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어 올리버
올리버 색스.수전 배리 지음, 김하현 옮김 / 부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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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발걸음이 우편함 앞에 멈춰 설 때마다 만년의 우정이 한 뼘씩 자라났다. (...) 마지막 편지는 올리버가 세상을 떠나기 3주 전에 주고 받았다.”

 

신경과학자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고 150통이나 되는 편지를 주고받을까. 대담보다 편지를, 말보다 글을 더 편해하는 독자라서, 더욱 기대되는 두뇌 교환 회고록이다. 아내와 모자가 먼저 떠오르는 올리버 색스를 만날 기대에 펼쳤다가 수전 배리를 감동적으로 만난 책.




 


과학은 분야가 좁고 깊고 다양해서, 전공자가 아니면 정확한 파악이 어렵다. 다만 과학자의 태도는 언급할 수 있다. 물론 연구 대상에 따라 태도가 현저히 달라지기도 한다. 사람을 연구하는 분야의 윤리적 책임과 요구가 가장 강력할 거라 짐작하지만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가 나를 두 눈과 뇌가 달린 흥미로운 사례로 취급하는 차가운 연구자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올리버는 새로 얻은 시력이 내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잘 알았다.”

 

올리버 색스 박사의 세계관과 태도는 그의 저작들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지만, 수전 배리의 경험과 기록으로 더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올리버는 환자에게 공감하는 연구자는 지금도 귀하다. 49세에 시력이 향상되어 세계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된 배리가 자신의 경험을 집요하게 털어놓을 때, 무시하지도 비난하지도 않고, 진지하게 듣는다. 소위 정설과 배치되는 사례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지 가르침이 크다.

 

더구나 올리버 자신은 종양으로 시력을 잃어 가는 중이었다. 세상에는 수많은 다양한 연대와 협력의 방식이 있겠지만, 이 둘의 관계도 순전하게 감동적이다. 질병과 장애를 데이터로 파악하지 않고, 폭넓은 학문을 바탕으로 접근하는 태도는 배리의 경험이 또 다른 누군가의 희망과 변화가 될 수 있도록 지지한다.

 

환원주의 과학을 거부할 필요는 없었어요. 그저 왕좌에서 끌어내리기만 하면 됐죠. 이렇게 저의 환멸은 해방감으로 변했답니다.”

 

본다는 것과 인지한다는 것, 인간 뇌의 작동 방식은 기존 상식과 감각에 반하는 내용이 많아 무척 흥미롭다. 감각과 행동 경험을 통해 모은 데이터로 세상을 이해하고 파악하는 생물로서, 인간 한 종 내에서도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은 지식이나 상상보다 다양한 듯하다.

 

시각 체계가 두 가지라는 것도, 서로 다른 신경 경로를 거쳐 정보 처리된다는 것도 처음 배운다. 복잡하고 정교하게 진화된, 적응력이 뛰어난 생물인 인간은 감각기관의 변형을 인지 과정에서 교정 합치한다. 그 결과,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시각적 심상도, 시력을 가진 사람들의 심상도 그 수준이 매우 다양하다.

 

흔히 생물은 발달 단계라는 것이 정해져 있어서, 어떤 기관과 기능은 그 시기에 결정적 영향을 받거나 발달하지 못하면, 그대로 고정 장애가 된다고 알고 있는데, 이는 입체시는 유아기의 결정적 시기에만 발달할 수 있고 그 시기가 지나면 결코 발달할 수 없다는 것이 반세기간 정설로 이어져온 것과 같다.

 

신경과학의 연구 결과나 진위 여부는 나로선 알 수가 없다. 그보다 더 빛나는 감상은, 인간을 대상화하지도 위계적으로 여기지도 않는 과학자의 태도다. 그런 관계에서만 우리는 어떤 혹은 누군가의 본질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에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드물긴 하지만 내 우주에 있는 모든 별과 행성이 나란히 정렬하는 것 같은 때, 이날도 그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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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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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치고 지어내지 않은 것이 있을까?”

 

, 개역증보판이다.” 초역을 읽지 못한 독자가 이런 기쁜 반응을 보인 건, 종종 개역 증보판이 가져다주는 행운이 크기 때문이다. 글이 늘어났고 번역은 다듬어졌다. 표지는 물론 책 만듦새도 멋지다. 늦여름을 매일 힘겨워하며 지내는 중에 잠시 계절도 시간도 잊고 책을 읽는다.

 

실내는 죄책감이 들 정도로 쾌적하니 더위에 뇌가 휘둘리는 건 아닐 텐데, 초면인 작가의 문장들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시베리아, 모스크바, 지구의 낯선 고장들이 경험한 공간들이라서가 아니라, 사유하는 방식이 다른 걱정 없이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오래 생각하고 깊은 대화를 나누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다시 말해 쓴다는 것이 나에게는 이 부호들을 반복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과정을 거쳐 나는 새로운 언어에 입양될 수 있었다.”

 

대학원 시절 지도 교수님이 책을 더 많이많이 읽어두라고, 사회에 나가면 이런 방식으로 책을 읽고 토론하는 기회가 거의 없을 거라고, 당부처럼 권하실 때는 설마 그럴까 했다. 그러나 밥벌이를 스스로 하는 일상은,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생긴 삶은, 더 이상 깊고 오랜 사유의 틈을 충분히 주지 않는다.

 

유쾌한 반전의 시선이 가득한 글을 즐기는 중에도 그 상실이 그리워 눈물이 고인다. 마치 돌이킬 수 없는 유년 시절처럼, 근심 걱정 없이 무언가의 본질을 경험할 수 있었던 그 짜릿하고 노곤하고 향기롭던 시절처럼. 일본어와 독일어로 쓰고 사는 작가의 한국어로 번역된 문장은 강력한 상기와 절감을 유발한다.



 

글을 쓰는 사람은 삶을 온전하게 사는 게 아니라는 주장은, 사람과 삶을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다.”

 

한 때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의미가 가진 유효 수명*이 얼마인지가 더 궁금해진지 오래다. 과학을 전공했기에, 인문학적 사유가 깊은 문장으로 사유하고 글을 쓰는 일의 즐거움과 고통을 제대로 안다고 하기도 어렵다. * The life of meaning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이런 작가와 글을 만나면, 잘 모르고도 그 힘에 기껍게 휘둘려, 현실의 한계를 슬쩍 넘어 환상적인 어디쯤에 머물 수 있다. 살짝 두려울 만큼 낯설지만 고혹적인, 기꺼이 헤매고 싶은 다정한 세계. 더 이상 뭘 성취하지 못해도... 뭐 어때, 하며 그냥 더 살고 싶은 시간이다.

 

나는 나도 살고 있고 나의 삶도 살아간다고 말하고 싶다. 나의 글도 삶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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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어린이들
이영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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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의 명암을 모두 겪은 일본은 자연스럽게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에 주목했고, 이러한 흐름은 교육계에도 반영되었다.”

 

“1930년대 조선에 살던 아이들...” 중에는 내 조부모님들도 계셨다. 그분들이 어린이였을 때를 몰랐고 모를 것이라서 무척 떨리며 설레며 책을 열어 본다. 여러 이유로 감정적으로 읽게 될 글들이다. 국내 최초로 소개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린다.




 

완전히 새롭게 만나는 세계를 담은 책들이 있다. 이 책도 그렇다. ‘일제강점기라는 명명으로는 떠올리지 못했던 사람들이 - 어린이들이 - 그들 본인의 글 속에 가득하다. 생생해서 공기 냄새조차 맡아질 듯하다. 토끼 굴에 들어간 엘리스처럼 설레고 감탄하며 읽었다.

 

요약 기록된 역사가 아닌 글을 읽으며, 어린이라는 분류에도 갇히지 말자 상기한다. 지은 이를 한 명씩 만나는 기분으로 그 시절과 사람들을 만난다. 기록물과 책은 그 당시보다 지금 훨씬 더 많을 텐데, 그 시절 어린이들의 어휘가 어떻게 이렇게 풍부할까 놀랍고 부끄럽기도 하다.

 

문어체에서 구어체로의 이런 변환은 특히 어린이 글짓기에 있어서는 획기적인 발전이었다.”



 

글에는 어린이들의 삶도 시절의 면면도 반영되어 있지만, 해설이 없었다면 짐작만 하거나 모르고 지나칠 내용도 많다. 흥미롭고 구체적인 역사 이야기들을 잘 풀어주어서, 아주 재밌게 집중해서 읽을 수 있다.

 

당시에도 아동 예술 운동이 있었고, “세계 아동 문학도 번역되었고, 11년간 10만 독자를 보유한 어린이 잡지도 있었다 - 방정환의 <어린이>. 현실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 없는 건 어린이들도 마찬가지라서, “정치 운동의 한 방편으로 문예 운동을 하며 작품을 투고한 소년 문사들도 존재했다.

 

조선의 쌀을 헐값에 반출한 식민지 정책이 조선인만이 아니라, 일본 농촌 경제까지 함께 망가뜨린 결과, 사회상을 반영한 교육 사조가 농어촌 아이들의 투박한 노동성야생마 같은 생활력을 가진 굳센 아이들에 높은 점수를 주고 표창한 변화도 흥미롭다.

 

국가는 어린이들의 사회라 할 수 있는 학교를 통해 이상적인 아동상을 형성하려 했다.”



 

일제의 아동 교육 최종 목적은 결국, “순응하는 피지배자들을 만들어 위급할 시 스스로 목숨을 바쳐 황국의 번영을 위하는 것이었지만, 더 아픈 현실은,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유일한 공간인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계급에 속한 어린이들이다. 다른 한편에는 전쟁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근대 도시 문화를 향유하는 일본인 어린이들과 조선인 지배층 관료 자제들이 있다.

 

아동 노동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전시 체제에 강제 동원되어 사망한 수많은 조선인 아이들 - 아홉 살 여자 어린이도 있었다 - , 제도 바깥에 있었기 때문에 사회에 존재하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서늘하고 따가운 소름처럼 어두운 슬픔이 지나간다.

 

이 아이들이 남기지 못한 기억은 어떤 것들이었을까? 일본어도 조선어도 쓸 줄 모르던 아이들은 어떤 시간을 보냈을까? 어떤 생활을 했을까?”

 

이 시절을 살아남아 나와 만난 내 조부모님들을 떠올리고,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해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아무도 만나지 못한 채 삶이 끝나버린 분들도 생각한다. 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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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서점 북두당
우쓰기 겐타로 지음, 이유라 옮김 / 나무의마음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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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개의 목숨 중 하나, 그중에서도 이 세 번째는 가장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홉 번이나 죽고 사는 고양이 주인공에, 아프고 슬픈 다른 죽음들도 많은 작품인데도, 생과 사의 풍경은 이런 거라고 대담하고 담담하게 힘을 내는 이야기다. 뜻밖에도 위계의 역전이 심해서 그게 또 유쾌하다. 고양이가 가장 멋지고, 인간은 늘 그렇듯 선악이 혼재된 면면으로 살고, 신은 참 어리석기도 하다.

 

인간을 불신하고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동족 고양이들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던 쿠로(가칭)’가 북두당에 지내면서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시간이, 한여름 밤에 푹 빠져 즐기는 애니메이션 동화 같아서 기분이 노곤 노곤해진다. 전혀 순탄하지 않은 격렬한 변화의 내용들임에도 불구하고.

 

우열이나 이해득실 따위는 생각할 필요 없어. 북두당에 오면 말이지…….”

 

북두당 서점 주인인 마녀가 저주에 걸린 것 말고는 다른 능력이 거의 없는 상태라는 것도 새롭다. 인간 손님 중에는 위협을 가하는 존재가 있지만, 함께 지내는 고양이들은 상황을 이해하고 곁을 지키고 위로하고 돕는 구성이 애틋하다. 어쩌면 현실의 집사들도 비슷한 관계로 살아가는 지도 모르겠다.

 

쿠로라 불리는 고양이의 진명은 막강하다. 서점이 주공간이고 작가가 되려는 주요 인물이 있고, 여러 번의 생을 사는 고양이들이 함께 한 일본 작가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일본의 신화와 문화사를 잘 몰라도 재밌게 읽었지만, 잘 아는 독자들은 더 큰 재미를 발견할 듯하다.

 

내가 어떤 과거를 살았든, 다른 누가 어떤 삶을 살았든, 전혀 상관없어. 중요한 건 단 하나, 지금뿐이야.”

 

세상 모든 고양이를 다 아는 건 아니니,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는 고양이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럼에도 더 궁금한 건, 인간에게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헤아려보는 일이다. 추악한 면도 많지만, 인간만의 지성, 언어, 인생... 무엇보다 함께 만드는 삶과 사회.

 

인간이 가진 두려움과 동경이, 그래서 만들어낸 수많은 이야기들은, 인간과 인간 아닌 존재 모두에게 힘이 되기를... 여름밤의 색조를 구경하며 바라본다.

 

내 진명은 괴성이라고 해. 신의 지위를 잃고 추방당한 어리석은 자이자, 이야기를 지키는 책의 신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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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뉴스로 출근하는 여자 - 빨래골 여자아이가 동대문 옷가게 알바에서 뉴스룸 앵커가 되기까지
한민용 지음 / 이야기장수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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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은 현재의 나를 과장하고, 내가 지나온 날들은 축소했다.”

 

역차별이니 하는 억지를 듣고 살아야 하지만, 통계는 한국사회의 평등지수가 얼마나 처참한지 유의미하게 드러낸다. 누가 봐도 그럴듯한 성취와 성공이 누군가를 판단하는 주요 기준은 아니지만, 워낙 여성의 사회적 활동과 직업유지가 역경과 고난이라서 무조건 응원하고 싶은 기분이 먼저 든다.

 

내가 처음이었다는 사실보다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나는 더 자랑스럽다.”

 

JTBC 뉴스를 시청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어서, 저자의 진행을 동영상으로 찾아 들으며 읽는다. 잘 관리된 외형보다 더 깊고 오래된 이야기를 읽으며 듣는 육성이 좋다. 화면엔 앵커 한민용이, 글에서는 기자 한민용이 더 선명하다. 보도 자료처럼 생생하고 박진감 넘치게 잘 읽히는 멋진 이야기다.

 

죽음을 아파하다 결국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낸 사람도 많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아가게 하는 건 언제나 그들이었다.”

 

마음껏 실패할 여유가 없었다고 하지만, 실패 횟수가 늘 성장과 비례하는 건 아니다. 어쩌면 저자는 이런저런 실패를 할 이유가 없었을 지도 모르다. 내 기준에서는 놀라운 행동력으로 꿈을 향해 곧게 전진한다. 이리저리 꼬인 내 속을 내가 알기에, “움츠러들지 않는저자의 시간들이 부럽게 빛난다.

 

내 보도는 미약하나마 분명 세상을 바꾸었다. 나만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은 오래도록 나의 명예가 될 것이다. 나는 명성 없는 명예를 얻었다.”



 

태어나 살다보면, 어릴 적 꿈과는 달리 성취라 할 만한 게 미약하다. 나이와 함께 지혜가 쌓이지도 않고, 그나마 알던 것도 잊어버리고, 체력은 떨어지고, 어떤 노인으로 살 것인가, 어느새 그런 생각이 든다. 반백인 독자의 기준은 낮지만, 그럼에도 보도로 세상을 바꾸었다고 기록하는 한민용은 반짝인다.

 

순산 후 돌아온 그가 보여줄, 세상을 또 바꾸게 될 보도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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