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귤을 좋아하세요 창비청소년문학 122
이희영 지음 / 창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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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공간이 되어 있는 배경에 살짝 놀랐다. 십여 년 만에 세상을 떠난 가족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이 몹시 쓸쓸하고 슬펐는데, 어찌나 생생하게 묘사를 하시는지 그 재미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작품 속 여름은 성장의 계절이고 귤도 제목부터 등장(?)하는데, 겨울방학이 지나면 늘 옷이 작아지던 나는, 겨울이 성장의 계절이었고, 그 풍경 속엔 늘 귤이 함께 했다. 이런 낯섦이 이상하게 유쾌하고 묘하게 설렌다. 판타지처럼.

 

그땐 참 시간이 더디 갔지. 학교를 졸업해도 또 학교, 시험을 끝내도 또 시험, 교복을 벗으면 또 다른 교복이었잖아.”

 

고등학생인 아이는 나와 다른 고등학교 시절을 산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서 알은체를 할 일이 적다. 그리고 많이 잊었다. 나는 잊어서 문득 외롭지만, 아이는 기억해서 아직 그리운 것들이 더 많다.

 

무언가를 기다릴 이유가 있다면, 그게 뭐든 행복하고 좋은 거야.”

 

아이든 어른이든 현실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갖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촘촘하게 경쟁하고 노출되는 시절에 가상공간의 확장은 필연인가 싶기도 하다. 기록이 저장되고 복원되고 재생되는 세계라면 더욱 더.

 

그리운 이를 드물게 꿈에서 만나고 기억하고 때론 울면서 잠에서 깨는 일은, 의식이 돌아오는 마지막까지 애달프고 안타깝다.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목소리가 같은 인공지능이 있다면, 나는 수다쟁이가 될 지도 모르겠다. 상상만으로 눈이 뜨거워진다.

 

특히나 작품 속에 구축된 형의 공간처럼, 세상의 모든 해야 하는 일들 말고, 혼자일 때 하고 싶었던 일로 마련된 세계는 행위 주체의 모습과 본질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질문은 존재를 규명하듯 입체적으로 바뀐다.

 

형은 어떤 학생이었을까?”

 

형은 대체 어떤 사람이었어?”

 

매력이 많은 작품이라 스포일링이 될까 쓰려던 문장들을 자주 머뭇거렸다. SF 추리소설처럼 작가는 여러 단서들을 별조각처럼 뿌리며 이야기를 전개했다. 페인트를 기억하듯, 한편 반전이 놀랍고 다른 한편 맑은 시처럼 아름답던 이 작품도 귤을 볼 때마다 기억날 것이다.


 

늦게라도 안녕, 늦었지만 안녕. 주인공을 부러워하며 결국 서로를 모르고 이별한 모든 조우를 잠시 떠올렸다. 가족이든 친구이든 그것이 관계의 일반성이라면 심장이 허물어질 것 같다. 올 해 겨울과 귤은 더 특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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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다정스러운 무관심
페터 슈탐 지음, 임호일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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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 나니 어떤 조급한 해방감이 들었다. 멋대로인 글을 감상이라고 적을 것만 같아서 걱정이 거세졌다. 세상 다정하고 반가운 제목의 이 책은 반백년쯤 살고 나서야 겨우 조금씩 보이는 삶의 진상을 일상의 기록처럼 보여주었다.

 

삶도 세상도 단정할 거라고 오래 믿었다. 몇 가지 수식이 품은 우주적 의미가 잘 해석되면 차근차근 올라가는 계단처럼 삶에 대한 설명도 가능할 줄 알았다. 그런데 가장 낯설어진 건 인간 자체이다. 더 정확히는 뇌 기능에 좌절했다.

 

뇌과학 지식은 답답함과 갑갑함과 불가해함과 부조리... 모두를 흔한 가능성으로 포용하였고 그 당연한 수용에 나는 더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알던 세상이 전혀 모르던 곳이 되고, 친밀한 존재들이 매순간 낯설어졌다.

 

나는 온통 혼란스러웠다. (...) 마침내 내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글을 쓰기로 결심했소. 참된 글을 쓰기로 말이오. (...) 지금 그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당시 내가 그랬던 것과 똑같이 시내를 헤매고 있을 거요.”

 

성장기에 배웠던 거의 모든 지식정보는 쓸모가 없어졌고, 최근엔 뇌가 없어도 인간보다 복잡한 수준의 학습이 가능하다는 걸 상자해파리를 통해 밝혀졌다. 신경 세포 1000개만 있으면 생존과 학습이 가능하다. 인간의 비효율성이라니.

 

이야기가 제공하는 미스터리 속에서 내가 즐겁게 혼란스러울 때, 20년의 간극을 두고 동일한 삶을 걸어가는 두 인물(혹은 아닐 수도)은 그 길을 가르는 다른 선택을 한다.

 

동일한 존재가 동일한 시공간을 점유할 수 없다면 모든 경험은 다르다는 물리학을 전공한 독자로서, 이런 편차는 필연이고 오류가 아니지만, 두 존재가 아니라면, 이 결정은 어떻게 문해되어야 할까.

 

삶도 사람도 잘 모르겠다고 항복하고 나니, 세상이 더 미로 같다. 마침 미니멀리즘이 유행했고, 나는 물건 대신 관계를 벗겨내고 쳐냈다. 그 마지막에 진실의 고갱이 같은 것이 나타날 거라 기대했을 것이다.

 

조급한 해방감으로 시작했지만, 책을 읽는 내내 신경은 더 팽팽하게 긴장했다. 실존을 묻는 질문은 어렵지 않은 적이 없고, 타자성을 통해 자신을 알아보는 인간은 늘 사랑의 방식을 택함으로써 모든 것은 더 복잡해지고 만다.

 

마지막의 반전이 마치 삶의 가장 지독한 오류 같았다. 혹은 사랑의 본질이란 늘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 자기확신을 확신하는 시간과 혼란의 시간이 교차하는 한 시절일 지도. 때로는 더욱 허망한 망상일지도.

 

지난 주 본 화재(?) 영화 <A fire>는 이 책처럼 내겐 혼동이었다. 계획과 이성과 논리와 서사를 대신하는 내가 속하지 않은 세대와 문화와 삶이었다. 불이 다 삼키기 전에 불구경을 그만 둬야 한다는 조바심에 몸이 들썩거렸다.

 

기성세대의 진정성은 정확성이 빠진 헛소리들이었을까. 그래서 지금 여기에 도착한 것인가. 붉어진 화면 속의 하늘을 느긋하게 보면서 불타고 있는 현실의 집을 생각했다. 사랑하는 이들이 가득한 그 집을. 현재가 되어버린 모든 과거를, 곧 미래가 될 달라지지 못할 현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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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함락 1945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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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께가 압축파일처럼 느껴지도록 놀랍고 꼼꼼하고 상세한 기록이다. 2주 동안의 전투, 수백만 명의 사연이 데일 듯 뜨겁게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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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함락 1945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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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전쟁과 국제전과 내전과 학살이 자행된 역사를 가진 한국 사회에 살고 있지만, 운이 좋아서 유사한 어떤 경험도 직접적으로 하지 않고 살았다. 이산가족이 된 가족 친지도 안 계시니 간접 경험도 일천하다. 그래서 더욱 기억하려 한다. 역사서의 기록은 실제보다 간명하기 마련이라고.

 

고단한 현실로부터 잠시 도피할 수단으로 독서를 오용하는 삶을 산다. 단숨에 읽고 잊는 소모적이고 이기적인 읽기를 지속했다. 그러다 팬데믹 발발 전 운 좋게 마지막으로, 친구의 책모임에 참가했다. 펼치기도 전에 두려운 전쟁사였다. <함락된 도시의 여자 : 1945년 봄의 기록> 저자는 익명이었다.


 

세계사와 분리된 자신만의 역사를 가진 국가는 없겠지만, 한국사회는 힘의 각축과 충돌의 전선을 제 땅 위에서 겪고 살아야했다. 2차세계대전의 참담한 역사는 책을 통해 거듭 읽히고 채워졌다. 책모임인데 영화 감상도 겸했다. 힘겨웠지만 기록한 용기를 존경하는 심정으로 눈을 감지 않았다.

 

* 원제: Eine Frau in Berlin, A Woman in Berlin: 2008년 영화 <베를린의 여인>으로 제작. 막스 파르베르복Max Farberbock 감독.

 

겁쟁이에 게으름뱅이라서, <베를린 함락 1945> 역시 친구의 권유로 책모임을 통해 함께 읽었다. 결과적으로 함께 읽고 이해하고 대화하고 생각을 나누는 방식의 읽기가 더 좋은 책이었다. 여섯 번의 모임 동안, 옆에는 혼자 읽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가 고요히 함께했다.


 

<함락된 도시의 여자>와 더불어, 몇 번이나 놓치고 싶고 포기하고 싶던 책이었다. 단정한 문자를 읽는데 떠오르는 광경은 너무나 참혹했다. 책장을 넘길 힘조차 주체하기 힘들어진 감정이 다 가져가 써버리곤 했다. 먼 곳의 모르는 이들의 역사를 느긋하게 배우는 일이 죄짓는 일처럼도 느껴졌다.

 

전공자는 아니지만, 이제 <베를린 함락 1945>를 만나고 읽고 함께 한 시간은, 미진하게 마친 이전 과제를 수정하고 마침내 마무리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 책은 두께가 압축파일처럼 느껴지도록 놀랍고 꼼꼼하고 상세한 기록이다. 2주 동안의 전투, 수백만 명의 사연이 데일 듯 뜨겁게 기록되었다.

 

나이에 비례하는 지혜는 없어도, 인간에 대한 고정관념을 털어내고 사실을 적시하는 담담한 태도는 익혔다고 생각했는데 더 정확히 전달함으로써 역사를 바로 기록하고 분석하려는 저자의 문장들에 자주 화들짝 놀랐다. 알던 내용도 모르던 내용도 읽던 호흡을 잡아먹듯 새롭게 끔찍했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시기가 300년 남짓이라던 내용은, 좀 안다고 생각한 세계가 가짜였다는 충격과 슬픔의 깨달음을 주었고, 전쟁사를 소재로 삼은 역사서를 읽을 때마다 아픔만으로 끝나지 않는 어떤 힘을 조금 증량시켜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것인가, 살 것인가, 무엇을 바랄 것인가를 묻는 힘.


이 책에는 거대한 숫자들이 적혀 있다. 수십만 명의 동사자들, 200만 명의 강간 피해자들, 700만 명의 피란민들……. 이런 규모의 잔인함은 창작 세계의 악몽보다도 거대해 보인다. 이 참상의 동력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이런 일을 하는 건가, 살아남았다는 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기적인가.



 

옛일이긴 하지만,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프라모델을 만들고 스파이 영화를 즐기면서도 전쟁과 무관했던 내 삶에, 이 책은 경계를 넓히기보다 테두리를 찢는 충격을 주었다. 히틀러와 스탈린의 독백들에서 식은땀이 어느새 배어나기도 했고, 전쟁과 강간의 모든 기록에는 위경련이 날 듯했다.



 

뇌과학이 밝혀준 인간 뇌의 진화와 작동 방식에 좌절감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서 서로를 보완하며 함께 만든 것이 문명사회인데, 오래된 가스라이팅도 현재 진행형인 프로파간다도 모두 하찮게 만드는, 인간성 말살에 복무한 기막힌 선전 선동은 모두가 고통스러운 종착지로 다급하게 향해갔다.

 

불길이 지나간 자리에 남아 폐허를 톺아보는 남은 인간들은, 이제야 불필요한 사상자들에 의아하고, 서로에게 총질하고 포격한 무능한 공격 작전을 마주한다. 대의라는 가식조차 부재한, 죽음의 공포에 내몰린 군상이 선택한 가해와 폭력의 순간들은 타인의 죽음으로 핓빛 어둠으로 얼룩졌다.

 

한국 사회의 특수성에 사적인 게으름이 합쳐진 독자로서 소련군 주인공의 시선으로 역사를 본 경험이 없었다. 나찌 독일에 대한 거부감처럼 전체주의 소련군에 대한 저항감도 크다. 다만 무참히 쓰러져간 소련군 보명의 공격과 독일 군인들의 수비에 똑같이 서글플 뿐이다. 무슨 의미와 가치가 거기에 있는가.

 

이런 비극과 참상을 다루면서도, 소위 지도부신성 신화를 위한 계산과 의지는 집요하다. 미국 원조 규모를 줄이거나, 집단 강간 등의 전쟁 범죄 거론에 대한 비난은,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상기시켰다. 철저한 사료 중심 기록인 이 책 덕분에 어떤 장면들이 이제야 선명해진다.

 

전투와 전쟁의 막바지에 가능한 병사들을 살려서 귀가하려는 노력을 하는 지휘관과, 그렇지 않은 이들 하에서의 최종 결말은 아주 다른 풍경이다. 전력 차이가 극명함에도, 병사들에게 돌격을 지시하는 자들이 후방 도주를 하는 일이 드물지 않다. 결국 히틀러 정권은 총독 시신조차 보존 못하는 종말을 맞았다.

 

대규모 전투와 전쟁이란 국운에 영향을 주겠지만, 그 이후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재건을 상상하지 않는 권력자들의 결정은 무모하고 어리석을 뿐이다. 원제의 적확한 의미와 더불어, 이 전투에서 희생된 청소년들을 생각하니, 독일이 어떻게 회복하여 현재에 이르렀는지가 미스터리 같다.

 

분단국가에서 살지만 기이할 정도로 태연하게 사는 독자가 만난 670쪽의 방대한 서사는 오래도록 곱씹을 귀한 기록이었다. 과문해서 많이 배웠고, 거대한 비극을 조망하는 저자의 방식에 경탄했다. 함께 읽은 것이 몹시 다행이었다.

 

아무리 간절해도, 어떤 역사도 단시간에 다르게 쓰지는 못할 것이다. 전쟁과 폭력의 역사는 문화와 언어와 일상에도 녹아있어서, 고작 몇 개를 분리해내기도 지난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것에 공감하지는 못해도 함께 사유할 수는 있다는 것이 나의 희망과 낙관의 근거다.

 

고통과 위험의 규모가 더 커지는 흐름으로 역사의 흐름을 보기도 하지만, 19세기보다 20세기가, 그리고 21세기가, 차별과 폭력과 광기와 시행착오를 더 잘 배우고, 대처법을 하나라도 더 알게 된 시대가 아닐까. 이 책처럼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이들이 만든 계단 위에 내가 서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밀덕이었다면 동원된 차량과 무기와 제복과 진군과 공격의 방식을 생생하게 떠올리며 전쟁 다큐멘터리를 보듯 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규모의 전투를 한 흐름으로 떠올려 볼 수 있게 해주는 독보적인 책일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 전쟁을 서술하고 디테일을 분석하고 비극을 사유한 최고의 글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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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만세 - 100%의 세계를 만드는 일
리베카 리 지음, 한지원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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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이란 출판 업무가 무엇인지 모를 시절부터 펭귄 북스 독자였으니, 그 책들이 탄생한 작업의 세계를, 편집 업무를 만나는 기회가 몹시 설레었다. 20년간 100여권도 아니고 수백 권의 책 업무라니, 잠시 오타인가 싶기도 했다.

 

스티븐 킹이 편집자는 언제나 옳다The editor is always right’라고 해서 흥미로웠고, 운 좋게 에디터가 저자인 재밌는 책도 읽게 되었다. 이 책에서 본격 편집의 세계를 만났다. 낯설어서 더 재밌고, 상세해서 벅차게 즐겁게 배웠다.

 

도서를 선별하고 기획하는 법, 투고 원고 보는 법, 기획한 도서를 소개하는 법, 에이전시나 저자와 소통하는 법, 저자와 함께 원고를 개발하는 법, 원고를 교열하는 법, 사업자로서 경력을 쌓는 법까지! 스티븐 킹은 이번에도 - 편집의 신의 영역 - 옳다. 어떻게 인간이 이런 일을 다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라져서 더 좋은 도서 별점이 존재하던 시기, 나는 독자가 좋으면 좋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문화와 예술은 음식처럼 취향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책들이 있어 좋고 그 다양성은 생각의 자유만큼 보장받아야 한다.

 

진짜 문제는 이 책이 읽을 만한가, 가치 있는가, 좋은 책인가 하는 것입니다. 책이 구간이든 신간이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 책은 읽히기 전까지 다 신간인 거죠.”

 

종이책을 넘기며 읽는 것도 힘든 조건인 분들 - 장애 등 - 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종이책이 더 좋다는 말을 삼가려 하지만, 종이책을 사랑하고 가능한 오래 종이책을 읽고 싶은 독자라서, 문장마다 책 냄새가 나는 것처럼 행복했다.

 

이 책의 냄새와 질감과 모양을 만끽하며, 내가 만난 책들과 앞으로 만날 책들을 기억하고 상상해보았다. 백 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진 출판사의 편집장이 누적된 세월만큼 꼼꼼한 면도 멋지고, 유쾌한 면은 더 멋지다.

 

실수는 무언가를 출판하기 위해 무대 뒤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잠시나마 들여다볼 수 있게 하고, 인간이 얼마나 실수를 저지르기 쉬운 존재인지 깨닫게 해준다.”

 

초고, 기획, 교정과 교열, 팩트 체크, 윤문, 색인 작업그래서 책. 모든 과정이 필수인 숨 가쁘게 채워진 과 책 만드는 사람들의 역사다. 출판이란 세계에서 살고 계신 많은 분들 - 디자이너, 번역가, 인쇄업자, 에이전트 등등 - 이 모두 반갑고 감사했다.



 

이 책을 읽은 후로는 책을 정물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보단 달리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들릴 지도 모르겠다. 내가 가만히 앉아 느긋하게 책을 읽을 순간을 위해 애쓴 모든 시간들, 모든 사람들, 모든 목소리들, 모든 기다림들.

 

정말 좋은 작가는 (...)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훌륭한 편집자는 (...) 책을 만드는 내내 독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니 말이다.

 

모두가 완벽을 위해 노력했지만, 치명적인 매력(?)인 오탈자가 불가사의처럼 존재하는 책은, 금서목록이 등장한 2023년 한국에서도 변함없이, 지식보다 의식을 가진 인간 존재들이 소통하는 아름다운 문명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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