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그림 읽는 법 - 하나를 알면 열이 보이는 감상의 기술
이종수 지음 / 유유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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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맘이 불편한 요즘. 그냥 동양미술에 꽂히기로 했다. 그래봐야 기초교양수준을 보는 것이지만. 너무 몰라서인지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고 있다. 공공도서관도 문을 닫은 시국이라 집안에 쟁여놓은 서재의 책들중 이 소재만 가려 보고 있다. 의외로 좀 있었다. 동양미술에도 부채의식을 다소 갖고 있었나보다.

 사실 한국인은 한국인이면서도 동양화에 대해서 거의 모른다. 당연한 것이 우리 미술교육에서 단원이나 제재의 80%가 서양미술이기 때문이다. 음악은 거의 10여년 이상전 부터 국악이 제자와 단원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건만 미술은 서예와, 수묵화 관련 단원 하나 정도가 전부다. 그래서 기초를 다루는 이책의 내용조차 거의 몰랐다. 다들 나와 비슷할지도 모른단 생각으로 글을 남긴다.

 

1. 산수화

 우리 옛 그림의 갈래는 크게 네 가진인데 산수화와 인물화, 화조화, 풍속화다. 이 중 가장 으뜸으로 쳤고 지금도 우수한 작품이 많이 남은 것이 산수화다. 산수화는 지배계층인 양반과 문인들이 좋아했기에 수요가 놓았고 당대의 대가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산수화에서 인정을 받아야만 했다. 산수화는 글자 그래도 산과 물을 그린 것으로 중국의 남북조 시대인 대략 4-5세기 경 시작된 것으로 사려된다. 당시 중국의 종명이란 자가 자신의 늙고 병듬을 한탄하며 더 이상 아름다운 산수를 유람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쉬워하며 집에 누워서 풍경을 대리만족 하고자 산수를 그리고 감상하기 시작 한것을 산수화의 시작으로 본다.

 이처럼 산수화는 집에서 산수를 감상하는 것이 목적이다보니 구체적이고 특정한 지역을 그리기보다는 그럴싸하고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산수를 작품으로 나타냈다. 실경이 아닌 관념적이거나 이상화된 산수가 산수화의 소재가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시 이런 관념산수화가 주류였다. 변화가 시작 된 것은 17세기로 중국이 아닌 조선의 실경을 그리는 실경산수화와 진경산수화가 등장한다. 이런 변화의 이유로는 우선 명의 멸망으로 조선을 유일한 문명국으로 여기는 소중화 사상으로 인해 중국의 산수만을 그리던 방식에서 조선의 산수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있다. 그리고 명대부터 유행했던 문인들의 산수유람이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 그리 되었다는 설도 있다.

 

2. 실경산수화와 진경산수화

 조선의 유명한 화가로는 문인출신인 삼재와 직업화가인 도화서 출신의 삼원이 있다. 삼재는 호를 따서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공재 윤두서를 말한다. 삼원은 단원 김홍도와 그 제자인 혜원 신윤복, 그리고 오원 장승업이다. 이중 이 책은 겸재 정선에 주목했다. 우리 그림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기법이나 관념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는데 중국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장르를 구축한 것은 단원 김홍도와 겸재 정선이 유일하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진경산수화가 전통적인 관념산수화에서 벗어나 조선의 실경을 그려낸 것으로 실학사상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하지만 사실 진경산수화는 실경을 그려낸 것이 아니다. 실경을 그려낸 것을 실경산수화로 정선 이전부터 다수의 화가들이 그린 작품들이 있었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관념이 아닌 실제의 실경을 그리되 화가의 주관이나 멋을 더해 실경 이상을 그려낸다. 그래서 정선의 진경산수화에서는 한 시점에서는 관찰할 수 없는 부분들이 드러나는 다시점형태를 띤다. 금강산을 그린 그의 만폭동 작품에서는 정선이 보고 나타내고 싶은 금강산의 전부가 나타나 있다.

 이런 차이로 인해 진경산수화는 실경산수화와는 구분되는 것이다.

 

3. 수묵화를 볼때 몰랐던 것들

수묵화는 크게 종이나 비단에 그린 것들이 많다. 비단은 재료가 더 고급이고 화려한 맛을 주지만 배경이 너무 화려할 경우 그림과 어울리지 않으므로 주로 상아색이나 담황색을 썼다. 하지만 종이보다 오래가지 않아, 비단작품의 경우 오래되면 작품자체가 어둡게 손상되는 경우가 많다.

 서양의 그림은 캔버스에 그려 항상 펼쳐진 형태로 보관하지만 우리 그림은 가로나 세로로 둘둘마는 두루마리 형태로 보관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은 전시관이나 사진에서 모두 펼쳐놓아서 그런 상상이 잘 들지 않지만 과거 조상들은 둘둘 말린 그림을 조금씩 펴보는 형태로 감상했다고 한다.

 이런 감상형태는 당연히 표현에도 영향을 미쳤다. 화가들은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두루마리를 펼치는 순서를 생각하며 공간을 드러내는 형태로 그림을 그렸고, 심지어 펴는 방향에 따라 시간에 따른 변화를 주는 것을 도입하기도 했다. 이런것도 모르고 활짝 편채로 동양화를 감상하는 것은 아무래도 좀 그렇다.

 서양의 그림에는 거의 반드시 제목이 있는 편이지만 동양의 그림엔 사실 제목을 붙이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제목은 작가 자신이 붙이는 경우가 적었으며 그냥 표현한 것 자체가 제목이 되거나 후일 감상자에 의해 제목이 붙은경우가 대부분이다. 거기에 작가를 표시하는 관지라는 것을 썼는데 자신의 본명보다는 호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무려 200여개의 호를 갖고 있었던 것처럼 과거 사람들은 세월에 따른 자신의 내면 변화나 외면 변화에 따라 호를 꾸준히 변경했다. 동일작가의 관지가 제각각 다를수 밖에 없는 이유다. 거기에 왕의 어진이나 고관대작의 인물화의 경우 감히 관지를 넣을 수 가 없으니 여러 사료에 의해 작가를 찾아야 했다.

 관지말고 동양의 그림은 글이 있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우리 그림의 여백의 미는 애초에 이런 글을 위해 남긴 장소일지도 모르겠다. 그림에 쓰는 이런 글을 화제라고 하는데 주로 제사나 찬들이 많았다. 이는 작품과 하나가 되어 작품을 빛내기도 하는데 그림을 감상한 사람이 후일에 쓰는 경우도 있었고, 요즘 동화책의 글과 그림을 쓰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처럼 애초에 그림과 글을 협업으로 쓰는 경우도 있었다.

 더 재밌는 부분은 인장이다. 인장은 그림에 남기는 도장인데 화가 자신이 남기는 경우도 있었지만 작품의 소유주나 후일에 돌아가며 감상한 사람이 남기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그림과 어울리지 않는 붉은 인주의 인장이 그림 여기저기를 점령한 경우도 많다. 그림반 도장 반이다. 이는 그림을 훼손시키는 행위갔지만 당대 사람들에게는 그림을 높은 고관대작이나 중요한 문인에게 인정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누가 인장을 찍은 그림이냐가 매우 중요했던 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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