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안녕
유월 지음 / 서사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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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이든 조언이든, 그건 하는 사람의 것이지요, 그 사람이 던진 말을 받을지 말지는 김 선생이 선택하는 것일 테고.”

 

왜 이토록 몰입되는지 문득 의아해하며 빠져든 작품이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마주 앉았지만 튼튼한 창살 너머로 듣는 듯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그 점이 감정에 체하지 않고, 끝까지 이야기를 읽게 돕는다.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남의 직장(?) 풍경도 그곳이 법원이라서 더 기막히고, 너나없이 경험하는, 이 사회에 만연한 촘촘한 차별과 불합리와 불의를 소설 속 에피소드마다 환기하고 절감하니 한숨이 푹푹 나온다.

 

해진 마음을 끌어안으며 다짐했다. 누군가의 말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겠다고, 일로 만난 사람에게 마음 따위 주지 않겠다고, 다른 사람에게 나의 어떤 것도 맡기지 않겠다고, 쉽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고, 참지 않겠다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지키겠다고.”

 

열심히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착하게 내 몫 이상을 해내며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보상과 감사와 인정 대신 결과로 자리한 아픔과 상처에 심장이 저릿하다. “마침내라고 편한 숨을 내쉴 수 있는 순간은 왜 이리 야박한 건지. “안녕을 고하며 패턴을 끊고 바꾸고 다르게 살아보는 일은 왜 이리 드문 건지.

 

타인들의 아픔과 상처를 들어 온 시간이 도연의 힘이 된 걸까. 나라면 외면하거나 포기했을 고비에도 도연은 연대를 놓지 않는다. 우정을 버리지 않는다. 그럴 수 있는 결정에는 자신의 경계를 살짝이라도 허무는 용기가 필수다.

 

작고 사소한 사랑이 얼마나 자신의 곁을 스쳐 갔을지 도연은 알 수 없었다.”

 

뒷목이 뻐근할 정도로 긴장해야하는 상황이 적지 않지만, 역시 이런 희망이 파릇한 이야기가 좋다.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지 않아도 끊어지지 않는 이웃과 동료의 태도로 타인을 지켜보는 이가 좋다. 재빠른 계산과 이익을 위해서는 못 할 게 없다는 태도보다 윤리적 고민과 성찰이 있는 삶이 더 아름답다.

 

여름이라도 이런 따뜻한 이야기는 환영이다. 지난겨울의 광장에서처럼, 괜찮지 않은 것들. (...) 징징대고 싶은 것, 힘든 것, 견딜 수 없는 것, 더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누구나 계속 이야기하며 살 수 있기를.

 

좋은 방향으로 키를 맞춰두지 않으며 더 쉽고 편안한 나쁜 방향으로 이끌려갔다. 매일 어떤 모습으로 사는지, 곁에 어떤 사람을 두는지에 따라 삶의 모양도 조금씩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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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과 마법사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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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처럼 커서 곰개, 고마, 가마, 가문, 거문, 이런 말은 다 곰이라는 뜻인데, 모두 크다는 소리야.”

 

배명훈 작가의 오랜 팬으로서 제목이 낯설고 짐작이 어려웠다. 익숙한 SF 장르도 익숙한 판타지 소재와 형식도 아니다. 매번 그렇듯 학위논문보다 자료조사를 더 많이 하고 난 창작물,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난다.

 

1부를 읽으면서는 집중과 노력이 꽤 필요했다. 사극에 별로 익숙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처음 만나는 단어들이 적지 않았다. 사전 중심의 빠른 게임 같은 전개가 아닌 차분한 묘사와 서술이 치밀하게 얽힌 이야기다.

 

그저 살아 있기만 해도 반역이 되는 사람도 있다. 잠깐 숨통이 트이기만 해도, 발을 뻗고 자는 날이 아주 조금 길어지기만 해도.”

 

끊임없는, 피할 수도 없는 권력의 위협 속에서, 생존을 위해 제대로 된 삶을 거의 다 포기해야하는 깊은 함정 같은 상황이 실감나게 표현된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크다. 이렇게 오래 억눌리면 무엇을 계기로 각성할지 기대가 커진다.

 

자료와 지식 정보가 탄탄한 작가는, 가볍고 빠른 속주 대신 마치 그물 밑을 기어서 빠져나가는 고단함을 느낄 만큼 정교하면서도 무리 없는 자연스러움으로, 독자를 현실감 있는 이야기 속으로 더욱 깊이 끌어들인다.

 

“1021. 이제는 기억조차 전해지지 않는 고대 천문학의 가장 중요한 숙제. 그보다 짧은 어떤 주기로도 대비할 수 없는, 번거로운 주기의 숨겨진 의미.”

 

제목의 기병과 마법사가 어떤 존재들인지 궁금했다. 순전한 창작물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존재한 이들처럼 느껴지는 지점이 놀랍다. 기록이 없던 시절을 작가가 발굴해서 시각 정보로 전해주는 듯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진다.



 

상상 불안과 위협에 스스로를 괴롭히다, 망상과 모함이 날개를 펼쳐 제가 아닌 다른 모든 일들을 해치는 권력자가 짜놓은 모진 그물 같은 세상에서, 약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그리 다양하지는 않다.

 

다만, 연결되고 연대한 개인들은 유무형의 힘들을 독점한 소수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만은 현실에서도 판타지에서도 같은 희망이다. 겨우 한 표만 행사할 수 있는 주권자이나 그 결과로 현재와 미래 모두가 바뀔 수 있는 것처럼.

 

웅숭깊은 이야기가 품은 의미와 작가가 전하는 개념을 더 선명하게 독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어떤 뜻인지 짐작하는 것만으로도, 일희일비를 잠시 잊고 오지 않은 행복을 상상해보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역시 배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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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죄
존 위티 주니어 지음, 정두메 옮김, 김형태 감수 / 한길사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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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주된 목표는 성경과 전통에서 제기된 혼외출생의 원칙에 대한 찬반양론들을 다시 따라가보는 것이다.”

 

대학이 기업 인력 충당소로 빠르게 변모하는 시절에, 연구기관인 대학에서 진행된 프로젝트의 결과를 만나는 일은 감동적이다. 더구나 그 주제가 멸칭으로 사용되는, 유구한 구조적 차별을 받은 혼외자에 관한 인식, 그 유래를 배워 볼 기회라면 더 반갑다. #혼외출생자의원칙 (doctrine of illegitimacy)

 

역사적으로 혼외출생으로 고통받은 이들이 아주 많을 것이며 관련 차별과 혐오와 배제가 사라진 적도 없다. 이 책은 이런 방식으로 성(sex)관계를 정의하고 규제하기 위한 절차들을 왜 그리고 어떻게 고안해왔는지를 깊이 들여다보는, 법과 종교와 사회를 아우르는 연구 결과다.

 

교회는 교회법, 고해, 교회법정 등의 장치를 통해 교인들의 내적 삶을 감독했고, 국가는 성범죄에 대한 정책, 기소, 처벌 등의 장치를 통해 시민들의 외적 삶을 감독했다.”

 

덕분에 서구의 고전 문헌과 성경을 탐구한 내용, 고대 로마법, 중세 캐논법, 영국의 코먼로, 미국의 혼외자법에 대해, 통시적으로 읽고 배울 수 있었으며, 현대사회에서 갈등의 형태로 나타나는 관련 문제의 유래와 연원에 대한 이해가 생겼다. 한 권의 책이 전달할 수 있는 지식 정보의 양질 모두가 대단하다.

 

조급한 심정에 늘 시야가 좁은 독자인 나는 늘 성급하게 실망을 거듭한다. 제퍼슨이 미국 독립선언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양도할 수 없는 특정한 권리들을 부여받았다고 쓴 뒤, 미국 법에서 친자와 혼외자가 똑같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완전한 인정을 얻기까기는 200년이 걸렸다.

 

입양과 관련된 제도적 약점과 불완정성이 존재하고, 변화란 대개 아주 고단한 노력의 산물이다. 그럼에도 태어난 존재들에게 사회가 제도적 지원을 최대한 제공한다는 지향만은 선명하다.

 

다만, ‘임신과 동시에 해당 자녀를 보호해야할 책임이 생긴다거나, ‘무책임하게 임신하는 부모에 대한 자격 문제라거나, 자녀의 임신과 양육이 결혼제도 하에서 가장 효과적이고 권장될 방식이라는 내용에는, 단번에 동의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반박 주장을 제대로 할 지식 배경도 없지만.

 

혼외자법의 가장 주된 요점은 진정한 상속자가 누구인지를 가리는 것이었다.”

 

이견과 질문들에도 불구하고, ‘출생한 방식 - 자신이 알 수 없던 - 만으로 죄악을 부여받고, 이후의 모든 기회를 상실하는 것은 정당하지도 필요하지도 않다는 것에는 전면 동의한다.

 

날마다 새로운 차별과 혐오가 바이러스보다 빠르게 변형 전파되는 시절에, 일상적으로 흔하고 오래된 차별과 혐오에 대해 깊이 배워보는 기회가 든든한 격려와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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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억 번째 여름 (양장) 소설Y
청예 지음 / 창비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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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비출판사로부터 제공된 도서입니다.

 

꽃은 죽여도 이미 온 여름은 저물지 않아.”

 

뜻밖에 아담한 양장본 소설을 며칠에 걸쳐 읽었다. 작가가 작품 세계를 아주 정교하게 만들었기 때문이고, 전하려는 메시지를 촘촘하게 눌려 담아두었기 때문이다. 몇 쪽을 읽고 쉬며 문장을 곱씹고 인물들을 더 헤아려보려 애썼다.

 

폭력과 가해가 일상인 현재를 보나, 전쟁이 없었던 시기가 거의 없는 인류사를 봐도, 평화로운 미래라는 낙관은 망상에 가까운 일일 것이다. 그래도 문학에서 만난 미래 세계가 여전히 계급적, 차별적, 폭력적인 것은 매번 아릿하다.

 

참 더웠다. 거짓말을 할 때도, 진실을 말할 때도 여기에는 온통 더위뿐이다.”

 

행동하지 않으면 바라는 어떤 변화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노력에는 용기가 필요하고, 대부분의 경우 노력의 결과는 좌절이다. 이 진지한 작품은, 생존이 이토록 기나긴 치욕이라는 것을 참 차분하게 보여준다.

 

주인공 이록의 고민은 현실의 많은 이들의 고민이기도 하다. 두렵기 때문에 잘못된 것을 알면서 저항하지 못하는 것, 떠나지 못하는 것, 너무 오래 고민만 하고 행동하지 못하는 것... 그리고 자신이 쓰임새가 있기를 소망하는 것.

 

원래 세상 모든 것은 서로를 보완한단다. 그러니 거창한 행복이 필요로 하는 것은 시시한 일상이야.”

 

가장 강력한 동력은 욕망일지라고, 가장 간절한 동력은 이번에도 사랑이다. 드물고 작고 증오보다 소란스럽지 않아서, 그 아름다운 무늬가 만들어낸 세상은 속삭임처럼 전해지고 빨리 잊히기도 하지만, 소멸되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복잡한 뇌 시스템을 진화시켰지만 자기 자신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집단생활이 생존에 필수인 생물학적 존재이나, 타인과의 소통에도 능숙하지 않다. 그럼에도 가장 확실한 의사전달 수단은 역시 언어이다.

 

언어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

 

읽으며, 내가 사용하는 언어, 사회에 유통되는 언어, 권력자들의 언어를 생각해보았다. 이기고 죽이고 쟁취하자는 데일 듯이 달궈진 흉기가 남발한다. 우리의 일억 번째 여름도 지나면 선선한 가을이 올까. 인류는 생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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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한다는 것은
김보미 지음 / 북하우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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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사소한 것을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이 작은 해금이 알려주었다.”

 

덕분에 해금’, ‘정악’, ‘산조등에 관해 배우고 영상을 찾아보았다. 아는 바가 전무피해서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즐거움을 크게 느꼈다. 그 시작과 계기가 이렇게 맛깔스러운 이야기라서 어렵지 않고 재밌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게다가 저자는 음악이야기에만 좁고 깊이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무엇을 하며 산다는것에 대해, 그 밑바닥에 놓인 것에 대해, 그리하여 각자의 조각이 모여 만든 무늬로서의 삶에 대해 차분한 음조로 전달한다.

 

효율과 속도가 중요한 세상에서, 나 역시 시간을 아까워하며 조급해하는 기분으로 사는 중에, 낯설어서 읽는 속도가 느려지는 책을 만난 시간이 입원치료처럼 도움이 되었다. 담백한 문장들에서 고요하고 도저한 위로를 받았다.

 

정말 복잡하고도 요상한 악기였다. (...) 국악기를 만드는 8가지 재료, 즉 팔음(八音) - , , , 대나무, 바가지, , 가죽, 나무 - 이 다들어간 악기라고 했다.”

 

이제는 변화와 새로움이 반갑지만은 않았는데,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고도 싶다. “정형화되지 않은 감각들을 어떻게 소리로 표현해낼 수 있단 말인가. “감정의 포자들을 소리로 옮기는일이란 표현 앞에서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보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삶의 면면은 얼마나 많을 것인지, 무언가를 배우는 태도가 곧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며 세계관과도 같다는 생각을 하면, 이렇게 부족한 채로 살아가는 내 삶에 아찔한 기분이 든다.

 

정심정음(正心正音), 소란스러운 기분으로 단정한 소리를 낼 수야 없지 않을까. 성장하지 못하는 사람의 연주가 깊어질 수 있을까. 세상만사가 그렇지 않은 것이 없지만, 관계 맺기와 변화가 울림과 떨림으로 가닿는 것이 음악 연주라고 이해한다. 시간(시대)의 구분조차 무의미해지는.

 

내가 회복되면 우리가 관계하는 이 사회도 변할 수 있지 않을까? (...) 어떤 음악은 사람을 살리기도 하니 말이다.”

 

살다보면 상처투성이가 되기도 한다. 때론 다친 것을 모르기도 한다. 음악은 그 상처의 감각을 예민하게 되살려, 치료와 회복을 진단하고 돕는 의료행위일 때가 있다. 인류 문명에 예술은 위무의 역할을 태초부터 해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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