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집 - 시리아에서 온 소녀 이야기
재스민 왈가 지음, 김래경 옮김 / 양철북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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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나는 ‘집’을 찾아 방황 중인 것만 같다. 공문서와 사회적 비용은 명확한데도 문득 여기가 정말 내 집인가... 싶을 때가 있다. 전쟁으로 살던 집을 떠나야했던 이들에게 다음 집은 어떻게 새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일지... 읽기 전부터 몹시 슬프고 쓰리다.



 

“내겐 달리 선택지가 없다. 난 용감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무엇보다 글의 형식이 길고 긴 산문시 같아서, 또 동화 같기도 해서, 또 체험 보고서 같기도 해서 짐작보다 덜 무서워하다 더 불안해하기도 하며 조심스럽게 천천히 읽었다. 이방인으로 살아 본 시절이 내게도 있어서, 덕분에 좀 더 늘어난 사고의 경계에 안도하며 읽었다.

 

한국 사회에는 차별과 멸칭이 너무 많아서, 구분도 지적도 지치도록 먹히지 않아서, 이젠 악의 없이 무감하게 마치 즐거운 농담인 양 쓰는 일이 매일 다반사다. 특히 나이 어린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모른 척 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그래서 더욱 이 책의 화자가 어른 독자도 무시할 수 없는 시선과 사고를 보여주는 점이 반갑고 감사했다.

 

“미국도 다른 모든 곳처럼 어떤 사람들은 그저 잠들고, 도 어떤 사람들은 꿈꾸며 살아가고 있구나.”

 

미국에서 살아가는 시리아 난민의 삶을 구체적으로는 모르고 산다. 모를수록 타인의 삶은 단순한 이미지로 기억되기 마련이라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친구를 사귀고, 낯선 문화에 반응하고, 다양한 불안 속에서도 울고 싶을 만큼 행복한 일도 생기는 일상의 모든 모습이 소중하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사회에 속하는 이들의 모험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의 터전과 방식을 모두 바꾸어야하는 상황을 ‘멋지다고’ 봐주는 어린이 친구의 시선이 멋져서, 사라져가기만 하는 희망... 같은 감각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듯도 했다.

 

“쏘아보는 눈초리 하나하나가 내가 저지르지 않은 그 무언가를 사과하라고, 설명하라고 재촉했다.”

 

과학이 상식이 되는 시절이 와도, 어쩐지 사람들은 여전히 ‘해가 뜨고 진다’고 말하며 살 것 같다. 그렇다면, 한 사회에서 이민 온 이들을 동료 시민이라고 정말로 받아들이는 때는 오기나 할까 싶기도 하다. 호모 사피엔스는 분명 하나의 종인데, 세상에 다른 인종은 없는데, 촘촘한 하부 문항들이 온갖 구별을 차별화시킨다.

 

“누구든 뭐라도 해야 하지만 모두가 기다리고만 있다. 다른 누군가가 해주기를.”

 

나는 나이 듦을 다행이라고 여기며 더 자주 변명거리로 삼아서, 누구보다 더 조용하지만 열렬하게 ‘다른 누군가가’ 내 모든 불안의 원인들을 해결해주기만을 바라고 산다. 그 해결이 더디다고 짜증만 부리며 산다.

 

그러니 이런 귀한 문학을 체험하고도 막연히 바랄 뿐이다.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삶이 가능한 사회를 바라는 이들이 더 많을 거라고, 평화는 그렇게 구체적인 일상이 가능할 때만 진짜라고. 고통에 침묵하지 않는 시절도 올 거라고. 전쟁이 그치지 않는 세상에서, 포기하지 않는 이들과 누구든 ‘함께’ ‘뭐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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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자기 뼈의 운명을 알겠는가 - 하이드리오타피아, 유골 항아리 매장에 관하여
토머스 브라운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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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달 전, 올드 월싱엄의 한 들판에서 마흔 내지 쉰 개에 달하는 유골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선친의 2주기가 지났으나 여전히 애도 중이다. 이후에도 사별은 이어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30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 발견된 유골 항아리들에도 통증이 먼저 느껴진다. 죽음이란 보편적으로 확실한 사건이지만, 죽음을 맞는 존재들은 개별적인 시간과 장소와 방식을 경험한다.

 

확률로 짐작할 수밖에 없는 수명, 그 불확실성이 거듭 망각을 보장하고, 그 망각 덕분에 매일의 생을 멀쩡한 채로 - 그렇게 보이게 - 살아간다. 여름은 버겁지만, 여름이 끝나면 한 해가 다 끝난 느낌이 든다. 10월에, 시간과 죽음에 관한 이 명상록을 천천히 읽을 수 있어서 위안이 되었다.

 

“육신의 부패가 녹여 없애든 화장으로 태워 없애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루카스(39-65) 로마의 시인.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을 노래한 서사시 『파르살리아(내전기)』를 남겼다.

 

죽은 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고대인들이 고민한 것처럼 나도 고민했다. 사실 선택지는 많지 않다. 예전처럼 지금도 매장할 것인가 화장할 것인가가 있을 뿐이다. 저자가 유물 연구 과학자로서, 세밀한 기록과 역사적 추론을 보고서처럼 들려주어서, 인류가 유골을 어떻게 다뤘는지, 생전의 결속을 죽음 후에도 어떻게 생각했는지, 다양한 공부가 되었다.

 

“우리는 왜 그토록 기억되려 하는 걸까? 그런 노력 끝에 기억되는 것은 무엇일까?”

 

숏폼도 안 보고, 인터넷 접속 시간도 업무를 제외하면 길지 않지만, 그럼에도 사색과 명상을 충분히 할 시간은 부족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숙련되지 않으면, 해당 근육이 생기지 않으면, 소위 정신 활동도 의지만으로 제대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더구나 시간, 죽음, 망각, 기억... 이런 주제들이라면.



 

저자 토머스 브라운이 놀라운 지적 능력과 연구와 관찰과 해독에도 불구하고, 자기 유골의 운명을 알 수 없었듯이, 매일 짧아지는 내 수명보다 세상이 더 빠르게 다채롭게 망할 것 같아 품는 온갖 걱정과 불안 역시 무용할 것이다. 이름이 기억되길 바라거나 유골을 걱정한 적은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삶의 내용을 갖추길 바랐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 만물의 뜻은 무엇인가 (...).”

 

길게 이어지는 저자의 사유를 그대로 받아 적은 듯 긴 문장들은 반갑고 낯설고 때론 어렵기도 해서 좋았다. 한 페이지, 몇 문장을 읽고 낯선 여행지로 떠나듯 오랜 상상을 하기도 했다. 덕분에 휴일 오후 시간은 다른 때와 달리 천천히 흘렀고, 살짝 붉어진 초저녁 하늘을 처음인 듯 반갑게 바라보기도 했다.

 

심호흡과 가을에 좋은, 공들인 초역이 반가운 명상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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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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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케든 되겄제.”

 

읽기 전 준비자세(?)는 비슷했다. 사투리 너무 자주 많이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하는 아쉬움과, 마냥 웃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는 미리 짠함. 그리고 꽤 무거운 아픔까지. 그런데 전작처럼 살짝 당황해하며 때론 배를 잡고 웃으며 읽었다. 정지아 작가 작품의 단 하나의 단점은 순식간에 다 읽고 만다는 점이다. 아깝...

 

그렇다고 재밌기만 한 코미디 같았단 건 아니다. 빨치산 부모를 둔 친구가 없어서 전작에 대한 공감엔 상상과 짐작이 더 컸다면, 이성애가 아닌 방식의 애정 혹은 무정으로 살아가는 지인들이 있어서, 이 작품은 더 쓰리고 아렸다. 너무 깊이 가라앉지 않도록 적절한 때에 현실 언어로 팡팡 등 두들겨주는 작가의 필력이 놀랍고 고맙다.

 

“갸들이 사램을 죽였어, 도둑질을 혔어? 머슬 워쨌다고 지랄옘벵을 떨어싼대? 즈그는 월매나 잘났가니!”

 

익숙하지 않은 말은 옮겨 적는 일도 만만치 않다. 손가락이 버벅거려서 자꾸 오타를 내며 고치다보니 웃음이 난다. 찌니들이 잔뜩 긴장하며 움츠려들었다가 풋, 웃는 장면에서, “무슨 일이든 웃으면 반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는 법”이라는 현자의 명언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해결까진 아니라도 묵직함을 덜어내는 효과는 분명하다.

 

겪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 더 많고, 당사자가 아니면 짐작도 어려운 일도 많고, 평생 살아도 자기 자신도 잘 모를 수 있다. 그래서 다 겪고 나니(?) 수평마을 주민들의 질문들은 오히려 낯선 타자에 대해 가장 솔직하게 가질만한 의문으로 들린다. 특정 인물을 제외하면, 지독한 악의가 느껴지지도 않는다.

 

“치명상을 입혀놓고 음식을 먹인다? 두 행동의 머나먼 간극을 기희는 어떤 논리로도 채워 넣을 재주가 없었다.”

 

찌니들에게 가장 공감하고 마음이 쓰일 거라 생각했는데, 책을 놓고 나니, 베트남에서나 수평 마을에서나 “팔다리가 쑤시도록 일”을 하며 살아온 쑤언이 강렬하게 남았다. 문득 안부가 궁금해지는 인물로 한참 내 시간에 머무를 듯하다. 얼마나 많은 현실의 쑤언들이 아픈 팔다리로 K-한국의 식량 생산을 책임지고 있을지.

 

한 마을 안에 몇 명 안 남았다는 이들의 사연들도 다 오래고 깊고 제각각이다. 사람 노릇 제대로 하며 사는 삶이 무엇인지... 배워지기보다 멀어지기만 하는 갑갑한 형편이 내 삶이지만, 이 이야기 덕분에, 눈앞의 사람을 더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대하자는 결심을 새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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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치 인류세 - 인간과 생태계를 잇는, 인류학의 새로운 자연사
애나 로웬하웁트 칭 외 지음, 김희정 옮김 / 해나무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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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하게 ‘계산’할수록 인류의 미래는 어둡다. 당장 행동해도 안전한 환경으로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망하는 쪽으로만 가속되는 듯해서 무섭다. 인류세 환경문제에 관한 새로운 시각이라 궁금하고 반갑다. 현장에서 관찰하고 이해한 ‘이탈(feral, 離脫)’한 존재들이 전환과 희망으로서 예측불가능성을 보여줄지 기대가 크다.



 

“우리가 내린 정의에 따르면 이탈성ferality이란 인간 프로젝트에 연루되었지만 그 프로젝트의 설계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변화한 인간 외 존재들의 상태를 의미한다.”

 

‘과학 연구’를 무엇으로 이해하는가는 연구자 나름일 수도 있겠으나, 나는 유의미한 과학적 상상력을 갖춘 프로젝트 주제를 제시하고, 현장연구fieldwork를 이행 완료할 수 있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학문의 권위와 진리(혹은 일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연구자에게 연구 활동 과정은 갈수록 더 모욕적으로 변했다. 지원이 없이는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기 때문이고, 현 문명은 즉각 수익으로 환수되는 일이 아니면, 치사할 정도로 생색만 갖추는 출자도 망설였기 때문이다.

 

“‘패럴 아틀라스’는 경험적 관찰에 기초해서 인류세 패치들을 묘사하는 현장 보고서를 지도로 제작한 것이다.”

 

과학전공자로 겪은 경험이 읽는 내내, 책 속 연구자들의 현장 관찰에 이입되었다. 보고서가 충실하고 내용에서 배움이 클수록, 이런 마무리를 위해서 쏟아내어야 했을 모든 어렵고 성실한 끈기가 필요한 시간이 더 생생하게 상상되었다.

 

고공관찰과 거리두기와 평균화와 일반화라는 다소 손쉬운 작업 대신, 관찰 결과를 통해서만 과학적 통찰력을 쌓아올려서, 가속 중인 암울한 인류세의 인프라와 본질을 파악하고, 주체와 과정을 식별하려고 노력하는 연구자들이 존경스럽다.

 

“인류세 현상이 지구 전체에 걸쳐 벌어진다고 해서 모든 것이 전 지구적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더 차분하게 오독하지 않고 배우려 노력했다. ‘패치’라는 명명에서 드러나듯, 연구 결과들은 공간적인 비균질성을 보이고, 이런 분석이 특정 지역의 흥미로운 일화나 예외적인 이야기로 취급당하지 않고, 사회적 생태계의 역동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는지를 잘 알아보고 싶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을 경험했다’는 것이 아니라, 과학 연구에 필수적인 ‘통계’와 시기별 ‘자료’ 등의 탄탄한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렇게 책 속 연구자들은 ““기후 변화” 역시 “지역적 영향의 집합체로 보는 시각”으로 나아간다. 즉, 기후 변화가 단일한 거대 현상이 아닌, ‘패치 현상’이라는 이해다.

 

“세계성은 기후 변화를 이해하는 방법 중 하나에 불과하다. 다른 하나는 패치의 시각에서 보는 것이다.”

 

“세계 전역에서 파괴의 향연이 이어졌”다는 공동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가 이미 살고 있는 “황무지와 폐허”를 알아차리고,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대하는 방식을 함께 찾아보자는 지극히 소박한(?) 과학적 태도를 유지한다.

 

인류의 역사는 늘 정의보다 파워가 이기는 방식으로 움직였고, 좁은 지역에서의 정의조차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그렇게 때문에, 여전히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기적 같다.

 

최근에 발생한 현실의 거대 비극인 환경 재앙에서도, 이제는 상식처럼 들리는 환경 정의에 관한 요구와 배상의 목소리가 나왔다. 기후 위기가 인류 전체의 문제라고 모두가 동등하게 비난받고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상식에도 논리에도 맞지 않다는 이 감각은 패치 연구자들의 태도와 보고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활력은커녕, 흔적만 남은 듯한 용기와 희망도 다 사라질 것 같은 순간들마다 이렇게 힘을 내게 해주는 이들이 존재한다. 고마운 일이다. 패치 연구자들의 경험을 담은 이 책을 매개로, 상호성에 기반을 둔, 책임지는 삶의 윤리를 더 크게 표현하고 현실화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드러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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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노래 - 나무는 말하고 그녀는 듣는다
진재운 지음 / 생각의힘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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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휴休. 많이 좋아하는 한자입니다. 사람이 나무에 가만히 기대어 쉬는 모양, 그 시간. 이 책을 읽는 동안에는 고단함을 옆에 눕히고 깊은 호흡을 하며 쉴 수도 있을 듯합니다.




 

“니카라과에는 그녀의 큰 숲이 있다. 그곳에서 그녀는 홀로 백만 그루의 나무를 심고 있다.”

 

숫자가 가장 중요한 건 아니지만, 백만 그루... 가늠이 안 된다. 씨앗 뿌리기부터 시작했다고 하시는데, 묘목 키우는 일도 옮겨 심는 일도 공장 생산품이 아니라, 변수가 크다. 그 일의 ‘반복’이 백만이라는 숫자보다 더 큰 기적 같다.

 

누군가 내게 종교를 물으면 한 때는 ‘나무교’라고 했던 진심이 무색하게 나무숲과 멀어지기만 하는 내 삶이 다시 불만스럽게 낯설어진다. 곧 떠날 지도 모르는 사람이 열심히 나무를 남기는 이야기, 책으로만 말고 그 숲에 가보고 싶은 기분이 불쑥거린다.

 

“나무마다 사투리가 다 다른 것 알아요?”

 

저자는 과학자다. 그래서 불편하게 아득한 신비주의적 사고나 화법을 구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절개하고 분석하는 과학적 방법론의 한계와 약점을 잘 알고 있어서, 오래 전 자주 만난 다정하고 아름다운 생태주의자 친구들을 생각나게 한다.

 

“오래 살아온 한 생명과 그 앞에 선 또 하나의 생명”으로서, 상실과 실패를 경험한 짧지 않게 산 사람으로서, 저자가 독백처럼 전하는 문장들이 새로 뻗은 부드러운 나뭇가지 같다. 저자보다 덜 살아본 독자로서, 알게 되는 지식마다 이젠 부담과 책임으로 느껴질 뿐 즐겁지 않은 나의 요즘을 잠시 관찰해본다.



 

“우리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가 안다고 말하는 순간, 무엇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는가.”

 

‘무엇을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를 알려주는 과학을 전공하고 내내 배우며 살았지만, 요즘엔 어린이들까지 첨단과학기술 상품들을 능숙하게 사용하고 살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관한 대답은 부재하거나 부족하다.

 

지식 정보는 넘쳐나는데, 욕망을 절제하는 법도 약한 생명을 연민하는 태도도, 미래에 태어날 존재들에 대한 상상력도 부재하거나 부족하다. 지혜를 배우지 못한 기술자들의 세계 같다고 느낄 때도 있다. 생사의 순간에도 멈춰 서지 않는 어리석은 속도전의 세상 같기도 하다.

 

한 그루가 다른 한 그루와 같지 않다는 것을 오래 바라보아야 제대로 구별할 수 있는 것처럼, 인간도 그런 속도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해가며 살아야 살육 대신 평화가 틈입할 가능성이 생기지 않을까. 자발적 디스토피아 구축 속도에 멀미가 난다.

 

“인간은 나무를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 구원받아야 할 존재는 나무일까, 인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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