록이 남아있다. 고려청자에서 가장 큰 주제는 차와 술이었다. 다완에는 다도에 걸맞는 고요하고 맑고 정숙한 분위기가 있으며, 술은 감성적 해방이 허용되기에 술병과 매병에는 풍류와 낭만, 서정이 느껴진다. 그래서 술병에는 명시가 새겨져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런 시명청자는 중국과 일본엔 없는 우리 고려청자만의 고유 특성이다. 이런 청자는 고려말에 들어 거의 생산과 사용이 사라진다.

 조선에 들어 청자는 거의 완전히 잊혀지고 백자의 시대가 시작된다.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크게 세가지 관점에서 비롯되는데 형태미와 빛깔, 문양이다. 동북아 삼국의 도자 중 일본의 것은 주로 빛깔에서 찬양받으며 중국은 형태, 한국의 것은 아름다운 곡선미로 주목받는다. 조선의 백자 중 이 책에서 주목한 것은 바로 달항아리다. 달항아리는 특유의 백색 빛깔의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독특한 곡선으로 주목받는다. 달항아리의 곡선은 정확한 좌우대칭을 이루지 않으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는데 이는 조선시대 기술적 한계에서 비롯된 미이다. 당시 전동이 아닌 크기가 작은 수동식 물레로 도기를 제작했는데 달항아리처럼 큰 조형물을 한방에 만들긴 불가능했다. 그렇다보니 고육지책으로 정확히 반씩 물레로 빚은 후, 나중에 두 왕사발을 합치는 형태로 달항아리를 제작하게 된 것. 이런 달항아리의 빛깔과 곡선미는 오늘 날에도 눈을 때지 못하는 미를 자랑하게 되었으며 우리나라의 작가 김환기는 달항아리를 주제로 많은 회화를 남기기도 했다. 책에 나온 에피소드중 영국의 빅토리아앨버트 미술관에서는 유명인사 5인에게 이 미술관이 보물중 5가지를 꼽으라는 미션을 주었다. 이 유명인사중 007시리즈에 나온 주디 덴치는 5가지 보물중 하나라 조선의 백자항아리를 꼽았다. 하루종일 보고 있으면 근심이 사라진다는 이유였다는데 정말 공감이 가는 이유였다.

 개화기에 들어 일본은 우리의 문화재를 마구잡이로 도굴하거나 헐값에 사들이기 시작했는데 공식적이지 않지만 대충 2만에서 3만점의 우리 유물이 일본에 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유명한 안견의 몽유도원도도 일본에서 소장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우선 고려청자를 도굴하고 수집했는데 조선시대 청자가 완전히 잊혀져 매우 쉽게 얻을 수있었다. 그들의 고려청자수집붐은 1910년대 분청사기와 조선백자로 이어졌고, 이후엔 삼국시대 토기와 불상, 금속유물과 회화, 고서로 이어진다. 이에 우리 수집가들도 조금씩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깨닫고 대응하기 시작한다. 1920년대부터 고미술작품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1930년대에는 급기야 일본인들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확보한 미술품이 있었기에 일본에 넘어간 것이 어쩌면 2-3만정도 그쳤는지도 모를일이다.

 분단이후 한국미술은 현대미술로 접어든다. 남북은 체제의 차이로 제각각의 길을 걸었는데 일제강점기 잔재인 일본화된 인상화 화풍을 제거하기 위해 남에서는 서구 모더니즘이 도입되었고 사회주의 북에서는 리얼리즘에 도입된다. 러시아 유학 화가 변월룡은 이때 북으로 와서 북의 리얼리즘에 일조하며 많은 작품을 남기는데 당시대의 여러 인물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것이 독특했다. 남에서는 미술계가 산업화를 통해 어느정도 정체성에 대한 자각이 이루어지면서 단색조의 현대미술이 등장했고, 현실에 대한 참여와 고민으로 민중미술이 생겨나게 된다.

 책에는 굉장히 다양한 우리 미술품과 작가들이 소개된다. 보는 즐거움이 확실히 있는 편인데 주제가 좀 복잡하다보니 하나의 큰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편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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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부동산 경험치 못한 위기가 온다 - 큰 판을 읽으면 기회가 보인다
이광수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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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동산 책들을 보면 교통이나 직장과의 거리, 학군, 상권 등 주요 요소들을 본다. 이런게 강하면 수요가 많다고 보고 투자가치가 있다는게 대부분의 설명인데 이 책은 좀 달랐다. 보다 근본적이라 볼 수 있는 수요와 공급에서 부동산 시장에 접근한 것이다. 물론 이책에서 물하는 수요와 공급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르다. 부동산 시장의 가격은 상당히 빠르게 변화하는데 주택수요는 사실 인구나 가구, 소득에 따른 것으로 장기적으로 천천히 변하는 것이다. 공급역시 집을 짓는 것이어서 인허가에서 토지구매나 건축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것들이다.

 그렇다면 부동산에서 가격을 변화시키는 수요와 공급을 대체 뭘까? 저자는 수요는 우선 투기수요로 본다. 심리적 영향을 받는 것으로 실제적 수요는 아니지만 부동산 구매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실제 가격을 움직이는 수요로 작용한다. 공급역시 마찬가지다. 집을 짓는 것을 오래 걸리니 가격에 영향을 미치는 공급을 투기공급으로 매도의사가 없는 주택을 제외한 물량을 말한다. 즉, 기존 주택자의 매도 물량이 투기 공급이 되는 것이며 실제 수요가 아닌 구매하려는 심리를 가진 투기 수요가 부동산 가격의 방향을 단기적으론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10여년 간 전국의 집값은 가파르게 올랐는데 이는 투기 공급을 줄어든 반면 그로 인해 투기 수요가 커졌기 때문이다. 투기 공급을 줄어든 이유는 우선 낮은 금리로 집주인들의 보유부담이 줄었고, 정부의 임대사업정책으로 보유부담이 더욱 줄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주택 가격에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고, 주택매도자들간의 담합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여러 상승작용으로 투기공급이 줄고 투기수요만 커지다보니 부동산 가격은 상승한 것이다.

 또한 부동산 시장은 전통적인 수요공급곡선의 법칙도 벗어난다. 보통 가격이 상승하면 수요는 감소하는 것이 당연한데 부동산시장에선 가격이 상승할 수록 오히려 불타는 듯이 수요가 폭발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우리나라 부동산이 이미 재화가 아닌 투자재로 여겨진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저자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부동산 시장은 다음과 같이 움직인다.

우선 어떤 이유에서건 투기수요가 증가한다. 그러면 가격이 상승하며 물건값이 오르니 파는 사람도 늘어나 거래량 자체가 늘어난다. 하지만 곧 가격 상승이 계속 될 것을 직감한 집주인들이 투기공급을 줄여 매물이 줄어들고 그로인해 공급이 줄어 가격은 더욱 폭발적으로 상승한다. 물건은 적고 사려는 사람만 많아보니 거래량은 급감하게 되고, 지나친 상승과 구매의 어려움으로 투기수요도 점차 줄어든다. 투기 수요가 줄어드니 가격은 자연스레 조금씩 하락하게 되며 살 사람이 없어지니 거래량도 따라 감소한다. 가격하락과 거래량 하락에 놀란 집주인들이 매물을 내놓아 투기 공급이 증가하게 되며 이에 따라 가격은 폭락한다. 가격이 폭락하자 실수요 및 투기수요가 이를 사들여 거래량은 다시 급증한다. 투기 수요도 슬슬 살아나며 앞에 시작한 공식이 다시 반복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부동산은 장기간의 상승과 장기간의 하락을 주기적으로 반복해왔는데 1980년대가 급증기였다면 1990년대는 장기간의 하락에 경제위기란 인한 폭락 2000년대는 장기간의 상승 그리고 서브프라임모기지사태부터 2010년 초반까지는 장기간의 하락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는 장기간의 상승기였다. 대충 10년 정도의 상승기와 하락기를 갖는 셈인데 지금은 슬슬 하락할 시점으로 저자는 보고 있는 것 같다.

하락기엔 흔히 많이 말하는 똘똘한 한채 투자 전략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본다. 똘똘한 한채는 많이 오르는 만큼 하락기엔 많이 하락한다는 것이. 좋은 전략은 이같은 큰 흐름을 보고 평소엔 유동산 현금자산을 많이 보유하다 상승기 초반 많이 하락했던 수요가 큰 지역에 투자하고 하락기에 다시 빠지는 형태의 투자전략이다.

 저자는 아파트투자에 있어서 거래회전율을 중시하는데 이는 아파트의 거래건수의 빈도다. 거래회전율이 하락하면서 가격이 많이 빠진 지역은 본디 수요가 높아 상승기엔 크게 오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또한 임대비율이 높은 아파트도 주목한다. 임대비율이 높다는 것은 투자자가 많이 실소유주로 들어와있다는 점이며 이로 인해 가격변동성도 크다는 것.

 미래의 변화로는 그동안 우리 부동산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였던 교육여건의 약화다. 향후 자녀가 없거나 많이 두지 않는 1인가구가 인구의 40%가량을 차지하게 되면 교육여건은 당연히 부동산 입지에서 약화되고 오히려 레저여건이나 지금도 중요한 직업여건이 더 중요해 질 것이란다. 장기적으로 인구구조의 변화로 전체적인 수요감소와 주거 이동률의 하락, 소형주택의 선호, 도심회귀, 임대시장의 활성화, 빈집의 증가를 예상한다. 저성장시대를 맞아 도시집중화가 이루어지고 한 주택에 오래 살게 될 것이며 지금의 자본수익보다는 임대수익이 중심이 될 것이란게 저자의 예상이다. 

 독특한 좋은 투자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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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읽는 법 - 하나를 알면 열이 보이는 감상의 기술
이종수 지음 / 유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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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맘이 불편한 요즘. 그냥 동양미술에 꽂히기로 했다. 그래봐야 기초교양수준을 보는 것이지만. 너무 몰라서인지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공공도서관도 문을 닫은 시국이라 집안에 쟁여놓은 서재의 책들중 이 소재만 가려 보고 있다. 의외로 좀 있었다. 동양미술에도 부채의식을 다소 갖고 있었나보다.

 사실 한국인은 한국인이면서도 동양화에 대해서 거의 모른다. 당연한 것이 우리 미술교육에서 단원이나 제재의 80%가 서양미술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거의 10여년 이상전 부터 국악이 제자와 단원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건만 미술은 서예와, 수묵화 관련 단원 하나 정도가 전부다. 그래서 기초를 다루는 이책의 내용조차 거의 몰랐다. 다들 나와 비슷할지도 모른단 생각으로 글을 남긴다.

 

1. 산수화

 우리 옛 그림의 갈래는 크게 네 가진인데 산수화와 인물화, 화조화, 풍속화다. 이 중 가장 으뜸으로 쳤고 지금도 우수한 작품이 많이 남은 것이 산수화다. 산수화는 지배계층인 양반과 문인들이 좋아했기에 수요가 놓았고 당대의 대가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산수화에서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산수화는 글자 그래도 산과 물을 그린 것으로 중국의 남북조 시대인 대략 4-5세기 경 시작된 것으로 사려된다. 당시 중국의 종명이란 자가 자신의 늙고 병듬을 한탄하며 더 이상 아름다운 산수를 유람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쉬워하며 집에 누워서 풍경을 대리만족 하고자 산수를 그리고 감상하기 시작 한것을 산수화의 시작으로 본다.

 이처럼 산수화는 집에서 산수를 감상하는 것이 목적이다보니 구체적이고 특정한 지역을 그리기보다는 그럴싸하고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산수를 작품으로 나타냈다. 실경이 아닌 관념적이거나 이상화된 산수가 산수화의 소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시 이런 관념산수화가 주류였다. 변화가 시작 된 것은 17세기로 중국이 아닌 조선의 실경을 그리는 실경산수화와 진경산수화가 등장한다. 이런 변화의 이유로는 우선 명의 멸망으로 조선을 유일한 문명국으로 여기는 소중화 사상으로 인해 중국의 산수만을 그리던 방식에서 조선의 산수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있다. 그리고 명대부터 유행했던 문인들의 산수유람이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 그리 되었다는 설도 있다.

 

2. 실경산수화와 진경산수화

 조선의 유명한 화가로는 문인출신인 삼재와 직업화가인 도화서 출신의 삼원이 있다. 삼재는 호를 따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공재 윤두서를 말한다. 삼원은 단원 김홍도와 그 제자인 혜원 신윤복, 그리고 오원 장승업이다. 이중 이 책은 겸재 정선에 주목했다. 우리 그림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기법이나 관념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는데 중국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장르를 구축한 것은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이 유일하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진경산수화가 전통적인 관념산수화에서 벗어나 조선의 실경을 그려낸 것으로 실학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사실 진경산수화는 실경을 그려낸 것이 아니다. 실경을 그려낸 것을 실경산수화로 정선 이전부터 다수의 화가들이 그린 작품들이 있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관념이 아닌 실제의 실경을 그리되 화가의 주관이나 멋을 더해 실경 이상을 그려낸다. 그래서 정선의 진경산수화에서는 한 시점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부분들이 드러나는 다시점형태를 띤다. 금강산을 그린 그의 만폭동 작품에서는 정선이 보고 나타내고 싶은 금강산의 전부가 나타나 있다.

 이런 차이로 인해 진경산수화는 실경산수화와는 구분되는 것이다.

 

3. 수묵화를 볼때 몰랐던 것들

수묵화는 크게 종이나 비단에 그린 것들이 많다. 비단은 재료가 더 고급이고 화려한 맛을 주지만 배경이 너무 화려할 경우 그림과 어울리지 않으므로 주로 상아색이나 담황색을 썼다. 하지만 종이보다 오래가지 않아, 비단작품의 경우 오래되면 작품자체가 어둡게 손상되는 경우가 많다.

 서양의 그림은 캔버스에 그려 항상 펼쳐진 형태로 보관하지만 우리 그림은 가로나 세로로 둘둘마는 두루마리 형태로 보관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전시관이나 사진에서 모두 펼쳐놓아서 그런 상상이 잘 들지 않지만 과거 조상들은 둘둘 말린 그림을 조금씩 펴보는 형태로 감상했다고 한다.

 이런 감상형태는 당연히 표현에도 영향을 미쳤다. 화가들은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두루마리를 펼치는 순서를 생각하며 공간을 드러내는 형태로 그림을 그렸고, 심지어 펴는 방향에 따라 시간에 따른 변화를 주는 것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런것도 모르고 활짝 편채로 동양화를 감상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그렇다.

 서양의 그림에는 거의 반드시 제목이 있는 편이지만 동양의 그림엔 사실 제목을 붙이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제목은 작가 자신이 붙이는 경우가 적었으며 그냥 표현한 것 자체가 제목이 되거나 후일 감상자에 의해 제목이 붙은경우가 대부분이다. 거기에 작가를 표시하는 관지라는 것을 썼는데 자신의 본명보다는 호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무려 200여개의 호를 갖고 있었던 것처럼 과거 사람들은 세월에 따른 자신의 내면 변화나 외면 변화에 따라 호를 꾸준히 변경했다. 동일작가의 관지가 제각각 다를수 밖에 없는 이유다. 거기에 왕의 어진이나 고관대작의 인물화의 경우 감히 관지를 넣을 수 가 없으니 여러 사료에 의해 작가를 찾아야 했다.

 관지말고 동양의 그림은 글이 있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우리 그림의 여백의 미는 애초에 이런 글을 위해 남긴 장소일지도 모르겠다. 그림에 쓰는 이런 글을 화제라고 하는데 주로 제사나 찬들이 많았다. 이는 작품과 하나가 되어 작품을 빛내기도 하는데 그림을 감상한 사람이 후일에 쓰는 경우도 있었고, 요즘 동화책의 글과 그림을 쓰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처럼 애초에 그림과 글을 협업으로 쓰는 경우도 있었다.

 더 재밌는 부분은 인장이다. 인장은 그림에 남기는 도장인데 화가 자신이 남기는 경우도 있었지만 작품의 소유주나 후일에 돌아가며 감상한 사람이 남기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그림과 어울리지 않는 붉은 인주의 인장이 그림 여기저기를 점령한 경우도 많다. 그림반 도장 반이다. 이는 그림을 훼손시키는 행위갔지만 당대 사람들에게는 그림을 높은 고관대작이나 중요한 문인에게 인정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누가 인장을 찍은 그림이냐가 매우 중요했던 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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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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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 책 '세한도'를 읽고 추사 김정희에 대해 관심이 더 생겨났다. 세한도도 좋은 책이었지만 좀 얇았고 자세하진 않았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추사 김정희란 책을 사놓은게 생각났다. 그래서 집었는데 생각보다 두껍고 요즘 직장일이 번잡해 좀처럼 읽히질 않았다. 김정희는 세한도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림보다는 서예로 유명한 학자다. 그래서 이 책은 그림보단 한문글자가 무척 많다.

 우리 조상들은 글씨가 마음과 학식을 반영한다 하여 무척 중시했는데 그 흔적이 남아 어릴적 국대시절 글씨쓰기 대회나 글씨 못쓰는 이유로 고통을 받았다. 자칭 우리반 5대악필이었는데 글씨를 못쓰면 담탱이님께 성의가 없거나 대충했다는걸로 여겨져 혼나거나 숙제를 다시하곤 했다. 이상하게도 그시절 숙제는 노력을 요하는게 많았다. 뭔가를 무척 많이 쓴다든지 하는 것들.

 의외로 추사 김정희에 대해 우리 학계는 일제시대 학자인 후지쓰카에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는 청대공부를 하며 청대 유수의 학자들과 김정희의 교류를 알게 되었고, 김정희를 청대학문연구의 일인자로 칭하기에 이른다. 그렇기에 각종 유물과 작품들을 많이 모으게 되었고, 책 세한도와 책 추사 김정희도 그의 연구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후지쓰카의 아들은 만년에 아버지가 소장하던 많은 김정희의 작품을 한국에 기증하니 뜻 깊은 일이다.

 하여튼 김정희는 정조 10년인 1786년에 태어난다. 영조와 사위를 맺은 월성위 집안으로 왕실의 외척인 경주김씨이기에 귀공자였다. 백부인 김노영이 자식이 없기에 출가하여 양자가 되었고, 친부는 김노경이다. 아버지 김노경은 무려 40세인 늦은 나이에 대과에 급제하였음에도 불과 20년의 관직 경력에 각종 판서와 주요 지방의 감사직을 두루 지냈다. 추사는 그런 집안의 자제였고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박제가라는 당대 실학자의 제자여서 북학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정조는 중국의 문물을 따라잡고 우리 것으로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청의 서책을 사들였고, 이로 인해 연경에 가는 사신들도 많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김정희는 자연스레 연경에 동경을 품게 된다.

 당시엔 연경에 주요 대신들의 자제가 자제군관으로 같이 가는 특혜가 있었는데 아버지 김노경의 첫연행시엔 너무 어렸고 두번째 연행때는 24세의 나이가 되어 연행에 동참한다. 거기서 그는 청의 대학자인 옹방강과 완원 등을 만난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연행이고 2-3달의 체류였지만 그간의 경험이 평생 그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다. 옹방강이나 완원역시 김정희에 강한 인상을 받고 거의 제자로 삼는다.

 조선에 돌아와 예술과 학업에 매진하던 그는 마침내 34세의 나이에 대과에 오른다. 2대 연속의 벼슬살이로 집안은 탄탄했고 같은 경주 김씨인 정순왕후가 있었다. 김정희 역시 아버지 만큼 요직을 거치진 못했지만 높은 벼슬살이를 했으며 이를 통해 연경과의 교류도 계속되었고 청의 서책과 문물을 계속 접한다. 또한 그는 금석문에 관심이 많아 진흥왕 순수비를 찾거나 조선의 각종 명승지와 산들, 유적을 탐색한다. 일종의 학자이자 지리역사학자 및 고고학자의 성향이 강했던 것. 요즘으로 치자면 종합예술학자느낌이다. 김정희는 독특하게도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이론적으로 통달했는데 그래서 그는 사찰의 현판에 글을 많이 남기기도 했고, 스님들과의 이론 논쟁 및 교류도 많았다. 조선시대 유학자치곤 매우 드문일이었다. 젊어서는 그는 자신만의 소신과 지론이 강한 편이었고 이로 인해 남들과 오해 및 다툼도 잦았는데 맞다고 생각하는 말은 반드시 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평소 생각이었다. 그래서 훗날 김정희를 모함하는 안동김씨 세력의 김우명을 암행어사 시절 고발해 파면시키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김정희가 벼슬에서 물러나고 조정엔 안동김씨 세력이 득세한다. 그들은 경쟁세력인 경주김씨를 못마땅히 여기고 조정을 장악하고자 공격을 시작한다.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은 벼슬에서 물러나자마자 상소로 공격을 받았고 급기야는 고금도로 유배된다. 추사는 독특하게도 왕실의 행차에 꽹과리를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격식과 법도를 중시하면서도 맞다면 과감히 새로운 것과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갖는 추사의 개성을 보여주는 면목이었다. 이후에도 안동김씨 세력의 공격은 계속되어 부친 김노경은 사후에 관작이 박탈되고 공격은 김정희에게 이어져 억울한 상황임에도 그는 무려 제주도의 대정현으로 위리안치된다.

 조선시대 귀양은 주로 천사와 부처, 안치로 구분하는데 천사는 고향에서 천리밖으로 이주시키는 것으로 고향에서 쫓아내는 것이고 부처는 중도부처의 준말로 죄인을 정상참작하여 귀양지로 가는 도중 그냥 도중의 한곳에서 지내게 하는 것이었다. 안치는 이중 가장 가혹한 것으로 상황에 따라 고향이나 개인 별장, 혹은 유배지를 스스로 택할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절도안치와 위리안치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절도안치는 글자그대로 섬에, 위리안치는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스스로 치고 그안에 갇히는 것이었다. 추사는 가장 먼 제주도에 그것도 위리안치된다.

 귀양길에서도 추사는 원교의 글씨를 폄하하고, 서예가인 창암 이상만의 글도 높이 치지 않는등 고고한 모습을 보인다. 제주에 도달해서도 귀공자로 자란 탓에 토착 음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으로 보내는 편지에 여러 음식의 조달을 부탁한다. 하지만 워낙 먼곳이라 상당수의 음식이 썩어 도착하고 장맛도 변하여 도착하는등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귀향 초기엔 벽파스님과 벌인 논쟁에서도 상당히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귀양 생활은 상당히 고달팠는데 음식과 기후, 물등 모든 것이 그와 맞지 않았던듯 하다. 제주의 풍광은 아름다울진데 위리안치 신세니 나가지도 못하였다. 오랜 귀양생활중 학문의 일가를 이룬 정약용과는 너무나 다른 상황이었지만 그의 학예는 좁은 곳에서도 할수 있는것이기에 다행이었다. 거기서도 연경의 소식을 접하고 지안들과 서신을 주고 받았으며 심지어 제자를 기르기도 하며 천거까지 한다. 세한도는 당시 연경을 오가던 역관 이상적에게 고마움에서 준 것이며 이상적은 세한도를 가져가 연경학자들로부터 그림에 대한 시를 받아 이를 책으로 엮기까지 한다.

 오랜 귀양생활로 추사의 생각과 성격은 많이 변화한다. 이전의 날카로움은 많이 사라졌고 관용적인 면과 토착적인 면, 인간적인 면이 더욱 많아진다. 귀양이 풀려 돌아오면서 과거 자신이 폄하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이야기하며 그들의 작품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오랜 유배생활로 집안은 예전만 못했다. 가세가 기울어 호화롭던 월성위궁은 이미 팔렸고, 추사는 서울 용상으니 강상에 머문다. 거기서 학예에 다시 집중하고 여러 사람과의 교류도 다시 시작되었지만 다시 모함을 받아 지난번과 정반대로 북방인 북청에 유배된다. 북청은 매우 추웠지만 중국과 가깝게 큰 고을이기에 제주만큼 힘겹진 않았다. 하지만 이미 60이 넘은 몸에 두번의 큰 유배생활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준다.

 돌아와선 과천에 자리잡는다. 과거 부친 김노경이 별장을 세운 곳으로 그곳에서 말년 생활을 한다. 추사는 석파 이하응과도 교류가 있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흥선대원군이다. 대원군은 난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는데 그의 난 그리기는 추사로부터 배운 것이다. 추사는 이하응에게 난 그리기를 가르치기도 했고 난 그림을 묶은 서책을 보내기도 했다. 과천에서 많은 작품과 제자들을 남기고 있던 그는 71세의 나이에 죽는다. 죽기 3일전에도 큰 글씨를 남겼는데 평생 열개의 벼루의 바닥을 보고 수천개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든 만큼 끊임 없이 학예에 매진하던 그의 모습다웠다.

 추사의 글씨는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는 이가 많았으며 실제 추사 자신도 살아생전 여러 사람에게 글씨를 청탁받았다. 그리고 상당수 서예가들이 입고와 출신 사이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한 반면 추사는 입고와 출신을 완벽히 통달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입고는 옛글씨를 학습하는 것으로 주로 금석학인데, 입고에 치중하다보면 새로운 것을 만다는 출신이 약했고, 출신이 강하다보면 근본이 없어져 입고가 약한 편이었다. 하지만 추사는 금석과 과거의 비문을 많이 연구한 사람으로 입고에서 출신이 나온 학자였다. 그래서 추사의 글씨는 추사체라는 새로운 장르로 확립된다.

 책을 읽으며 한문을 잘 모르고 서예도 모르기에 그의 작품들이 아름다움이나 뛰어난 문학적 표현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굴곡진 삶에서 변해가는 글씨를 보며 한 사람의 삶이 느껴졌고 거기서 오는 울림이 있었다. 책엔 부록으로 대표 작품집 책자도 있었는데 책을 완독하고 보니 이런 식의 부록을 준비한 저자의 생각에 공감가는 부분이 있었다. 저자 유홍준도 나이대별로 그의 삶에 따라 변화한 그의 글씨가 감명깊었던 것이다. 유홍준은 말년에 이르러 삶을 관조하고 낭만적이며 주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한 추사의 글씨는 마치 어린아이의 글씨처럼 돌아갔다고 했다. 추사가 어릴적 글을 썼다면 그랬을 것이라고 말이다. 돌고 돌아 처음으로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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