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8 - 2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8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제목 : 토지 8 (2부 4권)

◎ 지은이 : 박경리

◎ 펴낸곳 : 나남

◎ 2008년 1월 3일 16쇄, 392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팍팍한 삶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다들 멍하니, 기계적으로 숨을 쉬고 먹을 것을 목구멍으로 밀어넣으며 신체가 가진 리듬에 따라 자고 싸고 반복적인 시간을 보낼 뿐. 그 사이에 월선은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단다. 애가 탄 홍이가 아비를 찾아 집에 편지도 보내고 아비가 일하는 산판에까지 달려갔으나 용이는 끝내 일을 마치고야 왔다. 가엾은 인연, 이토록 슬픈 인연이 있을까? 그 와중에 임이네는 월선이가 홍이 앞으로 남긴 돈을 가로채려다 용이에게 된통 얻어맞았다. 얼마나 고소한지. 진즉에 그리 할 일이지!



서희는 공노인을 내세워 조준구가 빼앗았던 재산을 하나씩 차근차근 자기 것으로 만든다. 조준구의 탐욕이 불러온 결말이라 하겠다. 길상을 빼닮은 환국, 서희의 성정을 닮은 윤국 두 아들을 거느리고 서희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길상은 동행하기를 거부하고 그들을 찾아왔던 환이를 따라 독립군 무리에 섞여든다.

-아 그러시, 왜놈 점방도 좀 생깄소? 말끔하니 조촐하니, 그러니께 조선사람들 가게는 돼지우리 겉은 꼴이 되고 객줏집도 마찬가진 기라요. 왜놈들이 모갯돈을 가지고 와서 물건을 싸악 거둬가고 질퍽하게 풀어놓으니 장돌뱅이들은 찌들어가고 객주업이 될 기 머요. 아무래도 왜놈 밑에서 종질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사램이 없일 것 같소.(11쪽)

-공노인은 두메며 길상이며 월선이 봉순이 모두 기찬 얘기책 속의 인물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하나의 인생이 모두 기차다.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뜻대로 살아볼려니까 피투성이가 되는 게야. 인간의 인연연같이 무서운 거이 어디 있나.'(58쪽)

-맷돌을 가스메 얹어놨다기보다 아까 자리 속에서 느낀 그것, 끈적끈적하고 물컹물컹한 것, 문어다리가 목과 양쪽 손목에 휘감기어 흡반이 피를 빨아대는 것처럼 죄어드는 느낌.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하얀 버섯 세 개가 푸른 바위 곁에서, 서희의 얼굴이요 환국이와 윤국이의 얼굴이다. (83쪽)

-망해라. 망해라, 최서희! 망해라! 망해! 망해! 망해라. 그러면 넌 내 아내가 되고 나는 환국이 윤국이 애비가 된다. 그리고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 망해? 어떻게 망하느냐 말이다! 비적단이 몰려와도 최서희는 안 망한다. 고향에는 옛날같이, 옛날과 다름없는 엄청난 땅이 최서희를 기다리고 있어!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85쪽)

-혼자 타인들에게 둘러싸였던 지난 날에도 이렇게 외로움을 느끼진 않았다. 느낄 겨를이 없을 만큼 숨가쁜 도약이 있었을 뿐이다. 싸움과 싸움의 연속이었다. 승리의 언덕은 외로운 자리였는지 모른다. 서희의 승리를 축복해주고 기뻐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정상에 오르기까지 외로운 싸움이었다고는 하지만 동행자는 있지 아니하였던가. 그 동행자들이 지금 서희의 승리를 외면한다. 아니 쓰디쓰게 바라본다. 공노인조차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295쪽)

서희가 망해서 자신을 의지하기를, 그래서 고향에 돌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길상이와 다시 고향에 돌아가 빼앗긴 모든 것을 되찾기를 열망하는 서희는 처음부터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던 지도 모르겠다.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평행선. 서희와 함께 평사리로 돌아간 사람들이 부디 행복했으면 좋으련만 아직도 그들에게 시련이 남아 있을 게 뻔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뻐근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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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7 - 2부 3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7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제목 : 토지 7 (2부 3권)

◎ 지은이 : 박경리

◎ 펴낸곳 : 나남

◎ 2008년 1월 3일 16쇄, 379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최서희와 길상이 마침내 부부가 되니 하인이 주인 아씨와 결혼했다는 생각에 보는 이들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어색하기로는 길상도 마찬가지다.

'길상은 고독했다. 고독한 부부, 고독한 결혼이었다. 한 사나이로서의 자유는 날갯죽지가 부러졌다. 사랑하면서, 살을 저미듯 짙은 애정이면서, 그 누구에게도 주고 싶지 않았던 애기씨, 최서희가 지금 길상에게는 쓸쓸한 아내다. 피차가 다 쓸쓸하고 공허한가. 역설이며 이율배반이다. 인간이란 습관을 뛰어넘기 어려운 동물인지 모른다. 그 콧대 센 최서희는 어느 부인네 이상으로 공손했고, 지순하기만 하던 길상은 다분히 거칠어졌는데 그래도 서로 사이에 폭은 남아 있는 것이다.' (121쪽)

서희의 마음은 잘 모르겠다. 싫진 않으니 길상과 혼인을 한 거겠지만 '나는 지키는 게야. 최서희의 권위를. 최 참판 가문의 권위를 지키는 게 아니라 되찾는 게야. 영광도 재물도.--나는 그 종을 최서희의 머리칼 하나 안 다치고 최서희 윗자리에 앉힐 테다!' (99쪽) 이렇게 드러낸 마음으로만 보면 길상을 그저 파트너로만 생각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렇지는 않겠지만 봉순이와 맺어졌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마음이 자꾸 올라오는 걸 막을 수가 없다. 기생이 된 봉순이 혜관 스님을 따라 용정촌에서 가서 길상과 서희를 마주할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풍전등화같은 목숨, 하루살이 같은 인생의 이들.연해주를, 만주 땅을 유랑하는 백성들이 품팔이 일군뿐일까마는 독립지사든 장사꾼이든 혹은 서희 같은 자산가, 심지어 김두수 등속의 앞잡이까지 풍전등화의 목숨이며 하루살이 같은 인생임엔 대동소이한 것, 남의 땅 위에 뿌리박기도 어렵거니와 뿌리가 내린들 튼튼할 까닭이 없다. (159쪽)

-돼지겉이 살든 쇠겉이 살든 고향 돌아갈 희망만 있이믄. (223쪽)

-민족주의자 조오치요, 독립투사 얼마나 훌륭합니까? 그 훌륭한 양반들이 나라 잃고 이곳 타국에 와서 개척민들, 일찍이 버림받았었던 그네들을 언덕삼아 비비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으나 그래 그네들에게 호령하고 지도할 푼수가 되나요? 애국애족이면 단가요? 국토회복이면 단가요? 염치없는 짓 아니고 뭡니까? 그들에겐 피땀 흘려 일쿠은 땅보다 버림받았던, 은덕이라곤 받은 일이 없는 조국이란 게 더 소중할 리 없지 않습니까? 제가 무슨 얘길 하는고 하니 그네들에게 주도권을 주라 그 얘깁니다. 그래야만 수십만 이민들은 한 깃발 밑에 모일 거란 그 말입니다. (314쪽)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도, 용정촌에서 하루하루 목숨을 부지하는 이들도 모두 힘겨운 시간을 이겨내고 있다. 그나마 한 가닥 재미는 공노인을 앞세워 조준구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서희를 보는 일이다.

-밤하늘이 그 수많은 별들의 운행같이 삼라만상이 이치에서 벗어나는 거란 없는 게야. 돌아갈 자리에 돌아가고 돌아올 자리에 돌아오고, 우리가 다만 못 믿는 것은 이르고 더디 오는 그 차이 때문이고 마음이 바쁜 때문이지. 뉘우침말고는 악이란 결코 용서받을 순 없는 게야.(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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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사람의 유머는 못 당하겠다.
프롤로그부터 이렇게 웃기기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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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5 - 2부 1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나남출판) 5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 책제목 : 토지 5, 6 (2부 1, 2권)

◎ 지은이 : 박경리

◎ 펴낸곳 : 나남

◎ 2008년 1월 3일 16쇄, 403쪽( 5권), 386쪽(6권)

◎ 내 마음대로 별점 : ★★★★★

숙취로(또!!!) 인해 우리끼리 정해놓은 시간 내에 읽지 못했던 5권을 읽으면서 어찌나 흥미진진한지 2주를 기다릴 수가 없어서 결국 6권까지 읽어버렸다.


월선의 삼촌인 공노인의 도움과 길상의 부지런함, 서희의 예리함이 빛을 발해 그녀는 이곳 용정촌에서 거상이 되었다. 맺어질 수 없는 사이건만 이상현을 사모하는 서희와 서희를 좋아하는 상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이상현을 벌 주고자 서희는 그에게 남매가 되어줄 것을, 그리고 길상과의 혼인을 도와달라 청한다. 불탄 용정촌을 복구한뒤 서희는 세를 줄 가게 하나를 월선에게 내주라고 하면서 임이네는 절대 같이 들이지 말라고 명한다. 그리고 용정촌에 일본 끄나풀이 되어 등장하는 거복 (지금은 김두수).

"그래? 왜놈 될 뻔했구나. 될 뻔했다가 안 됐으니 다행이야.

나도 그만 갈보 될 뻔했다가 안 됐더라면 좋았을걸. "

"아니 갈보하고 일본 사람하고 어째서 같소!"

화를 발끈낸다.

"같지. 일부종사 못한 년이 갈보요, 두 나라 섬기는 놈이 역적이니,"

(127쪽)


 



길상이는 마음이 어수선하다. 서희를 생각하는 마음을 용이에게 푸념하듯 털어놓고 있는 길상. '지금 애기씨는 내게 있어 한 마리의 꾀꼬리새끼란 말일까? 나는 애기씨를 위해 누구의 목을 비틀고 있는 게지?' (5권206쪽) 길상이도, 서희도, 상현도, 용이도, 월선이도, 용정촌에 있는 사람들도, 조선 땅에 있는 사람들도 죄다 불쌍하구나.

'서희의 대상으로서 상현은 사모(思慕)와 기혼자(旣婚者), 이 두 상극선상(相剋線上)의 존재며 길상은 야망(野望)과 하인(下人),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상극된 것은 아니다. 야망은 불순물이다. 불순물은 혼합될 수 있는 것이다. 상현과 사이에 질러놓았던 지름목은 길상과 서희 사이에는 제거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드러내려는 서희의 모험을 길상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서희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해주고 싶다던 길상은 그러나 그것만은 용납할 수가 없없다. 서희와의 거리는 절체절명의 것이다. 왜냐? 자존심 따위, 사내로서의 오기 따위 그런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사랑의 순결 때문이다. 순결을 지키고 싶은 때문이다. --(중략)--서희의 보다 깊은 영혼 속에는 숙명적인 길상과의 애정이 잠을 자고 있었다 할 수는 없을까. 무시무시한 내적 투쟁은 과연 야망의 좌절에서만 빚어졌다 할 수 있을까. 강렬한 질투, 강렬한 패배감, 광적인 증오심-.(6권12쪽)

-심장을 쪼갤 수만 있다면 그 가냘픈 작은 벌레에게도 주고, 공작새 같고 연꽃 같은 서희 애기씨에게도 주고, 이 만주 땅 벌판에 누더기같이 찾아온 내 겨레에게도 주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운명신에게 피 흐르는 내 심장의 일부를 주고 싶다.'(6권 20쪽)

서희는 자존심을 누르고 길상이 살림을 내어주고 결혼할 거라는 소문의 주인공 옥이네를 만나 침모로 자신의 집에 가자 청하지만 옥이네는 거절한다. 팽팽한 신경전은 둘이 탄 마차가 사고를 당해 서희가 병원에 눕게 되면서 조금 누그러진다. 그리고 드디어 움직이는 환과 그 주변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자넨 잠자코 있어. 지랄 같은 소리 아니한다 해서 왜년을 데리고 사는 그 누구더라? 이름 한번 유명하지. 이인직, 지금은 경학원 사성 이인직보다 위대할 것 한푼 없다고.'(6권 248쪽)

'몇해 전 일본으로 건너갔던 용운이 무슨 심산으로 왜중의 가취법(嫁聚法)을 들고 나왔느냐'(337쪽)

신소설 <혈의 누>를 쓴 이인직과 <님의 침묵>의 한용운. 이렇게 둘이 다 친일파로 언급되었으나 아는 이름들이 나오니 괜히 반가웠다. 교과서에 박힌 이름들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라고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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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형제의 숲
알렉스 슐만 지음, 송섬별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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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제목 : 세 형제의 숲

◎ 지은이 : 알렉스 슐만

◎ 옮긴이 : 송섬별

◎ 펴낸곳 : 다산책방

◎ 내 맘대로 별점 : ★★★☆

"우리는 여기 있다고요!" 그는 고함을 질렀다.

"저, 닐스 형, 그리고 피에르, 우리가 여기 있잖아요." (262쪽)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아이들이 기본적으로 원하는 것은 언제나 부모의 사랑이다. 이젠 어른이 된 이들의 절규는 끔찍했던 사건을 겪고 안 그래도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던 부모들이 완전히 등을 돌린 후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서글픔이다.

'그들은 서로를 도울 수 없었다. 기억하는 한, 어른이 된 이후로 단 한번도 그럴 수 없었다. 셋 중 누구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며, 심지어 서로의 눈을 똑바로 마주치지도 못했다. (273쪽)' 남과도 같았던 형제는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였다. 대체 그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어머니의 죽음 후후 베냐민은 무작정 바다로 뛰어들었고 그 순간에 어릴 때 셋이서 의지하며 헤엄쳤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형과 피에르를 보며 따뜻하게 웃는다. 그리고 심장이 멎었다. 이렇게 죽음 직전까지 갔던 베냐민은 의사의 권고에 따라 심리치료사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한다. 그러니까 세 형제 중 둘째인 베냐민이 화자인 셈인데 그렇게 나눈 이야기들은 현재와 과거가 마구 뒤섞인 채 널브러져 있어 처음에는 읽기가 꽤나 혼란스럽다.

-이 풍경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되고, 또 끝났다. 그가 두 사람의 싸움에 끼어들 수 없는 것은, 그는 아주 오래전 이곳에 갇혀 버렸고 그 뒤로 꼼짝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 아홉 살이다. 반면 저곳에서 싸우고 있는 두 사람은 줄기차게 살아낸 어른들이다. (31쪽)

미드소마 (스웨덴에서 매년 6월 중순마다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하지 기념 축제)전날 외식하러 나간 가족들. 부모는 술에 취해 낮잠을 자러가면서 강아지 몰리를 돌봐달라고 한다. 숲으로 도망친 개를 찾아간 세 형제는 변전소에 다다랐고 형의 만류에도 블구하고 베냐민은 몰리를 안은 채 눈앞에 튀는 불꽃을 보며 손을 위아래로 움직였다. 감전되고 쓰러진 베냐민. 그리고 죽은 강아지 몰리. 형을 도우려 달려갔던 피에르도 감전되어 팔에 화상을 입고 큰 형 닐스는 베냐민을 도우러 다시 돌아가자는 피에르의 청을 거절한다.

그러나 아홉살이었던 베냐민뿐이 아니었다. 닐스와 피에르도 깊이는 다르지만 그 사건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은 건 분명해보인다.

-피에르가 늘 놀라웠다. 동생은 그저, 그때 일어난 일을 전부 훌훌 털어버린 것처럼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그 일 때문에 더 강해졌으려나? 그러나 동생이 감자튀김 끄트머리를 쌓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베냐민은 어쩌면 피에르에게도 그 사건이 남긴 흔적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자기 손이 닿은 것을 입에 넣지 않으려 하는 성인 남자는 아마 자기 자신과 관련되 모든 게 싫은 것이리라.(175쪽)

-베냐민은 예전부터 닐스가 별다른 문제없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건 그가 늘 마음을 닫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가끔은 닐스가 행복했던 적이 있긴 있을까 궁금할 때도 있었다. 오랜만에 만날 때면 드물게 행복해 보이던 적도 있다. 하지만 조리대 앞에 서서 커피를 새로 따르고 있을 때라거나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볼 때처럼 무방비한 순간이면 베냐민은 형의 눈 속에서 아주 작은 불꽃처럼 슬픔이 빛나는 것을 본다.(293쪽)

'심리치료사가 시키는 대로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자, 그녀는 두뇌란 놀라운 기관이라고 했다. 때로 트라우마를 경험하면 정신이 기억을 바꿔버린다고 했다.(265쪽)' 그 결과 베냐민이 그동안 죽었다고 생각한 몰리가 개가 아닌 그의 여동생이었음을 떠올린다. 그제야 형제들을 차갑게 대했던 어머니의 행동이 이해가 되기 시작한다. 그래도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죽은 몰리는 안타깝지만 남아있는 세 아이를 제대로 돌봐줬어야지. 특히 베냐민을.

처음부터 언급되었지만 마지막에야 공개되는 어머니가 남긴 편지. 몰리의 죽음이 베냐민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남몰래 몰리가 살아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몰리의 엄마로 살아왔음을, 아들들과 대화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 미안하다는 편지다.

-애도라는 건 단계가 아니라 상태란다. 결코 변치 않고 바위처럼 그 자리에 우뚝 버티고 있지. 그리고 애도는 사람을 침묵하게 만든다.(319쪽)

-마지막 소원이 하나 있구나. 나를 다시 그 별장으로 데려가주렴. 그리고 내 유해를 호수에 뿌려다오. 하지만 나를 위해 그렇게 해달라는 건 아니야. 너희들에게 내가 무엇을 해달라고 부탁할 자격이 어디 있겠니. 난 너희들이 너희들 자신을 위해 그렇게 해주었으면 한다. 함께 차에 올라 먼 길을 가거라. 내가 상상하고 싶은 너희 셋의 모습이니까. 차 안에서, 외딴 호숫가에서, 또 저녁나절 사우나 안에서 다른 누구도 없이 오로지 너희 셋이서만 시간을 보내는 모습 말이다. 우리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일, 서로 대화를 나누는 그 일을 너희들이 해주었으면 한다. (320쪽)

어머니의 유언장 때문이었을까. 형제들은 외딴 호숫가에, 사우나 안에서 추억을 떠올리기도 하고, 심하게 싸우기도 하지만 셋이서만 시간을 보내는 일을 한다. 이런 편지를 봤다면 나는 어머니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 범죄를 다룬 드라마에서서 피해자들에게 상담사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이 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이 말을 그때 엄마나 아버지가 해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어른이 될 때까지 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을 베냐민과 피에르와 닐스가 너무 가엾다.

-다시 한번 살아남기 위해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되짚어가며 그들을 충돌지점까지 데려다줄 여정을, 그들은 알고 있다. 그 여정은 이미 일어난 일인 것처럼 그들 안에 자리하고 있다. (321쪽)

-돌계단 위에서 그들은 서로 다친 곳을 살핀다. 사과는 하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배운 적 없어 사과하는 법을 모르기에. 그들은 조심스레 서로의 몸을 만지고, 상처의 피를 닦아내고, 이마를 마주 댄다. 그렇게 세 형제는 서로 끌어안는다. (33쪽)

드디어 어릴 때 서로 의지했던 물 속의 그날처럼 셋은 끌어안았다. 다행이다. 천천히, 한 발 한 발 디디며 뒤뚱거리더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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