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모를 땋으며 (보급판)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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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향모를 땋으며 BRAIDING SWEETGRASS (보급판)

◎ 지은이 : 로빈 월 키머러 ROBIN WALL KIMMERER

◎ 옮긴이 : 노승영

◎ 펴낸곳 : 에이도스

◎ 2021년 1월 11일 1판 1쇄, 570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2020년 <한겨레> <문화일보> '올해의 책', 제 61회 한국출판문화상 번역 부문 최종후보작, <국민일보> '2020년 놓치기 아까운 책 20선', '2020년 YES24 '작가·출판인·기자·MD 50인의 올해의 책', 리터러리 허브 선정 '2010년대 최고의 에세이 TOP10', 2020년 알라딘 '올해의 책' 후보도서,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베스트셀러. 숨찰 정도로 타이틀이 많다.

2020년이라... 다이어리를 찾아보니 그 해에 나는 고작 서른다섯 권 읽었다. 지독하게 힘들고 피곤했던 해라는 기억. 그래서 몰라봤구나. 2020년에 겨우 내가 건진 책은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과 황석영의 『철도원 삼대』, 옌렌커의 『연월일』 뿐이니.

화려한 날들이 간 다음 만났지만 내게 '2022년 올해의 책' 중 한 권으로 올라선 이 책은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이라는 부제가 모든 걸 말해준다. 꽤 두꺼워서 양쪽에서 꽉 잡아주는 독서대의 두 발이 아니었다면 보기도 힘들었을 분량 570쪽이건만, 소설도 아니건만 어찌나 재미있게 술술 읽히던지!

손을 내밀어보세요. 갓 뽑아 마치 방금 감은 머리카락처럼 하늘거리는 향모 한 다발을 올려드릴게요. 윗부분은 황금빛 감도는 반짝거리는 초록이고, 땅과 만나는 줄기는 자주색과 흰색 띠를 둘렀어요. 향모 다발을 코에 대보세요. 강물과 검은 흙의 내음에 얹힌 꿀 바른 바닐라 향을 맡아보세요. 그러면 향모의 학명이 왜 Heirochloe odorata(향기롭고 성스러운 풀)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저희 말로는 윙가슈크wingaashk라고 해요. 감미로운 향기가 나는 어머니 대지님의 머리카락이라는 뜻이에요.

머리말 중에서. 10쪽

-우리는 향모를 어머니 대지의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애정 어린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자, 우리에게 베푼 모든 것에 감사하며 그녀의 아름다움과 안녕을 바라는 염원을 드러내는 것이다. (19쪽)

작가는 인간과 동식물에 존재 서열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범주를 나타낼 때 말고는 사람 이름처럼 동식물도 대문자로 표기한다. 한글에는 대문자가 없으므로 번역가는 뒤에 '님'을 붙이는 것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읽는 동안 처음에는 '루이 비외 느릅나무님'이라든지 '위치헤이즐님' 혹은 '검은물푸레나무님'이라는 호칭에 당황했지만 점점 익숙해져, 이렇게 '님'이 붙은 호칭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은 경건한 마음이 들기까지 한 걸 보면 작가의 생각이 옳다고 느껴진다. 인간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그 말이.

작가는 향모를 심고, 돌보고, 뽑고, 땋고, 태우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 안에 자신들 (인디언 원주민들, 작가는 포타와토미족 출신이다.)이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나고 그들 부족이 갈라지고 말과 문화를 잃어버리게 된 과정과 배경을, 그들의 문화를 답습하고 이어가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천천히, 가만가만히 말해준다. 더불어 발전이 가져온 파괴와 환경오염의 현장, 그것을 회복하는 많은 이들의 노력을 이야기하고 방법을 제시한다.

-선물의 본질은 관계들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선물 경제의 바탕에 놓인 화폐는 호혜성이다. 서구적 사유에서는 사유지를 '권리'로 이해하지만 선물 경제에서는 재산에 '책임'이 결부된다. (52쪽)

-솔잎을 스치는 바람소리, 바위에 떨어지는 물소리, 동고비가 나무줄기 두드리는 소리, 줄무늬다람쥐가 땅파는 소리, 너도밤나무 열매 떨어지는 소리, 귓가의 모기소리 - 내가 아닌 소리, 표현할 언어가 없는 소리, 우리가 결코 외롭지 않음을 알려주는 언어 없는 존재들의 소리를. 우리 엄마의 심장 박동 이후로 나의 첫 언어는 '이 소리들'이었다. (79쪽)

-우리는 매일 선물 세례를 받지만, 이 선물들은 우리에게 가지라고 준 것이 아니다. 선물의 생명은 움직임에, 공유된 숨의 들이쉼과 내쉼에 있다. 우리의 할 일은 선물을 전달하는 것이요, 우리가 우주에 내놓은 것이 언제나 돌아올 것임을 믿는 것이며 거기에 기쁨이 있다. (159쪽)

-감사는 충만의 윤리를 계발하지만, 경제는 공허를 필요로 한다. 감사 연설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이미 우리에게 있음을 일깨운다. 감사는 만족을 찾기 위해 쇼핑하라고 등을 떠밀지 않는다. 감사는 상품이 아니라 선물로 다가오기에 경제 전체의 토대를 뒤엎는다. 감사는 땅에게도 사람에게도 좋은 치료약이다. (169쪽) 이를테면,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 어머니 대지님에게 감사합니다. 당신 위를 걸을 때 우리의 발을 떠받쳐 주심을 감사합니다. 태초부터 그랬듯 지금도 우리를 보살펴주심이 우리에게 기쁨이 됩니다. 우리의 어머니에게 감사와 사랑과 존경을 드립니다. 이제 우리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땅과 사람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추천할 만한 한 가지가 무엇이냐고 종종 내게 묻는다. 그때마다 내 답은 한결같다."텃밭을 가꾸세요." 텃밭은 대지의 건강에도 좋고 사람의 건강에도 좋다. 텃밭의 힘은 출입구 안에 머물지 않는다. 땅 한 조각과 관계를 맺으면 그 자체가 씨앗이 된다. (189쪽)

-식물은 숨 쉬는 모든 존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한다. 식물은 보편 언어로 가르친다. 그 언어는 '식량'이다. (191쪽)

-일부 원주민 언어에서는 식물을 가리키는 단어가 '우리를 보살피는 이들'로 번역된다.식물은 적응adapt하고 사람은 적용adopt한다. (336쪽)

-언어가 죽으면 사라지는 것은 말만이 아니다. 언어는 다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 깃드는 장소이며 세상을 바라보는 프리즘이다. (379쪽)

-식물은 땅의 문화와 소유권 변화를 반영한다. (383쪽)

-향모가 어머니 대지님에게서 자란 최초의 식물이며 그래서 우리는 향모가 어머니의 머리카락인 양 우리의 사랑을 나타내려고 향모를 땋는다는 사실을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들은 조각난 문화적 지형을 통과하여 내게 오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이야기는 칼라일에서 도둑맞았다. (386쪽)

-어쩌면 우리 모두가 사유 재산의 강박 때문에 외로운 구석으로 추방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름답고 세상에 하나뿐인 삶을 더 많은 돈을 버는 데, 일시적인 위안은 되지만 결코 만족을 주지 못하는 물건을 더 많이 사들이는 데 쓰면서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추방까지도 달게 받아들였다. 그것이 윈디고의 방식이다. 우리가 속여 소유가 우리의 허기를 채워줄 거라 믿도록 하는 것. 우리가 정작 갈망하는 것은 속함인데. (450쪽)

-사람들은 집단적 피해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 모르지 않는다. 채굴 경제의 대가를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만두지 않는다. 그들은 낙담하고 침묵한다. 얼마나 침묵하느냐면, 그들이 먹고 숨 쉬고 자녀들을 위한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해주는 환경을 보호하는 일은 최대 관심사 열 가지에 들지도 못한다. (479쪽)

-식물은 최초의 복원생태학자다. 그들은 자신의 선물을 이용하여 땅을 치유하고 우리에게 길을 보여준다. (485쪽)

-나는 과학의 '드러냄'에 뿌리 내리고 토박이 세계관에 기반한 이야기의 렌즈를 길잡이로 삼는 세상을 꿈꾼다. 물질과 영혼에 고루 목소리를 부여하는 이야기 말이다. (504쪽)

-무지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섣불리 결론을 내리게 한다. (518쪽)

로빈은 식물생태학자면서 작가다. 단순히 생태만을 이야기했다면 아주 지루했을 이 이야기들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 작가 덕에 살아났다. 찬장을 열고 '6월을 담아 포동포동해진 그대 베리, 이젠 나의 2월 식료품 저장고에 들어있군요. 그리고 카리브해 고향을 멀리 떠나온 그대 설탕, 여기까지 와줘서 고마워요.(229쪽)' 라고 말하는 그녀는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녀의 학생으로 캠프에 참가해 숲속에서 며칠씩 지내며 관찰하고 배우고, 자연에서 먹을 거리와 잠자리를 얻는 귀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정복자들에 의해 빼앗겼던 토박이 말, 서툴지만 조금씩 잃었던 그 말을 배우고,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방식을 답습하며 문화 부흥 운동을 하고 있는 그들이 하는 말을 우리도 들어야 한다. 그것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일지도 모르니까.

-대지가 우리에게 내어준 모든 것에 감사하면 우리를 따라다니는 윈디고에 맞설 용기가 생긴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지를 파괴하여 탐욕스러운 자들의 주머니를 불리는 경제에 참여하기를 거부할 용기, 생명에 반하는 게 아니라 생명과 한편이 되는 경제를 요구할 용기가 생긴다. 하지만 글로 쓰기는 쉬워도 실천하기는 힘들다. (551쪽)

그리고 정말 마음에 들었던 이것도.

받드는 거둠의 지침

자신을 보살피는 이들의 방식을 알라.

그러면 그들을 보살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소개하라.

생명을 청하러 온 사람으로서 책임을 다하라.

취하기 전에 허락을 구하라. 대답을 받아들이라.

결코 처음 것을 취하지 말라. 결코 마지막 것을 취하지 말라.

필요한 것만 취하라. 주어진 것만 취하라.

결코 절반 이상 취하지 말라. 남들을 위해 일부를 남겨두라.

피해가 최소화되도록 수확하라.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용하라.

취한 것을 결코 허비하지 말라. 나누라. 받은 것에 감사하라.

자신이 취한 것의 대가를 선물을 주라.

자신을 떠받치는 이들을 떠받치라.

그러면 대지가 영원하리라.

(2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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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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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인생의 역사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 지은이 : 신형철

◎ 펴낸곳 : 난다

◎ 2022년 10월 31일, 초판 1쇄, 326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평론하는 글이라면 고개를 외로 꼬고 질색하는 표정을 짓는 게 보통의 경우일 텐데도 그의 글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사유가 살아 있으면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문장들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시나 소설을 써도 엄청난 작품이 될 것 같은 그의 글을, 이가 다 닳아 없어지고 잇몸만 남은 사람처럼 조금씩 침으로 녹여 오래도록 우물거렸다.

그는 시화詩話 라고 명명한 이 책에서 「공무도하가」, 「욥기」, 에밀리 디킨슨의 시 두 편, 에이드리언 리치 「강간」, 최승자 「20년 후에, 지에게」, 윌리엄 셰익스피어 「소네트 73」,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 비가」, 이영광 「사랑의 발명」, 나희덕 「허공 한줌」, 메리 올리버 「기러기」, 김시습 「나는 누구인가」, W. H. 오든 「장례식블루스」, 황동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윌리스 스티븐스 「아이스크림의 황제」, 한강 「서시」,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 두 편,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 황지우 「나는 너다 44」, 밥 딜런 「시대는 변하고 있다」, 신동엽 「산문시 1」, 레이먼드 카버 「발사체」, 김수영 「봄밤」, 필립 라킨 「나날들」,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등의 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2016년 한겨레에 '신형철의 격주시화'에 연재되었던 것들과 연관된 글 몇 개, 새로 쓴 프롤로그, 고쳐 쓴 에필로그를 더해 만들어졌다. '인생은 불쌍한 것이지만 그래서 고귀한 것이라고 (못) 말하는 아주 작은 사람, 그런 그가 기루어서 나는 이 책을 엮는다.' (9쪽) 막 태어나 '기룬'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아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등장하는 그 말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에서 이름을 차용한 아들 때문에 이 책을 엮게 되었다는 이 부분이 정겹다.

김연수의 소설집이 아니었더라면 스쳐지났을 이름 ' 메리 올리버'를 여기에서 다시 만나니 반갑고, 레이먼드 카버가 시도 썼구나 (이런 무식한!) 하고 놀라고, 여태까지 내 나름으로 시를 해석하며 읽었다 생각했건만 어쩌면 이렇게도 다 어려운지 그의 설명이 없었더라면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시는 내가 즐겨 보는, 혹은 좋아하는 것들은 아니어서 내 곤궁한 취향에 대해 낙담하였으나 말할 거리, 생각할 거리들을 찾자면 이렇게 시대를 담은 시들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것으로 내 취향의 정당성을 다시 취득했다고 혼자 또 기뻐했다. 쯧쯧. 어쨌든 그가 조곤조곤 풀어주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내 취향이 아닌 것들도 갑자기 친근하게 여겨지니 이런 것이 신형철의 힘이다.

책 속에 낑겨 도착한 엽서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그 대답이 아주 길다. 이렇게 많으니 얼마나 좋을까, 그는. ^^

- 그러니까 인생은 이해할 수 없어서 불쌍한 것이다. 문제를 푸는 사람 자신이 문제의 구성 성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 수가 없는데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풀어야 하니까 더 불쌍한 것이다.

(6쪽)

-'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예술이다. 시는 행과 연으로 이루어진다. 걸어갈 행, 이어질 연. 글자들이 옆으로 걸아가면서 아래로 쌓여가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할 게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 걸어가면서 쌓여가는 건 인생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생도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니까. (7쪽)

-셰익스피어에게서 브레히트로 이어지는 이 사랑의 태도에 나는 '조심'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조'는 '손으로 나무 위에 있는 새를 잡는' 모양을 따른 글자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거기에 '심'을 더한 '조심'의 뜻은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이 될 것이다. (25쪽)

-천사가 껴안으면 바스러질 뿐인 우리 불완전한 인간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자세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누구도 상대방에게 신이 될 수 없다. 그저 신의 빈자리가 될 수 있을 뿐.(90쪽)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다시는 그때의 나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131쪽)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가능한 일은, '평상시에' 누군가의 사랑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보다 덜 고귀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유사시에' 돈도 힘도 없는 이들의 사랑이 돈 많고 힘있는 이들의 사랑을 지키는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게속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그러니까 평화를 함께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 이런 것도 애국이라면, 애국자가 될 용의가 있다.

(168쪽)

신형철, 만세!

-이젠 좀 알겠다 싶으면 당신은 아직 모르는 것이고, 어쩐지 점점 더 모르겠다 싶으면 당신은 좀 알게 된 것이다. (172쪽)

-읽으면 비참해지지만 안 읽으면 비천해진다. (208쪽)

작가가 스스로 윤상의 덕후라 밝히며 그의 음악에서 경탄하며 발견하는 것들이라고 했던, 글쓰기의 준칙이 있다. 가치 있는 인식을 생산할 것,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공학적으로 배치하여 모든 문장이 제자리에 놓이

도록 만들 것을 스스로 정했다는데 이런 기준에 맞춰 썼기 때문에 그의 글들이 빛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도. '인생이라는 불에 대해 문학은 맞불이라는 것. 그렇구나. 나를 태우는 불을 끄기 위해 나는 타오르는 책들을 뒤적이는 사람이 된 것이다. '(211쪽)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 『나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나'란 나눌 수 없는 '개인'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 즉 '분인'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러 사람을 언제나 똑같은 '나'로서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누군가와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다보면 그 앞에서만 작동하는 나의 어떤 패턴(즉, 분인)이 생긴다는 것. '나'란 바로 그런 분인들의 집합이라는 것. (131쪽)

이 부분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어쩌면 이렇게 정확하게 콕 찝을 수가 있지? 부끄럽게도 생각하는 걸 멈춘지 오래인 나는 매번 감탄만 한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작품은 『달』밖에 읽은 게 없는데 이 책도 봐야겠다. (이래서 자꾸만 장바구니가 무거워진다.)

언어에 대한 환멸이 심해질 때마다 약을 구하듯 되돌아가는 책들이 몇 권 있다.

최근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손재준 선생이 옮긴 릴케 시선집 『두이노의 비가』다.

숨도 안 쉬어졌다. 나는 과연 이런 책이 있던가? 아니, 언어에 대해 환멸을 느껴본 적이라도 있었나? 내가 느낀 환멸은 그저 작품에 대한 것이라고, 장르에 대한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바로 언어에 대한 환멸이었나? 피로해진 눈을 숲에게서 치료를 받듯, 영혼을 치료하는 글들을 말하는 것이려나.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생각하고 찾아보는 수밖에.

-다행이지 않은가. 인생은 다시 살 수 없지만, 책은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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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미래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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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이토록 평범한 미래

◎ 지은이 : 김연수

◎ 펴낸곳 : 문학동네

◎ 수록작품 : <이토록 평범한 미래>, <난주의 바다 앞에서>, <진주의 결말>,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엄마 없는 아이들>,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사랑의 단상 2014>,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등 8편

◎ 2022년 11월 11일, 1판 4쇄, 273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1. 시간을 이해하는 힘이 김연수에게는 있는 것 같다.

2. '리하쿠'라는 사케를 마셔야겠다.

3. 메리 올리버의 시를 찾아서 읽어보자.

딱 이렇게 세 문장만 남기자. 그리고, 내가 빨간 꼬리표를 달아준 얘네들도.

-마찬가지로 언어는 현실에서 비롯되지만 현실이 아니며, 결국에는 현실을 가린다.' 정말 행복하구나'하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불안이 시작되는 경험을 한 번쯤 해봤으리라. 행복해서 행복하다고 말했는데 왜 불안해지는가? '행복'이라는 말이 실제 행복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대신한 언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19쪽>

-그게 아니라 결심만 해도 좋아요. 아무런 이유 없이 오늘부터 클래식 음악을 사랑하기로 결심한다거나. 아주 사소할지라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겠다고 결심하기만 하면 눈앞의 풍경이 바뀔 거예요.

<이토록 평범한 미래 , 27쪽>

-용서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기억할 때 가능해집니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 30쪽>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이토록 평범한 미래, 34쪽>

-정미가 죽은 뒤로 마음의 가장자리는 매 순간 조금씩 시간에 쓸려 과거로 떨어지고 있었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103쪽 >

-그무렵 정미는 언젠가 세상이 모든 것은 이야기로 바뀔 것이고, 그때가 되면 서로 이해하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게 되리라고 믿는 이야기 중독자였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115쪽>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가 도움이 돼. 비관적이지 않으면 굳이 그걸 이야기로 남길 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 우리가 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어.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121쪽>

-지구상에 존재했던 다른 모든 생명들에게 그랬듯 그들의 인생에도 시간의 폭풍이 불어닥쳤고, 그렇게 그들은 겹겹이 쌓인 깊은 시간의 지층 속으로 파묻히고 있었다. <바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 127쪽>

-마음은 언제나 늦되기 때문에 유죄다. <사랑의 단상 2014, 196쪽>

-평생 삼천 명의 이름을 접한다고 해도 그중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단 한 명뿐이라고, 그 단 한 사람이 없어서 사람의 삶은 외로운 것이라고. <사랑의 단상 2014, 207쪽>

-모든 것을 직접 체험하면서 이 우주를 인식하기에는 육신의 삶이 너무나 짧기 때문에 인간은 말과 글을 통해 서로 협조함으로써 자신을 완성해나갈 시간을 단축해야만 한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222쪽>

-고립은 자신에 대한 애착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타인을 멸시하기에 비극을 초래한다. 하지만 고독은 우리 자신으로부터도 이탈하는 것이다. 이 이탈을 통해 각 존재는 공통의 시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231쪽>

-인간의 인식을 안으로 되돌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게 하는 거울은 뭐냐? 그걸 알려면 자신이 인식한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려야만 해. 각자가 보는 세계가 바로 자신의 존재를 비춰주는 거울이니까. 존재의 크기는 그가 인식하는 세계의 크기와 같아.

<다시, 2100년의 바르바라에게, 235쪽>

'어두운 시간'이 '빛으로 가득 찬 이 몸'을 만든다. 지금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도 이런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들은 언젠가 우리의 삶이 될 것이다.

(273쪽) 작가의 말 중에서.

디스크로 고통을 호소하는 뼈들의 아우성을 몰라라 하면서 늦은 밤까지 한 편 한 편을 기쁘게, 그리고 마지막 한 편의 긴 시 같은 '작가의 말'까지 흡족한 마음으로 읽었다. 그 보답으로 밤새 두통에 시달려야 했지만 '가을이 되면 가을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싶다'는 그의 바람이 나에게 와, 은은한 먹향으로 번진 게 아까워서 진통제를 삼킬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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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록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 철학자 황제가 전쟁터에서 자신에게 쓴 일기 현대지성 클래식 18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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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명상록

◎ 지은이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옮긴이 : 박문재

◎ 펴낸곳 : 현대지성

◎ 2022년 10월 1일, 1판 10쇄, 270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때때로 책이 내게 오는 과정을 보고 있자면 인연이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언젠가 한 번은 읽어야지, 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을 뿐 열성적인 시도를 하지 않은 책이라 더 그렇다. '초서' 모임이 아니었다면 절대 안 읽었을 책.

'철학자 황제가 전쟁터에서 자신에게 쓴 일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을 왜 사람들은 그리도 열심히 읽는 걸까? 쓴 이가 유명한 황제라서? 이걸 읽으면 혹시라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이름을 남길 수 있을 거라는 환상으로? 어쩌면, 나도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이걸 읽을 결심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를 유혹한 결정적 조각은 영화 <글라디에이터>였다. 그가 총애했던 장군 막시무스와 폭군이 된 아들 코모두스의 이름까지도.

- 로마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자신의 생애

말기에 외적들의 침공을 제압하기 위해서 제국의 북부

전선이었던 도나우 지역으로 원정을 간 10여년에 걸친

기간 동안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철학일기다.

-일차적인 목적은 마르쿠스가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의 생각

들을 살펴보고,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최선의

삶인지를 자기 자신에게 충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해제> 중에서. 9쪽, 13쪽

- 가장 오래 산 사람이나 가장 짧게 산 사람이나 잃는 것은 똑같다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가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은 빼앗길 수 없고, 모든 사람은 다 똑같이 현재라는 순간만을 소유하고 있어서, 그가 누구든 오직 현재라는 순간만을 잃을 뿐이기 때문이다. (제2권 14장, 51쪽)

- 늘 쾌활함을 잃지 말고, 외부의 도움 없이 네 자신의 힘으로 해 나가며, 다른 사람이 주는 편안함을 물리치고 스스로 서라. 네가 스스로 바르게 서야 하고, 남의 도움을 받아 서거나, 남이 너를 바르게 세우게 해서는 안 된다. (제3권 5장, 59쪽)

- 지구 전체가 한 점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우리가 이 땅에 머물며 차지하고 살다가 가는 이 좁디 좁은 공간은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제4권 3장, 69쪽)

- 판단을 하지 말라. 그러면 네가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이 사라질 것이다. 그런 생각이 사라지면, 피해도 사라질 것이다. (제4권 7장, 71쪽)

- 누가 너에게 강요하는 대로, 또는 누가 네게 원하는 대로 어떤 것을 보지 말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 (제4권 11장, 72쪽)

- 그림의 이쪽 면을 보았느냐. 이제는 저쪽 면을 보라. 고민하지 말고 단순해져라. (제4권 26장, 77쪽)

- 시간은 모든 생성되는 것들의 강, 아니 급류다. 어떤 것이 눈에 보이자마자 이내 떠내려가 버리고, 또다른 것이 떠내려 오면, 그것도 이내 떠내려가 버린다. (제4권 43장, 83쪽)

- 날이 밝았는데도 잠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을 때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라: "나는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다. " (제5권 1장, 88쪽)

- 나라는 존재는 "원인"으로 작용한 것들과 "질료"로 사용된 것들로 이루어져 있고, 이것들 중 그 어떤 것도 무(無)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듯이, 무로 사라지지도 않는다. (제5권 13장, 97쪽)

- 진정한 행운은 네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진정한 행운은 혼의 선한 성향, 선한 충동들, 선한 행동들에 있기 때문이다. (제5권 36장, 107쪽)

- 네가 네게 맡겨진 의무를 행할 때에는 춥든지 덥든지, 졸리든지 푹 잤든지, 욕을 먹든지 칭송을 받든지, 죽어가든지, 또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상황이 닥쳐도 개의치 말고 행하라. 죽는 것도 인생의 일부이기 때문에, 죽음을 눈앞에 두었더라도 네게 맡겨진 일을 잘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제6권 2장, 108쪽)

- 인생에서 육신은 아직 굴복하지 않는데 정신이 먼저 굴복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제6권 29장, 117쪽)

-잠시 후면 너는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이고, 잠시 후면 모든 것이 너를 잊게 될 것이다.

(제7권 21장, 135쪽)

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생각날 때마다 써둔 것이므로 일기 같은 형식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복되는 부분들이 상당히 많은데 기본적으로는 윤리적인 삶을 살려고 상당히 노력하고 있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있는 동안 좋은 통치자가 되고 대중을 위한 선을 실천하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에게 거는 주문같은 것으로 느껴졌는데 약해지려고 할 때마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수단으로 쓴 글이 아닌가 싶다.

노년에 이르러서도 끝까지 이렇게 자신을 몰아세우다시피하며 백성들을 돌봤기에 5현제 중 하나로 칭송받는 것일 테지만 나는 왠지 그가 좀 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믿는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것이니 그는 괜찮았겠지만 모든 욕망들을 물리치려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 싶어서.

영화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책을 한 달 가까이 천천히 읽어가면서 느낀 것은 딱 두 가지. 첫 번째, 이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 삶을 조율하고자 노력했구나. 두 번째, 한 번 읽어볼 가치는 있어도 빌 클린턴처럼 1년에 두 번씩 읽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통치자로서 뭔가를 얻고자 한다면 이것 말고 차라리 『도덕경』이나 『논어』를 읽는 편이 얻는 게 훨씬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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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에서
이승우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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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이국에서

◎ 지은이 : 이승우

◎ 펴낸곳 : 은행나무

◎ 2022년 9월 29일 1판 1쇄, 355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새 책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저 반가운 작가 중 한 명이 바로 이승우다. 서점에서 눈으로, 손으로 만나야 반가움이 솟아나는 걸 제대로 느낄 텐데 요즘은 서점 나들이를 통 하지 않으니 아쉬운 대로 화면에서 눈으로만 아는 척을 하고 소근거리는 게 끝이다. '오랜만이에요.'

표지에 잔뜩 웅크리고 서 있는 저 시커먼 형체들은 눈을 감은 채 감시하고 있는 괴물들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람들을 가둬둔 높은 벽처럼 보이기도 하며, 책속에 등장하는 체리나무 같기도 하다. 그리고 양복 차림의 두 남자, 그들을 둘러싼 안개와 같은 형상은 왠지 모르게 밀림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사실 표지에 깊은 관심을 갖는 편은 아닌데 <이국에서>라는 제목이 <이승에서>로 읽혀 한참을 본 결과다.

'보보는 그가 살아온 인구 300만의 광역시보다 면적이 세 배쯤 크고 인구는 두 배쯤 적은 도시국가다. 공식명칭은 보보민주공화국. 유럽 대륙의 여러 큰 나라들이 이 땅을 오랫동안 지배해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립국이 되었지만 그 후로도 내전이 끊이지 않았고 최근까지 쿠데타를 통한 권력 주체의 변동이 일어나는 등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나라이다.' (8쪽) 이런 나라에서 최소한 6개월, 시장의 계산대로라면 5개월 19일 이상 살아야 하는 황선호가 주인공이다.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시장의 뇌물 스캔들이 불거지자 책임자의 완벽한 실종이라는 시나리오 아래 담당자 한 명이 모든 비리와 부정을 뒤집어 쓰고 관련 파일, 비밀, 진실을 안은 채 선거에서 승리할 때까지 잠적하기로 했고 가족이 아무도 없고, 시장의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발탁된 이가 바로 황선호다.

그가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서였지만 실제로 그는 '그 사람' (엄마가 언급한 적은 없으나 그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이)가 마지막으로 머문 공간으로 추측되는 곳이라서 고른 것이다. 자전거로 세계일주를 하겠다며 간 사람이 왜 거기에서 연락이 끊긴 것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할 일이 없는 그는 처음에는 자신이 잊혀졌고 비리의 주체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술독에 빠졌고 '계획을 세우지 않은 사람은 계획에 없는 일을 하며 산다.' (46쪽)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이 언급했던 '친구들의 집'을 찾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기로 한다. 하지만 보보의 권력을 잡은 군부세력은 외부인을 전부 몰아내려고 혈안이었고 황선호 역시 그 나라를 떠나야만 하는 지경에 이른다.

'외부인'은 그런 외지인들에게 이들이 새롭게 붙인 이름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을 뜻하는 외지인이나 외국인이라는 단어가 있는데도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사람, 소속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으려는 의도입니다. '외부인'은, 그들에게 꼬리표를 붙여 자기들과 구별하기 원하는 이들에 의해 규정된 이름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은 손님이니까, 손님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외부인, 소속이 없는, 바깥에 있는 사람은 존중과 배려의 대상에서 배제해도 되는 사람, 경계해야 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311쪽)

어디에나 친구는 있는 법이다. 오래 전 그와 닮은 사람을 만났다는 펍의 주인 필의 도움으로 '친구들의 집' 과 관련된 쟝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그 남자 김경호의 행적을 알게 된다. 그 남자 김경호가 묻힌 보보체리 나무의 열매, 체리를 입에 넣는 순간 '그 향기에 휩싸인 말들이 혈관을 타고 그의 몸속 구석구석을 유영했다. 확성기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크고 웅웅거리고 찌릿했다. 네가 원하는 일을 해라. 남이 원하는 일이 아니라. ……. 황선호는 그 순간 새로 태어난 것처럼 느꼈다. '(305쪽) 이 부분은 마치 성당에서 하는 영성체를 떠올리게 했다. 김경호의 피와 살을 아들인 선호가 먹는 신성한 느낌이었다.

황선호가 급박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는 답조차 하지 않았던 이들이 선거가 끝나자 그를 찾아온다. 그가 돌아와 해명을 하고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 재선에 성공한 시장을 도와주기를 바라면서. 뻔뻔함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처음에는 '때때로 믿음은 우매함과 구분되지 않는다. 혹은 믿음이 분별의 눈을 가려 우매함에 .' (31쪽) 빠졌던 그였지만 이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기에 남겠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세계는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자국 이기주의를 선동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불량배 같은 인물들이 지도자가 되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잘 살아야 되고, 자기들이 잘 살기만 하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부끄러운 주장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공공연하게 합니다. 이 나라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보보의 권력을 손안에 넣은 집단도 수준 미달이고 파렴치합니다.' (309쪽)

나라와 나라 사이의 이동이 제한되어 있던

그 시간 동안 나는 내부인의 외부와 외부인의 내부

사이를 자주 오갔다.

어디에나 있는 다른 나라, 그리고 한 사람 안의 외부인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작가의 말 중에서. 354쪽

뉴스 보기가 싫은 시기다. 봐야 하지만 보기 싫어서 애써 채널을 돌리거나 아예 텔레비전을 켜지 않고, 라디오를 들어도 음악만 찾아다니는 형국이다. 그럴 때였는데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도망치듯 다른 나라로 간 이야기를 내가 읽는구나 싶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그저 지나가는 자막에 불과했다. 이것은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행이고, 자신을 찾는 여행이며,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고, 아무런 조건 없이 서로 나누며 사는 삶이 가치있다는 것을,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야 되지 않겠느냐는 열띤 웅변이었다.

왜 하필 이국이라 했을까. 타국이나 이국은 같은 개념이지만 타국이라 하면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이 아닌 다른 나라는 맞지만 어렴풋하게나마 내가 알고 있는 나라, 이국은 신비로움을 기본 골격으로 얹은 채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다른 나라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것은 황선호가 나중에 '친구들의 집'에서 떠나 돌아가길 거부하는 데서도 연결이 된다. 작가가 말했듯이 어디에나 있는 다른 나라. 보보라는 디스토피아 속 유토피아가 바로 '친구들의 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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