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숨결에 날리는 깃털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장성주 옮김 / 복복서가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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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의 라방 소식에 설레며

책 사고 댓글 남기고

알람 설정해두고 완독하고

할 수 있는 준비는 다하며 기다렸는데...

 

알람 소리도 못 듣고

라방 날도 잊고 지나버렸다.

그날 밤에는 또 무슨

새롭고 익숙한 돌발이 있었던가...



 

출생 후 생존능력을 갖춰가는 오랜 시간동안

한 인간에게는 그 과정의 온갖 시행착오를

봐 넘겨줄 시공간과 인간관계가 필요하다.

그런 틈이 없고서는 성장 대신 찌그러질 뿐이다.

 

그래서...

이 정도로 치밀한 기억은

잔.혹.하.게

느껴진다.

 

상상에 의한 구상작이면 안도감이 들겠지만

자전 소설이라는 점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서늘해지는

속쓰림 같은 시선과 기억의 통증을 느꼈다.

 

그 날선 진실함이...

마지막 문장까지 이어지는 가족에게만 느끼는 애증,

그 잔인하고 꺼지지 않는 감정의 땔감이자

이 작품만의 압도적인 매력이다.

 

“나는 너무나 오래 기다렸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쓰려고. (...) 아버지에게 우리는 언제나 ‘타인’이었을 것이다. 여자들. 악귀들. (...) 아시아계 사람의 얼굴을 구분하지 못하는 악귀들.”

 

“나는 언제나 순진무구한 금발 소녀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곤 했다. (...) 그러다 나중에는 어머니를 위기에 빠진 여주인공들과 동일시했다. (...) 그렇게 어머니를 아름다움과 고통과 상실의 상징으로 여겼다.”

 

“어머니는 어디에 속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 마치 깃털처럼 바람에 날려 여기까지 왔다는 듯이.”

 

“사랑과 괴로움은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언어에서 같은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남자의 마음을 향해 스스로를 투창처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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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신 - 여순항쟁 이야기
김금숙 지음 / 창비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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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의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 Zum ewigen Frieden>를 철학서 모임에서 읽고, 책 출간 이후 발발한 전쟁이 너무 많아서 아찔했던 기억이 있다. 인류의 오랜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시기가 너무 짧아서, 생명이 예외적인 것처럼 평화도 그런 것인가 싶다.

 

* 내 세대엔 이렇게 불리지 않아서 좀 어색하지만, 외래어 표기법에 '칸트, 이마누엘'로 올라 있고 <우리말샘>에도 '이마누엘 칸트'로 올라 있다.

 

하늘보다 기분이 더 흐리고 지치는 어느 날, 따뜻한 초콜릿 마시며 최애 영화나 다시 보고 싶은데, 여순항쟁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나 말해보려 하니, 3분도 이어나가지 못할 것 같아서 배워보기로 했다. 마른 피보다 어두운 먹색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1948년 10월 22일 이승만 정부는 여수와 순천 지역에 대한민국 최초의 계엄령을 선포했다.”

 

국가 폭력에 다수가 희생된 비극이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 모두 과거면 불안이 덜하겠지만, 방임으로 인한 대형 인명 사고는 이어졌고, 적반하장이나 지지부진한 대응만 이어지는 형편이다. ‘계엄령’조차 얼마 되지 않은 현실이었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 혹은 두려운 울음 같은 기도는, 여순 학살이 한국 전쟁 시기의 보도연맹 사건으로 이어지면 전국에서 자행되면서 무용해지고 만다. 흑백의 표정들이 너무 짙어서, 쏟아낸 피와 눈물이 고인 지면을 넘기는 듯했다.

 

“숱헌 사람들의 무고한 목숨이 아침 이슬처럼 사라졌제. 흰 신을 신었다는 이유로, 머리가 짧다는 이유로, 젊다는 이유로, 그곳에 산다는 이유로, 특별한 이유도 없이 지목되어 총살당했제. 저 어디맨가 여즉도 가족을 만나지 못한 유골이 있겄제.”

 

운이 너무 좋아서, 갖가지 비극을 피해가며 살았다. 세상에는 선하고 따뜻한 이들이 참 많다고 느끼며 살았다. 어쩌면 그럴 것이다. 이만큼 살만한 것도 그런 이들이 애써 만들고 지켜나간 모든 순간의 수렴일 것이다.

 

종교가 없어서인지... 이런 순간에 나는 어떤 가치를 더 굳게 지켜나가겠단 표현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헷갈린다. 그저 이토록 억울한 이별과 죽음이 가득한 시간을 살아낸 이들이, 시신조차 찾을 수 없는 이들을 그리워하며 그들의 영혼을 존재를 ‘믿기로 했다’는 문장을 나도 힘껏 믿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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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집 - 시리아에서 온 소녀 이야기
재스민 왈가 지음, 김래경 옮김 / 양철북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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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도 나는 ‘집’을 찾아 방황 중인 것만 같다. 공문서와 사회적 비용은 명확한데도 문득 여기가 정말 내 집인가... 싶을 때가 있다. 전쟁으로 살던 집을 떠나야했던 이들에게 다음 집은 어떻게 새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일지... 읽기 전부터 몹시 슬프고 쓰리다.



 

“내겐 달리 선택지가 없다. 난 용감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무엇보다 글의 형식이 길고 긴 산문시 같아서, 또 동화 같기도 해서, 또 체험 보고서 같기도 해서 짐작보다 덜 무서워하다 더 불안해하기도 하며 조심스럽게 천천히 읽었다. 이방인으로 살아 본 시절이 내게도 있어서, 덕분에 좀 더 늘어난 사고의 경계에 안도하며 읽었다.

 

한국 사회에는 차별과 멸칭이 너무 많아서, 구분도 지적도 지치도록 먹히지 않아서, 이젠 악의 없이 무감하게 마치 즐거운 농담인 양 쓰는 일이 매일 다반사다. 특히 나이 어린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모른 척 하기 어려울 정도인데, 그래서 더욱 이 책의 화자가 어른 독자도 무시할 수 없는 시선과 사고를 보여주는 점이 반갑고 감사했다.

 

“미국도 다른 모든 곳처럼 어떤 사람들은 그저 잠들고, 도 어떤 사람들은 꿈꾸며 살아가고 있구나.”

 

미국에서 살아가는 시리아 난민의 삶을 구체적으로는 모르고 산다. 모를수록 타인의 삶은 단순한 이미지로 기억되기 마련이라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친구를 사귀고, 낯선 문화에 반응하고, 다양한 불안 속에서도 울고 싶을 만큼 행복한 일도 생기는 일상의 모든 모습이 소중하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사회에 속하는 이들의 모험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삶의 터전과 방식을 모두 바꾸어야하는 상황을 ‘멋지다고’ 봐주는 어린이 친구의 시선이 멋져서, 사라져가기만 하는 희망... 같은 감각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듯도 했다.

 

“쏘아보는 눈초리 하나하나가 내가 저지르지 않은 그 무언가를 사과하라고, 설명하라고 재촉했다.”

 

과학이 상식이 되는 시절이 와도, 어쩐지 사람들은 여전히 ‘해가 뜨고 진다’고 말하며 살 것 같다. 그렇다면, 한 사회에서 이민 온 이들을 동료 시민이라고 정말로 받아들이는 때는 오기나 할까 싶기도 하다. 호모 사피엔스는 분명 하나의 종인데, 세상에 다른 인종은 없는데, 촘촘한 하부 문항들이 온갖 구별을 차별화시킨다.

 

“누구든 뭐라도 해야 하지만 모두가 기다리고만 있다. 다른 누군가가 해주기를.”

 

나는 나이 듦을 다행이라고 여기며 더 자주 변명거리로 삼아서, 누구보다 더 조용하지만 열렬하게 ‘다른 누군가가’ 내 모든 불안의 원인들을 해결해주기만을 바라고 산다. 그 해결이 더디다고 짜증만 부리며 산다.

 

그러니 이런 귀한 문학을 체험하고도 막연히 바랄 뿐이다. “함께 둘러앉아 밥을 먹을 수 있는” 삶이 가능한 사회를 바라는 이들이 더 많을 거라고, 평화는 그렇게 구체적인 일상이 가능할 때만 진짜라고. 고통에 침묵하지 않는 시절도 올 거라고. 전쟁이 그치지 않는 세상에서, 포기하지 않는 이들과 누구든 ‘함께’ ‘뭐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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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자기 뼈의 운명을 알겠는가 - 하이드리오타피아, 유골 항아리 매장에 관하여
토머스 브라운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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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달 전, 올드 월싱엄의 한 들판에서 마흔 내지 쉰 개에 달하는 유골 항아리가 발견되었다.”

 

선친의 2주기가 지났으나 여전히 애도 중이다. 이후에도 사별은 이어졌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300년이 넘는 세월을 지나 발견된 유골 항아리들에도 통증이 먼저 느껴진다. 죽음이란 보편적으로 확실한 사건이지만, 죽음을 맞는 존재들은 개별적인 시간과 장소와 방식을 경험한다.

 

확률로 짐작할 수밖에 없는 수명, 그 불확실성이 거듭 망각을 보장하고, 그 망각 덕분에 매일의 생을 멀쩡한 채로 - 그렇게 보이게 - 살아간다. 여름은 버겁지만, 여름이 끝나면 한 해가 다 끝난 느낌이 든다. 10월에, 시간과 죽음에 관한 이 명상록을 천천히 읽을 수 있어서 위안이 되었다.

 

“육신의 부패가 녹여 없애든 화장으로 태워 없애든 그것이 무슨 상관이랴.”* *루카스(39-65) 로마의 시인.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을 노래한 서사시 『파르살리아(내전기)』를 남겼다.

 

죽은 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두고 고대인들이 고민한 것처럼 나도 고민했다. 사실 선택지는 많지 않다. 예전처럼 지금도 매장할 것인가 화장할 것인가가 있을 뿐이다. 저자가 유물 연구 과학자로서, 세밀한 기록과 역사적 추론을 보고서처럼 들려주어서, 인류가 유골을 어떻게 다뤘는지, 생전의 결속을 죽음 후에도 어떻게 생각했는지, 다양한 공부가 되었다.

 

“우리는 왜 그토록 기억되려 하는 걸까? 그런 노력 끝에 기억되는 것은 무엇일까?”

 

숏폼도 안 보고, 인터넷 접속 시간도 업무를 제외하면 길지 않지만, 그럼에도 사색과 명상을 충분히 할 시간은 부족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숙련되지 않으면, 해당 근육이 생기지 않으면, 소위 정신 활동도 의지만으로 제대로 이뤄지지는 않는다. 더구나 시간, 죽음, 망각, 기억... 이런 주제들이라면.



 

저자 토머스 브라운이 놀라운 지적 능력과 연구와 관찰과 해독에도 불구하고, 자기 유골의 운명을 알 수 없었듯이, 매일 짧아지는 내 수명보다 세상이 더 빠르게 다채롭게 망할 것 같아 품는 온갖 걱정과 불안 역시 무용할 것이다. 이름이 기억되길 바라거나 유골을 걱정한 적은 없지만,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는 삶의 내용을 갖추길 바랐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로 가는가, 만물의 뜻은 무엇인가 (...).”

 

길게 이어지는 저자의 사유를 그대로 받아 적은 듯 긴 문장들은 반갑고 낯설고 때론 어렵기도 해서 좋았다. 한 페이지, 몇 문장을 읽고 낯선 여행지로 떠나듯 오랜 상상을 하기도 했다. 덕분에 휴일 오후 시간은 다른 때와 달리 천천히 흘렀고, 살짝 붉어진 초저녁 하늘을 처음인 듯 반갑게 바라보기도 했다.

 

심호흡과 가을에 좋은, 공들인 초역이 반가운 명상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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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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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케든 되겄제.”

 

읽기 전 준비자세(?)는 비슷했다. 사투리 너무 자주 많이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하는 아쉬움과, 마냥 웃을 수만은 없을 것 같다는 미리 짠함. 그리고 꽤 무거운 아픔까지. 그런데 전작처럼 살짝 당황해하며 때론 배를 잡고 웃으며 읽었다. 정지아 작가 작품의 단 하나의 단점은 순식간에 다 읽고 만다는 점이다. 아깝...

 

그렇다고 재밌기만 한 코미디 같았단 건 아니다. 빨치산 부모를 둔 친구가 없어서 전작에 대한 공감엔 상상과 짐작이 더 컸다면, 이성애가 아닌 방식의 애정 혹은 무정으로 살아가는 지인들이 있어서, 이 작품은 더 쓰리고 아렸다. 너무 깊이 가라앉지 않도록 적절한 때에 현실 언어로 팡팡 등 두들겨주는 작가의 필력이 놀랍고 고맙다.

 

“갸들이 사램을 죽였어, 도둑질을 혔어? 머슬 워쨌다고 지랄옘벵을 떨어싼대? 즈그는 월매나 잘났가니!”

 

익숙하지 않은 말은 옮겨 적는 일도 만만치 않다. 손가락이 버벅거려서 자꾸 오타를 내며 고치다보니 웃음이 난다. 찌니들이 잔뜩 긴장하며 움츠려들었다가 풋, 웃는 장면에서, “무슨 일이든 웃으면 반은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는 법”이라는 현자의 명언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해결까진 아니라도 묵직함을 덜어내는 효과는 분명하다.

 

겪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 더 많고, 당사자가 아니면 짐작도 어려운 일도 많고, 평생 살아도 자기 자신도 잘 모를 수 있다. 그래서 다 겪고 나니(?) 수평마을 주민들의 질문들은 오히려 낯선 타자에 대해 가장 솔직하게 가질만한 의문으로 들린다. 특정 인물을 제외하면, 지독한 악의가 느껴지지도 않는다.

 

“치명상을 입혀놓고 음식을 먹인다? 두 행동의 머나먼 간극을 기희는 어떤 논리로도 채워 넣을 재주가 없었다.”

 

찌니들에게 가장 공감하고 마음이 쓰일 거라 생각했는데, 책을 놓고 나니, 베트남에서나 수평 마을에서나 “팔다리가 쑤시도록 일”을 하며 살아온 쑤언이 강렬하게 남았다. 문득 안부가 궁금해지는 인물로 한참 내 시간에 머무를 듯하다. 얼마나 많은 현실의 쑤언들이 아픈 팔다리로 K-한국의 식량 생산을 책임지고 있을지.

 

한 마을 안에 몇 명 안 남았다는 이들의 사연들도 다 오래고 깊고 제각각이다. 사람 노릇 제대로 하며 사는 삶이 무엇인지... 배워지기보다 멀어지기만 하는 갑갑한 형편이 내 삶이지만, 이 이야기 덕분에, 눈앞의 사람을 더 예의 바르고 친절하게 대하자는 결심을 새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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