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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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종교인들은 많지만, 종교는 가져본 적 없다. 그래도 기도하는 방법은 시인에게 배웠다. 걷기 명상을 좋아하니, 걷다가도 문득 기도할 수 있는 이 방법이 좋다. 살아갈수록 모르는 것만 더 많아진다는 슬픔을 나눌 형편이 아닐 때는 더 좋다.

 

2014년에 처음 배웠으니 어느새 12년차 기도쟁이가 되었다. 문득 낯설고 익숙하기도 한 것이 삶 자체와 닮았다. 봄꽃들이 진 자리마다 봄이 왔다 감, 이라고 적혀 있다. 남은 꽃잎들이 더 적은 하늘 어디에서, 다시 꽃잎 하나가 떨어진다. 기도하고 싶은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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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 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라고 묻곤 했다. (...) 나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존경하는 친구가 말했듯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관(世界觀)이 아니고 세계감(世界感)이다. 세계와 나를 온전하게 느끼는 감성의 회복이 긴급한 과제다. 우리는 하나의 관점이기 이전에 무수한 감점(感點)이다.”

 

이렇게 모아놓은 조금은 낯선 낯익은 이야기가, 오래된 기도 같은 이야기가 다른 삶, 다른 세계를 상상하는 사람들과 손을 잡았으면 한다.”

 

2014년 봄 이문재 시인의 말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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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단
정보라 지음 / 상상스퀘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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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속에서 계엄군은 대화나 협상이 통하지 않았다. 군인들은 종이 피켓 한 장을 손에 들고 거리에서 행진하는 사람들에게 실탄을 발사했다.”

 

청청이 패션이라는 말에 격세지감(?)을 크게 느낀 적이 있다. 내게 청청은 끔찍한 폭력의 상징이라서 명명도 실제 착장도 보기가 편하지 않다. 대단한 희생과 피해를 감수하면 산 당사자는 아니지만, 한국근현대사를 필수과목처럼 배우며 살았다. 그래서 정말 역사가 된 줄 알았다. 그런데...

 

뇌가 이해를 못했다. 뭐라는 거니... 계엄?! 환시를 보고 환청이 들리는 건지, 가짜뉴스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친구들 연락이 들이닥치자 현실감도 함께 찾아왔다. 바로 국회로 달려 간 가족 때문에 벌써 울고 있는 친구, 나처럼 일종의 쇼크 상태로 멍해진 친구, 분노에 차서 내란 수괴는 사형이라고 해당 법령을 찾아 알려주는 친구... 그 밤이 어떻게 지났는지.. 기억 속에서도 혼란스럽다.

 

총성, 핏방울, 쓰러지는 사람들의 모습이 휴대폰 화면을 통해 그대로 전송되었다.”

 

신경이 찢어질 듯 긴박하고 결정적인 그 밤이 지나 계엄은 해제되었지만, 수면도 정신도 챙길 새가 없이, 재시도를 막고 제대로 처벌하며 사회 공동체를 지키고 바꿔나갈 거대한 일은 막 시작되었다. 202412, 겨울이 더 깊어지는 계절에.

 

지금은 20264월이다. 재판()은 아직 진행 중이고, 명명백백하게 내외란 음모를 다 밝히고 있는 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민주적 절차를 통해 선출한 자들의 온갖 헛소리를 매일 들어야 하는 악몽 같은 시간도, 기세등등하던 다종다양한 불법 세력들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된 것도 다행이다.



 

연대하는 동지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소설이라서 현실보다 더 무서웠다. 고문과 살해 장면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며 겨우 읽었다. 그리고 계엄의 밤 이전부터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오래전부터 싸우고 있었던이들을 다시 떠올렸다. 이 정부는 어떤 기대들을 배반하지 않을 것인지 배반할 것인지도. 사는 일이 곧 저항인, 그래도 계속해서 좀 더 좋은 날을 기다리고 만들어 나가는 이들을 떠올렸다.

 

밀도 높은 시절을 사느라 우리 모두 힘이 들지만, 이런 기회가 흔한 것은 아니니까, 부디 미래를 위한 설계를 제대로 잘 해나가길 조마조마하게 지켜본다. 그리고 그 설계도에 따라 삶의 실질적 풍경을 바꿀 지역 정치의 지형도와 내용도 바뀔 수 있길 기대한다. 그 모든 희망과 변화의 주체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꼭 해치우면서.

 

투쟁은 헌법에 보장된 권리이지만 내가 지키기 않으면 빼앗기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란이 나에게 남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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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
유시민.김세라 지음 / 은빛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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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산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에요. 우리나라 역사가 이렇게 흘러왔다는 걸, 국민들이 이렇게 고생했다는 걸 말하고 싶은 거예요.”

 

특별하다. 기쁘다. 오랜만에 이런 기백*을 느끼는 분이 살아 낸 삶을 들었다. 왕조 말기, 식민지, 내전, 독재, 폐허, 가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재난을 그토록 단시간에 겪으며 살아낸, 내 조부모님 세대의 이야기를 다시 만난 듯했다. *기백氣魄: 씩씩하고 굳센 기상과 진취적인 정신. 몸 백

 

그래서 천천히 아껴 읽었다. 그럴 수 있게 정성스럽게 자료 조사와 각주을 달아주어 감사하고 큰 도움을 받았다. 자신의 삶을 우리 역사를 적은 일이라고 선명하게 인식하는 분, 대단한 성취를 해내서가 아니라, 가족사와 개인사도 민족사라고 증언하는 분이라서 읽는 동안 나 역시 역사적 동참을 하는 기분이었다.

 

역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는 게 다 역사예요. 우리가 지금 이렇게 만난 것도 다 역사가 되는 것이지요.”

 

생전에 할머니께 듣던 다양한 여자들의 이야기를 지면에서 다시 만나 기분이 들고, 그렇게 자긍심도 집요함도 끈기도 용기도 큰 존재들이 있었다는 걸 오래 잊고 산 기분도 든다. 우리 가족들이 남편 살려 달라고 호소하기만 한 게 아니라 그놈들이 조작한 걸 모두 파헤쳤어요라고 자부심을 느끼는 동료 시민을 만난 감사도 크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되지 못한, 발치도 못 미치는 나이만 먹은 나를 돌아보게 된다. 어째 이럴까... ... 게으르게 산 것도 아닌 듯한데... 기대 수명에 기댄 변명을 오늘의 다짐처럼 기록해보다. 어쩌면 나도 여한이 없다고 느낄 생의 마지막 시간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나한테 주어진 것으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았어요. 아무 여한이 없어요. 아무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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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치동 1등급 고미정이 망하면 우리학교 소설 읽는 시간
우신영 지음 / 우리학교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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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 고시라 불리는 영어 레벨 테스트를 앞둔 유치원생부터 암소고시를 준비하는 초등학생들까지, 10월이면 이 골목은 키즈 카페가 되었다.”

 

초가공 식품으로 채워진 매대에서 고르고 삼킬 짧은 시간, 제한된 선택의 자유만 누리고 사는 아이들, 그건 거대한 식품 산업과 허술한 사회 시스템이 합작한 삶의 풍경이다. 식사만 그런게 아니라, 나머지 시간은 지옥 같은 입시 공부에 시달린다. 단 한 번의 실패가 남은 삶을 결정한다는 무서운 협박에 익숙해진 채로.

 

K- 뭐뭐뭐 등이 찬란하게 각광 받을 때마다, 고통 속에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어린이들 생각을 한다. 이런 세상에서 소위 어른들이 참 무감하구나,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부족하구나. 그건 내가 사랑하는 십 대 두 명이 늘 겹쳐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시에 그건 거듭되는 악몽처럼 멈추지 못한, 그래서 십대들을 망가뜨리고 죽게 만드는 한국 사회의 성장과 성공의 방식에 대한 깊은 불만과 고민이다.



 

제목보다는 덜 서늘하고 더 생동감이 있고 더 다정한 내용이라서 읽을수록 안도감이 퍼진다. 작가가 아이들을 염려하며 보내는 간절한 기도처럼, 이토록 척박한 토양에서도 이야기 속 아이들은 말랑하고 따뜻한 우정을 피워내고 나눈다. 소설이라서 아쉽고 동시에 소설이라서 누군가의 상상력과 희망에 더 다채로운 불을 피울 수 있을 거란 기대가 함께 든다.

 

꿈 없음, 그러니까 무몽증(無夢症)은 이 동네 아이들 사이에 도는 전염병이었고, 대치동은 무몽동이었다.”

 

63일은 전국동시지방선거일이다. 지자체장과 교육감을 새롭게 선출한다. 삶의 뿌리를 더 튼튼하게 하기 위해서는 국회위원이나 대통령선거보다 더 중요한 선거일 수 있다. 지자체와 교육시스템은 한국에서 가장 깊고 크고 멀리 보는 공동의 고민과 계획 재정립이 필요하다.

 

그 기회가 대치동으로 상징되는, 4세부터 잠을 줄이고 시험을 마주하는, 한국의 교육 풍경과 일상의 풍경과 굳은 인식을 바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저항과 관성이 한반도 지각 변동에 버금갈 것 같지만, 절망을 반복할 새 이유는 없다. 파란만장해서 더 선명한 이 이야기를 통해 어른 독자도 청소년 독자도 변화를 바라게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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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파란 - 제19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47
유지현 지음 / 창비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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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인류의 모습으로는 이 지구에서 살아갈 수 없다.”

 

지구가 물에 잠겼다. 핵폭탄으로 절멸되지 않고 인류는 수중 생활이 가능하게 진화했으니 지금 상상하는 미래보다 더 낙관적인 설정이라고나 할까. 그래도 상당히 개연성 강한 미래 풍경을 엿보는 것 같아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미래에는 이런저런 것들이 달라질 거라고 바라는 것들 중 더 간절한 것은, 어린이들을 이토록 괴롭히는 경쟁과 평가 시스템이다. 그래서 여전히 기록과 등수와 진로로 인해 아프게 흔들리는 내용이 꽤 쓰리고 아프다. 거의 모든 SF 영화에서 여전히 전쟁과 폭력을 일삼는 장면들을 보는 익숙한 절망 같달까.

 

우리 엄마는 나에게 뭐든지 선택할 수 있는 나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 열아홉은. (...) 무언가를 냉큼 그만두기 어려운 나이라는 거였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계속 시도하는 일은, 그 실패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가능하다. 그래서 두 번의 기회조차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 비용에서 더 결정적인 것은 때론 돈보다 시간(나이)일 때도 있다.

 

한시적인 기회란, 조바심을 부르고, 잘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기면 뭐라도 재미있게 하기 어렵다. 어쩌면, 나이가 들어서도 자기가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방황하는 어른들은, 충분히 시도도 실패도 해보지 못한 성장기에 그 원인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저 견디다가 점점 더 깊이 가라앉게 된 슬픈 존재들.

 

문제를 고치겠다고 지난 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계속 나아가야 했다. (...) 어디에 도달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주인공은 영웅적 성공을 전시하지 않지만, 주저앉지도 않는다. 그 설득력있는 변화가 이 작품을 좋아하게 만든다. “아무 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라는 무시무시한 자유의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계속 살아보는 것이다. 아무리 상상해도 짐작해도 공부해도 그 도착지를 미리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구가 물에 잠겨도, 다름이 차별이 되는 일은 있다. 이 작품은 한 개인의 고민에만 친착하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유려하고 은근하나 강력한 설득을 펼친다. 일상의 모든 계기와 기회를 통해, 서로 직접 만나고 뭔가를 함께 하면서 서로에게 익숙해지면 된다고. 삶을 배우지 말고 겪으라고.

 

지나간 시대는 소멸하지 않는다. (...) 전해진 과거의 것들이 세상에 계속 남아서 어딘가를 메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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