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날은
파올라 퀸타발레 지음, 미겔 탕코 그림, 정원정 외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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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반짝이며 사라져가는, 모든 날들의 수많은 순간들을 아름답게 포착한 시선일 거란 기대. 문득... 마음껏 게을러도 나른해도 되는, 약속도 책임도 알람도 없는 하루가 이제는 이룰 수 없는 소원 같다.

 

느긋한 위안과 잔잔한 감동을 기대하고 펼쳤는데 시험에 들게 되었다. 짧은 한 줄 문장이 피하지 못할 질문 같다. 이게 만약 시험문제들이었다면 나는 낙제다. 제대로 온 힘을 다해 살지 않는 피상적인 삶을 들킨 듯 허둥거렸다.

 

심신이 무탈한 어떤 날이 언제였는지, 흐릿한 기억을 뒤져봐도 또렷해지는 하루가 없다. 삶을 견디는 비법 같은 건 없이 심호흡과 산책으로 얼마나 관리 가능할지 모르겠다. 화가 병이 되어 고달픈 친구들이 적지 않아 더 힘겹다.

 

이런 날을 마주하게 된 것은, 얇고 단단하고 노릇한 이 그림책이 제안한 것들을 하지 못한 자업자득인걸까. 두려움 앞에 마주 선 시간이 모자라서, 기억해야할 이들을 잊고 살아서, 끝까지 알아내려하지 않아서, 꺼내야할 진실을 꺼내지 않아서.




 

삶은 가차 없어서, 이제 알겠다 싶을 때는 이미 늦은 거라고, 늦었다 싶을 때는 너무 늦은 거라고 하던데……. 회한을 놓아 주고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다시 뭐라도 해보면, 누구의 어떤 날도 무탈하고 어떤 밤도 편안하게 될까.




 

너무 잠이 오거나 너무 잠이 안 오거나 하는 모든 이들의 휴식을 간절히 바라고 싶은 밤이다. 3월의 마지막까지 봄의 노래는 들리지 않았다. 내일이 4월이고 1일이라는 것이 불쾌한 농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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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한다는 착각 - 나는 왜 어떤 것은 기억하고 어떤 것은 잊어버릴까
차란 란가나스 지음, 김승욱 옮김 / 김영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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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증을 넘어 슬슬 두려워지는 나이, 지금이야말로 기억의 메커니즘을 더 잘 배워보고 싶은 때.




 

기억하는 자아는 우리가 내리는 거의 모든 결정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항상 그리고 심오하게 현재와 미래의 형태를 만들어간다.”

 

이 책은 기억에 관한 오래된 질문과 최근에 더 절박해진 질문 모두를 잘 설명해준다. 기억, 망각, 오해, 편향, 상상, 망상, 오류 등의 단어들보다, “재구축이라는 개념이 인간 뇌의 상상력과 결합하니 많은 게 더 선명해진다.



 

외부환경과 유입자극이 끊임없이 변하는 환경에서 생존하자면, 당연히 뇌는 그 변화에 대응할 수 있도록 변형이 쉬워야 한다. 예외 없이 올바른 상대와 연결되는 것이 불가능하니, 이 능력이 곧 약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물론 인간이 주의력의도에 충분히 집중한다면, 어지러운 머릿속을 일부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즉각적으로 잘 작동하는 능력은, 중요도에 따라 정보를 정리하는 망각의 능력이다. 즉 망각이 기억의 실패는 아니다.

 

우리가 서로 협력하며 개인적인 기억과 집단적인 기억을 끊임없이 재구축하고 갱신하기 때문에 (...) 우리는 이 (...) 기억을 렌즈 삼아 세상에서 자신이 처한 위치를 바라보며, 현재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와 화해한다.”

 

뇌의 가소성이 평생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 정보와 상상력을 동시에 활용하는 기능은, 과거의 고통을 갱신해서, 그 과거를 보는 시각을 바꾸어, 현재 삶을 참을 만하게 바꾸기도 한다.



 

사회적 동물로서 사회 생태계에서 상호 작용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의미학습과 반복 노출로 인해 누구나 가짜뉴스()의 신봉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만나 배운 것처럼, 기억의 메커니즘에 관한 연구 결과가 더 일반적인 상식이 되면, 잘 알려지면, 각자가 처한 상황을 새롭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설명도 대화도 좀 덜 감정적이고 더 선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희망을 품어본다.

 

기억하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움직이면서 (...) 스스로를 해방시킨 뒤 오히려 과거를 안내인 삼아 더 나은 미래로 향할 기회를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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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와 거장 - 위대한 창의성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데이비드 W. 갤런슨 지음, 이준호 외 옮김, 박성원 감수 / 글항아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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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 역시 세잔의 최고의 해는 67, 피카소의 최고의 해는 26세라고 보고 있다.”

 

예술가의 생애나 예술 작품 관련 책들은 늘 관심 있게 읽는 편이지만, 이 책은 처음 접하는 방식의 연구 주제와 내용을 다룬다. 이런 식의 분류와 통계와 이론 도출이 낯설고 그 시선이 재미있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한국사회에서는 흔히 암기력과 창의성이 대척되는 능력인 것처럼 교육 이슈로 다루어지지만 그렇게 다룰 문제는 아니라고 늘 생각했다. 저자는 가설을 세우고 방대한 수집 연구를 통해 분석하고 패턴을 찾는다.

 

예술가의 사고 과정을 보여주는 것들은 때때로 완성된 작품보다 더 흥미롭다”* * 솔 르윗, 1967



 

통계 경제학의 방식은 대개 즉자적 흥미를 끌진 못하지만, 대상이 예술가들 - 화가, 조각가, 시인, 소설가, 영화감독 - 이라서, 그들이 창의성을 활용하는 방식과 그 결과인 예술 작품들을 생애주의를 통해 다시 보는 전개가 재밌다.

 

배경 지식이 없어서, 자세하고 정확한 소개는 어렵지만, 피카소로 대표되는 개념적 혁신가와 세잔으로 대표되는 실험적 혁신가의 분석 내용을 자세히 정독하고 싶은 독자에게는 매력적인 연구다. 경제학 책이나, 예술가가 겪는 창작의 불안과 고백과 마침내 창의성이 발현하는 순간들은 늘 그렇듯 극적이다.

 

실험적 혁신가는 찾고 개념적 혁신가는 발견한다.”



 

흔히 천재나 거장은 한 명의 인물로 언급되지만, 그 인물이 이루어낸 예술적 혁신은 결국 고립된 천재한 명의 성과가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인간의 유의미한 행위는 늘 협력에 기반을 둔다는 것을 이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저자의 제안처럼, 한국 사회에서도 창의성에 관한 이런 차이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 좋겠다. 창의성을 높이는 예술에 무게를 더하는 교육 변화나, 예술 분야가 아니더라도 학습하고 학문을 발전시키는데 활용되는 미래를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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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개자식에게
비르지니 데팡트 지음, 김미정 옮김 / 비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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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스한 개자식보다 훨씬 강렬한 놀라움일 듯, 이 제목 아래 담긴 내용이 너무나 궁금하다.


도서제공: 비채


 

우리 언제 만나요. 당신 말이 맞아요. 편지 속이 좁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최강 변론처럼 들리는 소통방식의 소설이다. 밑줄을 긋거나 필사하거나 메모를 첨부하고 싶은 문장이 가득하다. 억측과 거짓과 왜곡과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 악랄함이 너무 시끄럽다. 입을 열면 욕이 튀어나올 듯한 감정 격변을 달래는 중에 정제된 작가의 글을 읽는 것은 치료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듣지 않고 혹은 들을 여유가 없이 살다보면 누구의 목소리도 충분히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듣는 방법을 잊고 인내심을 잃는다. 말이 되든 안 되든 구호 같은 외침이 점점 더 커지고 호응을 얻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거침없이 솔직한 시선을 유지하는 것이 버거워서 놓아버린 선택이 기억났다. 그래서 나는 평안을 얻은 걸까. 겁쟁이에 게으른 편이라 생존 도모를 위한 에너지 배분이었다고 변명부터 또 하고 싶다.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없네.

 

우리를 인정하기를거부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요?”


대개 외모의 아름다움이 사라지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애석해하지만, 더 심각한 변화는 지성의 퇴보가 아닐까. 한 때 빛나던 이들의 황당하고 비겁한 언행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짐작해보곤 했다.

 

문화사대주의자라고 지적을 받아도 어쩔 수 없지만, 알코올 대신 진한 커피를 마시며, 밤새 혹은 몇날며칠을 새면서라도 자신의 생각을 타협하는 법 없이 토로하는 프렌치 필름을 감상한 듯하다.

 

뭘 해도 뭘 봐도 현실 도피에 실패하는 날들이었는데, 에라 모르겠다,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두고 빠져들어 탐독했다. 그동안 세상은 다 망하지 않았고, 현실은 강고하게 퇴행하고 있지만, 나는 언어의 힘을 더 독실하게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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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중국인의 삶
다이 시지에 지음, 이충민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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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가 다른데도... 한강 작가님 작품이 설핏 생각나는 어떤 분위기... 어리석은 코미디 같은 날선 비극, !




 

늙은 친구를 조로증에 걸린 아이로 착각할 만큼 두 사람의 유사성은 맹백했다. 흰 눈썹, 주름, , 눈썹까지.”

 

살아있는 동안은 살아가야하니 온갖 비극이 난무한다. 관계 속에서 생존한다는 일은 이토록 뇌를 진화시켜야하는 일이었을까. 마치 통제가 불가능한 기술로 망하는 부작용처럼, 인간이 그 뇌로 구축한 엉망인 시스템들 속에서 끝없이 죽고 죽인다. 그렇게 끝나기 전에 죽을 만큼 서로 괴롭힌다.



 

세 편의 이야기는 하나같이 둔중한 충격을 가한다. 날카로운 부분 타격과 달리, 온 몸이 울리고 호흡이 딱 멈추는 강력함이다. 르포르타주가 아닌 소설이라서 도리어 실제 사건들인 양 세세히 생생하다. 여행조차 가본 적이 없는 낯선 곳들의 낯선 이들의 이야기가 그저 사람의 이야기로 낯설지 않다.

 

그이에게 그 탄피들은 이후 우리를 남편과 아내로 묶어주는 계약의 증인이었던 셈이야.”

 

담담해서 더 두근거리는 문장들과 단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촘촘한 그물 같은 암시들은 추리나 미스터리 장르물 못지않게 읽는 이를 긴장케 한다. 깊고 어두운 음모의 완성 같은 결말들은 오래 기억하는 게 두려울 정도로 강렬하다.

 

악랄한 함정 같은 시스템들 속에서 개인이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순전히 인가... 새삼 한탄하게 만드는 작가의 통찰력은 체제의 저변을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구조적 비극으로 드러낸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과 시시각각 변화될 미래의 사회는 과연 이보다 덜 파괴적일까.

 

짐승의 이름이 중국어로 산을 뚫는 갑옷인 것은 그래서였다. 이 짐슴의 과학적 명칭은 천산갑穿山甲이었다.”

 

생명은 다치고 망가지고 부서져도 살아남는 끈질긴 복원력을 가지긴 했지만, ‘생존만이 유일한 선택지라면, 비대한 뇌를 가진 - 모순적이게도 사피엔스라는 학명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어리석고 자기파괴적인 - 인류는 그래도 아름다움을 바라고 추구하며 애쓸 것인가.

 

작가가 드러낸 낯선 이들의 숨겨진 이야기들이 쓰리고 아파서 기분 나쁜 냄새를 품은 공기 속을 천천히 걸으며 한참을 서러워했다. 조금도 현명해지지 못한 탓에 우매한 질문들 속을 여태 헤맨다. 어떻게 살아야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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