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이산 어록
손인순 지음 / 포럼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몇년 전서부터 다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다산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그가 어버이처럼 생각했던 군주! 정조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그의 생각이 묻어나는 책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일득록'!! 생소한 책이었다. 정조가 책일 읽고, 신하들과 대화한 것들을 모아서 기록한 책이 일득록이다. 매일 읽기를 썼고, 이것이 '존현각일기'와 '일성록'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정조는 '일득록'도 작성했다.정조 그의 엄청난 독서력과 기록 정신은 정말 신기! 그 자체이다. 애민군주, 정조의 생각을 읽어 보자.

 

1. 독서광 정조!!

  조선시대를 통털어 책읽기를 즐긴 왕을 꼽으라면, 조선전기는 세종이요, 조선후기는 정조를 꼽을 수 있다. 정조는 책을 어떠한 순서로 읽었을까? 그는 경전을 중심으로 하고, 역사책을 먼저 익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책과 경전을 같이 두루 읽어야 세상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정조의 생각은 지금의 나의 생각과 일치한다. 대학을 다닐때만 하더라도 역사책만 두루 읽으며 세상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단히 역사책을 읽었다. 그러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면서 역사의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면서 심리학책과 철학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심리학을 통해서 인간을 이해하고, 철학서적을 통해서 인생의 지혜를 얻어갔다. 나의 독서는 자연스레, 역사와 심리학, 철학을 머릿속에서 엮어가는 방향으로 이뤄졌다. 철학을 현실과 괴리된 학문으로 생각했던 내가, 철학을 통해서 역사와 세상을 꿰뚫어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역사와 철학, 심리학 책들은 우리가 항상 옆에 두고 읽어야할 보배이다.

  그럼, 정조는 역사책을 읽을 때, 가장 경계해야할 점이 무엇이라 했을까? 사사로운 생각을 조심하라 했다. 유명인이 말을 하면, 의심할 만한 것도 옳은 것으로 이해하고, 명성이 보잘 것 없는 자는 취할 만한 것도 싸잡아 나쁘게 평가하는 세태를 조심하라고, 정조는 말하고 있다. 문학의 거두가 성추행을 했는데도, 이를 쉬쉬하는 것은 그가 유명하기에 흠결이 있더라도 덮어 주자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일 수록, 힘없는 사람의 말은 좋은 말이라도 귀담이 들으려하지 않는다. 문학계 뿐만 아니라, 학문세계의 권력도, 유명한 스승 밑에서 배운 자들은, 그가 스승이기에 그의 학설을 함부로 부정하려하지 않는다. 정조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 사람의 배경에 집중하여 그사람의 진면목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고!!

  조선후기는 성리학이 절대화되고 교조화된 시기였다.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한 사실을 떠올린다면, 성리학 이외의 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자칫하면 이단을 공부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런데, 조선후기의 군주, 정조는 장자를 인용했을 뿐만 아니라, 금강경 주를 인용하기도 했다. 성리학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장자와 금강경까지 섭렵하는 그의 넓은 시야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럼, 정조는 암기력도 좋아서 책을 많이 암기했다. 그럼 그는 몇번 이나 읽었을까? 10번이면 충분할까? 아니 너무 적다고? 그런데 정조는 '마음이 바르면 어찌 열번이나 일어야 외워진단 말인가?'라고 반문한다. 책을 10번 이상 읽어도 많이 잊어버리는 나로서는 정조의 물음이 황당하기까지하다. 정조대왕님! 대왕님의 총명함으로 타인을 재단하면 곤란합니다. 저와같은 우매한 백성은 어찌하란 말이십니까?

 

2. 정조와 혜경궁의 마음을 읽다.

  '느닷없이 화를 내는 병통이 많다.' 정조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탓닛한 스님이 우리는 화를 어린아이 다루듯이 하라했다. 어린아이가 울면, 혼부터 내기 보다는 왜? 우는지 물어야한다. 화를 내는 사람을 본다면 그 사람이 왜? 화를 내는지, 그의 무의식에는 무엇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한다. 12살의 어린나이에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야했던 정조! 그의 가슴에 울분이 얼마나 컸겠는가? 이를 억누르고 성군이 되어야했다. 그러나 무의식속으로 억누른 분노가 억누른다고 잠잠히 있겠는가? 그의 분노는 느닷없이 화를 내는 병통으로 표출된다. 정조의 위대성은 그러한 병통을 스스로 고치려 노력했고, 그 분노를 딛고 성군이 된 것에 있다.

  '일은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고, 말은 다하려고 하지 말라' 이 글을 정조는 벽에 써 놓고 자신을 살폈다. 자객이 난입하는 밤을 지세워야했던 정조는 밤새도록 책을 읽었다. 그러하기에 누구보다 많은 독서를 했고, 학문은 신하들보다 한참은 위였다. 정조의 눈에는 신하의 일처리가 완벽해보일리 없다. 정조는 신하에게 완벽하기를 요구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말은 다해서는 않된다. 노론 벽파가 조정을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신의 감정을 모두 쏟아낸다면 노론의 쿠데타를 초래하게 된다. 정조는 살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감정을 절제해야했다. 원수와 웃으며 궁궐에서 만나야했다. '평생에 하지 않은 것이 있은 뒤에야 비로소 남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한 정조! 아버지의 원수를 아직 일망타진하지 않은 뒤에야 그 누구도 못한 조선왕조의 개혁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현실의 힘을 가진 노론 벽파를 일망타진하지 않고 있지만, 왕권을 강화시키는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여 언젠가는 천개의 강을 비추는 성군으로 우뚝서겠다는 포부를 정조는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면서 비를 만나자, 비 때문에 행차가 더디어진 것을 오히려 기뻐한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사랑이 비가오는 현실도 기뻐하게 만들었다. 일생을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아버지의 원수에 대한 분노를 안으며 살아야했던 인간 정조의 아픔이 느껴진다.

  혜경궁 홍씨는 역대 왕들의 제도 수십권을 언문으로 번역하고 손수베끼기 까지했다. 왜? 역대 왕들의 제도를 번역하고 손수베끼기 까지 했을까? 혹시 정조의 개혁정치에 참고자료로 제공할 의도에서 한 작업이 아닐까? 자신의 남편이 하지 못한 제왕의 모습을, 아들을 통해서 보고 싶었던 혜경궁의 바램이 역대 왕들의 제도 번역으로 나타난 것은 아닐까?

 

3. 시대를 읽다.

  '지금 사람이 사리에 밝지 않은 것은 글을 읽지 않아서이다.' 정조대왕의 말이다. P를 위한 집회에 나오는 노인들을 보면서, 정조대왕의 말을 해주고 싶다. 우리나라 10대의 학습능력은 세계 최고를 달린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은 20대 초반에 꺾이기 시작한다. 30대 후반을 넘어서서는 세계 평균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여, 50대가 되면, 하위권으로 밀려난다. 10대에 열심히 공부를 시키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책을 읽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자신이 10대에 배운 지식과 신문으로 주입된 지식이 세상의 진실이라 믿는 노인들이 양산되는 비참한 현실을 우리는 직시해야한다. 저 불쌍한 노인들에게 무슨 대화와 설득이 가능하가?

  정조는 크게 간사한자(대간)은 용남해서는 안되며, 조그만 허물이 있는자(소과)는 용서해야한다고 말한다. 대간을 용서하면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이요. 소과를 용납하지 않으면 온전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조는 우리가 적폐세력을 왜? 처단하지 않으면 안되는지를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 대간이 법원에 의해서 풀려나고, 소과는 법에 따라 엄벌에 처해지지는 않는지 생각해본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던 지강원이 지금 이시대에는 없을까?

  그럼 정조는 소과를 저지른 신하를 어떻게 깨우쳤을까? 책을 베고 자는 규장각 각신에게 정조는 복숭아를 소반에 담아 선물하였다. 복숭아는 맛있게 먹고, 소반은 남겨서 경계토록한 정조!! 매보다는 따뜻한 마음으로 신하를 대했다. 보통의 갑질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약한자에게 호통을 치면서 쾌감을 얻으려한다. 정조는 '사람은 언어로 한대의 쾌감을 얻으려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정조는 마부에게도 이놈 저놈이라 부르지 않았다. 강자가 약자의 소과는 불같이 호통치면서, 자신보다 강한자의 대간은 용서하는 현실!! 갑질하는자여! 정조의 말을 귀담아들어라!

 

4. 정조의 사생활과 잡설

  우리는 조선시대 양반들이 도교의 양생법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이를 조선의 왕도 했을까? 조선시대 양반들이 했던 양생법을 정조도 했다. 취침전에 두발바닥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기도 했으며, 담배를 피우더라도 침을 뱉지 않았고, 머리를 많이 빗었다.

  정조의 개혁정책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화성건설이다. 정조는 화성건설에 인중기와 치원거를 사용했다. 신하들이 문집에 이들 기구를 싣자고 주장했지만, 정조는 백성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아니기에 실을 필요가 없다며 거절한다. 백성의 성쌓는 고통을 줄여준 기구가 백성을 위해서 왜? 필요하지 않겠는가? 정조를 존경하지만, 정조의 이번 의견을 동의할 수 없다.

  한편, 정조는 경기 산군에 장용영의 산군 2초를 두고 둔전을 설치한다. 이는 정전제와 뜻을 같이한다고 정조는 말한다. 장용영을 운영하면서 그 운영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정조는 다양한 토지개혁 방법을 모색한다. 우리는 실학자들의 토지개혁론과 정조의 개혁정치를 분리해서 배우고있다. 박제가를 비롯한 많은 실학자들이 정조시대 활약했다는 점에 유의하여 조선시대 실학자들의 개혁론과 정조의 개혁정치를 유기적으로 연구해야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한다.

  마직막으로 조선시대 잠채의 성행, 민영광산의 발달을 알 수 있는 생생한 글을 소개하겠다.

 

  경연 신하 가운데 어떤 사람이, 은점을 금하기 때문에 은값이 매우 올랐다고 우러러 아뢰니, "관점은 금하여 막는다 하더라도 사적인 채굴은 낭자할 것임을 알 수 있다. 해마다 사행의 역관이 포은 외에 몰래 들여오는 것이 몇만 냥이 되는지 알 수 없고 잠상이 왕래하며 들여오는 것 또한 몇만 냥이 되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기명과 패식에 순은을 쓰는 것이 그 수효를 알 수 없을 정도인데 이것이 모두 어디에서 생산된 것이겠는가? 만약 사점이 아니라면 강남에서 얻어오겠는가, 일본에서 얻어오겠는가? 관청에서 채광을 허락하지 않아 나라에 은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 게다가 은을 캐는 놈들이 모두 무뢰하고 놀고먹는 무리들이니 지금 만약 은점을 설치하도록 허락한다면 그 폐단을 만드는 것을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일득록

 

  영정조시대 잠채의 성행을 예측할 수 있는 생생한 사료이다.

 

 

  누구나 다 알듯이 정조는 애민군주이다. 적임자를 지역에 보내지 못한다면 자신이 백성을 구덩이에 멀어 넣는 것과 같다고 말하는 정조! 이 책은 정조의 인간적인 매력에 마음껏 빠져 볼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이책의 아쉬운 점도 많다. 정조의 '일득록' 모두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일부를 발췌 편집한 것이 첫번째 아쉽움이다. 두번째 아쉬움은 박지원이 규장각을 통해서 배출된 당대의 문장가라 설명한 부분이다. 정조가 반성문을 쓰라고 명했는데도 박지원은 이를 거부했다. 벼슬을 주겠다는 정조의 회유책도 거부한 박지원이 규장각을 통해서 배출되었다는 설명은 명백한 오류이다. 이러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생각을 살펴보고 싶어하는 독자에게 권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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