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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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인생의 역사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 지은이 : 신형철

◎ 펴낸곳 : 난다

◎ 2022년 10월 31일, 초판 1쇄, 326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평론하는 글이라면 고개를 외로 꼬고 질색하는 표정을 짓는 게 보통의 경우일 텐데도 그의 글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가 뭘까? 아마도 사유가 살아 있으면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문장들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시나 소설을 써도 엄청난 작품이 될 것 같은 그의 글을, 이가 다 닳아 없어지고 잇몸만 남은 사람처럼 조금씩 침으로 녹여 오래도록 우물거렸다.

그는 시화詩話 라고 명명한 이 책에서 「공무도하가」, 「욥기」, 에밀리 디킨슨의 시 두 편, 에이드리언 리치 「강간」, 최승자 「20년 후에, 지에게」, 윌리엄 셰익스피어 「소네트 73」, 라이너 마리아 릴케 「두이노 비가」, 이영광 「사랑의 발명」, 나희덕 「허공 한줌」, 메리 올리버 「기러기」, 김시습 「나는 누구인가」, W. H. 오든 「장례식블루스」, 황동규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 윌리스 스티븐스 「아이스크림의 황제」, 한강 「서시」, 고대 그리스의 서정시 두 편, 윤동주 「사랑스런 추억」, 황지우 「나는 너다 44」, 밥 딜런 「시대는 변하고 있다」, 신동엽 「산문시 1」, 레이먼드 카버 「발사체」, 김수영 「봄밤」, 필립 라킨 「나날들」, 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등의 시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2016년 한겨레에 '신형철의 격주시화'에 연재되었던 것들과 연관된 글 몇 개, 새로 쓴 프롤로그, 고쳐 쓴 에필로그를 더해 만들어졌다. '인생은 불쌍한 것이지만 그래서 고귀한 것이라고 (못) 말하는 아주 작은 사람, 그런 그가 기루어서 나는 이 책을 엮는다.' (9쪽) 막 태어나 '기룬'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아들, 한용운의 '님의 침묵'에 등장하는 그 말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에서 이름을 차용한 아들 때문에 이 책을 엮게 되었다는 이 부분이 정겹다.

김연수의 소설집이 아니었더라면 스쳐지났을 이름 ' 메리 올리버'를 여기에서 다시 만나니 반갑고, 레이먼드 카버가 시도 썼구나 (이런 무식한!) 하고 놀라고, 여태까지 내 나름으로 시를 해석하며 읽었다 생각했건만 어쩌면 이렇게도 다 어려운지 그의 설명이 없었더라면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시는 내가 즐겨 보는, 혹은 좋아하는 것들은 아니어서 내 곤궁한 취향에 대해 낙담하였으나 말할 거리, 생각할 거리들을 찾자면 이렇게 시대를 담은 시들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것으로 내 취향의 정당성을 다시 취득했다고 혼자 또 기뻐했다. 쯧쯧. 어쨌든 그가 조곤조곤 풀어주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내 취향이 아닌 것들도 갑자기 친근하게 여겨지니 이런 것이 신형철의 힘이다.

책 속에 낑겨 도착한 엽서에는 이렇게 써있었다.


 



그 대답이 아주 길다. 이렇게 많으니 얼마나 좋을까, 그는. ^^

- 그러니까 인생은 이해할 수 없어서 불쌍한 것이다. 문제를 푸는 사람 자신이 문제의 구성 성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풀 수가 없는데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풀어야 하니까 더 불쌍한 것이다.

(6쪽)

-'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예술이다. 시는 행과 연으로 이루어진다. 걸어갈 행, 이어질 연. 글자들이 옆으로 걸아가면서 아래로 쌓여가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할 게 있겠는가. 그런데 나는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 걸어가면서 쌓여가는 건 인생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생도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니까. (7쪽)

-셰익스피어에게서 브레히트로 이어지는 이 사랑의 태도에 나는 '조심'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조'는 '손으로 나무 위에 있는 새를 잡는' 모양을 따른 글자라고 나온다. 그렇다면 거기에 '심'을 더한 '조심'의 뜻은 '손으로 새를 쥐는 마음'이 될 것이다. (25쪽)

-천사가 껴안으면 바스러질 뿐인 우리 불완전한 인간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자세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누구도 상대방에게 신이 될 수 없다. 그저 신의 빈자리가 될 수 있을 뿐.(90쪽)

-다시는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다시는 그때의 나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131쪽)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가능한 일은, '평상시에' 누군가의 사랑이 다른 누군가의 사랑보다 덜 고귀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유사시에' 돈도 힘도 없는 이들의 사랑이 돈 많고 힘있는 이들의 사랑을 지키는 희생물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 그리하여 '언제나' 우리 각자가 사랑하는 사람을 게속 사랑할 수 있는 세상을, 그러니까 평화를 함께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 이런 것도 애국이라면, 애국자가 될 용의가 있다.

(168쪽)

신형철, 만세!

-이젠 좀 알겠다 싶으면 당신은 아직 모르는 것이고, 어쩐지 점점 더 모르겠다 싶으면 당신은 좀 알게 된 것이다. (172쪽)

-읽으면 비참해지지만 안 읽으면 비천해진다. (208쪽)

작가가 스스로 윤상의 덕후라 밝히며 그의 음악에서 경탄하며 발견하는 것들이라고 했던, 글쓰기의 준칙이 있다. 가치 있는 인식을 생산할 것, 정확한 문장을 찾을 것, 공학적으로 배치하여 모든 문장이 제자리에 놓이

도록 만들 것을 스스로 정했다는데 이런 기준에 맞춰 썼기 때문에 그의 글들이 빛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도. '인생이라는 불에 대해 문학은 맞불이라는 것. 그렇구나. 나를 태우는 불을 끄기 위해 나는 타오르는 책들을 뒤적이는 사람이 된 것이다. '(211쪽)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 『나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나'란 나눌 수 없는 '개인'이 아니라 여러 개의 나, 즉 '분인'들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러 사람을 언제나 똑같은 '나'로서 만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 누군가와 반복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하다보면 그 앞에서만 작동하는 나의 어떤 패턴(즉, 분인)이 생긴다는 것. '나'란 바로 그런 분인들의 집합이라는 것. (131쪽)

이 부분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어쩌면 이렇게 정확하게 콕 찝을 수가 있지? 부끄럽게도 생각하는 걸 멈춘지 오래인 나는 매번 감탄만 한다. 히라노 게이치로의 작품은 『달』밖에 읽은 게 없는데 이 책도 봐야겠다. (이래서 자꾸만 장바구니가 무거워진다.)

언어에 대한 환멸이 심해질 때마다 약을 구하듯 되돌아가는 책들이 몇 권 있다.

최근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손재준 선생이 옮긴 릴케 시선집 『두이노의 비가』다.

숨도 안 쉬어졌다. 나는 과연 이런 책이 있던가? 아니, 언어에 대해 환멸을 느껴본 적이라도 있었나? 내가 느낀 환멸은 그저 작품에 대한 것이라고, 장르에 대한 것이라고 여겼는데 그게 바로 언어에 대한 환멸이었나? 피로해진 눈을 숲에게서 치료를 받듯, 영혼을 치료하는 글들을 말하는 것이려나.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생각하고 찾아보는 수밖에.

-다행이지 않은가. 인생은 다시 살 수 없지만, 책은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것은. (2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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