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제목 : 이국에서
◎ 지은이 : 이승우
◎ 펴낸곳 : 은행나무
◎ 2022년 9월 29일 1판 1쇄, 355쪽
◎ 내 마음대로 별점 : ★★★★
새 책이 나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그저 반가운 작가 중 한 명이 바로 이승우다. 서점에서 눈으로, 손으로 만나야 반가움이 솟아나는 걸 제대로 느낄 텐데 요즘은 서점 나들이를 통 하지 않으니 아쉬운 대로 화면에서 눈으로만 아는 척을 하고 소근거리는 게 끝이다. '오랜만이에요.'
표지에 잔뜩 웅크리고 서 있는 저 시커먼 형체들은 눈을 감은 채 감시하고 있는 괴물들처럼 보이기도 하고, 사람들을 가둬둔 높은 벽처럼 보이기도 하며, 책속에 등장하는 체리나무 같기도 하다. 그리고 양복 차림의 두 남자, 그들을 둘러싼 안개와 같은 형상은 왠지 모르게 밀림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사실 표지에 깊은 관심을 갖는 편은 아닌데 <이국에서>라는 제목이 <이승에서>로 읽혀 한참을 본 결과다.
'보보는 그가 살아온 인구 300만의 광역시보다 면적이 세 배쯤 크고 인구는 두 배쯤 적은 도시국가다. 공식명칭은 보보민주공화국. 유럽 대륙의 여러 큰 나라들이 이 땅을 오랫동안 지배해왔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립국이 되었지만 그 후로도 내전이 끊이지 않았고 최근까지 쿠데타를 통한 권력 주체의 변동이 일어나는 등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나라이다.' (8쪽) 이런 나라에서 최소한 6개월, 시장의 계산대로라면 5개월 19일 이상 살아야 하는 황선호가 주인공이다.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시장의 뇌물 스캔들이 불거지자 책임자의 완벽한 실종이라는 시나리오 아래 담당자 한 명이 모든 비리와 부정을 뒤집어 쓰고 관련 파일, 비밀, 진실을 안은 채 선거에서 승리할 때까지 잠적하기로 했고 가족이 아무도 없고, 시장의 최측근이라는 이유로 발탁된 이가 바로 황선호다.
그가 그곳을 선택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서였지만 실제로 그는 '그 사람' (엄마가 언급한 적은 없으나 그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이)가 마지막으로 머문 공간으로 추측되는 곳이라서 고른 것이다. 자전거로 세계일주를 하겠다며 간 사람이 왜 거기에서 연락이 끊긴 것인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할 일이 없는 그는 처음에는 자신이 잊혀졌고 비리의 주체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술독에 빠졌고 '계획을 세우지 않은 사람은 계획에 없는 일을 하며 산다.' (46쪽)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이 언급했던 '친구들의 집'을 찾는 일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기로 한다. 하지만 보보의 권력을 잡은 군부세력은 외부인을 전부 몰아내려고 혈안이었고 황선호 역시 그 나라를 떠나야만 하는 지경에 이른다.
'외부인'은 그런 외지인들에게 이들이 새롭게 붙인 이름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을 뜻하는 외지인이나 외국인이라는 단어가 있는데도 굳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바깥에 있는 사람, 소속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으려는 의도입니다. '외부인'은, 그들에게 꼬리표를 붙여 자기들과 구별하기 원하는 이들에 의해 규정된 이름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은 손님이니까, 손님으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외부인, 소속이 없는, 바깥에 있는 사람은 존중과 배려의 대상에서 배제해도 되는 사람, 경계해야 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311쪽)
어디에나 친구는 있는 법이다. 오래 전 그와 닮은 사람을 만났다는 펍의 주인 필의 도움으로 '친구들의 집' 과 관련된 쟝을 만나게 되고 그에게서 그 남자 김경호의 행적을 알게 된다. 그 남자 김경호가 묻힌 보보체리 나무의 열매, 체리를 입에 넣는 순간 '그 향기에 휩싸인 말들이 혈관을 타고 그의 몸속 구석구석을 유영했다. 확성기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크고 웅웅거리고 찌릿했다. 네가 원하는 일을 해라. 남이 원하는 일이 아니라. ……. 황선호는 그 순간 새로 태어난 것처럼 느꼈다. '(305쪽) 이 부분은 마치 성당에서 하는 영성체를 떠올리게 했다. 김경호의 피와 살을 아들인 선호가 먹는 신성한 느낌이었다.
황선호가 급박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는 답조차 하지 않았던 이들이 선거가 끝나자 그를 찾아온다. 그가 돌아와 해명을 하고 죗값을 치르는 것으로 재선에 성공한 시장을 도와주기를 바라면서. 뻔뻔함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처음에는 '때때로 믿음은 우매함과 구분되지 않는다. 혹은 믿음이 분별의 눈을 가려 우매함에 .' (31쪽) 빠졌던 그였지만 이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기에 남겠다고 당당하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