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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작은 무법자
크리스 휘타커 지음, 김해온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평점 :
장면 속으로 훅 빨려들 듯 도입부로 빠르게 착지한다. 사건이 막 시작되는데 가슴이 저릿할 만큼 재밌게 느껴진다. 살짝 죄책감이 든다. 죽음과 상실과 고통과 어두움이 짙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은밀한 죄악감조차 즐기며 긴장된 어깨로 조심스럽게 한 장씩 넘기며 문장을 아껴 씹듯 읽게 된다.
창에서 불어오던 후텁지근한 바람이 서늘한 기운으로 얼굴을 스치고, 순식간에 폭염을 식히는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날씨조차 완벽하게 어울린다. 여름 향을 품은 사탕을 문 것처럼 감각적으로 즐겁다. 자신이 창작한 세계로 이토록 매혹적으로 초대하는 작가구나, 크리스 휘타커.
애쓰는 어린이를 응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이 작품은 빈틈없이 압도적인 필력으로 감탄이 절로 나오지만, 감정이입한 더치스의 나이에 가슴이 시리다. 작은 존재에 차오르는 슬픔과 상처와 아픔과 고단함이 아프다. 좋은 어른이 못 되었다는 미안함이 적지 않은, 나이만 성인인 독자라 더 그렇다.
내가 더치스 나이일 때는, “희망이 거짓”처럼 느껴지는 괴로운 시기가 있다는 것, 어른들도 괴로워서 “헤아릴 수 없는, 거미줄처럼 얽힌 상처가 숱한 인생에 그림자를 드리워” 자신도 어린이도 제대로 도울 수 없는 때가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다. 어른들은 다들 삶의 비밀을 깨우친 멋진 척척박사들처럼 보였다.
좀 더 나이가 들어서도, 태어나보니, 성장에 필요한 “부드러운 것”이 부재하거나 부족한 상태인 채로, 희망을 품기도 전에 삶을 쉽게 깨버리는 일들이 일어난다거나, 내가 바꿀 수 있는 게 없어서 어디든 매달려보지만, 기댈만한 것들은 죄다 부서지는 무서운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저보다 더 어린 동생을 지키며, 한 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10살 소녀의 피곤함에 내 밤도 불면의 등으로 밝혀지는 기분이었다. 어른들은 어린이들도 문제의 ‘당사자’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모른다. 더치스가 동일시하고 명명하는 지독한 증오와 폭력의 이름이 비명처럼 들린다.
살인사건의 범인 찾기를 어느새 잊고 나는 더치스와 로빈의 미래가 어떻게 전환될 것인지를 초조하게 기다리며 두꺼운 책을 덮지 못하고 기도하는 기분으로 계속 읽는다. 이 이야기의 결말에는 아주 깊숙하게 숨겨진 슬픈 비밀이 있을 것 같다는 묘한 기대와 아릿함을 느낀다.
작은 몸으로 가능한 가장 지독한 저항을 하다, 더치스가 마침내 마음을 열고, 웃고, 얘기하고, 눈물을 흘렸을 때, 호흡이 잠시 편해진 듯 안도와 기쁨이 함께 왔다. 어쩌면 더치스의 이 끝은 곧 새로운 시작이 될 거라고, 긴장을 놓아도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달아나는 건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불행하기도 인간은 빈틈이 많고 불완전하고 꼭 필요한 순간에 충분히 현명하거나 지혜롭지 못하다. 기대와 희망을 품어본 경험은 더 큰 상처를 입힌다. 중상을 입은 채로 더치스가 헤매는 길을 나는 함께 울먹이며 따라다녔다. 상처와 복수에 충분한 것은 무엇일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올까.

작품에서도 현실에서처럼, “옳은 일이든 공정한 일이든 아무것도 분명하지가 않았”기 때문에, 작품 속 인물들도, 독자인 나도, 더 찬찬히 더 오래 생각해본다. 복수가 이토록 슬프고 아프다면, 파괴적인 결과의 원인이 실수였다면, ‘다시’ 일어나서 저 앞을 향해 발을 내딛어 보는 건 어떨까.
그 무엇도 정확하게 해명되지 못할 때, 아무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 내 잘못이 아닌 이유로 내 삶이 다시 나빠지기 시작할 때, 정답 같은 건 존재하지 않고 조언이란 어리석고 우유부단하게만 느껴질 때... 이렇게 꼼짝달싹 못하는 때야말로 용서의 힘이 필요하다.
반백이 된 지금도 그 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억울하다. 그러니 쉽지 않고 섣불리 권할 수도 없다. 그러나 온갖 가정법 속에서 내내 증오한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면,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없었냐고 매번 윽박지르는 대신 상대를 용서할 수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저주에 갇힌 것과 같다.
범죄소설이란 장르 구분이 너무 건조하게 느껴지는, 온통 사랑으로 아프고 또 아픈, 읽는 동안 폭우처럼 가슴에 눈물이 흐르던 작품이다. 영상으로도 꼭 만나보고 싶다. 더치스와 빈센트와 스타와 워크와 다크의 눈을 오래 들여다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