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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 그리고 가정 - 평등을 향한 여성들의 기나긴 여정, 2023 노벨경제학상
클라우디아 골딘 지음, 김승진 옮김 / 생각의힘 / 2021년 10월
평점 :
‘커리어와 가정’을 이유로 뇌리를 스치는 반백년의 세월이 모두 지난 기억임에도 뜨거운 손아귀에 멱살을 잡힌 기분이다. 동시에 커리어‘와’ 가정이라는 접속사의 연결이 무엇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힘 있는 응원처럼도 보인다.
산업화와 경제 성장, 집중된 교육 서비스 혜택을 받고 자란 내 세대의 경험과 현재가 일그러지고 뭉개진 반죽 덩어리처럼 보인다. 그래서 2023년에 이 주제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단 소식이 얼떨떨하게 놀라우면서도 반가웠다. 계속된 타협으로 눅눅해진 눈빛으로도 줌을 켜고 함께 읽자고 책모임을 꾸렸다.
시작은 설렜지만, 고등학생이거나, 수험생이거나, 재수생이거나 한 아이들 수발과 각종 돌발로 전원 참석이 더 어려워졌고, 수능일 이후로 소식을 전하지 않은 친구들이 세 명이다. 함께 읽은 곳에 멈춘 책갈피를 한참 보다가, 모임을 재개하자는 독려 대신 남은 내용을 혼자 읽으며 친구들의 형편을 짐작하고, 가정이 생기기 전 그들의 모습과 커리어에 대해 복기해본다.
두 명을 제외하면 모두 대학에서 만났고, 모두가 직업을 가졌다. 교대와 사범대에 진학해서 정규직 교사가 된 친구들, 박봉의 대학 강사로 살아온 친구들, 유학 갔다 전공을 바꿔 변호사가 되었으나 일자리 찾기가 어려워 다른 자격증이 필요했던 친구, 남편 근무지 따라 독일에서 살며 번역일 하다 귀국 후 번역 아르바이트 하는 친구까지. 우리는 ‘대체, 왜, 여전히’ 숨 막히게 바쁘나 가용 소득은 참담하고 책 한 권 함께 읽을 시간조차 마련하기가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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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가 가득한 단단한 문장들 덕분에 감탄과 부러움이 어지럽게 교차함에도 차분하게 읽어 나갈 수 있었다. 시간과 정체성을 갈아 넣는 것은 물론 더한 것도 요구하던 밥벌이 노동과 가정 사이의 함정 같은 구조와 커지던 소득격차를 어설픈 변명이 통하지 않도록 분석한다.
“이런 요인 모두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문제의 근원인가? 이 요인들을 다 합하면 남녀 사이에 발견되는 소득과 커리어상의 차이가 거의 다 설명되는가?”
1-5세대의 100년간의 데이터는 역사 도표처럼 흐르고, 돌봄 노동을 포기하지 않은 개인들의 분투를 어리석다 지적하는 대신, 커리어와 가정을 분리하고 차별하고 폄하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로 한 걸음이라도 걸었던 많은 여성들의 역사를 솔직하고 진지하게 명시한다.
커리어 투자를 위한 시간과 출산을 위해 ‘놓치면 안 되는’ 시간이 충돌하는 문제, 출산 후 가정 돌봄과 양육에 참여하는 여성과 더 많은 시간을 근무하고 온콜까지 남성이 담당하면서 벌어지는 소득 격차, 한 쪽의 희생이 요구되지만 결과적인 경제적 이득, 학위나 전문성과 무관한 여성의 경력 단절. 방대하고 묵직한 데이터와 사료를 잘 엮어서, 자신의 논지를 끝낼 때까지 부족함이 없는 근거 자료로 활용한다.
“시간은 위대한 평준화 기제다. (...) 근본적으로, 성공적인 커리어와 행복한 가정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고전하는 여성이 직면하는 문제는 시간 충돌의 문제다. (...) 이러한 선택들은 이후의 삶을 크게 좌우하며, 한번 선택을 내리고 나면 무르거나 고칠 수 없다.”
성공담이 화려하게 전시되는 사회지만, ‘탐욕스러운 일’을 해나가는 사람에게 큰 보상을 줌으로써 최대한 노동자의 시간을 갈아 넣는 성장 방식을 고수하는 경제는 자체의 한계와 더불어 여성과 남성 모두의 삶에도 불가역적인 내용 손실을 초래한다.
미국 대졸 여성들의 이야기를 만나는 중간 중간에, 못지않게 노력하지만 취업 기회는 더 적고, 사회안전망은 더 부재한 상태로 출산과 양육과 살림(가정 경제)를 전담한 한국 여성들의 삶이 수면 위로 올라오는 침몰선처럼 그려진다.
“커리어의 시계가 생물학적 시계와 동시에 시한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생물학적 시계의 시한을 맞추려면 (...) 주요 승진 심사를 통과해서 커리어가 안정되기 전에 가정을 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가정을 영영 꾸리지 못할 지도 모른다.”
20-30대 여성들의 형편과 선택이 절박하고 아프다. 한 걸음 내딛기는 지난하고, 퇴행은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다. 우리에겐 어떤 데이터가 있을까. 기록으로 우리 존재와 역사를 증명할 수 있을까. 한국 여성들이 살아온 역사는 어떤 통계로 상세히 저장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소득 격차는 하나의 숫자로 말할 수 있다기보다는 동태적인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가지면서 남녀 간 소득 격차는 커진다. (...) 직종에 따라서도 크게 차이가 나며 대졸자들 사이에서는 더 그렇다.”
경력단절 여성이 취업할 곳은 콜센터 밖에 없다는 자조적인 말이 떠도는 한국에서, 사고 실험의 기회마저 없이 붕괴되는 출생률을 따라 소멸할 지도 모를 사회에서, 여성은 혼자인 적이 없으니 함께 방해물을 걷어내고 지향하는 길로 한 걸음 나아가자는 제언을 만난다. 경제학 책이라는 것이 낯선 행운 같다.
성차별과 성별 소득 격차 1위 국가에서, 삶을 규정하는 방해물을 당장 치워주지도 못하고, 통증이 많은 몸과 눅눅해진 눈빛으로, 이 책을 권하고 싶은 것은 너무 손쉬운 면제부일까. 여성 서사와 역사는 늘 고단한 오래달리기였다. 힘들어 걷더라도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 왔다.
기억해야 할 것은 저자가 해법과 실현 가능성이 ‘있다’고 제안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요구 조건들이 모두 채워지더라도, 성별 소득 격차를 동일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니, 또 다른 원인을 찾고 현실에 적용하여 해결하고 함께 고민하자는 것이다. 다른 많은 문제처럼, 가능한 많이 참여해야 이룰 수 있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가진 노동 구조를 고쳐나가면서 지난 한 세기의 여정이 전진해 온 길에 우리 몫의 길을 닦아야 한다. 나의 학생과 그 밖의 많은 여성들이 커리어도 가지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남자”도 만날 수 있게 말이다.”
역사적 흐름을 살펴 치밀한 분석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직업들과 여러 세대를 아우르며 살펴볼 기회를 제공하고, 경제학의 방식으로 문제를 추적하여 숙고하게 돕는 이 책은, 미국 여성 경제학자가 2021년 기록하고 2023년에 도착한 한국 여성들의 필독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