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 오스틴을 처방해드립니다
루스 윌슨 지음, 이승민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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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때는 인생에 제법 기대가 컸더랬는데 그게 다 어디로 가버렸는지 점검해볼 마지막 기회였다.”

 

독서가 가진 힘은 다양하고 그 중에는 분명 처방”*의 효과도 있다. 아주 오래 독서가 직업 자체였고, 독서만 하고 살아도 너무 짧은 인간의 수명에 문득 서글퍼지는 내 경우에도 그렇다. 특히 코로나 시절에는 여러모로 미칠 듯한 일상을 견디는 힘을, 북클럽과 독서에서 나눠 받았다. * 원제 remedy

 

이런 고백(?)은 많이 들었지만, 독서가 삶을 재구성하는 강력한 처방이 되었는지를 한 권의 책으로 기록한 이야기는 처음이다. 미처 듣지 못한 내 할머니나 어머니의 이야기처럼, 애틋하고 반갑게 만났고, 유쾌하고 재밌게 읽었다. 또한 영국 유학 시절 비로소 읽게 되어, 작품은 물론 영화와 드라마까지 모두 섭렵한 제인 오스틴 팬으로서 읽기가 행복하고 즐거웠다.

 

나이 일흔에 시작한 오스틴 다시 읽기가 나를 위로하다 못해 나를 인생의 화양연화로 이끌 줄이야.”

 

여성으로 태어난 것뿐인데, 그게 치명적인 약점이 되어, 한번 꿈꿔보지도 마음껏 살아보지도 못한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저자의 목소리에 중첩되어 들린다. 여성의 수명이 긴 것은 늦더라도 그렇게 한번 살아보라는 기회가 아닐까 싶게,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아가는 개인사와 공동의 역사가 귀하다.

 

계기가 무엇이든 - 저자의 경우 재활 치료 - 작품의 세계관에 비추어 자기 삶을 탐색하는 열중은 상상 이상의 결과를 낳기도 한다. 읽어야 하거나 읽고 싶은 책들만 일던 시절에도, 재미와 휴식을 위한 시간에도, 경계를 넓히기 위한 강제(?) 독서에도, 내게는 없던 태도라서 부럽다.

 

과거의 재미를 되새김하되 다른 가능성에도 마음을 열고, 내 감정과 생각과 인생 경험을 남김없이 끌어모아 읽는 행위와 읽는 기술에 쏟아부으리라.”

 

모두 행복해지고 오해가 풀리는 동화 같은 면이 있어서 좋은,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고심에 빠진 독자의 손을 살짝 잡아주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유의 성장과 태도의 변화를 선명하게 가이드해주는 힘이 제인 오스틴 문학에 있다고 공감한다.

 

주류 미디어든 어디든 남성 창작자과 생산자들이 넘치는 세계에서, 그게 너무 지겨운 시청자이자 소비자로서, 이 작품은 오랜만에 취향이 맞는 친구와 함께 하는 북클럽 활동 같았다. 여러 이유로 강퍅해지는 정신을 편하게 쉬게 해주는 해독제룰 얻은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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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란 말 따위 - 딸을 빼앗긴 엄마의 마약 카르텔 추적기
아잠 아흐메드 지음, 정해영 옮김 / 동아시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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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이토록 용감한데, 실화의 내용은 더 용감할 텐데, 읽는 것도 두려운 겁쟁이 독자입니다. 그럼에도 이 엄청난 용기의 기록을, 오랜 취재의 소중한 고발과 상세 내용을 꼭 읽고, 그 참상을 정확히 알고 싶습니다.



 

멕시코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이 촉발한 혼란에 제대로 맞서지도, 상황을 해결하지도 못했다. (...) 멕시코에서는 종종 법치가 유명무실했고, 부패한 정부와 범죄 조직의 만연한 유착관계는 (...) 한 세기 넘게 이어졌다.”

 

멕시코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아는 바가 없어서, 소재의 참담함에 더해,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쓰린 속을 달래가며 읽어야했다. ‘르포르타주방식의 기록의 가치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방식이 있을까 싶게 감탄스러운 책이다.

 

읽기 전에는 피해자와 유가족에 공감하며 범죄 조직에 대한 분노로 읽게 될 거란 짐작을 했다. 하지만, 다각도로 총체적으로 문제를 살펴보는 탐방 기사, 진짜 저널리스트의 시선은, 왜 조직범죄가 어떤 공존도 불가능한 형태가 되었는지, 가담 조직원들은 어떻게 거대 범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그러니 결국, 이 모든 비극의 가장 큰 원인은 국가적 실패. 70년 동안 대통령만 바꾸었지, 불평등 문제는 전혀 개선되지 않고, 희망이 너무 없는 사회에는 범죄 조직들만 번성을 거듭했다.

 

멕시코정부 인사들은 범죄 조직의 협박에 순응하며, 진실을 은폐 왜곡하는 것을 주동했고, 살인 가해자들은 대부분 처벌 받지 않는 지경이 이르렀다. 멕시코의 조직범죄 세력은 이렇게 국가에서 주는 살인 면허를 받아 운영되었다.

 

자식이 어떻게 죽었는지 아는 것은 두렵고 끔찍했지만 (...) 멈출 수 없었다. 심연을 더 깊이 파고들어야했다.”

 

이런 험악한 분위기에서, 적을 늘려가며, 모든 현실적 위협을 감수하며, “살해당한 딸을 가진 어머니가 추적을 계속했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딸의 죽음을 밝히고 재발을 방지하려고, 거대 기업에 맞서 수년간 싸운 한국사회의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무리 간절해도 목숨을 걸어도 희망, , 이상은 원형대로 구현되는 경우가 없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누더기가 되었더라도, 이전과 다른 모든 변화가 가장 빛나는 성취고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관성을 이겨낸다는 것은 그처럼 막막하고 힘든 일이니까. 가장 현실적인 성공과 희망의 이야기를 많이 만나보시기를 바란다.

 

정의가 전혀 구현되지 않는 것보다는 불완전하더라도 구현되는 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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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속의 비밀 1
댄 브라운 지음, 공보경 옮김 / 문학수첩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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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좋아하던 보드게임을 아주 오랜만에 다시 선물 받은 기분입니다. 이번엔 얼마나 더 기발한 게임규칙들이 긴장과 재미와 감탄을 줄까요. 2권을 주문 해두고 설레며 1권 읽기 시작.




 

의식은 여러분의 뇌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의식의 여러분의 머릿속에 있지 않아요.”

 

어떤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것이 진짜고, 사실 그대로고, 실제로 존재한다는 작가의 호언장담이 첫 페이지에 기록된 것이 반갑다. 진위와 무관하게 크게 웃으며 더 흥미롭게 읽게 된다.

 

기호학은 여전히 재밌고, 노에틱은 어떤 학문인지 모르지만, 등장하는 소재들이 길게는 30년 전에 내가 관심이 가졌던 것 - 새들은 어떻게 부딪치지 않고 군무를 출 수 있을까* - 도 있고, 내 비밀번호를 구성하는 Pi가 등장해서 잠시 등골이 서늘했다. 덕분에 몇 년 만에 중요한 비번 몇 개 변경 완료. * 행동 동기화

 

“‘프라하문지방이라는 뜻이었다. (...) 수 세기에 걸쳐 이 마법의 도시에는 신비주의, 유령, 정령이 들어찼다.”

 

그 외에도 인간의 감각이 사물을 실체 그대로 전혀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과, 인간의 뇌가 얼마나 착각, 편향, 오류 기억이 쉬운지를 보여주는 점이 흥미진진하다. 저자의 모든 것이 진짜라는 장담에 설득력을 더한다.

 

더구나 현재의 과학기술들과 전 세계인이 소셜 미디어에 의심 없이 자발적으로 제공하는 모든 정보들이 전 세계인 누구라도 감시, 사생활 침해, 더 나아가 범죄 가능하도록 활용되는 전개는 허구가 아니라서 소름이 끼친다.

 

우리는 진실을 모르기 때문에 외로운 거예요. 사실 우리는 완전한 전체에 통합된 존재인데 말이죠. 개별성은 우리 모두의 착각일 뿐이에요.”

 

주요 캐릭터들은 아주 매력적이고 특징적이다. 역시 영화화하기에도 최적인 설정이라 느낀다. 물론 그저 편히 읽게 두지는 않는다. 크고 작은 반전들은 본격적으로 사건의 실마리가 풀려가지 전에도 계속 이어진다.

 

좀 더 오래 산 덕분일까, 저자의 전작들을 재밌게 읽으며 기호학 훈련이 된 덕분일까. 이번에는 암호의 힌트들이 비교적 쉽고 빠르게 보였다. 이제 캐릭터들의 배경과 서사는 거의 나온 듯하다. 이어질 2권의 내용이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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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 극장 - 시대를 읽는 정치 철학 드라마
고명섭 지음 / 사계절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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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한 해가 평생 중 가장 빨리 사라진 한 해 같다. 어느새 일 년이 지난 내란 이후의 날들... 모든 소식을 따라 읽기엔 체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하지만, 기사 제목만으로도 충분한 분노와 모욕을 거듭 맛보며 산다.

 

그래도 그 시간을 극장 무대에 올린 든든하게 큼직한 이 책의 서사와 사유는 차분하게 따라 읽을 수 있을 듯하다. 고맙게 내 안의 것들도 정리해볼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에 모인 글은 20223월부터 20259월까지 신문과 잡지에 쓴 것들이다. (...) 36개월을 아우른다.”

 

새삼스럽게 36개월에 눈이 시리다. 끝없는 모욕감과 분노로 정신을 앙다물고 지나왔던 시간이다. 현대인이 당면한 많은 문제는 밝혀지지 않은 원인이 아니라, 아주 기초적인 준거가 지켜지지 않아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익이냐 사익이냐의 척도가 없던 이 정권의 결말은 이토록 필연이다.

 

신문에 실린 논설이라서, 한편마다 주제와 논조가 선명하다. 한 권의 책이 된 집적물이, 바로 오늘의 현실을 설명해주는 역사다. 지난 정권의 악행과 무능력에 새삼 감탄하며, 대의 민주주의와 절차적 민주주의의 허약함을 다시 확인하며, 결국 시민이 분별력과 정치적 문해력을 갖추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절감한다. 고단하지만, 오염된 것도 망가진 것도 너무 많으니 시민이 해야할 일은 산적해있다.

 

반상식이 상식 노릇을 하면 공동체의 윤리성은 존립의 토대를 잃는다. (...) 상식을 희롱하고 공동체를 모욕하는 반공동체 세력을 공적 공간에서 퇴출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상식이다.”

 

극우의 부상, 혹은 극우라는 이데올로기조차 갖추지 못한 폭력배들의 부상은, 짐작보다 오래된 계획과 체계적 지원의 결과일 것이다. 언급되는 것은 이명박 정권 때이지만, 한국 사회에 이런 유의 집단적 경험과 구조로 굳어진 집단적 의식은 청산하지 못한 더 먼 역사적 뿌리를 가졌다.

 

그러니 힘이 많이 든다. 일단 성립된 존재들이 가지는 관성은 공고하고, 항상 이익과 계산이 최우선인 집단의 성실함과 끈질김은 최강이다. 그러니 이길 때까지 싸워나가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히드라의 머리를 다시 자라게 하는 심장이 기득권을 지키려는 썩은 검찰 사법이라는 저자에게 동의한다.

 

그러니 정치권은 가진 권한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하고, 시민들은 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통찰로 오염된 생각과 언어를 바꿔야한다. 공동체의 요구로 만들어야한다. 백년지대계로서의 교육을 바로 세우는 일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카이로스timing가 지금이 아닐까.

 

우리는 언어로 생각하고 언어로 생각을 표현한다. (...) 좋은 정치는 언어를 정련함으로써 공동체를 일으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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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그날 그곳에 있었습니다 - 계엄의 밤, 국회의사당에서 분투한 123인의 증언
KBS 〈그날 그곳에 있었습니다〉 제작팀.유종훈 지음 / 이야기장수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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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벌써 123, 가짜뉴스 같았던 뜬금없던 계엄, 내란 발발 이후 1년입니다. 씹히지 않는 음식을 뱉지 못하고 씹어야하는, 소화되지 않은 시간을 잘 듣는 약 없이 버텨야하는, 그런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카운트 할 1년 내에는 관련 범죄가 모두 소명되고 합당하게 처벌되고, 재발 방지도 확실히 마련될까요. 그럴까요.



 

우리가 그동안 싸워서 지켜왔던 민주주의, 정말 어렵게 어렵게 한 발 한 발 디뎌온 민주주의인데, 이걸 한 방에 이렇게 해칠 수 있나? (...) 담 넘을 때 마음은, 되게 슬펐어요.”

 

날이 밝기 전에 계엄이라도 해제시켰으니, 신경이 찢기던 허둥대던 상황도 타임라인을 찾아갔지만, 그 밤부터 여러 달을 통과하던 시간은, 다시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에도,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버텨온 날들이었다.

 

시청한 지도 까마득한 KBS에서 이 기록물을 만들었다는 게 생뚱맞고 반발감도 들었지만, 이야기장수에서 출간했다는 사실이 책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품게 한다. 윤석열 파면까지 참 많은 분들을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 이 책 덕분에 함께 한 더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되니 잠시 분노 대신 온기가 몸을 채운다.

 

대한민국 건국 후에 계엄군이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온 적은 한번도 없었습니다. (...) 국회 경내에 계엄군을 투입한다는 것 자체가 의도가 명백한 일인 거죠. (...) 잡혀갔으면 당연히 죽임을 당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건 친위 쿠데타였기 때문입니다.”

 

내란 청산은 나와 지인들의 체력 회복만큼이나 더디다. 그래도 그 어두운 밤에서 제대로 방향을 잡아 걸어 나왔다. 나와 보니, 살던 세상의 문제들은 더 커 보이고, 때론 더 악화되기도 했다. 법치주의의 속도를 약점 삼아, 반성 대신 발악을 하는 내란 세력과 동조 세력들의 흉측한 언행은 계절의 아름다움도 잊게 만들었다.

 

아직 십대인데 대통령 탄핵을 두 번이나 경험한 우리 집 아이들이 내게 화를 내거나 비난하지는 않지만,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요즘도 문득 얼굴이 달아오르곤 한다. 동시에, 내가 누리고 산 얼마만큼의 민주화된 세상을 위해 갖가지 희생을 한 선배들의 삶을, 이제야 기록과 숫자가 아닌 역사로 체험하기도 한다.

 

저는 국민들께서 또 다른 국민적인 영웅이 될 검사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 필요하지도 않고요.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윤석열 검사가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12.3을 어떻게 기억하냐고 평생을 질문 받아도 대답은 같다. 그날 그곳에 계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 그 후 여러 곳들에 계셨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여전히 필요한 광장에서 다시 만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한다.

 

오늘도 내란 가담자들은 구속조차 되지 않고, 우두머리는 여전히 헛소리 같은 변명을 자유롭게 남발한다. 그토록 큰 위기를 겪어도, 세상의 어떤 면면은 달라지지 않았고, 이익 카르텔은 견고하며, 민주주의는 위태롭다.

 

할 일이 참 많다. 할 일이 많아서 다행이라고, 바꿀 수 있는 게 많으니 다행이라고 그렇게 나도 주변도 다독인다. 내년 123일에는, 내란은 다시 시도조차 못할 체계가 형식이라고 구비되었기를, 범죄를 예방 효과가 확실한 수준으로 합당하게 처벌할 법도 제정되었기를, 근본적으로 변화를 이뤄 낼 교육 내용도 충분하게 마련되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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