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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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전 책 '세한도'를 읽고 추사 김정희에 대해 관심이 더 생겨났다. 세한도도 좋은 책이었지만 좀 얇았고 자세하진 않았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추사 김정희란 책을 사놓은게 생각났다. 그래서 집었는데 생각보다 두껍고 요즘 직장일이 번잡해 좀처럼 읽히질 않았다. 김정희는 세한도로 유명하지만 사실 그림보다는 서예로 유명한 학자다. 그래서 이 책은 그림보단 한문글자가 무척 많다.

 우리 조상들은 글씨가 마음과 학식을 반영한다 하여 무척 중시했는데 그 흔적이 남아 어릴적 국대시절 글씨쓰기 대회나 글씨 못쓰는 이유로 고통을 받았다. 자칭 우리반 5대악필이었는데 글씨를 못쓰면 담탱이님께 성의가 없거나 대충했다는걸로 여겨져 혼나거나 숙제를 다시하곤 했다. 이상하게도 그시절 숙제는 노력을 요하는게 많았다. 뭔가를 무척 많이 쓴다든지 하는 것들.

 의외로 추사 김정희에 대해 우리 학계는 일제시대 학자인 후지쓰카에 큰 빚을 지고 있다. 그는 청대공부를 하며 청대 유수의 학자들과 김정희의 교류를 알게 되었고, 김정희를 청대학문연구의 일인자로 칭하기에 이른다. 그렇기에 각종 유물과 작품들을 많이 모으게 되었고, 책 세한도와 책 추사 김정희도 그의 연구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후지쓰카의 아들은 만년에 아버지가 소장하던 많은 김정희의 작품을 한국에 기증하니 뜻 깊은 일이다.

 하여튼 김정희는 정조 10년인 1786년에 태어난다. 영조와 사위를 맺은 월성위 집안으로 왕실의 외척인 경주김씨이기에 귀공자였다. 백부인 김노영이 자식이 없기에 출가하여 양자가 되었고, 친부는 김노경이다. 아버지 김노경은 무려 40세인 늦은 나이에 대과에 급제하였음에도 불과 20년의 관직 경력에 각종 판서와 주요 지방의 감사직을 두루 지냈다. 추사는 그런 집안의 자제였고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박제가라는 당대 실학자의 제자여서 북학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정조는 중국의 문물을 따라잡고 우리 것으로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청의 서책을 사들였고, 이로 인해 연경에 가는 사신들도 많았다. 이런 분위기에서 김정희는 자연스레 연경에 동경을 품게 된다.

 당시엔 연경에 주요 대신들의 자제가 자제군관으로 같이 가는 특혜가 있었는데 아버지 김노경의 첫연행시엔 너무 어렸고 두번째 연행때는 24세의 나이가 되어 연행에 동참한다. 거기서 그는 청의 대학자인 옹방강과 완원 등을 만난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연행이고 2-3달의 체류였지만 그간의 경험이 평생 그에게 강한 영향을 미친다. 옹방강이나 완원역시 김정희에 강한 인상을 받고 거의 제자로 삼는다.

 조선에 돌아와 예술과 학업에 매진하던 그는 마침내 34세의 나이에 대과에 오른다. 2대 연속의 벼슬살이로 집안은 탄탄했고 같은 경주 김씨인 정순왕후가 있었다. 김정희 역시 아버지 만큼 요직을 거치진 못했지만 높은 벼슬살이를 했으며 이를 통해 연경과의 교류도 계속되었고 청의 서책과 문물을 계속 접한다. 또한 그는 금석문에 관심이 많아 진흥왕 순수비를 찾거나 조선의 각종 명승지와 산들, 유적을 탐색한다. 일종의 학자이자 지리역사학자 및 고고학자의 성향이 강했던 것. 요즘으로 치자면 종합예술학자느낌이다. 김정희는 독특하게도 불교에도 상당한 관심을 갖고 이론적으로 통달했는데 그래서 그는 사찰의 현판에 글을 많이 남기기도 했고, 스님들과의 이론 논쟁 및 교류도 많았다. 조선시대 유학자치곤 매우 드문일이었다. 젊어서는 그는 자신만의 소신과 지론이 강한 편이었고 이로 인해 남들과 오해 및 다툼도 잦았는데 맞다고 생각하는 말은 반드시 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평소 생각이었다. 그래서 훗날 김정희를 모함하는 안동김씨 세력의 김우명을 암행어사 시절 고발해 파면시키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김정희가 벼슬에서 물러나고 조정엔 안동김씨 세력이 득세한다. 그들은 경쟁세력인 경주김씨를 못마땅히 여기고 조정을 장악하고자 공격을 시작한다.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은 벼슬에서 물러나자마자 상소로 공격을 받았고 급기야는 고금도로 유배된다. 추사는 독특하게도 왕실의 행차에 꽹과리를 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격식과 법도를 중시하면서도 맞다면 과감히 새로운 것과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갖는 추사의 개성을 보여주는 면목이었다. 이후에도 안동김씨 세력의 공격은 계속되어 부친 김노경은 사후에 관작이 박탈되고 공격은 김정희에게 이어져 억울한 상황임에도 그는 무려 제주도의 대정현으로 위리안치된다.

 조선시대 귀양은 주로 천사와 부처, 안치로 구분하는데 천사는 고향에서 천리밖으로 이주시키는 것으로 고향에서 쫓아내는 것이고 부처는 중도부처의 준말로 죄인을 정상참작하여 귀양지로 가는 도중 그냥 도중의 한곳에서 지내게 하는 것이었다. 안치는 이중 가장 가혹한 것으로 상황에 따라 고향이나 개인 별장, 혹은 유배지를 스스로 택할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절도안치와 위리안치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절도안치는 글자그대로 섬에, 위리안치는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스스로 치고 그안에 갇히는 것이었다. 추사는 가장 먼 제주도에 그것도 위리안치된다.

 귀양길에서도 추사는 원교의 글씨를 폄하하고, 서예가인 창암 이상만의 글도 높이 치지 않는등 고고한 모습을 보인다. 제주에 도달해서도 귀공자로 자란 탓에 토착 음식에 적응하지 못하고 집안으로 보내는 편지에 여러 음식의 조달을 부탁한다. 하지만 워낙 먼곳이라 상당수의 음식이 썩어 도착하고 장맛도 변하여 도착하는등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귀향 초기엔 벽파스님과 벌인 논쟁에서도 상당히 공격적인 모습을 보인다.

 귀양 생활은 상당히 고달팠는데 음식과 기후, 물등 모든 것이 그와 맞지 않았던듯 하다. 제주의 풍광은 아름다울진데 위리안치 신세니 나가지도 못하였다. 오랜 귀양생활중 학문의 일가를 이룬 정약용과는 너무나 다른 상황이었지만 그의 학예는 좁은 곳에서도 할수 있는것이기에 다행이었다. 거기서도 연경의 소식을 접하고 지안들과 서신을 주고 받았으며 심지어 제자를 기르기도 하며 천거까지 한다. 세한도는 당시 연경을 오가던 역관 이상적에게 고마움에서 준 것이며 이상적은 세한도를 가져가 연경학자들로부터 그림에 대한 시를 받아 이를 책으로 엮기까지 한다.

 오랜 귀양생활로 추사의 생각과 성격은 많이 변화한다. 이전의 날카로움은 많이 사라졌고 관용적인 면과 토착적인 면, 인간적인 면이 더욱 많아진다. 귀양이 풀려 돌아오면서 과거 자신이 폄하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이야기하며 그들의 작품이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오랜 유배생활로 집안은 예전만 못했다. 가세가 기울어 호화롭던 월성위궁은 이미 팔렸고, 추사는 서울 용상으니 강상에 머문다. 거기서 학예에 다시 집중하고 여러 사람과의 교류도 다시 시작되었지만 다시 모함을 받아 지난번과 정반대로 북방인 북청에 유배된다. 북청은 매우 추웠지만 중국과 가깝게 큰 고을이기에 제주만큼 힘겹진 않았다. 하지만 이미 60이 넘은 몸에 두번의 큰 유배생활은 그에게 큰 충격을 준다.

 돌아와선 과천에 자리잡는다. 과거 부친 김노경이 별장을 세운 곳으로 그곳에서 말년 생활을 한다. 추사는 석파 이하응과도 교류가 있었는데 우리가 잘 아는 흥선대원군이다. 대원군은 난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는데 그의 난 그리기는 추사로부터 배운 것이다. 추사는 이하응에게 난 그리기를 가르치기도 했고 난 그림을 묶은 서책을 보내기도 했다. 과천에서 많은 작품과 제자들을 남기고 있던 그는 71세의 나이에 죽는다. 죽기 3일전에도 큰 글씨를 남겼는데 평생 열개의 벼루의 바닥을 보고 수천개의 붓을 몽당붓으로 만든 만큼 끊임 없이 학예에 매진하던 그의 모습다웠다.

 추사의 글씨는 국제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는 이가 많았으며 실제 추사 자신도 살아생전 여러 사람에게 글씨를 청탁받았다. 그리고 상당수 서예가들이 입고와 출신 사이에서 정체성을 찾지 못한 반면 추사는 입고와 출신을 완벽히 통달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입고는 옛글씨를 학습하는 것으로 주로 금석학인데, 입고에 치중하다보면 새로운 것을 만다는 출신이 약했고, 출신이 강하다보면 근본이 없어져 입고가 약한 편이었다. 하지만 추사는 금석과 과거의 비문을 많이 연구한 사람으로 입고에서 출신이 나온 학자였다. 그래서 추사의 글씨는 추사체라는 새로운 장르로 확립된다.

 책을 읽으며 한문을 잘 모르고 서예도 모르기에 그의 작품들이 아름다움이나 뛰어난 문학적 표현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하지만 그의 굴곡진 삶에서 변해가는 글씨를 보며 한 사람의 삶이 느껴졌고 거기서 오는 울림이 있었다. 책엔 부록으로 대표 작품집 책자도 있었는데 책을 완독하고 보니 이런 식의 부록을 준비한 저자의 생각에 공감가는 부분이 있었다. 저자 유홍준도 나이대별로 그의 삶에 따라 변화한 그의 글씨가 감명깊었던 것이다. 유홍준은 말년에 이르러 삶을 관조하고 낭만적이며 주변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한 추사의 글씨는 마치 어린아이의 글씨처럼 돌아갔다고 했다. 추사가 어릴적 글을 썼다면 그랬을 것이라고 말이다. 돌고 돌아 처음으로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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